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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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못하는 위험을 인식하는 데에서 우리는 불안은 단순히 대상 없는 두려움이 아니라 대상 상실의 위험에 대한 특정한 반응이라는 단서를 얻는다.(49쪽)

 

예쁜 포메라니안 강아지와 함께 살고 싶어 하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드디어 그 소망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소녀는 강아지와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예쁜 포메라니안은 갑자기 죽고 말았습니다.

 

소녀가 강아지를 얻었을 때 느꼈던 기쁨을 1이라 해보겠습니다. 그러면 그 강아지를 잃었을 때 느끼는 슬픔은 얼마쯤 되겠습니까?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1.4 이상이라고 합니다.

 

소녀에게 미안하지만 이야기를 조금 더 진행하기로 하겠습니다. 슬픈 기억을 지닌 채 세월은 흘렀습니다. 이번에 병은 소녀의 엄마를 찾아왔습니다. 1.4 이상의 슬픔을 겪었던 소녀는 엄마의 병 앞에서 “상실의 위험에 대한 특정한 반응”을 나타냅니다. 엄마라는 “대상 없는” 결과 이전에 거기로 가는 과정, 그러니까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 속에서 알 수 없음이 낭자하게 뿌려대는 불안을 감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실의 슬픔이 어떠한 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상실의 위험성, 중립적으로 말하면 가능성만 현존할 뿐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아무 것도 알 수 없음으로 말미암아 “울울하게” 불안해집니다. “울울하게”라고 표현했지만 실제로는 형언하기 어려운 불편함과 견뎌내기 힘든 “지랄 맞음”을 끌어안고 있는 감정입니다.

 

제 경험에 따르면, 이 희한하게 달래지지도 눌러지지도 않고 제멋대로 스멀거리며 휘감기는가 하면 때로는 날뛰고 줄달음치는 감정은 하루 두 번씩 맹렬한 기세로 들이닥칩니다. 잠에서 깨어났으나 눈 감고 누워 있는 시간, 그리고 자려고 누워 눈을 감았으나 잠들지 않은 시간. 바로 이때가 ‘어둠’의 시간이며 ‘알 수 없음’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가장 위험한, 그 위험을 감지해야 할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불안이 마음의 아킬레스건을 물어뜯으며 들이닥치는 바로 이때가 또한 치유의 결정적 기회임은 물론입니다. 그 누구도 도움을 줄 수 없는 이 짧은 시간에 자신의 불안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임으로써 자기수용의 극대화가 일어나도록 하면 됩니다. 자기수용의 극대화가 일어나도록 하려면 신음소리와 더불어 친절하고 자비롭게 불안할 수밖에 없음과 불안할만함의 모든 조건을 자기 삶의 일부로 품어 안아야 합니다. 그리고 고요히 불안을 가로질러 앞으로 나아가는 자신의 영혼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 영혼을 둘러싸는 드넓은 생명의 힘을 감지합니다. 길게 한숨을 토합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잠들고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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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문제란 터질 때 터지는 모양입니다. 마음에 익혀두었던 것이지만 꺼내들지 못한 문제를 정색하고 꺼내들게 하니 말입니다. 한 소설가의 표절 문제로 말미암아 아직도 문단은 물론 우리사회 전체가 웅웅거리고 있습니다. 문학·문학인하고 그다지 서로 의미로운 인연 지닌 사이도 아닌 저 같은 사람도 자꾸 되풀이해서 이 이야기를 들먹이는 것을 보면 적잖이 심각한 문제임에 틀림없습니다.

 

제가 다시 한 번 이 이야기를 꺼내는 까닭은 표절 논쟁에 참여했던 한 문학인이 한 ‘현재 한국문학의 초라한 처지에서 볼 때 권력 이야기는 가당치 않다’는 내용의 말 때문입니다. 권력 이야기는 단 두 사람 사이에도 성립한다는 진실을 모를 리 없는 지식인이 그런 발언을 했다는 것은 커다란 객관적 사실을 전경으로 내세움으로써 내밀한 진실의 고갱이를 은폐하려는 의도를 숨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회자되는바 문단 내부 간의 권력관계는 어차피 외부인이니 잘 모르기도 할 뿐만 아니라 우리사회 어느 분야든 패거리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다지 입 댈만한 흥미로운 사항은 아닙니다. 저는 다만 독자의 처지에서 여전히 대한민국은 문학·문학인 ‘과잉’ 사회라는 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사회는 적어도 조선 이후 양반관료·도학道學지식인·문인을 하나로 인식하는 오랜, 그리고 강고한 전통을 지닌 사회입니다. 그 전통은 식민지 시대에도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민주주의 시대인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러므로 이제 전통이 아니라 인습의 몽당비에 지피는 귀신같은 관념입니다.

