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28장 본문입니다.

 

子曰 愚而好自用 賤而好自專 生乎今之世 反古之道 如此者 及其身者也.

자왈 우이호자용 천이호자전 생호금지세 반고지도 여차자 재급기신자야. 

非天子 不議禮 不制度 不考文. 

비천자 불의례 부제도 불고문. 

天下 車同軌 書同文 行同倫.

금천하 거동궤 서동문 행동륜.

誰有其位 苟無其德 不敢作禮樂焉. 

수유기위 구무기덕 불감작예악언. 

誰有其德 苟無其位 亦不敢作禮樂焉. 

수유기덕 구무기위 역불감작예악언.

子曰吾說夏禮 杞不足徵也 吾學殷禮 有宋 存焉 吾學周禮 今用之 吾從周.

자왈오설하례 기부족징야 오학은례 유송 존언 오학주례 금용지 오종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으면서 자기가 쓰이기를 좋아하고, 천하면서 자기가 마음대로 하는 것을 좋아하며, 지금 세상에 태어나서 옛날의 도로 돌아가려고 하면 이와 같은 자는 재해가 그 몸에 미치는 것이다.” 천자가 아니면 예를 논하지 아니하고 법도를 제정하지 아니하며 문자를 고정하지 아니한다. 지금 천하의 수레는 궤가 같고 글은 문자가 같고 행위에서는 윤리가 같다. 비록 그 위치에 있으나 진실로 그에 맞는 덕이 없으면 감히 예악을 만들지 못한다. 비록 그에 맞는 덕이 있으나 진실로 그 위치에 있지 않으면 또한 감히 예악을 만들지 못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하夏의 예를 말할 수 있으나 기杞에서는 증거 삼을 수 없다. 내가 은殷의 예를 배웠으니 송宋은 그것을 보존하고 있다. 내가 주周의 예를 배웠으니 오늘날 그것을 쓰고 있기 때문에 나는 주를 따른다.”

 

2. 사리에 맞지 않는[우愚] 선택을 하고도 밀어붙이거나[용用], 백성의 눈높이를 좇아가지 못하면서도[천賤] 소통을 거부하거나[전專], 진화를 거듭하면서 달라진 오늘 상황[금지세今之世]에 눈감은 채 한사코 구시대 가치[고지도古之道]를 고집하는 권력자는 반드시 화를 당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보고 하는 말이기나 한 것처럼 섬뜩합니다. 주제넘고 독선적인 권력자에게 날린 직격탄입니다.

 

3. 국가 규범과 질서를 확립하고 공적인 문화 콘텐츠 기조를 짜는 일은 덕을 갖춘 주권자가 할 일입니다. 대의정치에서는 이런 일이 소수의 선택 받은 자에게 위임되며, 그 정점에 우리나라의 경우 대통령이 있습니다. 전제주의 시절 천자天子라 이름 한 절대 권력자든 오늘날 대통령이든 그 정상의 위치만으로는 이런 일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정당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것을 본문에서는 덕이라 합니다.

 

『중용』의 맥락에서 말하는 덕은 당연히 중용의 실천력일 것입니다. 중용은 쌍방향 소통으로 온 생명이 평등하고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게 하는 집단적 실천입니다. 그리고 그 중용의 깃발로서 천자도 대통령도 존재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중용에 반한다면 천자도 대통령도 무의미한 존재일 따름입니다. 그 무의미성은 위임의 철회로 현실화됩니다. 주권자가 직접 집단 중용을 빚어가기 시작했다면 상황은 매우 급박한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모른 채 재앙을 맞는 사례를 우리는 수없이 보아 왔습니다.

 

4. 하례夏禮든, 은례殷禮든, 주례周禮든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시중時中하여 오늘 쓰기[금용今用]에 합당한가, 따를만한가[종從], 그것이 판단 기준입니다. 오늘을 사는 백성의 의중과 상관없는 가치는 그것을 진리라 하든, 과학이라 하든, 국위라 하든, 특정 세력이 주려 끼고 우겨서는 안 됩니다. 따를 것이냐, 말 것이냐는 주권자가 결정할 문제입니다. 이미 그 부분에서 위임 한계를 일탈한 이상 위임받은 자는 권한이 정지될 수밖에 없습니다. 중용의 기수, 주권자의 대표단수인 공자가 잘라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 그것을 쓰고 있기 때문에 나는 주를 따른다[금용지오종주今用之 吾從周].”

