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29일은 남은 제 인생의 날들에서 아마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뵙지 못한 지 45년 된 옛 은사에 관한 (것으로 추정되는) 소식의 단서를 찾았습니다. 연락을 넣어놓고 하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분은 제 인생의 행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중학교 국어 선생님이셨습니다. 아기를 낳다 돌아가셨다는 바람결 소리를 듣고 찾기를 40여 년 동안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지만 언제나 가슴 속에 삶 속에 살아계신 분이어서 틈만 나면 이런저런 곳을 기웃거리던 차, 인터넷 검색에서 가능성이 높은 정보를 얻는데 성공했습니다. 만감으로 가슴이 일렁거리던 바로 그 시각,


올해 45살이 된 지인 하나의 부음을 듣습니다. 그는 한의대를 같이 다닌 아우였습니다. 꽤나 오랜 시간 가까이서 애환을 나누었던 사이입니다. 복잡다단한 사연이 얽히면서 소원해졌는데 어느 날 그가 불치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끝내 다시 보지 못한 채 영원히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해후와 몌별의 기막힌 교차 때문에 하루 내내 감정의 자맥질이 계속되었습니다. 진료를 끝내고 홀로 동네 술집에 가 앉았습니다. 45년 만에 뵐 수도 있는 은사님에 대한 그리운 생각보다 45살로 생을 마친 아우에 대한 회한의 정념으로 영혼이 적셔졌습니다. 술에 약했지만 그가 즐기던 그 소주,



소주 한 병 시키고 잔 두 개 달라 하니 주모가 갸웃합니다. 남들이야 어찌 보든, 저는 먼저 건너편에 잔을 놓고 가득히 따랐습니다. 제 앞 잔에 가득히 따랐습니다. 그렇게 한 병씩(!) 비우고 그는 떠났습니다. 떠난 뒤에도 오랫동안 그는 제 마음 속에 살아 있을 것입니다. 45년 동안 뵙지 못했지만 은사님이 제 삶의 한가운데 늘 계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모름지기 만남과 헤어짐도 삶과 죽음도 전혀 다른 별개의 사건이 아닌 듯합니다. 울고 웃으며 이렇게 한 생을 살다 보면 울 자리와 웃을 자리가 하나일 수밖에 없지 싶습니다. 아우를 보내며 흘린 눈물이 은사님을 뵐 때도 흐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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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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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학대는 전천후로 깔린 남성 문명의 전가의 보도입니다. 그 위험한 삶의 행로에서 여성은 기득권을 쥐고 있는 남성과 불리한 경쟁을 감수한 채 공부하고, 대학도 가고, 직업도 구해야 합니다. 어렵사리 취업하면 차茶 심부름에, 임금 차별은 기본이고, 승진에서도 소외됩니다. 가뭄에 콩 나듯 예외적인 스타 여성 직업인이 탄생하면 마치 모두가 그렇게 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온통 난리를 치며 떠드는 분위기가 사회를 제압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사회제도나 분위기 자체가 여성에게 외상trauma을 입히는 주체로 되어버린 셈입니다.·······사회우울증·······.

  국가폭력으로까지 눈을 돌린다면 국가 자체가 우울증을 양산하는 상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가우울증·······!(153쪽)


사회든 국가든 이상향이 아닌 다음에야 구성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공동체인 Sollen의 측면과 불의한 소수 권력집단의 수탈체제인 Sein의 측면이 공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자 쪽으로 부단히 밀어가는 과정이 인간적 역사입니다. 후자 쪽으로 부단히 밀려가는 과정이 비인간적 퇴각입니다. 퇴각은 역사가 아닙니다. 역사이기를 멈춘 폭력입니다. 그 폭력이 전천후로 지배하는 사회·국가는 자체로 범죄입니다. 범죄인 사회·국가가 동원하는 수탈의 가장 흔한 방편이자 대상이자 결과가 질병입니다. 수탈의 포괄적 동력인 질병 가운데 가장 깊고 최종적인 것이 우울증입니다. 우울증의 저인망이 노리는 제1범주가 다름 아닌 여성, 좀 더 정확히는 여성성입니다. 여성성의 수탈은 사회·국가의 공동체성을 근본적으로 붕괴시키는 자멸행위입니다.