 

문학인이 누리는 특별한 지위는 독자들의 대우에서만 연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학인 스스로가 의식·무의식 간에 그 자리를 향해 올라갑니다. 대가나 스타 급 인사들은 말할 것조차 없습니다. 등단만 해도 바로 자세를 바꿉니다. 아마도 대부분 자신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부인할 것입니다. 문학에 대하여 자신들끼리 공유하는 조소와 자신을 일치시키는 제스처를 취할 것입니다. 만일 그게 제스처뿐인 것이 아니라면 왜 그들은 그 조소를 넘어 기어코 문학인이 되었을까요?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빤한 겸양 떨기라는 사실을 그들만 모르거나, 더욱 영악하게 알고도 일부러 그리 하거나 둘 중 하나일 테지요.

 

문학인의 이런 태도는 정치인을 그대로 닮아 있습니다. 오늘 한국사회에서 정치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거기서 무엇인가 변화를 일으켜보겠다고 각고 끝에 입문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배지를 다는 순간 그들은 제스처를 통과의례 삼아 바로 ‘나리’ 반열로 올라갑니다. 그렇게 ‘나리’가 되면 유체이탈 어법을 단박에 습득하고 이내 곳간 불리기에 돌입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대한민국의 표절 문제는 문학의 표절 문제가 아닙니다. 문학인, 문학인의 의 삶의 표절 문제입니다. 문학인의 삶을 정치인의 삶에서 표절해 들이는 문제입니다. 치명적으로 치명적인 표절입니다. 인간을, 삶을 표절한 문학인이 표절 없는 문학을 빚어내는 일은 과연 어떻게 가능한지, 문학·문학인의 꿈조차 꾸지 못하는 무지렁이에게는 심히 궁금한 사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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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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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거나 듣는 무엇, 즉 분간할 수 있는 대상 혹은 상황을 두려워한다.·······그에 반해 불안은 대상이 없는 두려운 상태, 즉 무엇이 불안하게 하는지 쉽게 말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무엇이 불안을 유발하는지 불분명하다는 바로 그 이유에서 두려움보다 공포스럽다.(44-45쪽)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한 쪽 다리로 균형을 잡은 채 서 있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눈을 감으면 상황은 전혀 달라집니다. 우리 몸의 평형을 유지하는 데 내이 전정기관의 평형감각, 관절에 있는 체성감각, 눈의 시 감각이 필요하다는 과학적 사실에 터하면 눈을 감았을 때 평평 유지가 어렵다는 점은 특별히 주의를 기울일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곰곰 이치를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눈을 감는다는 것은 “분간할 수 있는 대상 혹은 상황”에서 그야말로 순식간에 멀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령 적이나 맹수가 있는 경우 눈을 감는다는 것은 그들의 공격에 스스로 속수무책 노출시키는 행위입니다. 죽임당하지 않으려면 눈을 떠야 합니다. 눈을 뜨게 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찰나적으로 불안을 증폭시키는 것입니다. 찰나적으로 불안을 증폭시키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몸의 부드러운 안정을 갑자기 허물어뜨리는 것입니다.

 

눈을 감은 상태는 근본적으로 어둠 속에 있는 상태와 같습니다. 어둠 속에 있을 때 우리는 막연히, 그러니까 특정한 요인을 말할 수 없는 상태에서 두려움을 느낍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의 어떤 공격을 받을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둠 속에 있는 상태는 근본적으로 “무엇이 불안을 유발하는지 불분명하다는 바로 그 이유에서 두려움보다 공포”가 더 큰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안의 불편한 생태학입니다.

