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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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의 윤리가 독특한 활동이 되는 것은 임상 의료의 조우를 넘어서는 영역·······환자됨patienthood 바깥에 있는·······아픈 동안에 어떻게 좋은 삶을 사는가 (하는 문제에서-인용자 덧붙임-)다.·······

  ·······전문가-환자 관계가 두 인격체의 관계로 될 때, 의료는 또 다른 측면을 갖는다.

  ·······“제게 필요한 용기를 주실 수 있나요?” 이 질문은 의학적 정보나 치료에 대한 요청이 아니다.·······의학적 전문지식은 최소한만 관련된다.·······한 인간으로서 다른 한 인간-인간으로서의 그가 인간으로서의 그녀로 번역된 것을 인용자가 바꿈-을 위해 존재할 수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296-297쪽)


드라마에서 연기만 하다가 각종 토크쇼나 예능 프로그램이 개발되어 거기에 출연하면서부터 TV 탤런트들은 드라마 밖에서도 ‘탤런트’적 얼굴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중견급 이상 연기자들에게 어느 날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붙여졌습니다. 후배 탤런트, 방송인들의 선생님을 넘어 그들은 이제 사회 전체의 어른이나 멘토적 위상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이 요리 전문가에게 이미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주방장에서 셰프로, 셰프에서 선생님으로 호칭이 바뀌면서 요리 전문가가 사회의 어른이나 멘토적 위상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탤런트가 그러하듯 요리사도 불특정 다수가 보는 공개적 프로그램에 나와 반말을 서슴없이 하는 높으신 분이 되었습니다.


물론 어떤 분야의 누구든 걸맞은 지식과 덕망을 갖추면 선생님 소리 들을 자격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사회가 그런 이치와 전혀 다른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를 경전 삼은 자본의 논리에 따라서만 선생님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정작 선생님 노릇을 결곡히 하여 선생님 대접을 제대로 받아야 할 사람들은 한낱 자본의 주구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전락해버렸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다름 아닌 의사, 아니 의자醫者 집단입니다.


사회가 분화되기 이전 고대사회에서는 정치적 지도, 영적 인도, 그리고 치료적 계도는 통합되어 있었습니다. 모두 공동체 유지·발전에 필수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 일들에는 가르쳐 이끄는 것이 필요합니다. 서양 전통에서 의사를 가리키는 doctor는 docere, 즉 ‘가르치다’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의사는 선생님이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지금도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습적 호칭에 지나지 않습니다. 의사를 누가 어른으로 멘토로 존경한단 말입니까. 의사에게 누가 “임상 의료의 조우를 넘어서는 영역·······환자됨patienthood 바깥에 있는” 일을 묻겠습니까. 의사에게 누가 “아픈 동안에 어떻게 좋은 삶을 사는가,” 묻겠습니까. 의사에게 누가 “한 인간으로서 다른 한 인간을 위해 존재할 수 있는지를” 묻겠습니까. 특히나 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말입니다.


어제 수능 성적이 발표되었습니다. 가장 높은 점수대에 있는 이른바 극상위권 소수 아이들이 의대에 진학할 것입니다. 의대 6년 동안 공부하고 이어 전문의 과정을 통과해 전문의가 되면 중산층 이상의 삶이 보장됩니다. 의대 진학 이전에 그랬듯 진학 이후에도 이들을 인문적, 사회적 감수성으로 이끄는 교육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문적, 사회적 감수성이 없는 의사에게 “전문가-환자 관계가 두 인격체의 관계로 될” 기회는 없습니다. 두 인격체의 관계로 서지 못하는 의사에게 환자가 “제게 필요한 용기를 주실 수 있나요?” 라고 물을 기회는 없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의사는 전문지식 장사만으로 그 삶의 영역을 국한시켜야만 합니다. 인문과 사회 분야에 대해 아는 것도, 하는 것도 없습니다. 선생님 아닌 선생님으로, 그저 형해로 살아갈 뿐입니다.


이제라도 서둘러 의대는 의대생에게 인문적, 사회적 감수성을 일깨우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전문 지식에 걸맞은 인간적 소양과 기품을 지닐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성장한 의사만이 아픈 동안에도 어떻게 좋은 삶을 살아갈 것인지, 아픈 사람들과 함께 깊이 논의할熟論 수 있습니다.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이는 현실이기에 더욱 간절한 마음이 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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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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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적으로, 도덕적 가치는 권력의 불평등에 주목하는 정치와 상호보완적이어야 한다.·······도덕적인 방향의 재정립이 없는 정치적 변화는 관료주의를 더하기만 한다.(290쪽)


도덕은 인간의 문제입니다. 정치는 인생의 문제입니다.