여성성이 수탈체제의 근본적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는 까닭과 공동체성 유지의 근본적 부양자인 까닭은 하나입니다. 여성성은 자기 개인보다 먼저 자신이 속한 공동체 전체에 마음을 쏟는 속성 또는 경향성입니다. 공동체 전체에 마음을 쏟으려면 자기 개인에게 몰입 또는 집중할 수 없습니다. 자기 개인에게 몰입 또는 집중할 수 없는 사람은 사회적 성공을 거두어 권력의 핵심으로 진입할 수 없습니다. 사회적 성공을 거두어 권력의 핵심으로 진입할 수 없는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이 지배의 속성 또는 경향성을 우리는 남성성이라 부릅니다. 남성성이 여성성을 수탈하는 방편이자 대상이자 결과가 우울증입니다. 이 우울증은 그러므로 본질상 사회우울증, 국가우울증입니다. 개인적이기만 한 우울증은 없습니다.


자기 개인보다 먼저 자신이 속한 공동체 전체에 마음을 쏟는 여성성의 다른 이름은 진보성입니다. 진보는 이데올로기적 성향 이전에 인문적 자세를 의미합니다. 진보는 편하게 홀로 사는 것 아닌 불편하더라도 함께 사는 것을 선택하는 실천을 의미합니다. 이런 이치를 따진다면 진보성의 다른 이름은 지도자성입니다. 공동체의 지도자는 늘 진보성, 그러니까 여성성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가 진보성을, 여성성을 포기하는 순간 공동체는 수탈체계로 영락합니다. 오늘 여기 대한민국의 막장 정치는 여성성을 전유한 채 남성성의 전형을 드러내는 분열적 협잡꾼이 자행하는 것입니다. 25일 아침 대중문화평론가 황진미가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 나오는 분이의 리더십 이야기를 한겨레신문에 썼습니다. 그 일부를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육룡이 나르샤>의 가상의 인물 분이(신세경)는 ‘육룡’ 중 유일한 여성이다. 그는 하층민 여성이지만, 역사적 대의를 각성한 혁명가이자 리더의 면모를 보여준다. 어릴 때부터 마을사람들에게 ‘분이 대장’으로 불리던 그는 혁명조직의 일원으로 정보팀을 이끌다가, 왕자의 난으로 조직이 와해되자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섬으로 가 공동체의 리더로 살다 죽는다. 분이와 이방원 사이에는 로맨스가 있지만,·······분이는 이방원이 처음 청혼하였을 때 거절한다. 신분의 격차에 황송해하는 것이 아니라, 귀족에 대한 계급적 적대감과 첩의 신분을 거부한다는 자신의 입장을 당당히 밝힌다. 냉철한 분이에 비해 오히려 이방원이 감정적이다. 그는 신분차를 넘어설 수 없음에 괴로워하며, 먼저 정략결혼을 하면서도 분이의 감정을 계속 살폈다. 이후 둘은 혁명조직의 일원으로 동지애를 발휘할지언정, 더 이상의 로맨스를 발전시키지 않는다. 분이가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방원을 떠나려 하자, 이방원은 그동안 묻어두었던 연정을 투하하여 “결혼하자”는 말을 내뱉는다. 분이가 억류한 사람들만 풀어준다면 뭐든 하겠다고 순순히 답하자, 이방원은 자신과의 감정이 다른 사람들과의 신의보다 하찮음에 충격을 받는다. 분이에게도 이방원과의 감정이 하찮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일신이나 자존심보다 리더로서의 책임감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분이는 공동체를 책임지는 사회적 존재로서 놀라운 여성적 리더십을 보여준다.”(밑줄-인용자)


