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바로 사유야말로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한병철


김연아가 누구의 손을 뿌리쳤다며, 노란 리본을 달았다며, ‘국민 팥쥐’니 ‘종북’이니 날뛰는 자들의 훤화가 어제 오늘 풍경은 아니지만 갈수록 도를 더해 마침내 인면수심의 경지에 도달한 듯합니다. 어쩌다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 아프고 슬프고 또 막막합니다. 이 사유하지 않는 자들의 통치가 차라리 국권 상실 시대보다 더 모멸스럽습니다.


자유의 위기를 말하는 한병철에게 사유는 스투디움Studium으로서 자연Sein이 아니라 푼크툼Punctum으로서 당위Sollen입니다. 대우 명제로 바꾸면 뜻이 정확하게 들어옵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않는 것은 사유가 아니다.”


사유가 매끈한 보편성, 그러니까 투명성을 깨뜨리는 순간입니다. 사유는 명백하고도 구체적인 지향 에너지를 수반한 개념 지음이며 구성이며 판단이며 추리입니다. 자유와 필연적으로 결합해 들어가는 투쟁의 논거입니다.


자유를 가져오는 사유의 조건은 부정성입니다. 부정성은 의문의 자궁에서 태어납니다. 의문을 품지 않는 자에게 주어지는 자유가 바로 중독입니다. 중독으로서 행복은 노예의 환상 또는 도착 또는 분열입니다. 노예의 환상 또는 도착 또는 분열을 키우고 잡아먹는 긍정주의 악귀에게 던져줄 부적에는 똑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과연 그런가?”


자유에 관한 한 사유는 의문입니다. 의문은 바로 오늘 여기 우리 앞에 놓인 강요된 ‘사실’을 향합니다. 김연아 가슴에 달린 노란 리본은 이런 의문을 담고 있습니다.


“과연 아이들은 왜 죽었을까?”


자유롭기 위하여 사유하려고 이 한 권의 책을 집어 듭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선한 분노 - 자본에 저항하는 불온한 사랑
박성미 지음 / 아마존의나비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0. 저는 지은이 박성미를 아주 조금 압니다. 어둠 속의 낮은 연대들 변방에 서 있곤 했던 제 삶의 길목 이곳저곳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제가 알량하였으므로 그는 알토란같았습니다. 그가 선물한 영화 작품 CD를 소중히 지니고 있습니다. 그가 책을 냈기에 또 한 번 ‘장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슥한 눈으로 읽었습니다.


1. 고뇌 끝에 성직의 길을 버리고 생계를 위해 우유 배달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아파트 관리인이 어느 날 느닷없이 이 엘리베이터, 당신 우유 배달하라고 만든 거 아니라며 이용을 금지시켰습니다. 주민들의 항의가 있었다고 명토 박았습니다. 저는 조용히 응수했습니다.


“저도 주민입니다.”


그 일은 거기서 종료되었고 당연히 제 생각도 거기서 멈추었습니다. 만일 주민이 아니었다면 제가 어떻게 그 상황을 타개했을지 20년 넘게 더 산 지금이지만 그리 명쾌한 설득의 맥락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 때 박성미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 하나를 들려줍니다.


조금 된 일이다. 강남의 어느 아파트에 “우유와 신문 배달원은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말라”는 공고가 붙었다고 했다. 그 사실은 인터넷을 통해 널리 퍼졌고, 사람들은 분노했다. 그러나 한편 아파트 주민의 임장에서 쓴 글도 설득력이 있었다. 배달원이 엘리베이터를 매층 붙들어놓기 때문에 급한 볼일을 봐야 하는 주민들이 제때 움직일 수가 없고, 엘리베이터 고장도 잦아 불편이 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특별한 강남 주민 텃세도 아니고 날고 오래된 아파트의 평범한 주민들의 평범하고 합리적인 결정일 수도 있었다. 대책회의를 하다 보니 그런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실수한 지점이 분명히 있었다. 그들은 회의를 하면서 단 한 가지 생각을 놓친 것이다.


