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시인사양상최天時人事兩相催

(하늘의 때와 사람의 도모는 서로를 열어준다.)

 

4월 15일과 16일의 경계에서 인생의 승부수 하나를 던져 놓고 하늘 시계 바늘을 응시합니다. 제 천명 의식은 맹골수도의 꽃별들과 생명의 지평, 역사의 맥락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일렁임이 고요함을 짝하며 흘러갑니다. 겨울사막의 끄트머리를 볼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하기 그지없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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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16 17: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17 0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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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는 분명하다. 그것은 죽음이다.(168쪽)

 

자, 이제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죽어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죽음, 아이들의 죽음, 아이들의 분명한 죽음입니다. 아이들의 분명한 죽음을 우리 각자의 실재 속에 들여놓아야 합니다. 아이들의 분명한 죽음을 우리 각자의 역사로 만들어야 합니다. 아이들의 분명한 죽음을 우리 공동체의 실재 속에 들여놓아야 합니다. 아이들의 분명한 죽음을 우리 공동체의 역사로 만들어야 합니다.

 

자, 이제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것은 죽임이었습니다.

 

아이들의 분명한 죽음을 우리 공동체의 역사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것이 매판독재세력의 고의에 따른 제노사이드였음을 밝혀야 합니다. 근거는 충분하고도 명백합니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1년 동안 이 사건에 대하여 집권세력이 저질러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협잡은 이른바 직접증거보다 훨씬 더 웅변적으로 실체적 진실을 드러내줍니다. 근거의 결정판은 뭐니 뭐니 해도 최종 책임의 공백입니다. 2014년 4월 16일에는 한나절의 공백이 있었습니다. 2015년 4월 16일, 오늘은 물경 열하루의 공백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이탈입니다.

 

이탈은 고의적인 직무유기입니다. 고의적인 직무유기는 책임주체의 정치적 자기살해입니다. 책임주체의 정치적 자기살해란 그러면 과연 무엇일까요?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자, 이제는 분명하다. 그것은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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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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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관련해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는(‘도’를 ‘는’으로 바꿈-인용자) 사회 전체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풀리지 않은 채 남을 따름이다. 이 문제를 책임 있게 다뤄야 할 당국은 오히려 이미 깨끗이 처리된 것처럼 뻔뻔하게 처신할 뿐이다.(177쪽)

 

이명박 이후 매판세력 떼거지가 지니는 윤리적 특성을 한 마디로 말하면 ‘뻔뻔하다’일 것입니다. 조금 더 분명하게 한다면 ‘대놓고 뻔뻔하다’가 되겠지요. 이처럼 기막힌 우리말이 있다는 사실에 고마운 마음이 일다가 대뜸 아픈 생각 하나가 솟아올랐습니다. “지난 1500년 동안 대체 얼마나 매판세력 떼거지가 설쳐대어 왔으면 이다지도 기막힌 언어를 민중이 조탁해냈을까?”

 

‘뻔뻔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부끄러워할 만한 일에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염치없이 태연하다’입니다. 이 설명을 들으면 찰나적으로 그려지는 얼굴들이 있습니다. 국민을 죽이고도 태연 넘어 파안대소 날리던 소시오패스. 소시오패스가 미진해서 활짝 웃다가 돌연히 악어 눈물 흘리던 연기파 사이코패스. 이름 석 자 대지 않아도 그 뜨르르한 면상들이 선연하게 떠오릅니다.

 

오늘로 365일째를 맞은 세월호사건. 여기 연루된 대놓고 뻔뻔한 자들이 어디 하나둘이리요만, 세월호사건에 대한 정부와 언론의 고의적 호도를 적극 두둔하고 유족을 떼쓰는 사람들로 매도한 자, 세월호특별법 제정 자체를 반대하고 ‘일베’ 글을 퍼 나른 자를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으로 들이민 자들과 그 당사자만큼 대놓고 뻔뻔한 자들이 다시 있을 것입니까?

 

이 자들은 어느 신문의 표현대로 ‘트로이 목마’로 들어와 특조위를 망하게 하려는 야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자들이 노리는 바는 특조위가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채 세월호사건이 마치 “깨끗이 처리된 것처럼” 끝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시각에도 증거를 인멸하고 진실을 훼손하는 일에 골몰하고 있을 것입니다.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고 사는 자들의 이 대놓은 뻔뻔함이여!

