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고통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탐구는 오직 자기 자신만이 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탐구를 지시하는 것은 오만이다.(334쪽)


2014년 5월 11일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가 이런 설교를 해서 빈축을 산 바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월호를) 공연히 이렇게 침몰시킨 게 아닙니다. 나라가 침몰하려고 하니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은 그래선 안 되니 이 어린 학생들, 이 꽃다운 애들을 침몰시키면서 국민들에게 기회를 준 것입니다. 무슨 누구 책임, 이런 식으로 수습하지 말고 온 나라가 다시 한 번 반성하고 애통해하고 눈물 흘리고 우리 잘못이라고 생각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우리나라도 선진국의 꿈을 가지고, 이번에 (하나님이) 추락시킨 실종된, 침몰한 세월호와 함께·······다시 한 번 일어나는 기회가 만들어졌으면 합니다.


참으로 천박하고 허접한 논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침몰하려는 대한민국 건져내 선진국 만드시려고 아이들 250명을 침몰시켜 죽이셨다는 것이 그의 해석입니다. 그가 숭배하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왜 하필 부정선거를 자행하여 민주국가를 침몰시킨 권력의 주구 수천 명이 아니고 죄 없는 단원고등학교 학생 250명을 죽이는 것으로 나타났을까요? 그가 숭배하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은 왜 하필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기회를 주려고 자식 250명을 잃은 부모에게 극한의 고통을 주시는 것으로 나타났을까요?


강자를 위해 약자를,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양으로 삼는 이 따위 논리가 하나님의 논리라면 대체 그 아들, 아니 그 자신인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킨 논리와 어떻게 일치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논리적 일관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지금 이 땅의 통속 기독교는 죽임당한 250명 아이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반열에 올려야 마땅합니다. 만일 이를 신성모독이라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아이들을 침몰시키셨다고 말하는 것은 더욱 더 참람한 신성모독임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저들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침몰시키신 것은 김삼환류 인간들의 논리와 상식인 듯합니다. 그 대신 “고통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탐구는 오직 자기 자신만이 할 수 있다”는 천하 이치를 단칼에 베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탐구를 지시하는” 저 “오만”을 건져 올리신 듯합니다. 고통당하는 사람 앞에서 어설프게 ‘하나님의 뜻’을 읊조리는 맹랑한 주둥이는 필경 우주의 기운으로 혼을 정화하는 가금 신을 예찬하는 부리와 동급일 것입니다.


프리모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그들·······믿음·······의 우주는 우리의 우주보다 더 방대하고, 시간과 공간 속에 더 확장되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그들 마음속의 고통이나 그들 주위의 고통은 해석 가능한 것이었고, 따라서 절망으로 넘어가지 않았다.·······그들 중 일부는·······우리를 전도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어떻게 믿음이 없는 사람이 ‘시의적절한’ 믿음을 단지 시의적절하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받아들이거나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177-178쪽)


아우슈비츠에 끌려와 의미를 알 수 없는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신의 숨결을 느끼는 것은 느끼는 사람의 삶의 실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타인에게 고통의 의미에 대하여 “전도”라는 이름으로 탐구를 지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오늘 여기 대한민국의 전투적 통속 기독교의 전도폭력은 이미 사회문제 수준에 도달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심지어 광화문 대로에서 세월호사건 유족을 종북이라 떠들어대며 그 고통을 모독하고 그 의미를 강탈한 기독교 종파도 있었으니 말입니다. 오만한 언행이 문제가 아니라 존재가 그냥 오물입니다.