“그럼 그 배달원들은 어떻게 다니지?”(44-45쪽)


『선한 분노』는 바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입니다. 박성미는 이런 이야기를 지어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이야기 지음은 박성미의 사랑으로 가능해집니다. 이런 사랑이 “단 하나의 옳은 것”(34쪽)이기에 거기서 진짜 혁명이 나옵니다. 진짜 혁명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책이 사랑스러운 까닭은 자분자분하고 쉽기 때문입니다. 자분자분하고 쉬운 이야기가 담아내는 진실에서 어려운 현실을 우지끈 부러뜨리는 힘이 나옵니다.


2. 사랑과 혁명 사이에 돈이 놓이는 것은 필연입니다. 사랑에서 시작하여 사랑으로 끝나는 삶을 살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돈이므로 혁명은 부정의 부정으로서 피할 수 없는 당위입니다. 지은이가 사랑과 혁명보다 돈 이야기를 많이 하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돈의 실체와 작동 구조를 알아야 사랑과 혁명의 따로 또 같은不二而不一 이치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돈은 필요의 임계점을 넘는 순간부터 악이 됩니다. 이는 비단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의 문제입니다. 시대의 문제입니다. 문명의 문제입니다. 지은이는 사랑과 맞은편에 돈을 세우면서 실용적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평행 문장 둘을 선보입니다.


옳은 일을 할 때엔 사랑을 쓴다. 옳지 않은 일을 할 때엔 돈을 쓴다.”(291쪽)


옳은 일도 다 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글을 보고 순진하다 하겠지만 정작 순진한 것은 지은이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은이의 속뜻은 이런 것일 테니까요.


“옳은 일을 할 때 쓰는 이른바 돈은 실제로 사랑이다. 옳지 않은 일을 할 때 쓰는 이른바 사랑은 실제로 돈이다.”


속물적 순진성에 막무가내 신앙을 불어넣는 시중의 자기계발서를 모조리 내다버린 지은이가 자신의 책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래서 조금 다른 자기계발서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이것은 자기계발서이지만 혼자 살기 위한 자기계발서가 아니라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한 자기계발서다. 당신이 열심히 열망하면 당신이 성공해서 잘 살 수 있다고 얘기하는 시크릿이 아니라, 당신이 열심히 열망하면 함께 하는 사람들과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은밀히 속삭이는 책이다.”(13-14쪽)


열 명 중 한 명만이·······되는 방법을 열 명에게 가르치는”(168쪽) 사기술에 불과한 시중의 자기계발서의 목적은 단 하나, 양 한 마리 가진 아홉 명을 속여 아흔아홉 마리 가진 한 명에게 몰아주는 것입니다. 서점가를 석권한 자기계발서가 결국 수탈체계로서 자본주의의 나팔수란 사실을 일깨우며 이 책은 여기서 벗어나는 길을 발맘발맘 따라가고 있습니다.


3. 박성미의 사랑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돈에 미치지 않았다면 필부필부에게 있는 그저 평범한 사랑이었을 것입니다. 그 평범한 사랑으로 족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이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뒤집힌 세상에서 사랑은 평범한 사랑일 수 없습니다. 뒤집힌 세상을 본디 모습으로 되 뒤집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사랑이 혁명입니다. 혁명으로서 사랑이기에 그것은 옹골차게 정치적인 것입니다.


열심히 사랑하는 일이 그토록 정치적인 것이라면 나는 기꺼이 정치적이겠다.”(62쪽)


그의 이런 정치적인 사랑은 예수의 사랑에 젖줄을 대고 있습니다.