 

5. 여기 주周는 이 땅의 깨어 있는 백성입니다. 그 주권자의 뜻입니다. 그 뜻을 거슬러 지배집단은 강정에 사실상 ‘미군기지’를 건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례, 그러니까 미국을 등에 업고 매판과 독재를 결합한 이승만의 뜻을 따른 것일까요?  그 뜻을 거슬러 지배집단은 군사조약을 맺어 일본군의 한반도 진입을 허용하려 협잡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은례, 그러니까 독립군을 토벌했던 박정희의 뜻을 따른 것일까요? 이런 일들이 가능해지도록 세월호사건을 일으키고 중동독감을 방치하고 역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을 10억 엔에 팔아먹은 것일까요?


 

참으로 부끄럽고 슬픕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매판 세력의 후손들이 권력과 재력을 독점하여 이 나라를 영원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준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겐 옛날 그 식민지 시대가 바로 황금시대일 터. 무조건 따라야 할 진리일 터. 반공 애국의 탈을 쓰고 지금도 현실을 비틀어 과거에 복종시키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결코 그대로 두고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실천은 자주·민주입니다. 숭미모일崇米慕日의 옛 질서는 혁파해야 합니다. 오늘은 오늘의 실천을 할 따름입니다. 그게 군자의 길, 곧 중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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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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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주의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다양한 과업, 정보 원천과 처리 과정 사이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것이 이러한 산만한 주의의 특징이다. 그것은 심심한 것에 대해 거의 참을성이 없는 까닭에 창조적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는 저 깊은 심심함도 허용하지 못한다.·······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이다.(32쪽)


5월 23일 아침 한겨레신문 김영훈 기자의 <생각 줍기>입니다.



인간의 탐욕을 극대화하는 유일 종교이자 이념인 자본주의는 이미 거북이의 등껍질을 떼어버리게 했고, 물고기를 뭍에 오르게 했습니다. 통시적이든 공시적이든 인간의 탐욕, 더 정확히 수탈 체계는 벌써 통제임계점을 넘어섰습니다. 분주하고 부산한 삶으로 대박치는 사람의 ‘자뻑’ 활동이 힘과 돈을 그러모아 천년왕국의 꿈을 이루어나가고 있습니다. 온갖 토건을 일으키며 분주히 돌아다닌 CEO 빙의 ‘지도자’ 뒤를 이어 수백 벌의 옷을 갈아입으며 부산스레 돌아다니는 교주 빙의 ‘지도자’가 목하 새로운 경제를 창조한다며 훤화하지만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하고,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입니다.


휴먼스피드를 넘어서고 휴먼스케일을 벗어나면 신의 경지에 이를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이르는 것은 신의 경지가 아닙니다. 신의 느낌입니다. 전능감입니다. 전능감은 안와전두엽이 망가져 자기성찰을 할 수 없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막무가내 자신감입니다. 위너가 지닌 맹독성 독선입니다. 위너의 독선은 기존 가치만을 재생하고 가속화함으로써 공동체 전체의 생명력을 고갈시킵니다. 공동체 전체를 살리려면 쪽박 찬 민중의 “깊은 심심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깊은 심심함의 시간은 느릿느릿 흘러갑니다. 깊은 심심함의 공간은 낮은 담장 아래 있습니다. “정신적 이완”의 삶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느릿느릿 낮은 담장 아래를 걸어서 육십갑자를 살았습니다. 대한민국 중산층 요건 여섯 가운데 단 하나도 충족시키지 못한 도정이었습니다. 거북이인 거북이로 등껍질 이고 가려 합니다. 물고기인 물고기로 뭍에 오르지 않고 살려 합니다. 이런 삶이 가져다주는 새로움, 경이로움을 알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쓰다듬어봅니다, 제 등껍질을. 가만히 손 흔들어봅니다, 제가 오르지 않은 뭍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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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7장 본문입니다.

 

大哉. 聖人之道. 洋洋乎發育萬物 峻極于天. 

대재. 성인지도. 양양호발육만물 준극우천. 

優優大哉. 禮儀三百 威儀三千 待其人而後行. 

우우대재. 예의삼백 위의삼천 대기인이후행. 

故 曰苟不至德 至道不凝焉. 

고 왈구부지덕 지도불응언. 

故 君子 尊德性而道問學 致廣大而盡精微 極高明而道中庸 溫故而知新 敦厚而崇禮.

고 군자 존덕성이도문학 치광대이진정미 극고명이도중용 온고이지신 돈후이숭례. 

是故 居上不驕 居下不倍. 國有道 其言 足以興 國無道 其默 足以容. 

