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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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달라진다는 부정적 특성은 사유를 구성하는 본질적 측면이다. 이 점에서 사유는 언제나 동일한 상태로 머물러 있는 계산과 구별된다.·······인식도 부정성을 특징으로 한다. 단 하나의 인식이 기존의 인식 전체를 의심스럽게 만들고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정보에는 이런 부정성이 결여되어 있다. 경험 역시 근원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경험Erfahrung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건드리지 않는 체험Erlebnis과 다르다.(65쪽)

 

제 고향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의 간평마을입니다. 월정사 입구 오대산 청소년수련원이 있는 곳이 제가 어린 시절 뛰놀았던 버덩과 숲입니다. 물론 버덩과 그 뒤 숲은 수련원 때문에 거의 사라졌습니다. 집은 수련원 동편 6번국도변 언덕에 있었습니다. 밭 전田자 형으로 방이 네 개 있고 거기에 부엌과 외양간이 나란히 붙어 있는 초가집이었습니다. 집에서 좁다란 언덕길을 내려가면 버덩과 숲을 감싸고 서남쪽으로 흐르는 오대천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오대천은 그 버덩, 숲과 함께 숱한 추억이 담긴 놀이터였습니다. 오대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뒤 직강 작업이 이루어져 물고기를 잃은 죽은 냇물이 되었습니다.

 

떠나온 지 만 50년. 알 수 없는 그리움에 이끌려 이따금 느닷없이 고향을 찾습니다. 변했기도 그대로 있기도 한 거기에 가면 조용히 질문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나는 무엇인가. 어디로 가고 있나. 지금은 어디쯤인가.·······낯익음과 낯섦을 가로지르는 고향이라는 공간에서 시간을 잠시 멈추고 변화하는 생의 풍경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변화한다는 것은 세계 진실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세계 진실은 무상無常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참여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영혼의 의지가 개입된 행위입니다. 말하자면 “유심히” 애써 바꾼다는 것입니다. “무심코” 변하는 것은 변화라고 할 수 없습니다. 경이로움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경이로움을 느끼며 변화하는 삶, 이것이 사유의 삶이며 인식의 삶이며 경험의 삶입니다.

 

투명사회는 “유심히” 살지 못 하게 합니다. “무심코” 살아가게 강요합니다. 투명성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이따금 이렇게 경계의 땅으로 나와 시간을 세워두고 “유심히” 생의 감각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꿈꾸는 세계, 더는 “유심히” 애쓰지 않아도, “무심히” 경이로움에 깃드는 대동의 삶으로 다가들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이른바 지도층이 앞장서서 사유를 버리고 계산을 취합니다. 인식을 버리고 정보를 취합니다. 경험을 버리고 체험을 취합니다. 계산에 따라 팽목항에 갔습니다. 정보에 따라 조문을 연출했습니다. 가족 잃은 체험을 들먹이며 유족을 얼렀습니다. 그것이 끝이었습니다. 변한 것은 없습니다. 여전히 세상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건드리지 않”고 “동일한 상태로 머물러 있”습니다. 세월호사건, 꼼짝 않고 409일째 그 자리입니다. 어미아비들, 죽음 속에 그대로 머무릅니다. 진실, 어둠 속에 그대로 머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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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05-29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유도 흐르는데로가 아니라 절박함이 깃들여야 할텐데요.
사고가 터져도 여전히 변화의 모색은 어렵네요.
이책 사놓고 아직 못다 읽었어요.
잘 읽었습니다.....

bari_che 2015-05-30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건`을 `사고`로 처리하려고 협잡하기 때문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일 테지요.ㅠㅠ

<투명사회>
작아서 큰 책입니다.
쓱쓱 읽히는 책 아니니 느릿느릿 읽으시는 게 좋을 듯요.^^
 
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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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의와 의식에는 고유한 시간, 고유한 리듬, 고유한 박자가 있다. 투명사회는 모든 제의와 의식을 철폐한다. 제의와 의식은 조작을 허용하지 않고, 정보와 커뮤니케이션과 생산의 순환 과정을 가속화하는 데 방해물이 되기 때문이다.(64-65쪽)

 

마음병 때문에 심리상담 할 경우 서구의학이나 심리학을 한 사람들은 보통 한 회기session를 45-50분으로 잡습니다. 이것은 마치 아프리카 국경선 같은 인위적 시간 구획입니다. 저는 80-90분 사이, 결국은 90분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오랜 경험 끝에 상담을 청한 분들과 함께 얻은 깨달음입니다.