분이라는 캐릭터를 그려낸 이 텍스트가 “놀라운 여성주의”로 읽힌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사회가 이 상상력의 반대편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그런 리더십을 가진 자가 없습니다. 재빨리 이 이미지를 전유하는 자가 있을 뿐입니다. <명량>에서 그랬듯. 현실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그런 리더가 없는, 그러니까 사적 이익을 위해 공동체를 패대기치는 남성적 리더가 통치하는 사회의 시민은 전체적으로 수탈당하는 여성의 지위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수탈당하는 여성의 지위에 놓인 시민은 너나없이 사회·국가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질곡의 현실은 중첩되어있습니다. 깨달음도 중첩적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여성우울증이란 화두를 들어 공동체성 회복이라는 대승적 깨달음을 얻기만 한다면 몇 겹이든 뚫어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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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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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여성의 25%는 일생에 적어도 한 번은 우울증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본인이 우울증이라는 것을 모르거나 부인하는 경우를 감안한다면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여성들이 우울증에 시달린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2배 이상 높습니다. 어떤 실험에 따르면 슬픈 기억을 떠올리게 했을 때 감정뇌(대뇌변연계) 전면의 활동성에서 여성이 남성에 비해 8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여성이 이렇게 우울증에 민감한 것은 무엇보다도·······월경-임신-출산-육아-완경·······과정에서 일어나는 내분비 변화의 복잡성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월경, 임신, 출산, 육아, 완경은 각각 그 자체로 외상trauma입니다. 이들이 몸과 마음에 일으키는 고통이야말로 우울증의·······확실한 진원지입니다. 남성에게는 없는 이런 외상을·······안고 다른 생명과 삶에 관계를 맺어야만 하기 때문에 여성이 우울증과 더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145쪽)


한동안 남녀의 뇌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이야기가 유행하더니, 최근 들어서는 남녀의 뇌는 차이가 전혀 없다고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둘 다 일리一理가 있으니 모두 옳습니다[皆是]. 둘 다 무리無理가 있으니 모두 그릅니다[皆非]. 인간이 인간인 만큼에서 남녀는 차이가 없습니다. 같은 인간이라도 엄연히 남녀의 비대칭적 대칭이 있는 만큼에서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 결과 겹은 천차만별입니다. 진실의 전체 담론은 어느 특정 시공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분포적인 소밀, 그러니까 가우스곡선을 그려낼 것입니다. 문제는 남녀의 같고 다름을 하필 뇌만 가지고 논한다는 데 있습니다. 몸 전체와 그 몸이 생리적, 사회정치적 조건과 작용하는 사건인 마음 풍경을 모두 고려한 담론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극단적 이야기를 기획해내는 자들의 의도입니다. 다르다면 다르다고 한 대로, 같다면 같다고 한 대로 자본의 논리를 좇아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토건 의지를 저들은 언제나 교묘히 숨깁니다. 두 경우 모두 여성을 수탈 대상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다른 점을 신비화해서 매혹시키느냐, 같은 점 때문에 남성가부장의 변방에 놓느냐, 그 차이 뿐입니다. 물론 전통 주류의학에서는 후자의 전략을 취해왔습니다. 신비화를 경계하면서 성차를 분명하게 인지한 새로운 의학의 패러다임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2005년 한국성인지의학회가 창립되고 2010년 이화의료원이 성인지의학협진클리닉을 개설하였지만 아직 그 영향력은 미미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우울증을 포함한 마음병에서 성차 문제는 특히 중요합니다. 여성이 남성과 다른 몸으로 어떻게 다르게 살아가며 그것이 어떤 다른 마음 풍경을 빚는지, 잘고도 크게 그려낼 의학 담론이 긴절합니다. 주류의학 구조에서 산부인과의학이 정신의학을 결합하여 독자적 의학 담론을 만들거나, 거꾸로 정신의학이 산부인과의학을 결합하여 독자적 의학 담론을 만들 수는 없을 것입니다. 새로운 의학의 지평선을 열어야 합니다. 산부인과의학이라는 말 자체가 폭로하듯 지금의 주류의학은 남성의학을 보편의학으로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런 전제를 깨뜨리려면 전략적으로 ‘통합여성의학’이라는 용어를 쓸 필요도 있습니다. 남성의학의 하부단위가 아님과 동시에 여성의 심신을 통합적으로 이해한다는 뜻을 담은 것입니다.


