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일>



유치환



하늘도 땅도 가림할 수 없어

뽀야니 적설積雪하는 날은

한 오솔길이 그대로

먼 천상의 언덕배기로 잇닿아 있어

그 길을 따라가면

그 날 통곡하고 떠난

나의 청춘이

돌아가신 어머님과 둘이 살고 있어

밖에서 찾으면

미닫이 가만히 열리더니

빙그레 웃으며 내다보는 흰 얼굴



청마 시 가운데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시다. 이 시를 언제 처음 접했는지는 아슴아슴 기억이 희미하다. 적어도 30년은 훨씬 전일 것이다. 그럼에도 한두 군데 빼곤 정확히 암송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이 시를 노래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 노래의 가사로서 가슴에 남아 있는 것이다. 눈이 내리는 날은,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한없이 보고 싶지만 끝내 만나고 싶지는 않은 어머니와 함께 이 시가 하루 종일 내 영혼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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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폭발 - 타락
스티브 테일러 지음,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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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적 불화를 처리하려 할 때 우리가 쓰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단순한 직면 회피다. 활동activity과 여가distraction-노동, 취미, 사교, TV 시청과 다른 오락-로 삶을 채운다. 이것들은 우리 주의를 외부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정신적 불화와 직면할 기회를 차단한다.(205쪽)(원문 단어 붙임, 번역 바꿈-인용자)


요즘 틈틈이 미셸 마페졸리가 쓴 『부족의 시대』를 읽고 있다. 통찰의 근본 지점이 같기 때문에 존중하고 유념하여 독서를 진행한다. 중요하다 여기는 대목에서 멈추고 점검하는 습관이 붙었다. “혹시 자아폭발 이후 생긴 것 아닐까?” 스티브 테일러 브레이크다.


스티브 테일러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보면 활동과 여가, 또는 노동과 휴식이 인간에게 문제될 것은 전혀 없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권리며 향수享受다. <개미와 베짱이>에서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에 이르기까지 긍정과 우호 일방통행로로 질주한다.


스티브 테일러 브레이크를 밟고 보면 신성한 권리인 노동, 기품 있는 클래식 애호, 곡진한 동작의 요가·······이 모두가 정신적 불화에 대한 방어기제다. 그 도로로 더 나아갈수록 어둠이 짙어진다는 사실을 감지한다. 멈추고 점검한다. “내 ‘무심코’ 지수는 얼마일까?”


무심코 도망치기에 편승할 때 현실은 잔혹하다. 잔혹한 현실에서 보호되어야 한다는 느낌조차 도망치기다. 정작 보호되어야 할 필요는 “자신의 마음”(206쪽)에서다. 불화와 도망의 대열에 무심코 뛰어들어 달리는 자신의 마음이야말로 잔혹한 수탈의 본진이다.


잔혹한 수탈의 본진인 마음, 정확히 말하면 불화가 준동하는 분열된 정신을 ‘유심히’ 단도직입으로 마주해야 근본적 변화가 시작된다. “권태, 불안 그리고 우울의 판도라 상자”(206쪽)를 여는 것이 새로운 길을 닦는 단 하나의 방법이다. 맞짱 떠서 맞구멍 내기다.


맞짱 뜨기는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권태, 불안 그리고 우울과 함께 “있는” 것이다. 질량을 동원해 구조를 바꾸지 않는다. 에너지를 동원해 흐름을 바꾸지 않는다. 분열과 불화의 실재가 내 정신의 실재에 그냥 배어들고 나도록 인지 장場에 고이 머문다. 그뿐이다.


이 고운 시작이 없으면 어떤 뜨르르한 초월도 없다. 마음병 숙의치유 과정 초기에 내가 빼놓지 않고 말하는 것이 “뭘 하려고 자꾸 애쓰지 마세요.”다. 그런 애씀이 도망치기라는 사실을 깨닫고서야 아픈 사람의 좀 쑤심은 멈춘다. 바로 그 순간, 신이 깃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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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폭발 - 타락
스티브 테일러 지음,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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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 간의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은 그들이 죽음을 덜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고유한 개인성이 그들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존재를 자연이나 공동체, 또는 그들이 속한 종족의 존재와 완전히 구별할 수 없다. 따라서 개인으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 중대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타락과 함께 개인은 더욱 분리되고, 개인의 존재는 그들 삶의 전체적인 토대와 축이 된다. 그 종말은 예정된 공포다. 한 사람이 죽은 다음에도 공동체나 남은 우주가 계속 유지된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 사람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만이 문제다.(199쪽)