 

80분 이내로 잡으면 상담을 청한 분이 하고 싶은 말을 다 못한 채 맥이 끊긴 상태에서 중단하게 됩니다. 90분이 넘어가면 상담을 청한 분의 집중력이 떨어지고 지치게 됩니다. 80-90분 사이가 중용적 어름입니다. 개인차가 있음은 물론입니다. 무려 300분 넘는 상담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저의 이런 경험적 시간 구획은 미리 알고 일부러 맞춘 것이 아님에도 인간의 어떤 생명주기에 대한 체득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90분은 수면의 한 주기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대화(상담) 주기와 침묵(수면) 주기의 일치는 하등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귀 기울이면 “고유한 시간, 고유한 리듬, 고유한 박자”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투명사회는 인간의 공통적인 생명주기는 물론 개인마다 지니는 고유한 생명주기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정보와 커뮤니케이션과 생산의 순환 과정을 가속화하는” 어젠다에 맞추어 표준화합니다. 사이보그는커녕 로봇만도 못한 인간이 99.9%가 되는 그날까지 투명성은 집요하게 강제될 것입니다.

 

어제 한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외모에 대한 강박적 집착 때문에 일상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또래 친구들과 비교하면서 뒤쳐진 인생을 수습할 길을 찾지 못한 채 불안과 우울의 늪으로 감겨들고 있었습니다. 상담을 끝내고 돌아서는 그 청년에게 간곡히 당부했습니다.

 

“당신의 삶을 제의로 여기며 사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자신에게 ‘고유한 시간, 고유한 리듬, 고유한 박자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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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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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도 형식도 없이 무성하게 자라나는 사회의 몸은 외설적이다. 목적을 초과하여 가속화되는 과다 활동, 과다 생산, 과다 커뮤니케이션은 외설적이다. 이러한 과다한 가속화는 진정한 활동성과는 거리가 멀고, 또한 그것은 통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도 없다. 과다한 속도는 그 과도함 때문에 본래의 목표 지점을 지나쳐버린다.·······“·······운동은 운동보다 더 활발한 것 속에서 해체된다.·······운동은 방향을 빼앗음으로써 운동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것 속에서 해체된다.”(63-64쪽)

 

몽고인인지 아메리카 원주민인지 기억이 확실하지 않은데 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 가끔씩 멈춰 선다고 합니다. 너무 빨리 달리면 혹시 영혼이 못 좇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랍니다. 우스개로 지나칠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삶의 깊은 지혜와 배려가 스미어 있기 때문입니다.

 

속도 문제를 넘어 삶의 전반으로 이런 이치의 확산이 가능합니다. 가령 이렇게 이야기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

 

몽고인인지 아메리카 원주민인지 기억이 확실하지 않은데 그들은 식량을 비축하다가 가끔씩 야생동물에게 내어준다고 합니다. 너무 많이 가지면 혹시 영혼이 거기 사로잡힐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랍니다. 우스개로 지나칠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삶의 깊은 지혜와 배려가 스미어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의 목표 지점을 지나쳐버린” 빠른 운동도 많은 소유도 사실은 “진정한 활동성과는 거리가 멀고, 또한 그것은 통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도 없”는 자기 “해체” 행위입니다. 적어도 인간의 인간다운 행위이려면 “목적도 형식도 없이 무성하게 자라나는” 외설이 아니어야 합니다.