『안녕, 우울증』은 146-151쪽에 걸쳐 월경, 임신, 출산, 육아, 완경에 관한 이야기를 비교적 소상히 다루었습니다. 한 젊은 여성이 이 부분을 읽고 미화처럼 느껴진다고 말했습니다. 공감합니다. 그렇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은 그만큼 이 문제에 대한 우리사회의 통속한 담론이 진실을 접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만 펴도 미화로 감지되니 말입니다. 오히려 저는 임신, 출산, 육아 경험을 하고 싶어도 못하거나, 하지 않기로 선택한 여성들에 대하여 언급하지 못한 것이 더 마음 쓰입니다. 이런 곡절 때문에 마음에 병을 얻어 상담하러 오시는 분들이 드물지 않습니다. 남성가부장적 주류의학의 감수성이 가 닿을 수 없는 변방에서 겪는 여성의 고통을 덜어줄 섬세하고 따스한 이야기를 천천히 서둘러 만들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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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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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성) 회복 문제, 그 고갱이로서 여성우울증 문제가 우리 시대의 긴절한 현안으로 떠오르는 까닭에는 한 번 더 접힌 논점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성이 모든 인간 생명의 근원이라는 사실에서 비롯합니다. 여성(성) 문제가 모성(성) 문제로 진화하는 지점이지요. 여성의 생명 자체와 그 생명 감각이 가장 치명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은 바로 여성이 잉태하고, 낳고, 키워내야 하는 미성숙기 생명이기 때문에 이 문제는 미래와 현재를 한꺼번에 쥐고 흔드는 중대한 사안입니다. 무엇보다 관건은 이들의 정신건강 여하입니다. 최근 들어 다양한 스펙트럼의 발달장애는 물론이고 어린이우울증, 청소년우울증 등이 그려내는 가파른 상승곡선은 깊은 우려를 자아내게 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 사회의 청소년우울증 문제는 매우 심각한 국면을 맞고 있습니다.·······아이들이·······더 힘들어하는 게 있습니다. 자신의 상황을 호소할 때 어른, 특히 어머니가 보이는 반응입니다.

  “뭐, 우울증? 이마에 피도 안 마른 게, 무슨…. 공부나 열심히 해!”

  말해 봐야 소용없다는 절망감이 아이들을 더욱 큰 고통으로 몰아넣습니다. 제 때, 제대로 치료를 받아도 어려울 텐데 이렇게 마음의 고통 자체가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의 상처는 더욱 깊어지게 마련입니다. 어른들한테서 자신의 고통 자체를 부정당한 아이들이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의지로 의사를 찾아간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상황에 있을 때 아이들이 느끼는 두려움과 좌절감이 문제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도 출구를 찾지 못할 때 아이들은 자신을 놓아버립니다. 게임을 비롯한 중독이 아이들을 급습하는 게 바로 그 시점입니다. 이런 데도 어른들은 아이들의 중독만을 욕합니다. 중독은 일탈이기에 앞서 포기이고 절망입니다.·······

  이 문제를 대할 때 다만 입시제도 따위를 원인으로 지목해서는 안 됩니다. 이 문제는 생명말살적인 남성가부장적 자본주의 문명 전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해결됩니다. 그 주의가 다름 아닌 여성(성), 더 분명하게 모성(성)의 복원이란 화두 들기입니다. 문명의 주체인 우리, 어른, 특히 어머니로서 여성 자신이, 병에서, 죽음에서, 깨어 일어나 아이들의 아픈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여성이 남성문명의 헤게모니에 매몰되어 스스로 여성(성)과 모성(성)을 놓치고 있는 현실을 직면해야 합니다. 여성이, 엄마가 우울증의 포로가 된 상황에서 어찌 아이들의 현실에 제대로 귀 기울일 수 있겠습니까. 엄마들은 자신이 피해자이자 가해자란 사실을 불에 덴 듯 각성해야 합니다. 지금 아이들이 우울증으로 죽어갑니다, 엄마를 살려주세요!(138-141쪽)


