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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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성의 강제는 사물의 향기, 시간의 향기를 제거한다.·······무언가의 아름다움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다른 것의 빛 속에서, 회상을 통해 나타난다. 아름다운 것은 지금 당장의 스펙터클에서 뿜어 나오는 현란한 빛, 혹은 즉각적인 자극이 아니라 고요한 잔광, 시간이 남긴 인광이다.········미는 머뭇거리며 더디게 찾아온다. 나중에 가서야 사물들은 아름다움의 향기로운 정수를 드러낸다. 아름다움은 인광을 발하는 시간의 층과 침전물들로 구성된다. 투명성은 인광을 발하지 못한다.(69-70쪽)

 

박길주. 제가 중학교 1학년일 때 국어를 가르치셨던 여선생님의 존함입니다. 출산 중에 돌아가셨다는 바람결 소식을 전해준 사람마저 세상에 없는 이제, 더는 그 분을 뵐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46년이 지난 지금도, 아니 시간이 흐를수록 그 분의 “고요한 잔광, 시간이 남긴 인광”은 깊은 아름다움으로 제 인생에 배어들고 있습니다.

 

60년대 말 그 분은 중학교 1학년 수업에 세미나 방식을 도입하셨습니다. 학생 하나가 나와 발표를 하고 거기에 대해 토론하는 것으로 수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선생님은 뒷자리에서 조용히 지켜보신 뒤 맨 마지막에 간단하게 정리해주셨습니다. 그 수업이 다른 학생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제게는 개벽이며 혁명이었습니다.

 

너무 가난해 학습 참고서를 살 처지가 못 되었던 저는 밤을 새면서 혼자 힘으로 발표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물론 선생님한테 인정받고 싶은 아이다운 욕망도 있었지만 아이들한테 창피당하는 일만큼은 막아야 했기 때문에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애씀 덕분인지 선생님께서는 제 발표와 질문에 대한 응답이 단연 우수하다고 평가를 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어보셨던 그 음성이 아직도 귀에 생생합니다.

 

“얘야, 참고서나 부모님 도움 없이 정말 너 혼자 힘으로 발표를 준비했니?”

 

저는 그렇다고 단호히 대답했고 반 아이들은 거짓말이라고 야유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는 제 때 입학도 못하고 중간고사 직후에 보결로 들어온, 뭔가 흠 있는 아이였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의 수업방식과 저에 대한 인정은 언어에 대한 제 감각을 열어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먼 훗날 그 영향의 결정판이 드디어 나타났습니다. 수능사상 가장 어려웠다고 회자되는 2000년도 언어 시험에서 경이로운 점수를 받아 변환표준점수가 큰 폭으로 뛰는 바람에 상종가를 치고 있던 한의과대학에 당당히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제 나이 마흔다섯 살 때 일입니다. 합격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생각난 이름이 바로 박. 길. 주. 였습니다.

 

46년 동안 기나긴 “회상”을 통해 더욱 깊은 “시간의 향기”를 맡게 해주시는 그 분 존재의 어떠함을 ‘아름다움’이라 표현하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달리, 더 표현하면 누累가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현란한 빛” 아닌 “고요한 잔광”으로 한 사람의 삶에 “머뭇거리며 더디게” 찾아드는 아름다운 사람, 또 하나의 박길주를 제가 살고 있는지 사무치게 되돌아봅니다. 이 사무침으로 김선우가 보내온 그의 최근작 『발원 요석 그리고 원효』를 가만히 보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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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5 18: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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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6 11: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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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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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되지 않는 것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은 외설적이다.(69쪽)

 

정의定義를 내리는 것은 사유나 실천 대상을 명백히 하기 위한 편의 행위입니다. 불가피하다기보다는 필요악에 가까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명백히 한다는 것은 거기에 국한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국한한다는 것은 지배 욕구에 가 닿습니다. 정의의 속성은 언어 그 자체의 속성과 같이 근본적으로 정치적입니다. 정치는 자기의 불투명성을 보위하기 위해 상대에게 투명성을 강제하는 욕망입니다. 욕망이 불안과 무지와 동맹하여 피지배 사회전체를 투명한 외설로 만듭니다. 투명한 외설로서 커뮤니케이션은 소통의 이름으로 가하는 소통의 모독입니다. 소통의 모독에 이르러 정의定義는 내파implosion당하고 맙니다.