고통, 무엇보다 인간에 의해 의도된 고통의 의미는 ‘하나님’에게 물을 일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묻는 순간, 의도한 인간을 은닉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김삼환 목사는 대놓고 그 책임을 묻는 식으로 해결하지 말자고 두둔했습니다. 누구에게 화살이 돌아갈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수없이 많은 권력의 주구들이 수없이 많은 방법으로 이런 범죄은닉 행위를 자행하고 있습니다. 은닉할수록 진실은 자명해집니다. 그 진실에서 고통의 의미가 선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도 아이들은 눈물 흘리며 청문회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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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질병은 언제나 돌봄을 받는 것이거나 최소한 돌봄을 받아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아픔을 가하도록 인간에 의해 의도된 고통과 질병을 비교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몸-자아는 모든 고통들 속에서 파괴된다. 고통이 의식에서 그 자신을 고립시키고 의식의 나머지를 흡수하는 통증이라면, 진정한 차이는 병원에서 일어나는 고통과 강제수용소에서 일어나는 고통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차이는 주목을 받아 울 수 있는 고통과 그 자신의 쓸모없음 속에 남겨지는 고통 사이에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그 주장은 원점으로 돌아온다. 분명히 여러 고통들 중에서 질병은 훨씬 자주 응답을 받는 고통이다. 강제수용소에서 들리는 울음은 억압된다.(333-334쪽)



지금 세월호 청문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매판독재 권력과 막장 언론은 유족의 고통을 “자신의 쓸모없음 속에 남겨지는 고통”으로 남기기 위해, “주목을 받아 울 수 있는 고통”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날조하고 위증하고 왜곡하고 침묵합니다. 적어도 유족에게 대한민국은 “강제수용소”입니다. 그들의 “울음은 억압된” 흐느낌입니다. 생때같은 새끼들이 살해되는 상황을 '생중계'로 지켜보았던 유족에게 또 다시 대한민국은 “의도된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의도된 고통을 국민에게 주는 대한민국이 어찌 국가이겠습니까. 국가가 아닌 사적권력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요구하겠습니까. 유족의 고통이 “응답을 받는 고통”이게 하려면 감응하는 시민이 직접 나서야 합니다. 그 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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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어떤 사람의 고통이든 환원불가능하다는 바로 그 이유로 쓸모가 없어진다. 고통은 현재의 상태 그것일 뿐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다. 환원 불가능한 고통은 결코 비교될 수 없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그 주장은 원점으로 돌아온다. 고통이 비교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해된다면, 같은 이야기 안에서 다른 고통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비교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하다.·······비교가 가능하지 않은 곳에서는 제유적인 여집합-‘환유적인 과다함’으로 번역된 것을 문맥을 고려하여 인용자가 바꿈.-이 있다. 각각의 고통은 더 커다란 전체의 일부분이다. 각각의 고통 받는 개인은 다른 고통들에 대한 목격자로서 그 전체로 부름 받는다.(333쪽)


세월호사건과 관련해 어느 정신과 의사와 인터뷰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의사는 유족의 슬픔과 아픔에 대해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정부 수반의 심리 상태를 이런 내용의 말로 설명했습니다.


“내가 겪은 고통은 너희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이런 정도의 개인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닐 터이니 그 분석에 공감하는 것과 사건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남의 고통보다 제 고통을 크게 여기는 심리가 흔하다 못해 보편적이라는 사실 만큼은 분명합니다.


상담치료를 하다보면 거의 모든 경우 이런 상황과 마주칩니다. 마음병을 앓는 사람은 자기만 아프다거나, 자기가 가장 아프다고 생각합니다. 열이면 열 똑같이 이런 표현을 씁니다.


“내속을 누가 알겠어요.”


비교한다는 것은 환원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환원 불가능한 고통은 결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고통은 어떤 사람의 고통이든 환원불가능”합니다. 누구의 고통이 누구의 고통보다 크다고 말하는 것은 편견이자 왜곡입니다. 내 고통이 남의 것보다 크다고 말하는 것은 유아적 자기연민입니다.