청소년 자살률이 세계1위인 나라가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모르지 않으면서 아무도 진지하게 입대지 않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고등학생 250명이 한꺼번에 침몰하는 배에 갇힌 채 죽어가는 광경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보았으면서 아무 것도 밝혀지지 않았는데 이제 그만 하자며 입 다무는 우리가 오늘 대한민국 시민입니다. 자살이라 표현하지만 사회적인 타살이 분명합니다. 사고라고 우기지만 국가가 고의로 일으킨 사건이 맞습니다. 그래서 서로서로 침묵하는 것입니다. 추악하고 비겁한 카르텔입니다. 어른들은 이렇게 아이들을 죽여가고 있습니다. 어른들의 맨 앞줄에 엄마들이 서 있습니다. 엄마들은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엄마들의 무지는 사회가, 국가가 만들어낸 어둠의 일부입니다. 사회국가적 어둠 속에서 제 새끼들을 죽일 때 엄마들은 스스로를 또한 죽이고 있습니다. 엄마들의 자살 역시 사회국가적 타살임은 물론입니다. 엄마들을 살려야 합니다. “엄마가 살아야 나라가 삽니다.” 허름해 보이는, 심지어 우스워 보이는 이 말 한 마디가 정녕코 수천만의 생사를 가릅니다.


아동기와 청소년기에 있는 두 딸을 둔 중년 여성이 있습니다. 그는 상담 중에 자기가 딸들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깨닫고 몹시 아파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심한 죄책감을 여러 차례 호소했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볼 때 상처 입힌 엄마의 마음으로만 보지 말고 상처 입은 아이들의 마음으로도 보라고 조언했습니다. 다음 주에 그가 와서 조언대로 했더니 아이들에게서 그 시절의 자기 자신을 볼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여전히 죄책감이 심했느냐고 제가 물었습니다. 그가 뽀얗게 웃으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습니다. 죄책감은 대부분 진정한 성찰에서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외부에서 근거 없이 들어와 굳어진 기준으로 가한 비판에 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처 입은 아이들 속에서 상처 입은 자신을 발견하자 그는 두 번째 큰 눈물을 쏟아내었습니다. “둘째 아이가 어렸을 때처럼 재워달라기에 자장가를 부르고 다독거려주었습니다. 다음 순간 둘째 아이가 그 조그만 손으로 제 등을 다독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행복했습니다.” 목하 그 아이들은 서로 다독거리면서 함께 치유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그의 친정어머니한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전형적인 ‘다 너 잘되라고 그런 거야!’ 어머니였습니다. 자애로운 모성 어법의 행간에 폭력과 억압이 쏴아 소리를 내며 흘러갔습니다. 어머니는 그 짧은 시간에도 반복해서 돈과 체면 중심의 가부장 윤리를 설파하며 딸의 병을 인정하고 좋은 치료를 의뢰한다기보다 잘못을 교정해주기를 당부하는 속내를 드러내 보였습니다. 돈 걱정 때문에 치료 안 받겠다 하거든 연락 달라며 전화번호를 불러준 뒤, 재삼재사 부탁하는 말을 끝으로 어머니는 수화기를 내려놓았습니다. 그가 제게 온 곡절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던 통화였습니다. 통화를 끝낸 다음 한참 동안 그 음성과 말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문장들로 이어져 있지만 우리사회의 모순과 부조리가 무르녹아 있어 거대한 어둠과 절망을 가득 품은 말들이었습니다. 거꾸로, 이런 말들은 불의한 권력과 사악한 자본을 키워내 온 찰진 자양분이기도 했습니다. 문제가 깊을수록 각성은 멀어지고 중독의 유혹이 밀착해오는 현실 앞에서 무명의 의자는 그저 율연해질 따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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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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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 바리공주를 아십니까? 바리공주는 제주도를 제외한 우리나라 전역에서 전승되어 내려온 고대 무가 설화의 주인공입니다. 딸만 일곱인 왕의 일곱째 딸로 태어났다가 버려져서 그 이름이 ‘바리데기’입니다. 자신을 버린 아비가 죽을병에 걸리자 아비를 살리기 위해 바리공주는 다시 한 번 스스로 버려 저승길로 갑니다. 결국 생명수를 구해 와 아비를 살리고 나중에는 죽은 자의 영혼을 하늘로 인도하는 구세주가 되었답니다. 버려진 존재이지만 결국 버린 자까지 구원하는 바리공주의 가없는 보듬기. 이는 여성이 지니는 공존과 포용의 생명 감각이 평상시에는 삶의 풍요로, 위기에는 구원의 힘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리공주 이야기는 심청전, 춘향전, 박씨전, 옥단춘전 등 수많은 이야기로 모습을 바꾸어 전승되면서 우리 가슴의 밑바닥에 깊은 울림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리공주는 이 땅 모든 여성을 대표하는 아이콘이 된 것입니다.