 

한의학에는 『상한론傷寒論』이라는 의서가 있습니다. 『황제내경黃帝內徑』의 대척점에 서 있는 텍스트로서 야전野戰의 혈향血香이 도처에 배어 있는 임상 논픽션입니다. 여기에는 여섯 개의 병에 대한 제강提綱 또는 제요提要가 있습니다. 그 중 선두에 선 것이 바로 다음 문장입니다.

 

大陽之爲病 脈浮 頭項强痛而惡寒.

대양지위병 맥부 두항강통이오한.

 

쉽게 풀어 쓰겠습니다.

 

맥이 뜨고, 머리가 아프고, 뒷목이 뻣뻣하면서 으슬으슬 춥다면 맨 처음 열(양)로 나타나는 병이 (구성)된다.

 

제강提綱 또는 제요提要라는 기대에 어긋나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기축으로서 병에 대한 정의나 이론적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황제내경黃帝內徑』의 사진四診, 곧 망문문절望聞問切의 순서 내지 중요성을 절문문망으로 전복시킨 것이 충격적입니다. 아니, 『황제내경黃帝內徑』이 가장 중시하는 망진望診, 그러니까 병을 진단할 때 의자醫者가 눈으로 보아서 알 수 있는 내용이 탈락되어 있습니다. 환자의 몸에 직접 손을 대고서야, 질문하고서야 알 수 있는 내용만으로 짜여 있습니다. 이것은 진단이 의자가 소유한 능력을 일방적으로 구사하는 단독행위가 아니라 환자와 소통함으로써 함께 구성해가는 쌍방행위라는 선언입니다. 이것은 병이 불투명하다는, 연역이 불가능하다는 저항의 담론이며 의학혁명의 격檄입니다.

 

『상한론傷寒論』은 “정의되지 않는 것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을 거부합니다. “외설” 의학의 텍스트, 『황제내경黃帝內徑』을 거절합니다. 병의 서사구조를 복원하고자 분투한, 심지어 실패한 사실에 대하여 신랄하게 보고합니다. 위기에 처한 인간을 구하기 위해 필요한 참된 인문人文 정신이 무엇인지 직접 그 몸을, 그 냄새를, 그 정서를, 결결이, 울퉁불퉁하게 드러내어 제시하고 있습니다.

 

『상한론傷寒論』은 정의하지 않습니다. 실재, 적어도 현실, 최소한 증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합니다. 생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고통을 그 어떤 인문학보다 정확하고 예술적으로 표현합니다. 극화도 수사修辭도 없이 단소정한短小精悍(사기史記 중 유협열전遊俠列傳에 나오는 말로 짧고 작은 것이 정밀하고 세차다는 뜻임) 그 자체로 역동적 인문입니다.

 

오늘 여기 대한민국에 『상한론傷寒論』의 인문정신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문학은 문학대로 철학은 철학대로 과잉되어 뜨르르한 스타들을 배출하고 있지만 정작 세상은 반인문적으로 고착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문학하는 사람이 문학을 넘어, 철학하는 사람이 철학을 넘어, 『상한론傷寒論』적 논픽션으로 무장하고 단소정한의 인문전쟁을 벌여야 할 때가 왔습니다. 세월호사건 이후 달라진 전선을 직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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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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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여행은 흔히 마지막 단계에서 행렬로 마무리된다. 엄격한 의미의 종결은 오직 하나의 이야기 안에서만 가능하다. 탈서사화된 세계, 탈제의화된 세계에서 끝은 오직 고통스럽고 당혹스러운 중단일 뿐이다. 오직 이야기의 틀 속에서만 끝은 완성으로 나타날erscheinen 수 있다. 어떤 서사적 가상Scheinen도 없는 경우에 끝은 언제나 절대적인 상실, 절대적인 결핍일 수밖에 없다.(67쪽)

 

투명사회에서는 의학도 투명의학이 됩니다. 약도 투명 약이 됩니다. 당연히 병도 투명 병이 됩니다. 결국 사람의 몸도 투명한 몸이 됩니다. 심지어 마음까지 투명한 마음이 됩니다. 설마 의학까지 그러랴 하실지 모르지만 의학만큼 한 나라의 정치경제 구조와 그 문화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분야도 드뭅니다. 서구의학의 기본 패러다임이 본디 그러하거니와 특히 미국식 현대의학, 뇌 과학, 초국적 제약 산업과 의료기기 산업은 투명성 강제에서 초월적 권위를 누리고 있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미국화한 나라인 대한민국이 그 직접적인 영향 아래 놓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한의학이라는 이름을 지닌 동아시아 의학 패러다임으로 수천 년 동안 조선 문명과 생태공동체를 유지해온 우리의 유구한 보건의료 전통이 서구의학에 완전히 점령당하는 데는 불과 백 여 년이란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발목 접질렸을 경우 말고는 병났을 때 한의원부터 찾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습니다. 돌고 돌다 안 되면 한의원 오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그렇게 찾아온 사람들이 하는 한결같은 말은 서구의학 치료 효과가 “그때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서구의학의 치료 효과가 “고통스럽고 당혹스러운 중단일 뿐”인 본질을 지니고 있다는 경험의 토로입니다. 왜 그럴까요?