 

인간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에 무지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근원도 의미도 알 수 없는 칠흑 같은 고통은 대답 없는 질문의 무저갱으로 인간을 던져버립니다. 절대 불안입니다. 절대 불안에 처한 인간이 존엄을 지키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오늘 여기 그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숭고하게 수행해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월호사건 유족입니다. 아이들이 무엇 때문에 어떤 의미로 죽임을 당했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극한의 고통을 참아내고 있습니다. 온갖 욕설과 비아냥거림과 저주를 견디고 있습니다. 그 참아 견딤의 한가운데 저들의 존엄이 분황芬皇으로 피어 있습니다.

 

두려움보다 공포스러운 불안의 요인을 없애며 이미 생겼다면 그 불안을 걷어내라고 만든 국가와 헌법, 그리고 권력이 도리어 국민을 한꺼번에 불안으로 몰아넣는 아수라가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세월호사건, 메르스대란은 이 아수라가 쌓아올린 불안의 금자쌍탑입니다. 다시없는 고통이며 모멸입니다. 청초가 되살아나는 몸에 초췌로 사위어가는 마음을 담는 일이 이렇게 염치없는 일일 줄 참으로 몰랐습니다. 마음의 초췌를 부르는 이 불안은 대체 어디서 왜 오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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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공백void, 무인 것으로 보인다.(42쪽)

 

밤늦게 술 취해 들어와 발로 차서 구두 벗어 던지는 버릇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래 층 사는 사람이 그 소음 때문에 잠을 깨는 피해를 견디다 못해 그러지 말라고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그날 밤 무심코 구두 한 짝을 발로 차서 벗어 던지다 아차 하고 기억이 났습니다. 그래서 남은 한 짝은 손으로 벗어 조용히 바닥에 내려놓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아래 층 사람이 더욱 화가 나서 올라왔습니다. 남은 구두 한 짝을 언제 벗어 던질지 몰라 밤새도록 잠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익히 알고 있는 우스개입니다. 남은 한 짝을 언제 벗어 던질지 몰라 밤새도록 잠들 수 없었던 감정 상태가 바로 불안입니다. 불안을 야기하는 조건으로서 “공백void, 무”는 이 경우 알 수 없음으로 드러나는 인식론적 “공백void, 무”입니다. 존재론적 “공백void, 무”가 전형적인 불안의 조건임은 물론입니다. 범위를 조금 넓히면 윤리적 “공백void, 무”도 불안의 조건이 됩니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적 “공백void, 무”도 불안의 조건일 수 있습니다.

 

공백void, 무”가 불안의 조건인 것은 인간 생명이 충만fullness을 지향하는 유有의 운동이기 때문입니다. 충만fullness을 지향하는 유有의 운동은 신의 창조 행위가 아닙니다. 신의 창조행위가 아니므로 무엇인가를 항상 필요로 합니다. 필요는 자동적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스스로 애써 채워야 합니다. 스스로 애쓰는 이성·의지는 “공백void, 무”에 대한 감지 감성인 불안의 신호를 받아 작동합니다. 불안은 인간 생명 운동의 안내자입니다.

 

생명운동의 안내자로서 불안은 그 자체로 항상성을 유지하는 어떤 구조가 아닙니다. 정상적인 감정 수준을 넘어 격정상태emotionalism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공백void, 무”와 그것을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호작용 여하에 따라 불안은 침착하고 옹골찬 계획·준비·실행·점검을 낳을 수도 있고 다양한 정신장애·정신병을 낳을 수도 있습니다. 이치를 따지면 전자에 대한 극진한 관심과 공부가 더 중요합니다. 현실에서는 자본과 권력, 그리고 세속종교가 야합하여 격정불안을 토건 방식으로 유도하고 그렇게 해서 생긴 정신장애·정신병 치료 사업을 또 토건 방식으로 벌이는 전천후 장사판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격정불안의 전천후 장사판은 충만fullness을 지향하는 유有의 운동으로서 인간 생명을 교묘히 악용합니다. 실재로서 “공백void, 무”는 물론이고 충만fullness, 유有까지 “공백void, 무”로 인지하도록 환상을 불어넣습니다. 충만fullness, 유有를 극한적으로 전시하면 그 경계가 무너집니다. 경계가 무너진 충만fullness, 유有는 곧장 “공백void, 무”가 됩니다. 왜냐하면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경계가 무너진 충만fullness, 유有를 구체적으로 포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전화된 “공백void, 무”를 감각적으로 표현하면 아득하다, 까마득하다, 막막하다, 망망하다가 됩니다. 아득하고, 까마득하고, 막막하고, 망망하면 가차 없이 불안이 스며듭니다.