도덕은 내면에 주의합니다. 정치는 외형에 주의합니다.


도덕은 인문 지평을 세웁니다. 정치는 사회 맥락을 조정합니다.


도덕은 숭고를 증폭시킵니다. 정치는 비장悲壯을 감축시킵니다.


도덕의 규범은 ‘차마’입니다. 정치의 규범은 ‘감히’입니다.


도덕은 정치의 최대한입니다. 정치는 도덕의 최소한입니다.


도덕은 정치의 원천입니다. 정치는 도덕의 사해四海입니다.


마음병을 앓는 사람들과 상담하면서 의자醫者로서 흔히 마주하는 한계는 일반적으로 그 아픈 사람의 삶의 조건 자체를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옵니다. 병의 원인을 제공한 가족, 특히 어머니나 배우자 바뀌지 않는 한, 아픈 사람 홀로 마음 바뀌어서 될 문제가 아님은 너무나도 분명한데, 의자가 할 수 있는 일이 현실적으로 거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가족 문제가 이러할진대, 원인 제공을 사회, 국가가 했다면 더더구나 속수무책이 됩니다.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절망할 때면 체 게바라가 총을 든 까닭에 대해 생각합니다.


정치적 치유가 불가피한 만큼 정치 또한 부질없는 장난이기도 합니다. 우주의 기운으로 혼을 다스리는 영검한 통치자가 나와 창조와 개혁을 주도하는데도 사람은 떼로 죽어나가고 삶은 피폐해지고 있는 대한민국이니 말입니다.


도덕적인 방향의 재정립이 없는 정치적 변화는 관료주의를 더하기만 한다.


아, 참으로 적중하는 말입니다. 인간적 돌이킴이 전무한 채, 인생의 성공만을 구가해온 한 줌 집단이 어린아이 밥알 흘리듯 벌이는 토건정치의 무쌍한 변화는 오로지 기득권자들의 독선적, 형식적, 획일적, 억압적, 비민주적인 행동 양식이나 사고방식만을 강화할 따름입니다. 인간 아닌 주체가 행하는 정치 놀음이 인간을 말살하는 것은 필연입니다.


설마 이따위를 보고 도덕적 가치더러 “상호보완적이어야 한다.”라 말한 것은 아닐 테지요. 도덕적 가치와 상호보완적이어야 하는 것일 때의 정치는 “권력의 불평등에 주목하는 정치”여야 합니다. 지금 정치는 정반대입니다. 우리의 도덕적 가치와 상호보완적이려면 지금 정치는 파현의 대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파현이 치유입니다. 그 과정에서 도덕의 정신은 온전히 대승이 될 것입니다.


마음 아픈 사람들에게 입쟁立諍, 그러니까 싸움의 이치와 자세를 가르치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도덕적 가치를 세우기 위해서도. 권력의 불평등에 주목하는 정치를 세우기 위해서도. 나사렛 청년 예수가 이 말을 한 까닭에 대해 생각합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태복음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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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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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여의 관계는 필요에 대한 상호인정에서 출발한다.·······모든 사람에게 넘침이 있고 모든 사람들에게 모자람이 있다·······그렇다. 당신의 넘침은 다른 누군가의 모자람을 보완해줄 수 있다. 당신은 다른 사람을 채워주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모자람 역시 그 사람에 의해, 혹은 아마도 다른 누군가에 의해 비슷하게 채워지기 때문에, 그 상호교환을 틀 짓는 것은 지배가 아니라 상호성이다.·······누군가의 넘침은 너무 자주 고통의 형태를 띤다. 그러나 고통을 넘침으로 인식하는 것은 지배가 아닌 상호성으로서 자선의 한 축이다.

  다른 한 축은 모든 사람에게 모자람이 있다는·······신념이다.·······빈곤층을 위한 의료는 의사-문맥을 고려하여 인용자가 첨가함- 그 자신의 “부서짐”에 대한 해결책이다. 자기 자신을 “부서진” 존재로 보는 것은·······급진적이다. 어떤 사람이 진심으로 자기 자신의 모자람을 믿는다면, 그 모자람을 채우는 것은 필요의 문제다. “자선”은 타인의 넘침에 의지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법이고, 이는 필요의 넘침이 된다.