모두의 고통은 각각 “다른” 고통입니다. 다른 고통을 서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같은 이야기 안에서” 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야기는 다시 “더 커다란 전체”를 전제합니다. 서로 다른 고통은 서로에게 은유의 당사자입니다. 서로 다른 수많은 고통은 더 커다란 전체와 제유-제유Synecdoche는 사물의 한 부분으로써 그 사물 전체를 의미하는 비유로,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라는 문장에서 ‘빵’이 ‘식량’을 의미하는 것 따위가 이에 해당함.-관계에 함께 섭니다. 제유 관계에 함께 설 때 각각의 고통은 서로 여집합의 일부가 됩니다. 바로 이런 일련의 이치에 터하여 다른 고통을 같은 이야기로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단절은 연속의 계기입니다. 연속은 단절의 계기입니다. 이것이 다름 아닌 원효 성사의 화쟁입니다. 화쟁은 모두 다르다皆非와 모두 같다皆是 중 어느 하나를 누락시키지 않습니다. 전체 진실, 곧 일심一心 안에서 화쟁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국사 교과서 획일화 관련 민중시위 주도 혐의를 받고 수배 중이던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조계사에 피신해 있다가 무력으로 체포당하는 대신 자진 출두함으로써 사건이 일단락되었습니다. 내막이야 또 다를 테지만 이 문제 귀결의 중심에는 불교 화쟁위원회가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그들은 원효의 화쟁정신을 이 시대 문제를 푸는 열쇠로 삼고 있습니다. 표방과 달리 그들은 화쟁을 오독했습니다. 그들은 입쟁을 잘못함으로써 파쟁을 그르쳤습니다. 수탈당하는 사람들의 고통보다 수탈자의 존재하지도 않는 고통이 더 크다는 비교(!)에 결과함으로써 ‘다른 고통 같은 이야기’의 기본을 도륙해버렸습니다. 사회철학의 부재는 차치하고 원효의 근본조차 부정한 실로 한심한 작태입니다.


오늘도, 자기만 아프고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아프다는 한 분의 이야기를 고요히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그는 제가 혼신의 힘으로 듣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흔들렸음에 틀림없습니다. 저를 깊은 눈길로 바라보면서 참으로 궁금하다는 듯,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저만큼 아픈 사람이 저 말고 또 있었나요?”


제가 어떤 말을 해주니 그의 눈시울이 금세 젖어들었습니다. 이렇게 질문이라도 할 줄 알았다면 나라를 지금 꼴로 망치지는 않았을 사람들 얼굴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우리가, 이 슬프고 아픈 백성이 저들에게 무슨 말을 해주면 저들의 눈시울이 젖어들까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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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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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표면적으로는 그들을 돕기 위해 고안된 제도들에 의해 위협받는다.

  의료의 피해자가 되는 것은 질병 이야기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주제다.·······

  “·······화학요법은 지옥이었다. 화학요법은 치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을 만들어냈다. 나는 그것을 증오했다. 나는 화학요법을 받을 때마다 울었다. 그것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 나는 정말로 약하게 느껴졌다.” 여기서 들리는 목소리는 일종의 고문을 겪은 사람이다.·······화학요법을 받는 사람들은 또한 자신이 돌봄을 받고 있다고 믿는다.·······자아는 돌봄이라는 마음의 메시지와 고통이라는 몸이 메시지 간의 충돌로 파괴된다.(322-324쪽)


몸의 병에 관해서든 마음의 병에 관해서든 문진을 할 때, 저는 여느 의사와 다른 질문을 하나 합니다.


“사고 당하신 적 있습니까?”


없다는 답변이 돌아오면 반드시 하나 더 묻습니다.


“수술 받으신 적 있습니까?”