 

서구의학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병을 기계의 고장과 동일하게 봅니다. 고장 난 기계는 고장 난 부분을 수리하면 그뿐입니다. 기계와 그 고장은 서사성이 없습니다. 기승전결이 없습니다. 서사에 따르는 이미지와 장면이 없습니다. 같은 기계 같은 고장에는 같은 수리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고장 난 기계 수리하듯 하는 서구의학은 병의 서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병명이 같으면 같은 약 처방을 내립니다. 그 약은 수리용 약입니다. 수리용 약은 본질이 증상 억제입니다. 증상 억제의 본질은 진통입니다. 진통의 본질은 ‘약발’이 떨어지면 고통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제자리로 돌아간 고통은 더욱 당혹스럽게 합니다. 당혹스러움을 피하여 장기복용 상태로 들어갑니다. 장복된 약물은 복용이 중단될 때 금단 증상을 동반합니다. 금단증상을 피하여 평생 복용 상태로 들어갑니다. 결국 그 약은 치료를 통해 병을 “종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상실, 절대적인 결핍” 상태에서 영원한 “중단”을 맞게 합니다. 이것이 서구의학의 투명성입니다.

 

인간은 기계 너머의 존재입니다. 인간의 병 또한 고장 너머의 존재입니다. 서사가 있습니다. 기승전결이 있습니다. 태어나 자라고 쇠하다 스러집니다. 같은 이름의 병이라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다른 풍경 다른 냄새가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투명한 것은 없습니다. 한의학은 이 불투명성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침도 한약도 그 불투명성의 서사 속으로 발맘발맘 걸어 들어갑니다. 투명성 신화를 맹종하는 자들이 한의학을 의학으로 인정하지 않는 소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무지한 멸시를 넘어 한의학은 병의 서사를 “마무리” 짓고 “완성으로 나타날erscheinen 수 있”게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회정치적 중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모르지 않습니다. 그 치료가 서구, 특히 미국의 패러다임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리 가면 우리사회는 결국 “절대적인 상실, 절대적인 결핍” 상태에서 영원한 “중단”을 맞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는 국민에게 진통제 몇 알로 치료를 끝내겠다는 자들이 오늘도 권력을 조자룡 헌 칼 쓰듯 휘두르고 있습니다. 아프십니까. 낫고 싶습니까. 이 순례를 “종결” 짓고 “완성으로 나타날erscheinen 수 있”게 하고 싶습니까. 일어나 제의를 복원하십시오. 입을 열어 서사를 복구하십시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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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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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렬Prozession·······은 서사적 사건이다. 행렬은·······강력한 방향성을 지닌다.·······반면 프로세서의 전진procedere에서는 어떤 서사성도 찾아볼 수 없다. 프로세서의 작동에는 어떤 이미지도, 어떤 장면도 없다.·······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프로세서는 오직 셈할zählen뿐이다.(65-67쪽)

 

인간은 이야기하는 인간homo narrans입니다. 이야기하는 인간이어야 인간입니다. 심지어 인간은 이야기Narrative입니다. 이야기는 기억입니다. 기억은 창조입니다. 창조는 변화입니다. 변화는 경이입니다. 경이는 존엄입니다. 존엄을 지키기 위해 인간은 기어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야기는 “방향성”을 지닙니다. 방향성은 걸맞은 “이미지”와 “장면”을 거느리며 풍요로운 내용을 빚어갑니다. 이들이 함께 엮이면서 삶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재미가 다양한 결로 분화됩니다. 분화의 경계는 각각의 사회를 구획합니다. 분화의 맥락은 역사의 흐름을 바꿉니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이야기는 인간의 생명입니다. 그 삶입니다. 이야기를 금하는 것은 인간을 살해하는 것입니다. 그 삶을 절멸시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모든 투쟁은 이야기 투쟁입니다. 누가 과연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남기는 존재로 살아남느냐를 놓고 격돌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 대한민국은 실로 중차대한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부정선거를 해도, 수백 명의 국민을 죽여도, 그 진실을 은폐해도 승승장구하는 권력이 자기 이야기만 하고 있습니다. 다른 모든 이야기를 ‘살殺처분’하고 있습니다. 재벌과 종교가 부역하므로 희망은 가뭇없이 사라집니다.

