위험한 제약회사 - 거대 제약회사들의 살인적인 조직범죄
피터 괴체 지음, 윤소하 옮김 / 공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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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익상충은 보통 ‘1차적 이익(환자의 복지, 연구의 타당성 등)과 관련된 전문직 판단이 2차적 이익(금전적 이득 등)에 의해 대체로 과도한 영향을 받는 상황’으로 정의한다.(123쪽)

  최고로 권위 있는 학술지들도 제약회사 임상실험을 다루면서 심각한 이익상충을 경험한다. 너무나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면 재쇄 판매 기회를 놓쳐 큰 손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학저널》의 전 편집장 리처드 스미스는 “의학지는 제약회사의 또 다른 마케팅 무기”라는 논문을 썼다.(124쪽)

  ·······제약회사들은 의사와 의학지 편집자를 매수함으로써 의학을 건강 증진이 목표인 공공재에서, 금전적 이득을 최대화하는 것이 1차적 기능인 상품으로 변모시켰다.·······유감스럽게도 의학지는 의학 부패의 실질적인 원흉이다.(131쪽)


내 아침 출근 과정에는 25분가량 산길 걷기가 포함된다. 관악산 까치능선 일부인데 숲을 이루고 있는 곳은 제법 원시림 느낌을 자아낸다. 큰 나무들이 자연사해서 곳곳에 쓰러져 있다. 지척에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건만 꾀꼬리, 꿩, 까마귀 같은 새들의 울음소리도 들을 수 있다. 청설모가 떨어뜨리는 도토리를 줍기도 한다. 이런 길을 걸을 때마다 나는 마치 50여 년 전의 오대산 길을 걷듯 마음이 고요해진다.


이 고요를 깨뜨리는 고약한 사람이 두엇 있다. 70대 전후한 남성인데 라디오를 허리춤에 차고 걷는다. 그 라디오에서는 어김없이 뉴스가 흘러나온다. 나는 그들을 대할 때마다 착잡한 심경에 사로잡힌다. 저들에게 뉴스는 이미 단순한 소식이 아니다. 종교적 진리며 신의 계시다. 깨달음의 원천이며 구원의 근거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세뇌한바 저들은 무한한 신뢰로써 뉴스 앞에 엎드려 큰절한다.


어디 저들뿐이랴. 제약회사가 건네주는 자료를 의사들은 뉴스로 믿는다. 그런 자료를 받아 적은 의사의 논문을 의학지는 뉴스로 싣는다. 의학도나 관련 일반인들은 의학지를 뉴스로 읽는다. 결국 뉴스의 본질은 가짜가 된다. 가짜 뉴스는 이른바 ‘늬우스’교를 일으키는 태초의 말씀으로 군림한다. 하염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늬우스’를 경청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라디오든 의학지든 결국 예배를 위한 지성소다. 산책도 아니고 연구도 아닌 것이다. 어처구니없다 싶다가도 처연해진다. 대체 인간이란 게 고작 이뿐인가, 울컥해진다.


마케팅과 연구가 혼효를 일으킬 때 거기서 생산되는 과학담론은 개소리가 된다. 홍보와 정견이 혼효를 일으킬 때 거기서 생산되는 정치담론은 개소리가 된다. 구복과 구원이 혼효를 일으킬 때 거기서 생산되는 종교담론은 개소리가 된다. 개소리가 접수한 백색사회는 의도된 무지를 탑재한 자들과 알고 나서도 ‘그래서 뭐 어쩌라고’를 장착한 자들을 사냥개로 풀어놓는다. 녹색인간은 물어 뜯겨 피를 흘린다. 핏빛이 붉을수록 녹색은 선명해진다. 녹색의 선명함 하나를 잃지 않으려고 모든 것을 내준다. 진욕進辱이 개벽을 앞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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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학대를 경험한 여성의 84.5%는 그 경험의 부정적인 영향이 평생 지속되며, 자신의 몸과 자아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하는 경향이 크다. 그들은 성적 학대를 경험하지 않은 여성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거나 유지하지 못하며, 자신의 연인이나 배우자와 있을 때도 옷을 벗거나 불을 켠 채로 사랑을 나누는 것에 불편함을 느낀다.(351쪽)


‘여성의 적은 여성이다’라는 말을 페미니스트는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보편명제로 올리기에 하자 있는 말임이 분명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비수 같은 말임 또한 분명하다.