 

우리사회는 한사코 속도 자랑을 합니다. 이십대 삼십대, 아니 심지어 십대에 대박 나는 헛꿈으로 사람을 몰아댑니다. “목적도 형식도 없이 무성하게 자라나는” 연예인이나 프로 스포츠 선수로 자식을 키우려고 광분하는 부모가 삶의 모델인 대한민국입니다. “목적도 형식도 없이 무성하게 자라나는” 돈을 가지기 위해 국가와 종교까지 이용하는 상위 1%가 세계 사치성 소비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대한민국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외설적 성공을 거두기에는 너무 늦게 흐르고 인격적 성숙을 위해서는 너무 빨리 흐릅니다. 속도를 낼수록 활동과 소유는 넘쳐나지만 지혜와 기품은 메말라갈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매순간 각자의 선택하고 결단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공동체의 민주주의와 공화국을 염두에 둔다면 지금 당장 멈춰서야 합니다. 우리의 시간을 느림 속에 곡진히 놓아두어야 합니다.

 

영혼이 좇아오지 못하는 속도는 인간성 휘발입니다.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천천히 걸어가시라. 가난한 이웃에게 열리지 않는 소유는 사악한 허구입니다. 1850조나 해외에 빼돌린 재산 찾아와 99%에게 되돌려주시라.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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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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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는 사진의 두 가지 요소를 구분한다. 첫 번째 요소를 그는 “스투디움studium”이라고 부른다.·······‘좋아하다’의 범주에 들어간다.·······격렬함이나 열정 같은 것은 전혀 없다. 두 번째 요소인 “푼크툼punctum”은 “스투디움”을 깨뜨린다. 그것은 호감이 아니라 어떤 상처, 격한 감정, 당혹감을 낳는다.·······또한 사진은 “고요”해야 한다고 바르트는 말한다. “고요를 향한 노력” 속에서 사진은 자신의 푼크툼을 드러낸다. 푼크툼은 사색적 머무름을 가능하게 만드는 고요의 장소이다. 사람들은 포르노 사진 앞에서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런 사진들은 전시된 것이기에 현란하고 시끄럽다.(57-61쪽)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 문명의 가장 민망한 특징은 “호들갑”입니다. 환희도 호들갑을 떨며 표현하고 고통도 호들갑을 떨며 표현합니다.

 

환희에 대한 호들갑을 상품으로 개발한 것이 다름 아닌 긍정심리학입니다. 긍정심리학에 터한 다양한 자기계발·치유 프로젝트는 거대 기업과 고등종교의 후원을 등에 업고 문명사회의 파워 스트림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고통에 대한 호들갑을 상품으로 개발한 것이 다름 아닌 진통鎭痛의학입니다. 진통의학에 터한 다양한 의약·치료 프로젝트는 다국적 제약회사와 의료장비 개발업체의 후원을 등에 업고 문명사회의 필수 인프라로 자리 잡았습니다.

 

긍정심리학과 진통의학은 “전시된 것이기에 현란하고 시끄럽”습니다. 긍정심리학과 진통의학은 “머물러 있지 않는” 신속함으로 투명한 효과를 제공해야 합니다. 신속할수록 투명해지고 투명할수록 소란스럽습니다. 투명사회 사람들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어깨를 으쓱대며 “와우!” 하고 소리친 다음 하이파이브를 해야 직성이 풀리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지상 화두는 행복입니다. 인간의 행복 추구 자체를 시비할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문제 삼는 것은 행복과 환희를 동의어로 여기는 오류입니다. 이 오류가 긍정심리학이라는 괴물을 낳았습니다. 긍정 일변도의 환희 포르노는 반드시 광기狂氣로 귀결됩니다. 바야흐로 광기의 시대입이다.

 

인간에게 쾌락은 필수 감각입니다. 인간의 쾌락 추구 자체를 시비할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문제 삼는 것은 쾌락과 무통을 동의어로 여기는 오류입니다. 이 오류가 진통의학이라는 괴물을 낳았습니다. 진통제가 제공한 향락 포르노는 반드시 중독으로 귀결됩니다. 바야흐로 중독의 시대입니다.

