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노을이나

코타키나발루 노을이나

모두 처연히 아름답다

처음과 끝이 닿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가을의 여백, 여백의 가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병이 가져오는 위험 중 가장 명백한 위험은 경계를 넘어가 죽는 것이다. 이 위험이 제일 중요하며, 또 언젠가는 이 위험을 피할 수 없는 날이 오고야 만다. 하지만 피할 수 있는 다른 위험이 있는데, 바로 질병에 집착하게 되는 위험이다. 질병을, 자신과 마주하지 않고 또 다른 이들과 마주하지 않으면서 뒷걸음질 치는 핑계로 삼는 것이다. 하지만 질병은 계속 매달리고 있을 만한 무엇이 아니다. (할 수만 있다면) 그저 회복하면 된다. 그리고 회복의 가치는 새로 얻게 될 삶이 어떤 모습일지 얼마나 많이 알아 가느냐에 달려 있다.(8쪽)


강상중은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에서 악을 병으로 규정한다. 악에서 윤리성을 소거하려는 것이 아니다. 악의 뿌리가 윤리성 너머까지 뻗어 있다는 것이다. 악은 병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병이 악인 것은 아니다. 어떨 때, 병은 악이 되는가? “집착”할 때다.


집착은 병을 자신의 삶에서 떼어내 대상 사물로 만들면서부터 시작된다. 대상 사물은 숭배와 착취를 넘나든다. 숭배든 착취든 권력의 도구이긴 마찬가지다. 권력을 획득한 병은 보수화된다. 보수성 속에 안주함으로써 병을 앓는 사람은 병의 화신이 된다. 병의 화신은 병이 지니는 고통의 속성을 무기로 삼는다. 그 무기를 휘두르는 순간부터 병은 악이다.


병의 화신을 ‘고통체’라 부르기도 한다. 병을 쾌락으로 여긴다는 측면에서 보면, 고통체라는 이름은 악을 병이라 한 통찰과 맞물려 섬뜩하게 본질을 꿰뚫는다. 이렇게 악으로 고착된 병은 병인의 삶을 파편으로 만든다. 파편이 된 삶은 회복을 포함한 그 어떤 변화도 거절한 채, 동어반복 속으로 침잠한다. 동어반복은 주술이 된다. 주술은 제의를 낳는다. 제의는 정교하게 다듬어져 신성 내러티브를 짓는다. 내러티브 추상화로 경계 안에서 죽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심각한 질병은 우리를 삶의 경계로 데려간다. 그곳에서 우리는 삶이 어디에서 끝나버릴 수도 있는지 본다. 경계에서 삶을 조망하면서 우리는 삶의 가치를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해볼 수밖에 없다.(7쪽)


신약성서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 나심을 천사가 최초로 알려준 대상은 양치는 목동이었다. 이때 목동이 남의 양을 치는 고용목동임은 물론이다. 이 고용목동은 세리, 창녀, 이발사들과 함께 거의 최하층 신분에 속한다. 하느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 것을 이들에게 가장 먼저 알렸다는 것만큼 하느님나라의 본질을 웅변으로 증명해주는 사건은 다시없다. 하느님나라 소식, 그러니까 복음은 변방부터 전해진다. 변방인, 그러니까 “경계”에 서 있는 사람에게 하느님나라 인식의 특권이 부여된 것이다.


하느님나라는 무엇인가. “삶의 가치를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해볼 수밖에 없”게 하는 일대변화다. 그 변화는 “삶을 조망”해야 가능하다. 삶의 조망은 “경계에서”만 가능하다. 경계에서만이 “삶이 어디에서 끝나버릴 수도 있는지” 볼 수 있다. 삶의 끄트머리에 서게 하는 위태로운 삶에서 인간 인식은 깨어난다. 그 위태함이 질병인가, 사회정치적 수탈인가, 하는 차이 문제는 본질이 아니다. 생물학적 약자와 사회정치적 약자의 교집합은 원인과 결과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같은 내러티브 속으로 흘러든다.


심각한 질병”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이른 사람은 질병을 계기로 단순히 자신의 개인적 삶만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다. 거의 불가피하게 보건의료시스템의 거대한 벽과 맞닥뜨린다. 거기서 생물학적 질병이, 그 질병을 앓는 사람이 어떻게 사회정치적 수탈 대상으로 되어 가는지 통렬히 경험할 것이다. 이 통렬함이 생물학적 질병의 고통과 어떻게 다르고, 그러나 또 어떻게 같은지 깨닫고야 말 것이다.


심각한 수탈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 내몰린 사람은 수탈을 계기로 단순히 자신의 사회정치적 삶만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다. 거의 불가피하게 생물사회적 소외의 정교한 그물과 맞닥뜨린다. 거기서 사회정치적 수탈이, 그 수탈을 겪는 사람이 어떻게 생물학적 병자로 만들어져 가는지 통렬히 경험할 것이다. 이 통렬함이 사회정치적 수탈의 고통과 어떻게 다르고, 그러나 또 어떻게 같은지 깨닫고야 말 것이다.


사회 변화를 포기한 개인의 각성은 영적 폭식이다. 개인의 각성을 거세한 사회 변화는 공적 폭력이다.


분리 이데올로기 지배집단의 이간질은 본디 이 둘커녕 개인의 각성도 사회 변화도 모두 불가능하게 죄다 갈가리 찢어 놓았다. 아서 프랭크는 여기에 가장 근본적인 꿰매기를 시작했다. 심각하게 아파서 경계에 설 수 밖에 없었으므로. 이는 대단히 축하받을 일이다. 그 이전 허다한 사람들이 그 경계에 섰으나 인식의 특권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가 바느질한 땅에 어떤 꽃이 피는지 설렘으로 둘러볼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은 때로 결백을 위로이게 한다




눈은 때로 갈엽을 백화이게 한다




눈은 때로 나무 전체를 꽃송이이게 한다




눈은 때로 가을나무를 햇빛의 호위무사이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