“예수의 ‘서로 사랑하라’는 말.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은 단순히 그저 ‘좋은 말’이 아니다. 그것은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다시 재편할 만큼 혁명적인 말이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만약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신뢰하고, 누구든 자기 몸처럼 생각한다면, 진실로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는 예수의 그 말만 알고 있지 그 말을 실천했을 때 변화될 극단적인 세상의 모습을 거의 상상해본 일이 없다.”(288쪽)


우리사회에서 이른바 ‘개독교’ 현상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 글을 역시 순진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정작 순진한 것은 예수와 ‘개독교’를 동일시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이 땅의 ‘개독교’에 예수가 있을 리 없습니다. 권력과 자본에 부역하고 있는 ‘개독교’야말로 예수가 다시 온다면 앞장서서 십자가에 못 박을 것입니다. 예수의 “사랑이 지나치게 혁명적”(59쪽)이기 때문입니다. 박성미의 생각입니다. 그는 순진하지 않습니다. 그는 순수합니다. 예수처럼 사랑했기에 말입니다. 예수처럼 사랑해서 얻은 깨달음을 분명히 지니고 있습니다.


“나를 살려 달라 할 때보다 저 사람을 살려 달라 할 때 훨씬 크고 강한 움직임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았다.”(281쪽)


그의 깨달음이 이제 저와 그대에게도 번져오고 있지 않습니까.


4. 박성미의 혁명적 사랑, 사랑의 혁명에 함께 참여하고자 할 때 우리는 이 부분을 사무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장발장의 절도 사건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건은 보통 신부의 선함과 훌륭한 품성이 돋보이는 사건으로 이해되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계급사회가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빼앗은 것을 돌려주는 순간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 순간을 신부가 장발장을 용서한 것으로 이해하였다면 오해다. 그것은 과거 서민들로부터 자신이 부당하게 착복하고 있었던 사실들에 대해 신부가 장발장에게 용서를 구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42쪽)


물론 이 해석은 미리엘 신부의 이 말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 은식기들이 우리들의 것인가요? 내가 부당하게 그 은식기들을 오랫동안 갖고 있었어요.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었어요.”(41쪽)


그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이 이 구절을 미리엘 신부의 “선함과 훌륭한 품성”의 빛에서 읽어왔습니다. 이 세상의 실체적 진실을 드러낸 말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타성에 젖어 피상적으로만 세상을 읽는 우리의 남루한 영혼 때문입니다. 박성미는 이렇게 정리하고 정의합니다.


  “미리엘 신부가 장발장에게 은식기와 은촛대를 준 것은·······가난한 이들로부터 빼앗은 것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당연한 균형 감각’ 때문이었다.

  이 균형 감각을 우린 사랑이라고 한다. 내 행복이 누군가의 아픔에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고, 빼앗긴 이에겐 돌려주어야 한다는 균형 감각이다. 너무 많이 갖고 너무 많이 성장하여 다른 이들을 해치기 시작하면 멈춰야 할 시점을 아는 것이고, 세상이 한쪽으로 기울면 다른 한쪽에 함께 서 주는 것이며, 있는 힘껏 힘의 반대쪽으로 달려가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사랑은 세상에 대한 균형 감각이다.”(42-43쪽)


균형 감각은 진실이 지닌 이치에 맞게 살고자 하는 영적 지향성을 전제합니다. 이치에 맞게 살고자 하는 영적 지향성은 진실 전체를 향해 열려진 마음에서 나옵니다. 진실 전체를 향해 열려진 마음으로 현재의 자신을 돌아볼 때 용서를 비는 자세가 나옵니다. 우리 모두는 이제 여기서 용서를 비는 것으로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할 미리엘이 아닐는지요.


0. 2015년 8월28일, 오늘 250명 아이들을 바다에서 잃은 지 500일이 되었습니다. 진실은 더욱 깊숙이 묻히고 있습니다. 유족을 따돌린 채 권력이 엄폐 인양을 밀어붙이는데도 대한민국은 괴괴합니다. 500일은 선한 분노의 만료 기간일 수 없습니다. 대체 우리가 이 아이들한테 용서받을 수나 있는 것일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미 알만한 분은 다 알고 계시지만 삼각지 뒷골목에 <옛집>이라는 허름한 국수집이 있습니다. 우연히 알게 되어 무더위 기승이 여전한 지난 일요일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찾아갔습니다. 소문대로 손님이 꽉 차 있었습니다. 밖으로 나와 간이 식탁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온溫 국수를 시켰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국수가 나왔습니다. 워낙 국수를 좋아하는 터라 서빙하시는 아주머니께 물었습니다.