성적 학대를 경험한 한 여성이 어떤 인문학공부 모임에서 그 사실과 그로 말미암은 고통에서 쉽사리 해방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하여 이야기하자 들은 사람들의 한결같은 반응은 ‘왜, 그걸 내려놓지 않느냐?’였다. 자기 연민에 빠져 징징거리는 것은 인문적 삶에 반한다는 비판이 날아들었다. 놀랍지도 않게, 그들은 모두 여성이었다. 놀랍지도 않게, 그들의 리더, 아니 스승은 뜨르르한 철학자였다. 스승은 공개적 질타가 치유라며 가차 없이 그 여성을 공격했다. 그 여성은 다음부터 그들을 무서워했다.


이게 그들한테만 특수하게 일어나는 일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태도는 성폭행 당했다고 울부짖는 여고생 딸의 따귀를 후려갈기며 ‘몸 간수를 어떻게 했기에’라는 개소리를 지껄이는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여주인공의 엄마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놀랍지도 않게 이 태도는 남성을 내면화한 것이다. 놀랍지도 않게 정서적 공감에 터한 평등한 소통을 내던진 채 이성적 분석에 터한 일방적 훈계를 집어든 남성을 인문학이랍시고 뻐기는 것이다. 놀랍지도 않기만 한 이 풍경에서 쪼끔 놀라운 상상을 한 번 해보자.


그들 가운데 동성애자가 있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자기 연인이나 배우자가 성적 학대의 “부정적인 영향이 평생 지속되며, 자신의 몸과 자아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으며, 자신과 함께 “있을 때도 옷을 벗거나 불을 켠 채로 사랑을 나누는 것에 불편함을 느낀다”면 어찌 반응했을까? 정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이성애자 남성이고 비-학습 양성평등주의자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상상할 수 없다. 다만 여성 동성애자라도 자신이 남성을 내면화한 채 살아간다는 사실을 모르는 한, 태도는 달라질 것이 없으리라 볼 뿐이다.


성적 학대에서 인식과 삶 전체의 왜곡까지 여성은 중첩적으로 수탈당한다. 피해자인 여성이 수탈에 부역하면 중첩은 더욱 교묘해진다. 이 질곡에서 벗어나는 길은 수탈당한 여성을 치유하는 사후 방책에 있지 않다. 수탈의 원천을 봉쇄해야 한다. 수탈의 원천을 봉쇄하려면 이 남성문명, 그러니까 백색문명의 멱을 따야 한다. 백색문명의 멱은 일극집중의 거대구조다. 일극집중의 거대구조는 소미심심의 네트워크로써만 무너진다. 소미심심의 네트워크는 아픔과 슬픔으로 나지막이 직조된다.


아픔·슬픔의 네트워크에 트인 남성이 한 축이 될 필요는 있다. 남성이 아픔·슬픔의 네트워크를 주도해서는 안 된다. 두 번 겪을 일은 아니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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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달리 막 김치 대하기가 힘들었다. 막 김치란 정성 없이 막 담았다는 뜻이 아니다. 누가 차마 김치 담는 마음을 평가하랴. 내가 막 김치라 하는 것은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이다. 배추의 본디 자태-나는 강원도 평창의 깊은 산골에서 태어나고 자라 오달진 배추의 자태를 잘 안다-에서 소외된 빈곤과 슬픔의 김치가 막 김치다. 빈곤과 슬픔을 담은 그 막 김치는 바로 우거지김치다.