“아버지, 왜 죽음을 두려워하십니까? 아직 죽음을 경험해 본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러시아 속담이다. 이치상 죽음 공포는 있을 수 없다. 죽음은 경험 가능한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죽음 공포의 본질은 상실 혐오다. 타락 인간에게는 목숨도 소유물이다. 자기 소유물인 목숨을 빼앗기는 상황이 너무도 싫은 나머지 공포를 느끼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목숨 소유는 부, 권력, 명성, 사람, 시간, 쾌락으로 구성되므로 이것들의 상실이 휘몰고 오는 극한 혐오가 죽음 공포의 ‘유물론적’ 본질이다.


“인간이 품고 있는 죽음 공포는 자연 인식의 결핍에서 비롯한다.” 루크레티우스의 말이다. 자연 인식 결핍은 인간이 스스로를 자연에서 분리시켰기, 아니 분리시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실재에서 인간을 포함한 전체 생태계로서 자연은 모든 존재의 유기적 네트워킹이므로 죽음은 변화와 순환의 평범하고 평등하고 평화로운 계기다. 하나의 죽음은 다른 하나의 삶과 반드시 맞물린다. 개체의 소멸은 전체의 생성과 동격으로 거룩하다.


“죽음은 성장의 마지막 기회다.” 엘리자베스 K. 로스의 말이다. 죽음을 계기로, 죽음을 통해서 인간은 전체 진실, 즉 자연에 최후의 주술적 투과를 단행한다. 이 주술적 투과는 자아 부피가 영에 가까울수록 완전해진다. 공포·탐욕·어리석음을 덜어내며 점 하나로 나아가는 성장과정인 삶이 종점에 이르는 찰나를 죽음이라 한다. 종점은 정점이다.


정점에 도달한 삶이 죽음이라면 죽음의 느낌은 절정감일 터이다. 절정감은 삶과 죽음의 분리를 단칼에 베어버리는 법열일 터이다. 이 법열은 삶과 죽음을 자유로이 구사할 때 고요한 떨림으로 찾아온다. “용무생사用無生死.” 부설浮雪거사의 말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표표히 넘나들 수 있으려면 깨쳐서 증득하는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증무생사證無生死.” 부설거사의 말이다.


깨쳐서 증득하기 전 몸 느낌으로 알아차려야 한다. “지무생사知無生死.” 부설거사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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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폭발 - 타락
스티브 테일러 지음,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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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세상은 실로fantastically “생명의real” 장소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살아 있다.·······

  그러나 우리 타락한 사람들에게 세계는 도리어more 죽음의dreary 장소다.·······우리에게 바위나 강, 나무는 원자와 분자의 비활성 집합체일 뿐이다.(193-194쪽)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인지 수면 상태가·······의미에 대한 인식에서 우리를 단절시킨다는 사실이다.(197쪽) (문맥을 고려하여 fantastically “real”과 more dreary의 번역을 바꿈-인용자)


한의원 원장실에 놓인 사진 넉 장에는 내 아내와 딸, 체 게바라, 그리고 나무토막을 든 소녀가 담겨 있다. 물론 뒤 두 사람은 코르다가 찍은 것이다. 『나무토막을 든 소녀』는 코르다의 삶을 바꾼 작품이다.


코르다가 어느 가난한 시골을 찾았을 때 어여쁜 소녀를 발견하고 사진을 찍으려 한다. 소녀는 무서워하며 눈물을 글썽인다. 안고 있던 나무토막을 쓰다듬으며 소녀가 말한다. “울지 마, 아가야.” 인형 살 돈이 없어서 나무토막으로 대신한 것이다.



나는 가끔씩 이 사진 앞에 선다. 체 게바라 사진 앞에 설 때보다 살갗이 훨씬 더 얇아진다. 나무토막에서 생명을 감지하고, 아가의 의미를 발견하는 소녀의 영혼이 내 “둔감화 기제”(195쪽)를 벗겨내기 때문이다.