 

우리가 여기서 공포 때문에 자기 이야기를 포기하고 당장 살아남기 위해 “셈할zählen뿐”이면 장차 아이들은 어찌 할 것입니까. 아니, 그보다 먼저 이미 죽은 아이들은 대체 어찌 하라는 것입니까. 이러고서야 우리가 어떤 “이미지”, 어떤 “장면”으로 역사에 남을 수 있을 것입니까.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어림없습니다. 기억으로 창조 행위를 해야 합니다. 창조 행위로써 변화를 일으켜야 합니다. 변화를 통해 경이로운 세계를 열어야 합니다. 경이로운 세계에서 비로소 우리는 존엄합니다. 존엄을 세우기 위해 우리는 기어이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 이야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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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메리카 원주민 호피족은 연평균 강우량이 200mm 정도인 척박한 애리조나에서 농사를 지으며 삽니다. 비는 절대적 필요이므로 비가 오지 않으면 그들은 기우제를 지냅니다. 그들이 기우제를 지내면 100% 비가 내립니다. 그토록 영험한 까닭은 비가 내릴 때까지 계속해서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 동안 익히 들어온 ‘인디언 기우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는 행위에 대한 허무개그 식 비아냥거림이 들어 있는 한 이 이야기는 진실을 왜곡한 것입니다. 비가 올 것이라 믿는 긍정적인 마음과 인내를 제시하며 성공하는 삶의 비결을 말하는 자기계발류의 해석은 더욱 교묘하게 진실을 왜곡한 것입니다. 심지어 인식과 실천을 일치시키는 윤리적 의지로 읽는 것조차 진실에서 벗어난 것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비가 오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비가 올 때까지 계속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개신교를 포함한 통속적 종교의 기도 관념을 투영한 왜곡된 해석일 뿐입니다. 그들은 먼저 진심으로 모든 조건에 감사하는 기도를 한답니다. 그 감사 대상에 끔찍한 가뭄이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입니다. 바로 여기가 여느 기도나 긍정심리학과 첫 번째 다른 점입니다.

 

그 다음, 그들은 여러 가지 감사의 조건 가운데 하나인 비를 고요히 ‘선택’한답니다. 바로 여기가 여느 기도나 긍정심리학과 두 번째 다른 점입니다. 이 선택은 필요에서 멈춰섭니다. 탐욕으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 그들은 선택한 비를 온몸으로, 오감으로 느낀답니다. 바로 여기가 여느 기도나 긍정심리학과 세 번째 다른 점입니다. 이성으로 의지로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가 오는 드넓은 조건을 향하여 자신의 모든 생명감각을 열어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비굴하게 애걸하는 기도를 하지 않는답니다. 바로  여기가 여느 기도나 긍정심리학과 네 번째 다른 점입니다. 그들의 기도는 사사로운 이익의 추구가 아닙니다. 그들의 기도는 이웃과 민족 전체를 위한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과 아픈 사람, 그리고 약한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실로 참되고 착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기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기도가 어찌 당당하지 못할 것입니까. 이 당당한 기도가 어찌 인식과 실천을 하나 되게 하지 못 할 것입니까.

 

 

세월호사건 이후 어느 시점부터인가 기도를 시작하여 이제까지 계속하고 있습니다. 차고 어두운 바다에 버려진 이백 쉰 명의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기도함으로써 하루 일과를 시작합니다. 그 영혼들을 위해, 아니 그 영혼을 성령으로 모셔 그들에게 기도합니다. 그들이 이 실재 역사에 함께하기를, 그 함께함으로 말미암아 이 나라가 민주자주통일의 길로 나아가기를, 버려진 사람이 끝내 버린 자까지 구원해내는 대동 세상 오기를 간절히 빕니다. 이 기도가 앎과 삶을 하나로 이어주는 인력인 것을 느끼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이제 여기서, 새삼 정색하고 점검합니다. 죽임의 조건까지 감사히 받아들이고 있는가? 필요를 넘어서지 않고 있는가? 아이들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기운을 온 영혼으로, 오감으로 느끼고 있는가? 당당하게 두려움을 꿰뚫어 나아가고 있는가? 이 질문과 대답이 영글어가는 과정에서 제 삶은 하나의 제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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