“혹시 이 국수도 곱빼기가 있습니까?”




아주머니께서는 선선히 되물으셨습니다.


“양이 적으시다면 더 부어드릴까요?”


저는 그 말뜻을 즉시 알아차리지 못한 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나중에 아예 하나 더 시키지요.”


잠시 후 아주머니는 작은 그릇에 국수를 담아 들고 다시 오셨습니다. 가득 차도록 부어주셨습니다. 제가 심상히 다시 질문했습니다.




“곱빼기 값은 얼마입니까?”


아주머니는 또 선선히 대답하셨습니다.


“저희는 곱빼기 값을 따로 더 받지 않아요.”


어허, 이런! 이 사실 하나만으로 <옛집>은 우리 시대 지상의 국수집입니다. 한 가난한 소년에게 로망이었다가 수십 년이 지나 치유로 자리 잡은 소면 국수에 이런 내러티브를 얹어주는 국수집. 다음에는 그 주인 할머니와 눈 맞춘 채 이야기 한 번 나누리라 다짐하며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을 일으켰습니다. 이제 삼각지는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만이 아닙니다. 덥혀진 제 영혼이 발맘발맘 돌아가는 삼각지입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15-08-25 15: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25 15: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불안은 두려움의 경험에서 옵니다. 두려움은 인간의 근본 조건입니다. 근본 조건을 피할 길은 없습니다. 피할 길 없는 대상은 직면하고 맞아들여 온전히 살아내야 합니다. 온전하게 함께 살려면 불안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불안에 귀 기울이면 불안이 건네주는 생의 전언을 들을 수 있습니다. 생의 전언대로 극진히 나아가면 불안은 격정으로 증폭되지 않습니다. 격정으로 증폭되지 않는 불안은 충분히 귀중한 생의 일부입니다.


온전히 자유로운 개인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자유로운 개인이 어느 날 국가가 이백오십 명의 아이들을 바다에 빠뜨려 죽이는 장면을 TV 화면을 통해 봅니다. 두려움이 들이닥치고 절망이 덮쳐오고 슬픔이 밀려드는 급박한 상황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고 맙니다. 그 순간 이후 자유는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습니다. 울울한 불안이 온 영혼을 점령해버렸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불편함이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484일이 지나도록 숨 막히는 악몽이 떠나가지 않습니다.


불안을 의도적으로 증폭시키는 국가에 종속된 민중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불의한 권력과 탐욕스런 자본, 그리고 타락한 종교가 담합하여 국민을 두려움과 불안으로 몰아넣는 현실에서 개인은 개인일 수 없습니다. 개인의 정서는 없습니다. 개인의 격정은 없습니다. 개인의 정신장애는 없습니다. 불안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불안의 병리는 개인의 병리가 아닙니다. 불안에서 오는 질환은 개인의 질환이 아닙니다. 불안은 공공의 문제입니다. 불안은 대한민국이라는 생명공동체 전체의 문제입니다.


각자도생의 치유와 행복을 넘어 공적 참여로 여는 생명연대가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편으로는 사람들은 자신의 개성을 간절히 지키고 싶은 것처럼 보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책임을 맡아줄, 즉 선택의 가능성을 사실상 박탈해 가져가버릴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하다. 선택이 넘쳐나고 향락이 필수인 시대에 주체는 사실 자신의 주이상스를 규제해줄 주인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주이상스 규제에 대한 요구는 주인이 사실 자신을 위한 주이상스를 훔쳐가고 있다는·······공포로 쉽게 변할 수 있다.·······

·······불안이 없는 사회도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위험한 곳이리라.(270-272쪽)


종살이가 너무나 힘들고 지겨워진 한 노예가 주인에게 간청해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기쁨에 겨워 길을 나선 노예는 얼마 못가서 두 갈래 길과 맞닥뜨렸습니다. 왼쪽 길로 가면 산적을 만날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오른쪽 길로 가면 천 길 낭떠러지 아래 바다로 떨어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망설이고 망설이다 노예는 끝내 울면서 주인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심리현상 “뷔리당티스”와 본질이 같은 이야기입니다.