병력을 확인하려는 목적은 부차적입니다. 수술도 사고의 일종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사고를 당한 사람의 몸과 마음은 그렇지 않는 사람과 전혀 다른 기본적 증상이 있습니다. 공격을 당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수술도 공격입니다. 수술을 포함한 사고를 당한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하지 않는 치료를 부가해야 함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외과의사와 환자는 수술에 대하여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환자의 병을 고치기 위해, “돕기 위해 고안된 제도”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돌봄”이라고까지 생각합니다. 그것이 “고통”이며 “고문”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합니다. 의료계가 장구한 세월 동안 주입해온 교리 때문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비단 수술에 국한한 것이 아닙니다. 본문의 화학요법에 대한 증언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화학요법은 지옥이었다. 화학요법은 치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을 만들어냈다. 나는 그것을 증오했다. 나는 화학요법을 받을 때마다 울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정도의 이야기가 예외적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암과 관련된 모든 화학요법은 기본적으로 이와 같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서양의학의 거의 모든 치료가 본질적으로 화학요법이라는 사실이 무엇보다 요합니다. 화학합성 양방약물은 어떤 형태로든 어느 정도로든 지옥을, 다른 질병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서양의학은 이제 증오에 찬 외침을 들어야 합니다. 울음소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수술과 화학요법을 금하는 쪽으로 패러다임 전환을 해야 합니다. 불가피하게 할 경우에는 치료 절차를 개선하고 사전·사후의 보완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우선 수술에 관한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무릎 관련 수술은 가장 흔한 외과수술 중 하나입니다. 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손상된 무릎 연골 등을 복원·치료하기 위해 수술을 받습니다. 관련 의학비용도 천문학적 숫자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런 수술이 거의 무용하다고 합니다. 핀란드 헬싱키대학 연구팀은 무릎 연골에 이상이 생긴 환자를 두 그룹으로 나눠 1년 뒤 회복 정도를 비교했습니다. 한 그룹에는 실제로 수술을 하였으나 다른 한 그룹에는 수술을 한 것처럼 하고 아무런 의학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들 두 그룹을 1년 뒤에 비교했습니다. 실제 수술을 받은 환자의 89%가 수술과 회복이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하였고 수술을 받지 않은 쪽도 83%가 성공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수술 만족도는 실제 수술을 받은 쪽이 77%, 수술을 받지 않은 쪽이 70%였습니다. 이 정도 차이를 과연 의학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야 할까요?


화학합성 양방약물 또한 심각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작년 9월 한 의학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병원의 82%, 약국의 70%가 만2세 미만 영유아에게 금지된 감기약을 처방·판매하였습니다. 이 감기약들은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의약품등 표준제조기준>이 열거한 디엘염산메칠에페드린, 아세틸시스테인, 옥소메마진, 구연산옥솔라민 등 28개 금지 성분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이 성분들은 만2세 미만 영유아에게 빈맥, 경련, 의식 저하, 심지어 사망과 같은 치명적 부작용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들 약 가운데 극소수만이 만2세 미만 영유아에게 투여하지 말라는 명확한 표시를 하였고, 대부분은 복용시켜도 무방한 것처럼 오해할 수 있는 모호한 표시를 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은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은 채 지금도 진행 중일 것입니다.


진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수술이나 화학합성 양방약물 처치를 받을 수밖에 없는 환자들이 당하는 피해는 돈이나 부작용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받는 사람들은 또한 자신이 돌봄을 받고 있다고 믿는다.·······자아는 돌봄이라는 마음의 메시지와 고통이라는 몸이 메시지 간의 충돌로 파괴된다.


그러니까 몸과 마음의 충돌로 자아가 분리·파괴된다는 말입니다. 몸은 지옥으로 가는데 마음이 천국으로 간다고 믿는 저 참혹한 어긋남. 참혹한 어긋남을 이용해 돈을 빨아들이는 잔혹한 의료산업. 산업이 된 의료에 돈과 함께 빼앗기는 의료민중의 목숨. 이제 목숨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민중이 나서서 파괴의료를 혁파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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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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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사회적 본질·······고통은·······존재론적이고 보편적인 인간 조건이면서 동시에 서로 다른 지역적 세계들에서·······문화적 구체화-‘정교’로 번역된 것을 문맥을 고려하여 인용자가 바꿈-를 거친, 실천적이고, 그러므로 고유한-‘진기한’으로 번역된 것을 문맥을 고려하여 인용자가 바꿈- 경험의 형태다.(319쪽)