 

광기와 중독으로 요약되는 투명사회의 “호들갑”을 떨쳐내려면 “고요를 향한 노력”이 불가피합니다. 고요를 향해 노력하려면 “사색적 머무름을 가능하게 만드는 고요의 장소”인 푼크툼에 깃들어야 합니다. 푼크툼에 깃들려면 그것이 낳은 “상처, 격한 감정, 당혹감”을 품어 안아야 합니다.

 

생떼 같은 목숨을 잃은 “상처”는 투명 처리를 거부합니다. 협잡으로 칠갑한 매판 무리에 대한 분노의 “격한 감정”은 긍정 처리를 거부합니다. 속절없이 잊어가는 노예들의 냄비 정서를 보며 느끼는 “당혹감”은 속도 처리를 거부합니다. “상처, 격한 감정, 당혹감”은 뿌옇고 꺼끌꺼끌하며 느릿느릿합니다. 뿌옇고 꺼끌꺼끌하며 느릿느릿한 것만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환희 앞에서 고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고통 앞에서 고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고요를 깨뜨리는 소란을 깨뜨리는 바로 그 고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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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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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틱한 것과 포르노적인 것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벌거벗은 것의 직접적 전시는 에로틱하지 않다. 몸에서 에로틱한 부분은 바로 “옷의 벌어진 자리” “두 개의 가장자리 사이”, 이를테면 장갑과 소매 사이에서 “빛나는” “피부”다. 에로틱한 긴장은 벌거벗은 몸을 지속적으로 전시할 때가 아니라 “빛의 점멸을 연출”할 때 생겨난다. 벌거벗은 몸에 광채를 더하는 것은 “중단”의 부정성이다.(55쪽)

 

 

오래 전 강원도 어느 농가에 잠시 머물렀던 적이 있습니다. 하루는 이웃 어르신이 크게 역정 내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연유를 들으니 한전이 콩밭 근처에 가로등을 설치하는 바람에 농사를 망쳐서 가로등을 철거하라 요구했으나 안 된다고 하기에 화가 났다는 것입니다. 콩잎이 호박잎처럼 커가는 동안에는 대풍이라며 좋아하셨답니다. 기다려도 꽃이 피지 않자 그제야 사태를 알아차리셨답니다. 콩에 대한 학문적 지식 없기는 지금도 매한가지지만 일정한 어둠이 있어야 꽃 피우고 열매 맺는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히 깨달으셨답니다.

 

꽃 피워 열매 내는 식물에게 빛과 어둠이 “중단”의 부정성으로 상호작용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특히 단일식물(일조 시간이 짧고 밤의 길이가 일정 시간보다 길어지면 꽃을 피우는 식물로서 콩, 메밀, 국화 등이 있음.)에게 어둠은 더욱 중요합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간과하고 지나가는 낮달 같은 진실입니다. 빛이 생명의 전제라는 사실만 유념할 따름입니다. 어둠도 필수적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많은 농부들조차 아직도 깨치지 못한 유구한 인습입니다.

 

어둠이라는 “중단”의 부정성이 아니라면 빛은 빛일 수 없습니다. 태양은 지구의 대지에 “빛의 점멸을 연출”하여 “두 개의 가장자리 사이”에서 “빛나는” “피부”, 그러니까 에로틱한 생명을 창조해냅니다. 빛에 드러나 “벌거벗은 몸을 지속적으로 전시”되는 대지의 포르노는 에로티시즘이 없습니다. 생명이 없습니다. 아니, 당최 생명일 수 없습니다.

 

결국 투명사회, 그러니까 포르노사회의 기획자는 생명의 멸절을 기획한 것입니다. 어찌 보면 지구의 미래를 위해 잘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파멸하면 이 기적의 푸른 별은 더 오랫동안 다른 생명체의 낙원으로 존속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는 매순간 “사이”와 “점멸”의 틈을 찾아 아주 조금씩 옮겨가면서 에로티즘에 깃들어야 합니다. 투명사회에 금내는 일을 멈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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