  설화의 세계에서 실제 역사의 세계로 건너오면 거기에는 황진이가 있습니다. 황진이는 바리공주의 화신입니다. 황진이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기녀의 신분으로 봉건적 양반 사회의 온갖 질서를 가로질러, 자신을 버린 자들의 가치를 훌쩍 뛰어넘습니다. 황진이의 거침없는 도발과 자유혼. 이는 여성이 지니는 도도한 생명 감각이 시대의 질곡을 풀고 새로운 지평을 창조하는 예술적 상상력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황진이에 이르러 여성의 생명력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메시지가 한층 더 미학적이고 극적인 면을 더합니다.

  바리공주와 황진이를 결합한 전형이 21세기가 맞은 총체적 위기 상황에서 우리에게 전하는 이런 감동적 메시지는 여성이 버림받은, 버림받는, 버림받을 존재라는 칼 같은 진실에서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여성이 장구한 남성문명 체제 속에서 그 존재를 스스로 부정하는, 자기모독의 무의식을 지니도록 강요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뼈에 사무치게 인정하지 않는 한 모든 노력은 한낱 물거품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이 문명 속에서 여성은 그 자체로 우울증입니다. 이를 받아들여야 비로소 이 문명을 극복하는, 아니 보듬어 안고 비상하는 대승이 나올 것입니다. 바리공주도 황진이도 결코 신선놀음 한 게 아닙니다!(136-137쪽)


  “나이 스물여섯, 자살이 아름다워 보이는 나이.”

  어제까지 웃는 표정의 가면을 쓰고 있던 소녀들이 화면의 절벽 밖으로 발을 디뎌버렸다. 그녀들을 둘러싼 웃음의 외피가 두꺼우면 두꺼울수록 그 안의 울음은 점점 더 낮게 잦아든다. 한때 그녀들의 이미지를 타전했던 매체들은 외친다. 그녀들을 세계 바깥으로 몰아낸 우울증을 치료하라! 우울증이 극단에 이르러 자살이라는 ‘행위로의 이행’이 이루어졌을 때, 그 사건에 기생하여 그것을 서사화하는 모든 매체들조차 치료의 미덕을 설교한다. 이것은 가장된 행복, 가장된 조증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관리술에 불과하다.

  현재 한국의 문화 향유자들이 즐겨 찾는 싸이월드의 미니 홈피나 각종 포털 사이트의 블로그에는 자신의 행복을 노출하려는 과장된 제스처가 넘쳐난다. 극단적인 이 조증mania은 집단적 광기mania와 다름없다. 명랑함과 조증은 나의 세계가 안전하다고 믿고 싶은 자아의 방어기제일 뿐이지 자아가 현실적으로 경험하고 지각하는 정서적 상태가 전혀 아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무기력한 수동성에 빠지지 않기 위한 관리의 제스처라 부를 만하다. 조증에 드리워진 우울증의 그림자.


