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선물에는 주는 사람이 깃들어 있으며, 선물을 줄 때 우리는 자신의 무언가를 담아서 준다.(27쪽)


선물은 주는 사람이 관여한 정도만큼 특별하다.(29쪽)



앞으로 한 세대가 가기 전에 우울장애는 인류사회를 뿌리째 뒤흔들 것이다. 나는 우울장애를 숙의와 한약으로 치유해왔다. 그 경험에서 우러난 통찰로 볼 때, 우울장애는 인간 정신의 가장 깊은 곳에 침전된 존재론적 어둠이다. 이 도저한 어둠의 편만은 파멸의 증좌임과 동시에 개벽의 징조다. 우울장애를 좀 더 근원적 내러티브로 재구성해야 할 때가 왔다.


우울장애는 단독의 실체로서 존재하는 질병이 아니다. 우울장애는 일련의 증후군으로서 매우 유동적 사태다. 유동적이라는 말 속에는 질병 인식에 정치경제학적 역관계의 기울기가 작용한다는 뜻이 포함된다. 동일한 증후들이 나타나더라도 질병이라 규정하느냐 마느냐는 사회와 역사의 구체적 조건이 결정한다는 말이다.


분리문명 이전 삶에서 우울장애라는 질병은 성립할 수 없다. 우울장애는 연속성에 기반을 둔 것이기 때문이다. 태초의 삶에서 인간은 자신이 “깃들어 있”는 “무언가를 담아서” 선물을 주는 존재다. 자신의 가치와 중요성을 서로 주고받는 공동체에서 누군가 좀 더 그 관여도를 높일 수 있다. 그때는 “관여한 정도만큼 특별하다”고 느끼지 질병이라 하지 않는다.


분리문명이 심화·확대될수록 관여 정도가 높아지는 경향을 질병으로 인식한다. 가치와 중요성에서 분리된 상품만을 사고파는 시대정신이 의미를 부여하고 부여된 의미에 자신의 생명을 싣는 사람을 병자로 몰아버리는 것이다. 간단하다. 선물의 사람에게 선물이 돌아가는 길을 막으면 된다. 선물로 받고 상품으로 되판다. 수탈적으로 거래한다.


수탈에 길들여지면 수탈당하는 사람은 수탈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다. 내면화를 흔쾌히 정당화하는 인지된 우울장애는 그나마 상태가 나은 편이다. 빙의p​ossession 상태에 든 우울장애는 속수무책이다. 이렇게 분리문명에 기소당하고 스스로 선고한 우울장애를 앓으며 인류가 멸절의 길로 질주하는 동안,


다른 길을 내고 있는 ‘새로운 환자’ 소식을 듣는다. 그들은 시대정신의 어둠 한가운데로 정색하고 들어간다. 나는 이 행보를 진욕進辱이라 부른다. 진욕의 사람도 아프다. 아파야 개벽의 길을 걸을 수 있으니 선사하는 삶을 산다. 고유성을 되찾는다. 신성을 회복한다. 작을수록 크고, 적을수록 많은 경이로움을 짓는다. 마침내 선물이 된다. 우울 품은 신이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태초에 선물이 있었다(22쪽)


선膳은 본디 천지신명께 제사를 올릴 때 쓰는 희생 육이다. 공동체의 안녕과 번영을 위한 제사인 만큼 끝난 뒤 공동체 구성원은 이를 나누어 먹는다. 선은 거룩함과 질탕함을 동시에 지닌다. 선은 공적 참여와 사적 행복을 매개한다.


태초에 인간은 거룩하면서 질탕했다. 태초에 인간은 공적 참여와 사적 행복을 분리하지 않았다. 분리문명을 일으킨 이후 수천 년 동안 인간은 질탕함과 사적 행복을 극단적으로 추구해왔다. 포르노와 중독으로 치닫는 것을 ‘대박 났다’고 하는 광기 속에서 영성과 절제는 ‘그래, 너 잘났다’가 될 수밖에 없다. 도처에 수탈적 거래가 있을 뿐이다. 결핍을 따라 순환하던 선물은 사라지고 대박을 노리는 뇌물이 위를 향해 흐를 뿐이다. 수탈적 거래와 뇌물이 준동하는 사회는 더 이상 공동체가 아니다. 공동체 아닌 군집에 속한 인간 또한 인간이 아니다. 어찌 할까?


『오직 하나뿐Our Only World』에서 웬델 베리가 소개한 숲 관리인이자 벌목꾼인 트로이는 이렇게 말한다.


“나쁜 벌목꾼은 숲에서 자기가 가져올 것만 생각하고 숲으로 갑니다. 좋은 벌목꾼은 남겨두고 와야 할 것을 생각하며 숲으로 가지만요.”


