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 교란 식물인 서양등골나물이 숲을 점령해가고 있는 한 귀퉁이에 작은 꽃향유 가족이 자리 잡았다. 반가움에 이어 걱정이 들이닥쳤다. 출근길 바쁜 와중에 멈춰 섰다. 가까운 곳에 뿌리내린 서양등골나물 몇을 뽑아냈다. 대항할 힘이 없는 약하고 어린 꽃향유 가족을 조건 없이 보호해주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의사로서 부끄러운 얘기지만 산야초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숲을 걸어 출근하면서 시나브로 관심이 생겼다. 한의대 6년 동안 쌓은 것은 ‘특별한 식물’을 약명으로 전문화한 지식이 전부다. 거꾸로 한 공부다. ‘잡초’라 업신여기는 식물들이 귀중한 약재로 쓰인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마다 통렬한 각성 앞에 다시 선다.


제대로 된 각성은 세계진실의 전체성을 향해 열려 있는 것이다. 세계진실의 전체성은 개체 진실 사이의 연관관계를 톺아야 드러난다. 연관관계를 추적하는 과정은 지식의 도구적 나이브함을 넘어서 비판성을 획득하게 한다. 비판의 눈은 변화의 힘을 이끌어낸다. 나와 세계를 바꾸지 못하는 각성 가운데 진품은 없다.


너무나 그럴싸해서 진품처럼 보이는 짝퉁 각성으로 수십억 인류를 중독 상태에 빠뜨린 종교를 보라. 도구적 지식 포르노로 돈의 마름 노릇에 여념 없는 엘리트를 보라. 꽃향유에게 서양등골나물은 무엇인지 그래서 어찌해야 하는지 모른다면 꽃향유와 서양등골나물을 안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깨달음은 깨뜨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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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같고 언제나 다른 풍경으로 다가들어 숲은 경이롭다. 영특하고 날렵한 어치 한 마리로 말미암아 경이가 더욱 농밀해지는 가을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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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격려와 보살핌을 받은 아이는 살아갈 힘을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지니게 된다. 부모가 아이 삶의 과정에 그때그때 그러그러하게 동참하기 때문이다.


과도한 기대와 결과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며 산 아이는 목표의식에 사로잡힌 채 살아갈 힘을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기르지 못한다. 부모가 아이 삶의 시작과 끝에만 서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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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좋았던 10월 7일 오후 나는 어느 혼인예식 주례를 섰다. 혼인서약과 성혼선언문에 갈음하여 합죽선을 선물했다. 써 넣은 글씨는 사람 인人 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 기댄 모습을 형상화했다는 풀이다. 나는 기대면 안 된다고 역설했다. 대기만 하라고 당부했다. 대기만 한 모습을 묘사해 글자 형태를 바꾸었다. 거기에 내 인감도장을 찍어 증거로 삼았다. 부부는 그 아래 자필로 서명해 스스로 서약하고 선언했다. 하객은 박수로 최종 인증했다.


“기대지 말고 대기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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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치유의 본질에 대하여 - 노벨상 수상자 버나드 라운이 전하는 공감과 존엄의 의료
버나드 라운 지음, 이희원 옮김 / 책과함께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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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드 라운이 환자에게 최우선으로 당부한 말은 “의사를 존중하되 의학에 대한 환상을 갖지 말아야 한다.”(436쪽)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의사에게 되돌려주고 싶다.


“의사로서 자신(의 삶)을 존중하되 의학에 대한 환상을 갖지 마라.”


전통적인 국민보건의료체계가 제국주의 침탈과 식민화로 붕괴된 경험이 몰고 온 열등감 때문에 우리사회는 서양의학에 가히 초월적 권위를 부여한다. 의료대중보다 양의사가 더욱 그런 풍조를 조장한다. 직업의 특성상 매판독재 부역세력으로 비판 받지도 않고 시대 변화와 상관없이 ‘철밥통’ 특권층으로 군림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최근 대놓고 수구 본색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서양의학에 대한 양의사의 환상이 정치적 은유로 그 완결판을 내는 듯하다.


통념과 달리 의학은 매우 정치적이다. 정치적일 바에야 정치적 올바름을 지녀야 함에도 주류 서양의학은 전혀 그렇지 않다. 제약회사의 하수인이 되어 질병 날조와 폐기를 밥 먹듯이 한다. 그중에서도 정신의학은 사이비 신흥종교 수준이다. 이 어둠이 짙을수록 환상은 더욱 드라마틱해진다. 드라마 속 자기존중은 중독일 따름이다.


한의학이라 일컫는 전통의학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 국민보건의료체계 한 귀퉁이에 놓이면서 서양의학을 닮거나 종속되기를 강요당하는 현실을 전복할 힘을 한의학계는 지니고 있지 않다. 치료 개념과 방식이 근원적으로 서양의학과 다른 점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학문에서든 임상에서든 뚜렷한 지표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의사가 한의학에 무슨 환상을 갖겠는가. 오히려 환자가 온갖 양의사를 섭렵하고 돌아다니다 침이나 한 번 맞아볼까 하고 한의사한테 와서 한 방에 고쳐주기를 요구한다. 그들은 한의사를 존중하지 않는다. ‘용한’ 점쟁이 같은 한의사를 찾을 뿐이다.


우리사회의 의료 풍경은 이렇게 동강나 있다. 이판에 언감생심 무슨 치유 예술이란 말인가. 그럼에도 입에 올려야 한다면 치유 예술은 혁파의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혁파의 바람은 변방에서 불어온다. 변방은 어둠을 직시하는 자의 칼날이다. 그가 익명의 칼집에서 칼을 꺼내드는 찰나 혁파는 시작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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