시고 거상불교 거하불배. 국유도 기신 족이흥 국무도 기묵 족이용. 

詩曰 旣明且哲 以保其身 其此之謂與.

시왈 기명차철 이보기신 기차지위여.


크도다. 성인의 도여. 양양하게 만물을 발육하여 그 높음이 하늘에 닿았다. 넉넉하고 크도다. 예의 삼백 가지와 위의 삼천 가지가 그 사람을 기다린 후에 행해진다. 그러므로 “진실로 지극한 덕으로 하지 아니하면 지극한 도는 실행되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군자는 덕성을 높이고 문학을 말하며 광대함을 이루어 정미함을 다하고 고명함을 극도로 하여 중용을 실천하며 옛것을 익혀서 새것을 알며 돈후함으로써 예를 숭앙한다. 이 때문에 윗자리에 있어도 교만하지 아니하고 아랫자리에 있어도 배반하지 아니한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그 말로써 그 몸을 일으킬 수 있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그 침묵이 그 몸을 보존할 수 있다. 『시경』에서 말하기를 “이미 밝고 또한 어진 것으로써 그 몸을 보존한다.”고 하였으니 아마 이를 말하는 것이리라. 

 

2. 전체적으로 대구對句를 통해 속뜻을 전달하려는 형식을 취한 장입니다. 하지만 대구가 그리 치밀하지 않고 일관성을 잃은 듯한 메시지가 혼재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 많은 해석이 두루뭉술한 순접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해 대구의 속살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다소 무리가 있더라도 문맥에 일관된 흐름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3. 우선 성인의 도와 예의, 위의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마치 인仁과 예禮의 관계와 같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군자의 도는 이상형으로서 어떤 실체substance처럼 인식되고 예의, 위의는 실천 과정처럼 인식됩니다. 이는 후대 주희의 체용體用 대비와 맞물리는 것이겠지요. 옳고 그름을 떠나서 아무리 위대한 성인의 도라 할지라도 결국은 인간의 실천 없이는 결실을 맺지 못한다는 말을 하고자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4. 이런 빛에서 그 아래 문장을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덕성을 높이고 문학을 말하며 광대함을 이루어 정미함을 다하고 고명함을 극도로 하여 중용을 실천하며 옛것을 익혀서 새것을 알며 돈후함으로써 예를 숭앙한다故 君子 尊德性而道問學 致廣大而盡精微 極高明而道中庸 溫故而知新 敦厚而崇禮.”

 

하지만 어조사 이而를 앞뒤로 해서 배치된 말의 내용이 누가 봐도 상반된 것인데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순접으로 처리해서 대구를 통한 강조 의도를 무력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덕성이 존귀하게 되고, 넓고 큰 경지에 이르고, 높고 빛남이 극에 달하고, 이미 갖추어진 옛것을 익히고, 돈후한 것은 이상적이고 당위적인 경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묻고 배우며, 사소한 것까지 곡진히 살피며, 평범함에서 어긋나지 않으며, 새로운 것을 알아 나아가며, 예법을 지키는 것은 부단한 닦음, 깨어 있는 실천 감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인의 도란 찰나마다 치열한 실천 과정으로 증명되는 것이지 관념적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상반적 대구를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각각 이而 뒤에 오는 말이 더 중요합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이 말은 이미 온고溫故에 무게가 실린 채 그 의미가 정착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순접으로 읽은 데서 비롯한 오류입니다.

 

성인의 도가 과거 어느 시점에 이미 완성된 실체적 존재로 관념화, 박제화 되는 것을 경계하는 말이 바로 온고이지신입니다. 물론 순 임금과 같은 성인의 이상형이 실존했다는 전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순 임금은 순 임금 자신의 실천을 한 것뿐입니다. 그 예를 본받되 우리는 우리의 실천을 해야 합니다. 바로 그게 지신知新입니다. 바로 그 지신이 관건입니다. 성인은 각자 자신의 성인입니다!

 

그러므로 늘 묻고[문問] 배우고[학學] 사소한 것까지 곡진히 살피고[진정미盡精微] 평범함에서 어긋나지 않고[중용中庸] 세세한 예법 하나까지 지키는[숭례崇禮] 치열함을 잃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겸손이기도 하고 자긍이기도 합니다. 성인의 도를 적확하고 치열하게 실천하면서도 자랑하지 않으니 겸손이요, 비록 성인이란 자의식은 한사코 내려놓지만 당당하게 평범함에 깃드니 자긍입니다.