이보다 명쾌한 전복은 없다. 남겨두고 오는 것은 다음에 가져오려고 보류하는 것이 아니다. 숲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주고 오는 것이다. 혹 다음에 가져올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이 둘은 전혀 다른 행위다. 전자는 숲과 내가 분리된 상태에서 하는 행위다. 후자는 숲과 내가 연속인 상태에서 하는 행위다.


선膳을 나누는 행위는 단순히 함께 먹는 행위를 넘어선다. 선은 공동체 전원의 생명을 대신하여 바쳐진 희생이다. 나누는 것은 고기가 아니라 각자의 생명이다. 너와 나가 분리된 존재가 아님을 확인하는 것이 바로 선물이다. 태초에 선물이 있었다. 태초에 우리는 선물이었다.


태초는 아득한 옛날이 아니다. 태초는 찰나마다 들이닥치는 이제다. 이제 바로 남겨두고 와야 할 것을 생각하며 숲으로 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산딸기 유월

거룩한 놀이

질탕한 제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지금 인류는 목전에 닥친 위기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기 시작하고 있다. 내가 제시하는 경제 변혁이 기적처럼 보인다면, 적어도 이 세계를 치유하는 데 기적이 필요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돈의 영역에서부터 생태적 치유, 정치, 기술, 의료에 이르는 모든 영역에서 지금 가능한 수준을 넘어서는 해결책이 필요하다.·······이런 위기들이 개개인의 삶에 영향을 주고 이 세계를 허물어뜨려, 결국 우리가 새로운 세상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고 재탄생하게 만들 것이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전 지구적 위기, 심지어 경제 위기에서 영적인 차원을 감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는 ‘정상normal’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새로운 ‘정상’을 향해, 새로운 사회, 지구와의 새로운 관계, 인간으로서 새로운 경험을 향해 재탄생하고 있음을 느낀다.(14쪽)


山是山 水是水(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la naïveté première(제1차 소박성)

山不是山 水不是水(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la critique(비판)

山是水 水是山(산은 물이고 물은 산이다.): la critique(비판)

山是山 水是水(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la naïveté seconde(제2차 소박성)


왼쪽 한문은 청원 유신 선사의 것이다. 오른쪽 프랑스어는 철학자 폴 리쾨르Paul Ricœur의 것이다. 청원 유신의 글은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같다. 겉보기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익숙한 통속 논리에서 볼 때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므로 함의 또한 같다고 할 법하다. 청원 유신이 어찌 통속 논리 따위를 구사했겠나. 청원 유신은 스스로 그 차이를 구태여 밝히지 않았으나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지구 반대편의 폴 리쾨르가 제1차, 제2차라는 구분을 통해 진실을 드러내주었다. 부정의 부정은 단순한 긍정 회귀가 아니다. 부정否定의 부정否定은 부정不定이다. 부정不定은 모순 너머 역설 품은 무애자재다. 신성 운동이다.


인류의 고대적 삶은 “‘정상normal’”이었다. 분리 이후 인류의 문명적 삶은 비정상이다. 비정상의 폐해를 꿰뚫고 이제 인류가 꽃피워야 할 삶은 고대적 정상의 복원이 아니다. 문명이 일깨운 지혜를 폐기할 수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지혜를 신성하게 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신성한 삶은 “새로운 ‘정상’”이다. 숙성 정상이다.


숙성은 발효되어 잘 익은 상태다. 지금 인류가 벌이고 있는 온갖 화학적 행태들이 발효로 귀결될지 부패로 끝나고 말지 단정하기 어렵다. 머리로는 이미 비관적 판단이 내려졌다. 가슴으로는 아직 낙관을 부여잡는다. 낙관으로 낙원을 일구려면 판단 너머 결단으로 나아가야 한다. 결단은 통속한 이해와 달리 의지의 힘에서 나오지 않는다. 결단은 “영적인 차원을 감지하는 것”에서부터 추동된다. 영적 차원을 감지하는 것은 “지금 가능한 수준을 넘어서는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지금 가능한 수준을 넘어서는 해결책, 다름 아닌 “기적”을 일구어간다는 영적 신뢰가 결단을 낳는다. 영적 신뢰는 기적을 ‘표적σημεῖον’이 되게 한다.