  ·······진정한 봉사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모자람이 다른 사람의 필요의 넘침으로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의 문제다. 이를 의료에 적용시킨다면·······자기 자신이 시중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는 시종으로서의 의사의 이미지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예수는 적절한 이상이다. 우리가 시중을 드는 것은 시중을 받는 것이기도 하다는 역설은·······윤리의 핵심이다.

  사람들이 우리 각각이 타자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는 무언가를 결여하고 있다고 믿을 수만 있다면-우리가 소통하는 몸일 수 있다면-더 이상 공감은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위해 가지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공감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다. 이 관계에서는 자기 자신을 타자에 의해서만 완전해지는 존재로 이해한다. 그렇다면 아픈 사람은 더 이상·······돌봄을 받는 수동적인 환자가 아니다.·······

  고통의 교육학 의미하는 것은 고통을 겪는 사람이·······가르칠 것이 있다는 것, 그리하여·······기여할 것이 있다는 것이다.(284-287쪽)



  우울증을 전 지구적 문제라고 전제할 경우 이는 비단 인간 생명의 차원에만 국한할 수 없는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미 인간의 지나친 진화와 번성이 몰고 온 지구 생태계 전반의 위기와 직결된 문제입니다. 이를테면 킬리만자로의 눈이 녹아내리고 있는 것과 인간의 우울증 사이엔 분명한 함수관계가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거침없는 진화를 통해 자연을 대상화, 타자화한 결과가 이제 부메랑이 되어 인간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입니다. 이 잔혹한 문명의 혜택을 독점, 향유하는 헤게모니 블록은 자기 단일성의 미망에 빠진 분열증 집단입니다. 그들은 나머지 인간 그리고 자연과 소통하기를 거절합니다.

  이 광포한 분열증에 대한 경고가 바로 우울증입니다. 왜냐하면 우울증은 반성 불능의 자기단일성에 집착하는 분열증 집단의 먹잇감에게 씌워진 굴레이기 때문입니다. 우울증은 이 먹잇감이 다른 존재, 즉 자기 포식자에 대한 공감, 배려, 보살핌으로 자신의 생명을 잠식해 들어가는 병입니다. 우울증 환자의 영혼은 고요히 흐르는 깊은 강과도 같습니다. 그들은 투명한 통찰력을 지녔으나 따스합니다. 그들의 감각은 눈부시나 각질이 말랑말랑합니다. 하여 이 잔인한 문명 안에서의 삶은 백전백패입니다. 이 슬프고도 장엄한 패배를 온 영혼에 지닌 존재들이 저 승리자들과 자연의 경계에 서 있습니다. 저들이 죽어가면서 자연을 향한 분열증 집단의 돌진을 막습니다. 그들은 우울증이라는 천형을 덮어쓰고 생명의 연속성, 연대성을 절규하고 있습니다. 분열증적 자기단일성으로 승리한 문명의 적자, 저 비정한 ‘1%’가 끝내 이 선한 영혼, ‘등경(등잔걸이)를 말 아래 두는’ 생명들을 주목하지 않는다면 인류는 멸망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울증은 인류의 파멸을 막기 위해 분열증 문명과 자연의 경계에 핀 슬프고도 아름다운 꽃입니다. 인류가 이 사실에 귀를 기울이고 총력을 기울여 생명의 연속성, 연대성을 복원한다면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을 오래토록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부디 이 웅숭깊은 문명비판이 구원의 무지개로 뜨기를.


제가 쓴『안녕, 우울증』의 제42장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우울증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인류문명에 대하여 어떻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인간은 오직 고통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는 존재인 것이 진실인 한, “고통을 겪는 사람이·······가르칠 것이 있다는 것, 그리하여·······기여할 것이 있다는 것”은 논리적 필연입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의 고통은 “넘침”입니다. 그 넘침이 고통 밖에서 “모자람”을 견디는 사람들에게 그 “모자람을 보완해”줍니다.


우리는 그 동안 반쪽의 진실에 갇혀 있었습니다. 아픈 사람들은 뭔가 결핍되어 있으니 치료는 아프지 않은 사람들이 그 뭔가를 채워주는 것이다, 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치료란 치료자가 아픈 사람의 “넘침에 의지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법이고, 이는” 도리어 그 치료자에게 “필요의 넘침이 된다.”는 맞은편 진실을 간과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넘침이 있고 모든 사람들에게 모자람이 있다·······그렇다.