 

5. “윗자리에 있어도 교만하지 아니하고 아랫자리에 있어도 배반하지 아니한다[거상불교 거하불배居上不驕 居下不倍]”는 말이 바로 겸손과 자긍을 역설의 연금술로 달여 낸 것입니다. 다만 저는 배倍의 뜻을 달리 새깁니다. 윗사람의 교만과 아랫사람의 배반은 썩 어울리는 대칭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배倍는 비속하다, 더 나아가 비굴하다는 뜻을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교만과 대칭이 될 수 있습니다.

 

6. 국유도國有道 이하 문장 역시 종래의 읽기를 답습하면 전체 문맥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습니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그 말로써 그 몸을 일으킬 수 있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그 침묵이 그 몸을 보존할 수 있다. 『시경』에서 말하기를 ‘이미 밝고 또한 어진 것으로써 그 몸을 보존한다.’고 하였으니 아마 이를 말하는 것이리라國有道 其言 足以興 國無道 其默 足以容. 詩曰 旣明且哲 以保其身 其此之謂與.”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이리 읽으면 아무리 되새김질해도 제10장에서 말한 바, “나라에 도가 있으면 궁색하던 때의 절조를 변치 아니하니 그 강한 꿋꿋함이여! 나라에 도가 없으면 죽음에 이르러도 변치 아니하니 그 강한 꿋꿋함이여!國有道 不變塞焉 强哉矯 國無道 至死不變 强哉矯”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읽습니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드러내어 말함으로써 더욱 분발하게, 곧 흥興하게 하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알고 있음에도 덮어주어, 곧 용容하여 장차 바른 길로 나올 여지를 남겨둔다.”

 

이런 해석은 제6장에 나온 순 임금의 “악을 숨기고 선을 드러내는[은악이양선隱惡而揚善]” 실천과 일치하기 때문에 타당성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 문장이 제26장 말미에 오기에 적합하지 않아 보이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7. 과거 군인 출신 대통령들은 국민을 부하로 여겼습니다. 건설회사 CEO 출신 대통령은 국민을 비정규직 노동자로 여겼습니다. 현임 대통령은 국민을 무엇으로 여기는 지 궁금합니다. 아무리보아도 민주공화국의 주권자로 여기지 않는 것 같으니 말입니다. 아마도 신민臣民이거나 신도信徒 아닐는지요. 또는 둘의 결합이든지·······.


두루 알다시피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분명히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통령의 권력도 국민에게서 나왔습니다. 대통령이 권력의 정점에 있다고 해서 국민 위에 군림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통령은 공무원 집단의 우두머리일 따름입니다. 그럼에도 현임 대통령은 유체이탈 어법으로 국민을 가르치고 꾸짖습니다. 이는 헌법 제1조를 전혀 달리 해석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자신이 국민과 근본적으로 다른 부류의 사람, 그러니까 성인이라고 생각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자신의 행위가 국민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실천, 그러니까 중용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대체 어디서 이런 자신감이 나왔을까요? 궁금하지 않습니다. 질문이 오히려 물색없을 따름입니다. 마음 다해 발원發願합니다. 각자 대통령인, 아니 각자 국가인 국민이여, 부디 헌법 제1조 제2항을 되살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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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6장 세 번째(마지막) 문단입니다.

 

詩云維天之命 於穆不已 蓋曰天之所以爲天也 於乎不顯 文王之德之純 蓋曰文王之 所以爲文也 純亦不已.

시운유천지명 어목불이 개왈천지소이위천야 어호불현 문왕지덕지순 개왈문왕지 소이위문야 순역불이.


『시경』에 이르기를, “오직 하늘의 명은, 아아 충실하여 그침이 없도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하늘이 하늘 된 까닭을 말한 것이고, “아아 뚜렷하게 나타나지 아니하는가, 문왕의 덕의 순일함이여!”라고 하였으니 대개 문왕이 문文이 된 까닭을 말한 것이다. 순일하고 또한 그치지 아니함이다.  

 

2. 목穆의 뜻을 놓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누구는 미美다, 누구는 심원深遠이다, 누구는 충실充實이다, 제각각입니다. 그러나 문맥에 답이 있습니다. 이 문단 전체의 맥으로 보아 목穆도 순純도 불이不已로 귀착된다는 사실은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불이는 제26장 전체 문맥에서 불식不息 또는 무식無息과 같은 의미 군群을 형성합니다.