표적은 본디 신약성서에서 예수가 자신이 구약 전승의 예언을 따라 도래할 메시아임을 나타내는 증거로 행한 일을 뜻한다. 예수의 표적은 바로 오늘 우리에게 신성한 삶을 살도록 이끄는 깃발이다. 우리는 그 향도를 따라 표적을 행할 따름이다. 모든 표적이 기적일 필요는 없다. 기적이 필요한 시대에 표적이 그대로 기적인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신성이란 무엇인가? 신성에는 고유성uniqueness과 관계성relatedness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신성한 사물 혹은 존재란 독특하고도 유일무이해서, 한없이 귀하고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하다.·······

  이렇게 고유하지만 신성은 그것을 만들어낸 모든 것, 그것의 역사 그리고 모든 존재의 그물망 속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자리와 분리될 수 없다.(9쪽)


  신성의 존재란 마치 늘 거기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고, 변함없이 존재하는 진리로 회귀하는 것과 같다. 벌레 한 마리, 풀 한 포기를 들여다볼 때·······신성은 거기에 있다. 그런 경험들은 특별하지만 결코 나머지 다른 삶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 그런 경험들은 이 세계의 바탕을 이루고 관통하는 더 진짜 같고 신성한 세계를 언뜻 보여줌으로써 힘을 발휘한다.

  그렇다면 ‘늘 거기 있는 집’이자 ‘변함없이 존재하는 진리’란 무엇일까? 그것은 만물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진리이며, 자기 자신과 별개가 아니면서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에 참여하는 느낌이다.·······

  신성은 모든 존재의 기저에 놓인 통일성에 이르는 관문이자, 각 존재의 고유성과 특별함에 이르는 관문이다.(11쪽)


뜨르르한 서구 지성의 사유를 접할 때, 동아시아 사람은 두 가지 상반된 느낌이 공존하는 것을 경험한다. 뛰어난 언어 구사로써 진실의 층위와 구체성을 잘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현기衒氣가 지나칠 정도다. 심지어 지식 포르노로까지 치닫는다. 반면 전체 진실, 그러니까 비대칭적 대칭의 현기玄機를 통짜로 드러내는 직관에서는 적잖이 모자란다. 동어반복을 끊임없이 변주한다.


찰스 아이젠스타인은 분명히 균형이 잘 잡힌 사상가다. 그럼에도 아직 서구적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필경 그런 의식 자체를 지니고 있지 않을 것이다. 신성이나 통일성을 이야기할 때, 필연적으로 야기되는 형식논리의 붕괴 앞에서 그가 들려주는 음성은 플라톤의 진동수에 여전히 공현共絃한다.


찰스 아이젠스타인이 “신성에는 고유성uniqueness과 관계성relatedness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한 첫 문장부터 이미 이런 한계는 예고된 것이었다. 고유성과 관계성이란 말은 구체적이고 역동적이지만 신성의 비대칭적 대칭을 담아내기에는 부족하다. 동아시아 전통에서 오랫동안 써온 一卽多 多卽一, 또는 色卽是空 空卽是色과 비교하면 대뜸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말은 단 한 글자로 표현할 수 있다. . 은 고유한 낱 존재와 그 낱 존재의 네트워킹이 빚어내는 온 존재를 모두 담아낸 최고의 말이다. 그가 이런 언어·사유 세계에 이르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신성에 고유성과 관계성 두 측면이 있다는 말과 “신성은 모든 존재의 기저에 놓인 통일성에 이르는 관문이자, 각 존재의 고유성과 특별함에 이르는 관문이다.”는 말은 서로 어긋난다. 관계성과 통일성이 같은 말이 아닌 한 어긋남은 불가피하다. 통일성은 “만물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진리”로서 “이 세계의 바탕을 이루고 관통하는 더 진짜 같고 신성한 세계”와 조응하는 표현이다. 신성의 경험은 그 통일성의 세계를 “언뜻 보여줌으로써 힘을 발휘한다.” 통일성은 실체substance다. 신성은 실체에 이르는 관문일 뿐이다. 플라톤의 진동수가 확인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동아시아, 특히 의 사유는 존재와 존재의 기저를 분리하지 않는다. 존재의 기저는 실체 개념이기 때문이다. 실체 아닌 실재the Real로서 존재의 네트워킹 운동/사건을 인정한다. 존재와 존재의 네트워킹은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으므로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다不二不一. 더 진짜 같은 세계는 이 세계의 기저에 따로 있는being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운동/사건으로 끊임없이 실행doing된다. 의 사유를 원효가 불교적으로 정리한 것이 다름 아닌 一心和諍無碍 사상이다.


신성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가운데도 아니고 가장자리도 아닌,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무한불확정의 자유·평등·박애 운동이다. 신성 운동의 어느 찰나에 맛보는一味 장엄 사건을 구태여 이름 한다면 (찰스 아이젠스타인에서 실체 개념 뺀) 통일성이라 해도 나쁘지 않다. 장엄을 맛보지 않고도 신성에 깃드는 자가 싯다르타며 예수다.


* 본문에서  처리된 글자는 아래 아를 쓴 '한'이다. 알라딘 시스템에서는 인식이 되지 않는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