 

이렇듯 인간 문명은 불안의 녹조를 증식시키는 악질 토건으로 귀결되고 있습니다. 증식된 불안은 허영의 먹이로 주어집니다. 허영은 불안을 먹으면 먹을수록 허기가 집니다. 허기진 허영의 몸은 다만 “공백void, 무”를 느낄 따름입니다. 이 악순환은 무한궤도로 들어선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지구 역사상 처음으로 스스로 멸망하는 종種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멸을 면하려면 서둘러 불안토건이 세운 보洑를 폭파해야 합니다. 생명을 자연히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그 흐름 속에서 불안은 건강한 삶을 빚는 감지감성으로 작동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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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배냇우울증’이라 이름 지은 뿌리 깊은 우울증으로 50년 넘게 시달리는 동안 제 영혼은 크리스티안 노드럽Christiane Northrup이 말한 이른바 존재론적 우울감에 점령되어 있었습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다른 감정에 주의를 기울일 틈이 없었습니다. 이 식민지적 삶을 혁명하고자 내면의 격檄을 쓴 것이 30대 후반, 밖으로 깃발을 내건 것이 40대 중반이었습니다. 제 자신이 겪은 우울증을 바탕으로 한의학 지평 위에 독자적 공부 길을 내고 달려와 이제 60줄에 접어들었습니다.

 

그 사이, 50대 초반에서 중반에 걸쳐 벼락같은 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공적 공격을 받은 것입니다. 이전 50여 년이 무하마드 알리한테 무수히 잽을 맞아 그로기 상태에 빠진 세월이었다면, 그 2-3년은 조지 포먼에게 어퍼컷 한 방을 맞고 쓰러져 누운 시간이었습니다. 그 사건이 치명적 방식으로 단박에 일깨운 감정은 바로 불안이었습니다. 우울에 점령되어 있는 동안 무의식 깊이 숨어 잠자던 유서 깊은 불안도 화들짝 놀라 튀어나왔습니다. 이 불안들이 우울을 대체했음은 물론입니다.

 

점령군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식민지 실제 상황은 우울과 불안이 중첩된 것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둘은 본질상 같으므로 후자가 전자의 체제를 그대로 계승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해방 직후 미군정이 일본 식민지 체제를 그대로 계승한 것과 같습니다. 우울과 불안은 고통의 시너지를 일으키며 제 영혼과 삶을 결결히 겹겹이 흔들어 놓았습니다. 찰나마다 들이닥치는 모멸감이 죽음에 대한 생각을 30cm 밖으로 결코 내 놓을 수 없게 만드는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흘러갔습니다.

 

불행에게는 등이 붙은 행복이라는 쌍둥이 자매가 있습니다. 그 악조건에서 저는 감사의 단서를 발견했습니다. 우울증을 앓았기에 우울증 환우의 마음에 가 닿을 수 있었듯 극도의 불안에 시달리면서 비로소 불안증 환우의 마음에 가 닿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론으로만은 사유로만은 결코 가 닿을 수 없는 감정의 살갗이 있으니, 제가 당한 저 불안의 고통은 필경 우울과 불안이 비상하게 증폭되는 이 시대를 마주해야 할 못난 의자醫者에게 하늘이 내린 선물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앞으로 제가 얼마나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합니다. 얼마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아는 것은 남은 제 시간이 우울과 불안을 속 깊이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임으로써 우울과 불안으로 말미암아 괴로워하는 많은 사람들 마음에 가 닿아야만 하는 과제 속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운명을 천명으로 깨달아가는 과정에서 행복과 도리는 즐거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만남을 위해 이제부터 레나타 살레츨의 『불안들』을 차분히 읽어 나아가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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