도시 빈민으로 흘러들어 보낸 10대의 혼돈 한복판에서 어미 없는 나를 지켜주신 할머니의 빈곤은 늘 시장의 변두리 채소가게 언저리를 맴돌곤 했다. 거긴 우거지가 있었다. 돈 없어도 새끼 굶겨죽이지 않을 한 움큼 희망이 있었다. 할머니는 ㄱ자 허리를 이끌고 우거지를 주우셨다. 어린 나는 그 할머니 마음 한 자락을 부여잡고 주춤주춤 따라 나섰다. 가고 싶지 않았다. 굶어죽을지언정 우거질랑은 먹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할머니 억장 무너질까 헤아려 매번 따라나서던 착한(?) 손자 녀석이 어느 날 발작을 일으켰다. 더는 견딜 수가 없었던 거다. 괴성을 지르며 할머니 손을 뿌리치고 도망쳐버렸다. 한 식경 떠돌다 집으로 들어갔다. 밀가루 풀죽 같은 수제비국 옆에 우거지김치가 할머니처럼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훌쩍거리며 그 우거지김치를 다 먹었다. 애먼 수제비국은 식어만 가고.


우거지김치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한 채 할머니는 세상을 버리셨다. 할머니가 짊어지셨던 빈곤의 근본을 여적 보듬고 사는 나는 막 김치를 볼 때마다 할머니 우거지김치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우거지김치는 몸서리쳐지는 빈곤을 찰나에 복원한다. 우거지김치는 할머니의 청초한 설움을 단박에 소환한다. 빈곤과 할머니를 끌어안고서야 어찌 무심코 막 김치를 먹을 수 있으랴. 집에서는 아예 막 김치 또는 막 김치 상태인 김치를 식탁에 올리지 않는다. 밖에서 먹을 때, 막 김치가 나오면 애써 피한다. 반백 년 세월이 그렇게 흘러갔다.


엊저녁 우연히 나는 막 김치 앞에 앉게 되었다. 그 막 김치 앞에서 벼락처럼 나는 할머니 우거지김치를 직면한다. 유심히 젓가락을 댄다. 순간, 아침 햇살 비취면 물안개 사라지듯 막 김치 앞의 응어리가 홀연히 사라진다. 엉엉 울면서 그 막 김치를 다 먹는다. 이제는 무심히 막 김치를 먹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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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7-11-02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응....이 글 너무 좋아요

bari_che 2017-11-02 13:2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글 쓸 때도 엉엉 울었더니만...^^
 
위험한 제약회사 - 거대 제약회사들의 살인적인 조직범죄
피터 괴체 지음, 윤소하 옮김 / 공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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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제정된 미국 조직범죄통제법의 핵심은 RICO법(Racketeer Influenced & Corrupt Organizations Act)이다. 모리배 짓(racketeering)이란 특정 형태의 범법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갈취·사기·연방마약법 위반·뇌물 수수·착복·사법 방해·법률 집행 방해·증언 방해·정치적 부정부패를 포함하는 행위다. 거대 제약회사들은 이 중 대부분을 늘 저지르고 있으므로, 제약회사의 비즈니스 모델은 의심의 여지없이 조직범죄 기준에 부합한다.(85쪽)

  ·······우리가 보는 것은 조직범죄다. 이 업계는 완전히 썩었다.(87쪽)


마침 우리사회 현안이 된 적폐 청산, 그 적폐본진의 아이콘 이명박이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그를 흔히 MB라고 부른다. 나는 일찍이 그 MB가 Monkey Business의 이니셜이라고 풍자한바 있다. Monkey Business는 협잡挾雜, 그러니까 “모리배 짓(racketeering)”이다. ‘모리배’ 또한 MB, 그러니까 이를테면 MoriBae의 이니셜이라는 word play가 가능하니 퍽 재미있다. 모리배 짓이라는 본문 단어를 보고 대뜸 떠올린 것이 이명박이니 우연의 일치 치고는 거의 음모 수준이 아닌가.^^