[완벽히 똑같은 조건에서도 결정을 내리지 못할 수 있다는 이론을 제시한 프랑스 철학자 뷔리당의 이름에서 기원한다. ‘뷔리당의 당나귀’는 양쪽에 똑같은 먹이를 놓아두었을 때 당나귀가 어느 쪽을 먹을 것인가 결정하지 못하고 굶어죽는다는 이야기다.](111쪽 각주7)


본문에서 “주체”의 “개성” 그러니까 “선택의 가능성”과 “주인”의 “주이상스 규제”는 불안을 볼모로 잡고 거래하는 모순적인 힘입니다. 주체가 개성을 발휘할수록 그 자유가 동반하는 불안이 커집니다. 주인이 주이상스 규제를 강화할수록 안정이 동반하는 종속이 커집니다. 인간은 결국 이 두 힘의 쏠림 어디쯤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며 삶의 맥락을 구성하고 지평을 구획하는 운동 과정 그 자체입니다.


불안에 함몰된 것은 인간이 아닙니다. 불안과 절연된 것도 인간이 아닙니다. 100% 자유는 인간이 아닙니다. 100% 종속도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인 것은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인간인 것은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불완전과 불확실은 인간의, 생명의 숙명적 조건입니다. 이 조건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에 대한 지상의 예의입니다. 이 예의에 터하고서야 존엄이 성립합니다.


존엄은 모순을 타파하거나 극복하는 것으로 다다르는 경지가 아닙니다. 불안 없는 자유, 종속 없는 안정을 누리거나 그 둘 모두를 누리는 경지를 무어라 표현하든 그것은 이미 인간을 떠난 시공입니다. 여기에 다다랐다고 말하는 자는 그가 누구든 ‘깨달은 마귀’에 지나지 않습니다. 존엄한 인간은 인간의 불완전과 불확실을 인정하고 불안과 종속을 끌어안는 치열한 과정으로 존재합니다. 이 존엄의 과정은 홀로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홀로 성취한 것은 열반이든 행복이든 인간의 것이 아닙니다.



어제 문득 길상사를 찾았습니다. 항진자본주의 세상에서 ‘무소유’의 삶을 통해 맑은 울림을 주었던 법정이 길상화吉祥華 김영한의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의 뜻을 기려 한식집 대원각을 도량으로 조성한 곳입니다. 조용히 경내를 거닐다 홀연 돈점頓漸 논쟁의 다른 새김이 떠올랐습니다.


“돈오돈수頓悟頓修는 홀로 깨달았으니 홀로 실천한다는 말이고, 돈오점수頓悟漸修는 홀로 깨달았으되 이웃에 스며들어 실천한다는 말이다.”


이웃에 스며드는 데는 시간과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기다림에는 불안과 종속이 무한히 교차하고 뒤엉킵니다. 불안과 종속의 괴로움에 흔쾌히 함께 참여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자비입니다. 개체로서 주체의 각성이 전체로서 공동체와 함께 갈 때만 참 각성입니다. 참 각성은 반드시 공존, 그러니까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실행으로 이어집니다. 자리이타의 큰 수레 속에서 불안은 이치대로 일어나 자라고 스러질 것입니다. 그 자체로 병 될 리 없습니다. 다른 병으로 확산될 리도 없습니다. 불안은 그저 불안입니다. 우리가 직면해야 할 것은 불안이 아닙니다. 불안을 그저 불안이 아닌 것으로 몰아가는 세상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