허윤진 비평집 『5시 57분』에 실린 <춤추는 우울증>의 일부(128쪽)입니다. 우울증 치료라는 관리술을 엮음의 매개로 하는 조증과 우울증이 비대칭의 대칭을 이루고 있는 사회 풍경을 정확히 묘파한 장면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충분히 암시되어 있습니다. 다만 글의 전체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어제까지 웃는 표정의 가면을 쓰고 있던 소녀들이 화면의 절벽 밖으로 발을 디뎌버”린 까닭이 무엇인지에 관한 언급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 문제를 정색하고 제기해야만 합니다.


왜, 하필 스물여섯의 그녀들이란 말입니까? 그녀들은 그러면 어쩌다가 절벽 밖으로 발을 디뎌버렸단 말입니까?


사람을 조증, 그러니까 광기로 몰아가는 ‘투명사회’(한병철)의 지배 메커니즘은 그 몰아감에도 차별을 둡니다. ‘금 수저’를 모는 방법이 다르고 ‘흙 수저’를 모는 방법이 다릅니다. 수많은 종류의 ‘흙 수저’가 있으되 남성가부장적사회에서 그녀들은 당연히 ‘흙 수저’입니다. 아무리 ‘금 수저’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다시 그 안에서는 ‘흙 수저’입니다. 혹시 예외적으로 ‘금 수저’ 대우를 받는 자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 경우는 남성화 또는 버금 남성화된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거의 대부분 그녀들은 바리데기일 따름입니다. 그녀들은 존재 “그 자체로 우울증입니다.” 절벽 밖으로 발을 디뎌버릴 수밖에 달리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그것은 안 될 일입니다. ‘투명사회’는 호들갑을 떨면서 그녀들의 덜미를 낚아채어 치료에 투입합니다. 수탈할 것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 토건사업은 집요하게 되풀이되어야만 합니다. 조증으로 내몰리든 우울증으로 버려지든 그녀들에게는 근본적 차이가 없습니다. 목숨 다하는 그 순간까지 쌍끌이 수탈에 당하는 것이 운명입니다. 모진 운명의 사슬을 어찌하면 끊을 수 있을까요?


운명을 바꾸는 길은 그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서 출발합니다.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말은 순응하거나 체념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운명을 바르게 문제 삼아서 옹골차게 대응한다는 말입니다. 운명을 제대로 “받아들여야 비로소·······극복하는, 아니 보듬어 안고 비상하는 대승이 나올 것입니다.” 인간이 홀로 존재하지 않듯 운명 또한 개인 단위로 분획되어 있지 않습니다. 운명공동체라는 진부한 표현에는 결코 빛바래지지 않는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바리데기로서 그녀들의 운명에 나를 야무지게 깃들게 하여 슬픔의 생명연대에 참여하는 길 말고 다른 길은 없습니다.


슬픔의 생명연대는 그러므로 두 가지 결단을 요구합니다. 하나는, 낮은 삶을 선택하고 그 ‘욕됨’을 견디는 것입니다. 높은 삶 그 자체로 죄악인 대한민국 오늘에서 낮은 삶을 의롭다 해야 하겠지만 저들이 ‘근본 없는 것들’이라 업신여기니 그 업신여김을 달게 받는다는 것입니다. 둘은, 삶의 모든 국면에서 여러 겹, 여러 결의 공유가 일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물질은 물론 지식과 문화까지 광범위한 나눔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 둘 모두를 일찍이 실행에 옮긴 분이 다름 아닌 원효입니다. 원효를 그 삶으로 이끈 분이 다름 아닌 요석입니다. 요석과 원효 이야기는 김선우의 장편소설 『발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필독(강신주의 해제는 췌언이므로 제외)서입니다. 김선우가 그려낸 7세기 원효와 요석의 아미타림에 영혼을 디디고 21세기 우리는 각자 원효와 요석이 되어 바리공동체 꿈을 꾸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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