그렇습니다. 의사가 일방적으로 환자의 필요를 채우는 것 아닙니다. 건강한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것 아닙니다. 환자도 의사의, 아픈 사람들도 건강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웁니다. 환자도 의사를, 아픈 사람들도 건강한 사람들을 돌봅니다. 우리 모두 “타자에 의해서만 완전해지는 존재”입니다. 진정한 인간 세상은 “지배가 아닌 상호성”으로 이루어집니다.


지금 세상이 그렇지 못한 것은 이 진실에 눈감았기 때문입니다. 이 진실에 눈감은 것은 아픈 사람들의 아픔을 통한 가르침에 귀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픈 사람들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지 않은 것은 아픈 사람들이 모자란, 요즘 말로 ‘근본 없는 것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모자람이 바로 자기 자신들의 수탈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수탈당하는 고통 속에서 피워낸 꽃을 보지 못하는 자들의 발길 때문에 킬리만자로의 눈이 녹아내리고 있습니다. 파국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파국은 예외를 두지 않습니다.


공멸하지 않는 단 하나의 길, 오늘 여기서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사제의 예를 갖추는 것입니다. 강정마을 주민이 대한민국의 스승입니다. 밀양 송전탑 할매들이 대한민국의 스승입니다. 쌍차 해고노동자들이 대한민국의 스승입니다. 세월호 유족들이 대한민국의 스승입니다.


아픔이 가르치는 것보다 더 큰 가르침은 없습니다. 아픔이 가르쳐 깨닫는 것보다 더 큰 깨달음은 없습니다. 할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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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취약함과 통증이 전경에서 지속될 때, 새로운 사회윤리가 요구된다.

당면한 과제는 이 윤리를 다성적인 언어로 서술하는 것이다. 다성적 윤리는 상대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차이를 인정할 것을 제안한다. , 이는 합의에 도달하는 데 다중적 목소리들을 인정하고 각각에게 온전한 정당성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280)

 

지난 26일 대한불교 조계종 사부대중 100인 대중공사 동참자 일동은 국사교과서 획일화 강행으로 야기된 시국 현안과 관련해 정부와 국회에 아픈 국민들이 자신의 삶터에서 묵묵히 살아갈 수 있도록 다양한 여론을 듣고 해법을 모색해달라 요청하고, “정부와 정치의 존재이유를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여달라 일침을 가했습니다.

 

마치 아서 프랭크가 오늘 여기서 한 것처럼 두 말의 내용적 평행이 절묘합니다. 그는 아픔이 사회적 전경으로 나설 때 다중적 목소리들을 인정하고 각각에게 온전한 정당성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새로운 사회윤리”, 다성적 윤리라 합니다. 불교계는 지금 우리 국민 모두가 아프다고 진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국민을 아프게 하는 정부와 정치에게 다양한 여론을 듣고 해법을 모색하라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정부와 정치의 존재이유라 합니다. 요컨대 이는 국사 해석에 대한 다중적인 목소리를 인정하고 각각에게 온전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다성적 학문·교육 윤리의 요구입니다.

 

정치란 공동체 구성원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다양한 갈등관계를 조정하여 그 공동체의 정책과 목적을 실현하는 일입니다. 국사교과서 획일화 정국의 대한민국현실에서는 정반대로 정의됩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인간다운 삶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첨예한 갈등관계를 조장하여 통치자의 정념과 목적을 실현하는 일입니다. 통치자의 정념과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다중적 목소리들을 인정하고 각각에게 온전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대신 올바르다는 올가미로 그 다중적 목소리를 내는 목을 비정상의 혼이라며 옭아매고 있습니다. 이것은 낡은 윤리입니다. 이것은 단성적 윤리입니다. 아니! 윤리가 아닙니다. 병리입니다. 치료가 필요합니다. 의학의 정치학이 절실한 시점에 서 있습니다.

 

의학의 정치학은 병리란 치우침임을 직시합니다. 치우친다는 것은 한쪽으로 쏠린다는 것입니다. 한쪽으로 쏠린다는 것은 그 쏠림으로 말미암아 어느 한쪽의 생명력이 훼손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쪽의 생명력이 훼손되면 종당 전체 생명력이 훼손되고 맙니다. 전체 생명을 살리기 위해 균형을 되찾는 것이 치료입니다. 균형을 되찾는 것이 다름 아닌 다중적 목소리를 인정하고 각각에게 온전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매판독재분단세력 쪽으로 너무나, 아니 절대적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힘도 돈도 정보도 모조리 그쪽으로 엎어져 있습니다. 그들만 옳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나머지는 국민으로 인정 되지도 않습니다. 정녕 대한민국의 국민이고자 한다면, 국민의 위치를 되찾고자 한다면,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는 새로운 사회윤리를 세워야 합니다. 모두 일어나 각각 온전한 정당성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당면한 과제는 이 윤리를 다성적인 언어로 서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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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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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교육학”은 아픈 사람들이 사회에 가르침을 줘야 한다는·······표현이다.