 

무엇이라 표현하든 온전한 도리는 그 자체로서 목적이며 과정이기 때문에 수단화되어서도 안 되고, 결과적 상징물로 모셔져도 안 된다는 원칙을 거듭해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본 문맥에서 그 온전한 도리는 지성至誠이며 다른 표현은 지성의 변주variation입니다. 결국 지성불식 유구무강至誠不息 愈久無疆의 빛 아래서 부분적 이해를 조절해야 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목은 지성의 범주와 동떨어질 수 없는 말입니다. 충실充實이란 뜻으로 읽는 게 비교적 타당하지만 그렇게 읽으면 그냥 성誠이라고 하지 않은 까닭이 선명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성은 성이되 사물의 이치를 가없이 맑게 드러내는 실천적 측면을 강조한 것으로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뒤에 문文 임금의 덕을 순純이라 한 것과 자연스럽게 어울립니다. 

 

3. 문文 임금 덕은 순수함입니다. 그의 정치적 실천은 하나하나 그 자체로 목적이므로 무슨 이득을 위한 수단이 아니어서 순수합니다. 백성과 온전히 소통하므로 그 기품이 투명하게 드러나서 순수합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 불이不已입니다.

 

4. 맑고[穆] 순수한[純] 소통이 끊임없이[不已] 넘실거리는 축제로서 세상, 그 대동 잔치를 우리는 2008년 경험한 바 있습니다. 촛불집회, 바로 그것. 구호와 재잘거림이 하나인 여고생이나, 아빠 등에 올라타고 방글대는 아가나, 소주 한 잔 하고 덩실거리는 중년 사내나, 스크럼 짜고 노래를 연방 불러대는 대학생이나, 유모차 밀면서 옆 사람과 수다 떠는 아줌마나 모두 맑고 순수한 연꽃송이였습니다. 그들이 문文이고, 그들이 천天이였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촛불은 시대의 모든 어둠으로 번져갔습니다. 강정. 영도. 평택. 명동. 밀양. 안산. 광화문. 맑고 순수하여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들의 촛불 행렬을 따라가면 언젠가 대한민국 자주·민주·통일의 바다에 다다를 것입니다. 이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숙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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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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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명령이 아니라 성과를 향한 압박이 탈진 우울증을 초래한다.(26-27쪽)


  긍정성의 과잉 상태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animal laborans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성과주체는·······자기 자신의 주인이자 주권자이다.·······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28-29쪽)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와 “주인이자 주권자이다.”는 상호모순입니다. 한병철은 알랭 에랭베르의 오류를 지적하면서는 주권을 부정합니다. 반대로 <규율사회의 피안에서>라는 소제목 아래 있는 글을 마무리하는 바로 다음 문단에서는 주권을 인정합니다. 이것은 한병철의 논리적 실패일까요? 그렇습니다. 그러면 둘 중 하나만 맞을까요? 아닙니다. 둘 다 맞습니다. 한병철은 자기 자신이 인지하지 못한 논리적 실패를 통해 결과적으로 진실의 전경을 드러내 보인 셈입니다.


동질적 긍정성의 시대를 노동하는 성과주체가 스스로 열었다면 모순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노동하지 않으면서 타인의 노동의 열매를 수탈하는 자들이 이 시대를 열었기 때문에 모순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질적 긍정성은 실체적 진실이라기보다 수탈자들이 동원한 전략적 이미지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미지로서 언어가 실재를 오염·타락시키는 상태입니다. 마치 현 정권이 원칙이라는 언어를 전유함으로써 원칙의 실재를 오염·타락시키는 것과 동일합니다.


동질적 긍정성은 동질적 긍정성이면서 동질적 긍정성이 아닙니다. 우울증 환자가 스스로를 착취함으로써 착취자와 피착취자가 일치하게 되는 역설보다 이 역설이 더 근본적입니다. 이 역설이 우울증 역설의 원인이자 해결의 열쇠입니다. 이 역설의 인식과 실천을 누락시키면 우울증은 개인 문제로 환원되고 맙니다. 우울증은 정치경제학적인 문제입니다. 우울증에 입대는 사람은 자신이 공적 참여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한병철의 글은 모호해 보입니다.


우울증을 치료하면서 가장 많이 부딪치는 문제 가운데 하나가 가족들의 몰이해입니다. 거의 예외 없이 귀책사유가 환자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족, 특히 부모의 미명으로 가해의 실재를 덮고 환자 스스로 우울증에 빠져들었다고 몰아버리거나, 설혹 가해 실재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과거를 붙들고 있는 것이 잘못이라고 다그칩니다. 일부러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면서 아이들이 철이 없어 못 나왔다고 말한 세월호사건 해경의 태도와 같습니다. 동질적 긍정성이란 교묘한 음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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