일반적으로 사회란 말은 개인의 상대어, 즉 개체에 대한 전체 개념으로 씁니다. 이 문맥에서는 오히려 보편에 대한 특수 개념으로 쓰였습니다. 그러나 이 문맥의 인간이 특별한 개인이 아닌 보편 인간이므로 사회는 결국 각기 고유한 지역의 세계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특수성과 전체성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보편 인간에게 고통은 “존재론적·······조건”입니다. 태어나 자라고 늙다가 죽는 모든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겪는 인간적 고통은 남녀, 인종, 문화, 빈부에 따른 근본적 차이가 없습니다. 하여 고통은 천명이고, 천명은 저항이고, 저항은 숭고라고 바로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숭고는 모든 개체 인간에게서 패배로 마감됩니다. 패배하는 개체 인간은 울면서 서로 얼싸안습니다. 울면서 얼싸안은 개체 인간들 경계에 웃음꽃이 피어납니다. 울음과 웃음이 어우러진 전체 인간, 그러니까 공동체로서 인간만이 숭고의 패배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숭고의 패배를 넘어서기 위해 얼싸안는 일, 그러니까 사회적 실천이 일어나야 하는 공동체는 각기 다른 “문화적 구체화를 거친, 실천적이고, 그러므로 고유한 경험”으로서 고통의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국가의 형태로 공식화된 고유한 단위 사회는 각기 특수한 정치적 지형을 따라 다양한 고통을 노정시킵니다. 대한민국의 경우, 매판독재분단세력이 정치·경제·학문·교육·종교·문화·예술 각 분야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기 때문에 자주민주통일 지향의 시민이 겪는 고통을 고유하게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그러니까 장준하·박종철·문익환이 겪은, 그러니까 위안부 할머니들·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세월호사건 유족이 겪고 있는, 그러니까 저와 그대가 겪어야 할 고통의 “사회적 본질”입니다. 공동체적 본질입니다.


모든 분야에서 이 문제는 치명적 중대성과 혁명적 시급성을 띠고 있습니다. 역사 교과서 획일화 문제가 현안인 상황에 맞게 교육 문제에 집중해보겠습니다. 지난 11월 27일 이 리뷰44 <고통의 양육: 양육프레임>에서 가장 기본적인 사항을 말씀드린 바, 매판독재분단세력이 사학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참담한 일입니다. 이들은 식민지와 독재 권력에 부역하여 벌어들인 돈으로 학교를 세우거나 인수하였습니다. 사립중고등학교로는 대표적인 예가 김문희(김무성 누나)의 용문학원, 나채성(나경원 아버지)의 홍신학원, 김석원의 성남학원, 민덕기의 풍문학원 등입니다. 대학으로는 방일영 일가의 연세대학교, 김성수 일가의 고려 대학교, 이병철 일가의 성균관대학교, 조영식 일가의 경희대학교 등입니다. 일제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예언했듯 식민교육의 노예화를 그 부역집단이 알아서 치밀하고 광범위하게 진행해왔던 것입니다. 이들이 우리 공교육을 깡그리 무너뜨렸습니다.


저도 이런 치욕스런 상황에서 교육 받았습니다. 제 딸도 그러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동일한 치욕 아래 놓여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사회의 교육적 고통입니다. 교육은 다만 사회의 비교적 주변부에 위치한 한 부문이 아닙니다. 교육은 사회의 근본 성격과 방향을 결정하는 관건적 부문입니다. 매판독재분단세력이 신문과 방송을 장악한 것도 거기에 교육적 속성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교육이 저들의 지배체제를 영속화하기 위한 도구로만 존재하는 한, 이 사회는 더 이상 공동체가 아닙니다. 국가는 오직 저들의 사익추구를 위한 기업에 지나지 않습니다. 깨닫지 못한 부모가 죽을힘을 다해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것은 저들의 수탈에 자발적으로 공범이자 피해자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서 저는 무엇을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이제 여기서 그대는 무엇을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저 혼자, 그대 혼자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저와 그대가 손을 잡지 않으면 그 무엇도 어떻게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지 않습니까. 고통이 클수록 손을 굳게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통은 사회적 실천입니다. 사회적 실천으로야 패배를 건너갑니다. 이 순간도 아이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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