‘^^’ 일 아니다. 연방마약법 위반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모두가 이명박이 전매특허 행동 목록이다. “갈취·사기·뇌물 수수·착복·사법 방해·법률 집행 방해·증언 방해·정치적 부정부패” 어쩜 이리 이명박이 앞에 놓고 묘사한 듯 생생한가. 내친 김에 한 고개를 더 넘어가자. MB는 또한 Medicine Business의 이니셜도 되니 제약회사 식 조직범죄의 화신으로 번역해도 손색이 없는 과연 전천후 이명박이다. 추호의 순간이나마 섬쩍지근한 느낌이 살을 베고 지나간다.


실없는 이야기 아니다. 거대 제약회사의 조직범죄는 그 수법에서 특별하지 않다. 새로울 것도 없다. 딱히 갱단에서 시작되었다고 하기도 그렇다. 백색문명 지배집단 모두가 공유하는 전가의 보도 아니던가. 최근 9년 동안 이명박근혜를 필두로 이 나라 적폐본진이 힘과 돈과 이름을 얻기 위해서라면 서슴없이 대놓고 함부로 자행한 짓거리 아니던가. 하필 제약회사가 독극물을 가지고 약이라 개소리 떠벌이는 협잡 판에 의학이라는 고급담론과 의사라는 엘리트집단이 앞잡이 노릇을 해서 더욱 분노를 자아낼 따름 아니던가.


그렇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조직범죄다. 이 계는 완전히 썩었다.” 제약회사와 의사들의 조직범죄를 경험하면서 우리는 완전히 썩은 세계를 본다. 사람의 생명을 협잡의 대상으로 삼았다면 더 갈 데가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우선 여기부터 혁파하자. 백색의학부터 응징하자. 당장 우리 손에 들린 백색독극물부터 내려놓자. 남성들은 비아그라에 흘리던 침부터 거두자. 시작하면 끝이 있겠거니.


이 글을 쓰던 중, 점심시간이 되어 마을 소박한 백반 집으로 갔다. 제약회사와 의사가 던지는 백색 독극물 이야기를 하다가, 백반 집 여성 주인이 모두 손수 만들어주는 녹색음식을 먹자니 그렇게 싱그러울 수가 없다. 한의원으로 돌아와 잠시 쉴 겸 페이스북을 여니 MB가 떠 있다. 세월호사건에는 입도 뻥긋 않던 물건이 일본 쓰나미 1주년이라고 찾아가 고개 숙인 사진이 걸렸다. 아, 잊을 뻔했다. 이명박이 협잡에는 매판짓거리가 하나 더 추가된다는 사실 말이다. 아, 식민지 녹색혁명은 산 첩첩 물 겹겹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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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혈압을 치료하기 위해 사용하는 거의 대부분의 약물이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성 기능 장애를 일으킨다. 이것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다.·······항고혈압제 때문에 발기불능인 남성에게는 실데나필(상품명 비아그라)이 유용할 수 있다. 그러나 여성에게는 그와 같은 해결책이 존재하지 않는다.·······생명을 생각한다면 심각한 심혈관계 질환을 치료하는 일은 성 기능 장애를 개선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러나 성 기능 장애라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경우, 삶의 질은 현저하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347-348쪽)


『이브의 몸』(5)에서 메리앤 J. 리가토의 약, 그러니까 제약회사가 만드는 화학합성물질 문제에 대한 안일한 자세를 지적하였다. 이 지적은 이 책 전반을 관통한다. 안타까운 점이다. 일단 항고혈압제 문제에서 여성과 남성의 불평등, 치명적 심혈관계 질환과 성이라는 삶의 질이 지니는 모순 관계를 고민한 것은 당연하고 고맙다. 그러나 고마움은 두 가지를 전제한다. 하나, 항고혈압제가 심각한 심혈관계 질환을 치료한다는 말이 사실이어야 한다. 다른 하나, 실데나필(상품명 비아그라)이 백색화학합성물질이 아니어야 한다. 과연 그런가?