무엇이냐고 물을 수도 없고, 있기는 하냐고 따질 수도 없고, 대체 무슨 소용이냐고 비난할 수도 없는 것이 의미다. 그저 이렇게들 묘사할 수 있을 뿐이다. 의미는 “관계의 실재다. 접합과 교감이 일으키는 사건이다. 사랑과 상상력이 빚어내는 미학이다. 생태학이 피워 올리는 주술이다. 연속성과 우연성의 교차가 창조하는 경이다.”


소녀가 품은 세계를 물활론이라 픽 웃으며 지나치는 ‘어른’의 눈에 그 세계는 죽은 것이다. 자신을 포함한 세계가 모두 거룩하다는 진리를 비웃는 인간에게 인과율과 합리성, 그리고 개체끼리의 상거래만이 성숙한 질서다. 이 어른 인간은 무의미한 세계를 오직 착취할 따름이다. 착취 결과는 예컨대 이렇다.


과학 저널 <생물 보존>에 따르면 현 추세가 계속될 때 100년 안에 지구상의 모든 곤충이 멸종된다고 한다. 곤충의 멸종은 인류의 멸절로 이어진다. 인류 멸절은 결국 인류가 자초한 것이다. 급격한 곤충 소멸의 주요 원인이 집약농업, 도시화, 기후변화이기 때문이다.


인지 수면”은 다만 인지의 문제가 아니고 수면의 문제가 아니다. 생명의 문제고 생사의 문제다. 나는 다시 한 번 일어나 『나무토막을 든 소녀』 앞으로 간다. 세상에 다시없이 예쁜 아가를 안고 있는 소녀의 깊은 눈을 마주한다. 거기 신이 춤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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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폭발 - 타락
스티브 테일러 지음,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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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수다는 우리 내면에 통제 불능의 혼돈과 소란 인식을 조성하여 불안을 불러일으킨다.·······생각의 수다는 흔히 매우 부정적으로 치우치게 되어, 보통은 근심과 나쁜 경험 같은 부정적 생각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적인 생각은 부정적인 감정을 촉발한다.·······야망을 달성해도 불만감과 열패감을 부추긴다.(192-193쪽)


요즘 분위기로는 수다가 그리 나쁘게만 인식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지만, 분명히 수다의 사전적 의미는 ‘쓸데없이 말수가 많음, 또는 그런 말’이다. 게다가 스티브 테일러가 인정한 수다→부정사고→부정감정의 부정 동선에서 수다는 자아 수다니까 판이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렇구나!’ 하고 그냥 넘어가기에는 수다가 뒤집어쓴 큰칼이 너무 무겁다 싶기도 하다. 수다, 각별히 여기 자아 수다란 무엇인가?


자성이라 하든, 자기대화라 하든 실제로 자아 수다는 ‘내부자’끼리 나누는 수군대기다. 수군대기를 계속하면 부정 사고에 빠져든다. 빠져드는 사고를 유발하는 것이 수다의 요체다. 말이 많은 것 자체가 문제되지 않는다. 엄밀히 따지면 말이 많은 것도 아니다. 같은 말을 여러 가지로 변주할 뿐이기 때문이다. 변주는 결국 주제를 강화하므로 수다가 거듭될수록 깊이 빠져든다. 빠져들수록 헤어날 수 없는 “혼돈과 소란 인식”에 휘감긴다. 혼돈과 소란이 가져올 게 “불안”밖에 더 있겠나. 불안이란 감정은 전천후·전방위성을 지닌 권력이다. 온갖 정신병을 게워내는 악마의 목구멍이다. 심지어야망을 달성해도” 만족스럽지 않다고 느끼게 한다, 남보다 못하며 패배했다고 느끼게 한다. 이런 느낌은 상한선 없이 무제한으로 열린 허기증이다. 이 허기증의 수평선에 맛있는 음식을 놓아두어 다가갈수록 멀어지게 만드는 유혹이 바로 자아 수다다.


자아 수다의 유혹을 어떻게 뿌리칠까? 침묵을 처방으로 제시한 스승들의 뜨르르함을 뉘 모르랴. 그러나 침묵은 진통제에 지나지 않는다. 진통제는 치료약이 아니다. 치료 처방은 수다 공간의 전면 개방이다. 수다공동체 또는 공동체수다는 혼돈과 소란을 생태학적으로 주술적으로 수렴해 “동요 속 안정”이 번져가게 한다. 자아를 넘어 인류를 넘어 지구를 넘어 아득히 별세계에 가 닿는 신들의 역사를 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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