 

대놓고 뻔뻔한 자들의 세상에서 염치를 아는 사람들은 그러면 어찌 해야 할까요? 태연하지 않아야 합니다. 평소와 달라야 합니다. 착해서 버림받는 사람의 어리바리를 버려야 합니다. 이제는 싸워야 합니다. 바르고 결곡한 전사로서 우락부리를 마다하지 않아야 합니다. 맹골수도에서 자식 잃은 부모가 거리로 나섰듯 우리 모두 인문전선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인간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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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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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부자의 삶은 가난한 자의 빈곤한 그것과 엄청나게 다르다. 그렇다면 거듭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죽음 앞에서 평등하다고 하지만, 죽어가는 과정에서조차 평등하지 않다.·······돈만 있다면 죽음도 훨씬 더 편안하게 맞는다.(177쪽)

 

거대 부역언론은 한사코 덮고 비틀었지만 1년 전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품었습니다. “아이들 부모 가운데 국회의원 한 명만 있었어도 저렇게 했을까?” 실제로 권력과 그 주구들은 아이들 부모의 가난을 비아냥거렸고 배·보상금 문제를 띄우며 시체장사 운운하였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엄마가 준 용돈을 되돌려준 아이가 있었습니다. 새로 사준 운동화를 끝내 신지 않은 아이가 있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엄마 고생 면하게 해드리겠다 약속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맞습니다. 그들은 가난했습니다. 가난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수백 명 죽여 봤자 가난한 부모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을 계산했을 터입니다. 배·보상해 봤자 부자들의 그것에 비해 푼돈일 것임을 계산했을 터입니다. 가난은 개인적 무능으로 몰고, 진상규명 요구하면 무능한 자들이 떼쓴다고 몰면 된다는 계산을 했을 터입니다.

 

살아서는 가난했던 아이들의 꿈을 모독하던 국가가 가난을 표적 삼아 죽여 놓고 그 죽음을 다시 모독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을 때 아이들한테 한없이 미안하게 만들었던 국가가 눈앞에서 아이들을 죽여 그 부모의 가슴을 다시 갈기갈기 찢고 있습니다. 과연 전능합니다.

 

가난한 사람의 삶을 털어 부자에게 돈을 더해주는 국가가 가난한 사람의 죽음까지 털어 부자에게 편안을 더해줍니다. 매판자본이 성육신한 이 국가는 이렇게 신이 됩니다. 가난한 사람은 ‘완전’ 고통스럽게 살다가 ‘완전’ 고통스럽게 죽어갈지어다. 신의 거룩한 계명입니다.

 

삼백예순네 번째 날이 밝아 삼백예순네 번째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휘파람 불며 즐거운 ‘이탈’을 준비하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 무리의 행복한 휘파람은 가난한 사람들의 살해를 지시하는 잔혹한 시그널 음악임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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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저항해서도 안 되며, 시간의 꽁무니를 따라다녀도 안 된다.·······

·······시간으로 파괴될 위험에 처한 것으로 보이는 것은 바로 이 시간으로써 보존되는 것이 아닐까.(165쪽)

·······그는 영웅이 아니라, 그저 누군가일 뿐이다. 그리고 늙어 죽어가는 그 누군가와 마찬가지로 영웅적이다.(170쪽)

 

시간에 관해 물리학이나 철학의 언어를 동원해 낯설게 말하는 것은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다지 재미나 의미가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시간 속에서 우리가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더 주의해서 살펴보면 흐르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변화, 우리의 흐름은 두 측면에서 진행됩니다. 하나는 자기 동일성同一性의 측면입니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와 같은가, 하는 문제입니다.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합니다. 같기만 하지도 않고 다르기만 하지도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내가 변하거나 시간이 흐름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시간 속에서 변하기도 하고 변하지 않기도 하는 것입니다. 같다와 다르다가 공존하는 전체 진실은 결국 다르다, 그러니까 변한다가 맞습니다. 변화를 허락하는 ‘기다림’이 시간인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의 자기 단일성單一性의 측면입니다. 나는 나만의 나로 그 경계를 유지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나를 나이게 하는 경계는 동시에 남이 내 속으로 들어오는 입구이기도 합니다. 내가 빠져나가 남이 되는 출구이기도 합니다. 나는 나이며 너입니다. 시간이 흘러 내가 너이거나 시간이 흐름에도 내가 나인 것이 아닙니다. 내가 시간 속에서 나이기도 하고 너이기도 한 것입니다. 나와 네가 공존하는 전체 진실은 결국 내가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다가 맞습니다. 소장消長을 허락하는 ‘기다림’이 시간인 것입니다.

 

‘기다림’으로서 시간은 흐르지 않습니다. 쌓입니다. 쌓이는 시간 속에서 인간이 변화와 소장을 깨달아 상상常相과 아상我相을 깨뜨리는 것이 진리의 구조이며 운동입니다. 그러지 못할 때 시간은 흘려버려집니다. 흘려버려지는 시간의 앞뒤에서 인간의 괴로움이 솟아오릅니다.

 

이제 이틀 남짓 ‘지나면’ 4월 16일입니다. 우리에게 363일의 시간은 쌓인 것일까요, 흘려버려진 것일까요? 아이들을 죽인 우리 못된, 못난 어른들은 변하였습니까, 그대로입니까? 아이들을 죽인 우리 못된, 못난 어른들은 자신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있습니까, 여전히 알량한 나 자신에서 머무르고 있습니까? 지금 이 순간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은 “그저 누군가일 뿐”인 우리 하나 하나가 스스로 변하고, 스스로 깨뜨려 이루어내는 각자 자신의 “영웅”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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