  고통을 교육학으로 인식함으로써, 아픈 사람들은 행위성을 되찾는다. 증언은 전문지식과 동일한 지위를 부여받는다.(279쪽)


한의사‘임에도’ 상담으로 마음치료를 해오는 동안 양의사였더라면 현실적으로 가능해보이지 않는 축복을 받은 것이 있습니다. 제게 치료 받은 이들 가운데 저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이 여럿 생겼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어떤 깊이로 저를 아버지라고 부르는지 그 속마음까지는 가늠할 수 없습니다. 다만 여기서 분명하게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마음치료라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양육이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양육은 다만 어린아이를 잘 자라도록 기르고 보살피는 좁은 의미의 그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삶에 필요한 감각과 지식을 가르치고 덕성을 함양하는 교육의 의미를 포함합니다. 이를테면 국鞠養敎育의 준말인 셈입니다. 양육은 그러므로 개인으로서 인간의 인간다움은 물론 사회로서 인간의 공동체적 존립에 없어서는 안 되는 가장 보편적이며 핵심적인 행위이자 그 체계인 것입니다.


인간의 보편적이며 핵심적인 행위이자 그 체계로서 양육의 성숙한 근간이 바로 “고통의 교육학”입니다. “아픈 사람들이 사회에 가르침을 줘야 한다는” 진실입니다. 한 개인의 인간성과 사회의 공동체성을 구성하는 근본적 콘텐츠는 고통에서 나옵니다. 고통이 깨달음의 거처입니다. 고통이 깨달음이라는 열매를 맺으려면 “증언”을 필요로 합니다. 증언은 증언하는 개인과 듣는 사회를 함께 일깨웁니다.


고통을 교육학으로 인식함으로써, 아픈 사람들은 행위성을 되찾는”다는 사실, 여기에는 참으로 중차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픈 사람들이 행위성을 되찾는다는 것은 고통의 식민지성을 타파한다는 것입니다. 의료와 정치의 내러티브가 고통당한 사람들에게서 그 목소리를 약탈해온 것에 대한 통렬한 인식을 전제해야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인식의 전환이 행위를 탈환합니다. 바로 이 지점이 문제입니다.


인식의 전환을 막기 위해, 오늘 여기 대한민국 통치 집단은 고통의 교육학, 그 존재 자체의 은폐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고통을 가한 자들의 내러티브만을 가르치겠다며 차벽을 치고 있습니다. 국사교과서를 매판독재사관으로 획일화하는 것은 다만 국사, 다만 교과서 문제가 아닙니다. 교육, 근본적으로 양육이라는 사회 핵심 체계 전체를 왜곡 장악한다는 것입니다. 실로 무서운 반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사회의 양육 체계는 이미 최악의 수준입니다. 돈 하나로 값이 매겨지는 상품-인간을 생산하는 기업구조로만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런 파괴의 선두에는 역시 매판 노론과 식민지 신흥부역집단이 서 있습니다. 이들이 사학을 장악하여 국민의 혈세를 빨아먹고 아이들을 자신들의 노예로 사육하고 있습니다. 그 범죄의 성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겠다고 일으킨 것이 국정화정변입니다.


가공할 노림수가 하나 또 남아 있습니다. 정치, 아니 국가 전체를 양육프레임에 가두겠다는 것입니다. 어른이 아이를, 선생이 제자를 다루는, 그것도 식민지 방식으로 통치가 진행되는 것을 우리는 이미 목도하고 있습니다. 입만 열면 훈계와 질책뿐인 높으신 분에게 우리는 이미 길들여지고 있습니다. 최후의 살 떨리는 노림수가 헛것처럼 스칩니다. 그 양육프레임의 중심에 황군훈육프레임이 놓이는, 그런.


조금 전, 저를 ‘아부지’라고 부르는 젊은 여성이 선물을 편지와 함께 택배로 보내왔습니다. 편지 마지막 구절 일부입니다. “아부지~·······여기까지 올 수 있게 많이 보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별로 해준 것이 없습니다. 많이 보살펴주셔서 감사하다는 표현에 도리어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많이 보살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넬 수 있는 참 양육의 통치자를 만날 날이 온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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