물론 둘 다 아니다. 우선, 항고혈압제는 그냥 혈압을 강제로 떨어뜨릴 뿐이다. 혈압이 높아지는 기작을 찾아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간단명료한 반증이 있다. 정말 항고혈압제가 치료제라면 언젠가 치료가 되고 그 다음에는 복용하지 말아야 할 거 아닌가. 그럴 일 없다. 이건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다. 치료커녕 부작용이나 수반하므로 사기다.


실데나필, 그러니까 비아그라는 대체 어떤 물질인가? 우리가 그 세세한 지식을 공유할 필요까진 없다. 다만 원리를 따져보자. 항고혈압제 부작용에 쓰는 물질이라면 실데나필은 이치상 항고혈압제와 길항하는 기작을 지녀야 한다. 물론 그렇지 않다. 작용하는 부위의 특수성 때문에 이 어긋남이 그냥 넘어가는 것뿐이다. 정말 이 물질은 딱 그 부위에서만 그런 좋은 작용을 하고 마는가? 그럴 리 없다. 결국, 이 물질은 본디 염려했던 부작용을 낳고 만다. 하여 이 물질 제조자 ‘모리배 갱단(피터 C. 괴체)’인 다국적 제약회사 화이자는 심혈관계 질환을 지닌 사람들에게 쓸 때 주의하라는 경고를 교묘한 문구로 어지럽게 늘어놓는다. 그걸 의자가 읽나, 환자가 읽나.


하나 더. 두 전제 다 입증됐다 치자. 그런데 대체 혈압이 얼마에서 얼마면 항고혈압제를 먹어야 하나? 대체 성 기능 장애가 어느 정도면 그 실데나필을 먹어야 하나? 전자는 근거 없는 객관 120-80이고, 후자는 정처 없는 주관 욕망의 문제다. 후자는 논의 대상이 아니다. 문제는 전자다. 120-80은 대체 어디서 나온 기준인가? 필경 백인 남성 청년이 기준일 것이다. 실제로 항고혈압제가 긴절한 연령대는 자신의 나이에 90을 더한 수치가 수축기 정상혈압이라 생각하면 된다. 이런 이야기를 임상 현실에서 하지 않는 이유는 묻지 않아도 다 안다. 그럼에도 약을 먹는 것은 두렵기 때문이다. 거짓말과 두려움 조장은 백색 마케팅의 쌍끌이다.


마지막으로 중대한 문제가 있다. 분명히 저자도 항고혈압제가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성 기능 장애를 일으킨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임상 현실에서 이 문제를 먼저 호소하는 여성은 전혀 없다. 진단 과정에서 신중하게 물어봐도 그렇다고 대답하는 여성은 거의 없다. 이유는 단 하나다. 대체 그게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거다. 다시 말하면 그 동안 성욕을 정색하고 직면하며 살피며 추구하며 살지 않았다는 거다. 이는 개인 생리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정치 문제다. 여성의 성욕과 기능, 그 생활이 삶의 질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사회정치적 각성이 일어나지 않는 상황에서 실데나필이라는 ‘해결책’이 없음을 말하는 것은 본말의 전도다. 양성평등은 sexuality와 gender의 양면이 함께 사유되고 이행되어야 한다.


녹색의학은 고혈압 증상만 억제하는 가짜 약을 만들지도 쓰지도 않는다. 따라서 발기부전에 요법 포르노를 개발할 필요도 없다. 혈압도 성도 인간 생명과 생애 전체를 놓고 판단한다. 인간 생명과 생애 전체는 그가 속한 공동체의 사회정치 흐름을 불가피하게 탄다는 엄연한 사실에 주의한다. 진실에 터하려 하기 때문에 녹색의학은 언제나 스스로 흔들어 안일함을 깨운다. 마치 나침반의 바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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