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일 아침 관악 큰 산이 동작동 국립묘지 쪽을 향해 기운 내려 생긴 작은 까치산을 넘어 출근한다. 워낙 나지막한 산이라 골도 야트막하다. 평소 물이 흐르지 않는다. 많은 비가 내려야 잠깐 개울을 이루었다 이내 땅 밑으로 스며들고 만다. 이 마른 개울 꼭대기에 마른 샘이 있다. 마를 때는 누군가가 그릇을 가져다 놓고 물을 부어주곤 한다. 처음에는 그 연유를 몰랐다. 나중에 보니 그 물그릇 속에 도롱뇽 알이 담겨 있었다. 


얼마 전 제법 큰 봄비가 내린 직후, 어느 틈에선지 샘물이 흘러나와 조그만 웅덩이가 형성되었다. 그 웅덩이에 도롱뇽 알이 품어져 있다. 도롱뇽이 그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남아 다시 알을 낳은 것인지 참으로 경이롭다. 도롱뇽의 생태를 모르는 내게는 경이를 넘어 기이하기까지 하다. 작은 생명이 발하는 큰 빛에 소름이 돋는다. 거대도시 서울 한복판에 숨듯 자리한 이 지성소 앞에서 한 갑자 훌쩍 넘긴 내 인생을 아연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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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0-05-23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 이거 정말 오랜만에 봅니다! 어릴때 참 많이 봤었는데! 추억에 젖네요!ㅎ 감사합니다!
 
유머란 무엇인가 - 농담과 유머의 사회심리학
테리 이글턴 지음, 손성화 옮김 / 문학사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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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테리 이글턴의 『유머란 무엇인가』 번역서 표지 하단에 이런 문장이 놓여 있다.


지금처럼 유머가 절실했던 시대는 없었다!



이것은 영문 원서의 문장과 전혀 무관하다.


IF TERRY EAGLETON DIDN’T EXIST, IT WOULD BE NECESSARY TO INVENT HIM.



SIMON CRITCHLEY의 말인데,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 구사할 만한 적절한 유머다. 번역서의 문장은 번역자나 출판사가 우리사회의 상황을 고려해서 만들었는가? 그렇다면 우리사회의 지금은 왜 어떻게 그 어느 때보다 더 유머가 절실한 시대인가? 너무나 진지한 것 치고는 절실함이 다가오지 않는 이상한 선언문장이다.


절실함을 찾으려면 번역서 권미 <추천의 말> 끄트머리에 나오는 “언어공격과 혐오발언이 난무하는 이 시대”라는 표현을 그 단서로 삼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것이 왜 하필 우리사회의 상황을 반영하는가 하는 데 있다. 그 표현 자체로는 답을 얻기 어렵다. 중립적·추상적 발언이어서 도리어 탈-상황을 초래한다. 문화적 식민지 상태에 있는 사회의 번역이 빠지는 거의 필연적인 함정이다. 마사 누스바움을 정색하고 읽는다.


왜 우스운지 말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며 왜 슬픈지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게다가 비극적 곤경과 달리 농담에는 친근한 맥락이, 공유된 어떤 배경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유머를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옮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정치적 감정』482-483)


언어공격과 혐오발언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절실한 유머가 요청하는 “친근한 맥락”과 “공유된 어떤 배경”은 무엇인가? 거꾸로 말하면 유머의 친근한 맥락과 공유된 배경을 구성하는 언어공격과 혐오발언의 구체적 실재는 무엇인가?


언어공격과 혐오발언이라는 언어 중심적 표현은 유머라는 주제를 염두에 둔 것이다. 언어 너머 사회적 행위·사건, 나아가 정치적 구조·체제에 가 닿아야 한다. 인문학너머 사회과학적 성찰과 상상력을 동원해야 친근한 맥락과 공유된 배경을 역동적으로 핍진하게 파악할 수 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언어공격과 혐오발언이 난무하는 시대를 열고 구가하는 주체가 누군가? 단도직입으로 말하면 매판수구 언론·정당·재벌·사법·종교·지식인 과두집단이다. 이 과두집단이 근현대사를 통해 무슨 짓을 해왔는지 소상하게 알지 못한다 해도 2014년 416 이후 2020년 415 직전까지 굵직한 기억만으로도 언어공격과 혐오발언이 왜 어떻게 누구를 향해 행해졌는지 알 수 있다.


힘세지만 찌질한 이 집단을 향해 던진 민중의 유머를 <415우스개> <415우스개-시즌2>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415우스개가 완성되려면 매판수구집단 다수파 구조를 온전히 종식시켜야 한다. <시사인>의 마지막 분석(시사인661호)은 그 변곡점 여부를 결정할 리트머스시험지로 이른바 한국판 뉴딜을 꼽고 있다. 이 뉴딜혁명이 약자를 위한 사회 재계약에 도달해 ‘리그 밖 사람들’의 역습을 막아야 성공한다고 본다.



<시사인>의 관점은 아무래도 성공한 루스벨트 뉴딜의 빛 아래 형성되었을 것이므로 그 나름의 한계를 지닌다. 한국사회가 지니는 특수성 때문에 내가 <시즌2>에서 기다렸던 분석이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로 미흡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매판수구 본진의 브레인인 조선일보프레임에 대한 큰 틀의 담론이 누락되어 있어서 <시사인>의 결론은 ‘아쉬운 동의’ 정도로 매겨둔다.


마사 누스바움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한다.


모든 사회는 사람들의 염원을 좌절시키지 않도록 공적인 슬픔을 잘 다루어야 하며, 동정심의 대상을 일부에서 전체로 적절히 확장시켜야 한다.”(같은 책 409)


루스벨트 뉴딜을 그는 비극 축제에 위치시킨다. 대공황이라는 재난, 그러니까 “공적인 슬픔”을 다루는 탁월한 모델이라는 판단 때문인 듯하다. 문재인 뉴딜 또한 416에서 코로나19에 이르는 재난, 그러니까 공적인 슬픔을 다루는 문제다. 슬픔을 다룰 때 우스개가 전혀 필요 없어서라기보다 우르개만이 일으킬 수 있는 고유한 ‘정치적 감정’ 때문에 <415우스개-시즌3>의 말미 마사 누스바움에 기대어 기어이 다시 비대칭의 대칭 이야기를 모신다. 하이 바이, 마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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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란 무엇인가 - 농담과 유머의 사회심리학
테리 이글턴 지음, 손성화 옮김 / 문학사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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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서구정신의학, 특히 미국정신의학협회가 만든 DSM 모델을 인정하지 않는다. 무려 20가지에 가까운 분류 기준에다 물경 400개에 가까운 병명을 나열한 DSM-5가 내게는 사이비종교 경전과 다름없어 보인다.


그들에게서 건너오는 환원적·분석적 지식과 정보를 읽고 참조는 하지만, 나는 독자적으로 정신장애를 정의하고 분류하며, 그에 의거 진단하고 치료한다. 내 분류 기준은 크게 둘이고, 둘 가운데 하나에 다시 작은 기준이 둘이다. 따라서 병은 세 종류, 다섯 개가 전부다.


병의 원인도 번다하지 않다.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비대칭의 대칭구조·운동인 생명을 폭력적으로 침습한 것이 모든 병의 원인이다. 폭력적 침습은 폭력적 분리와 폭력적 병합이다. 전자는 둘이어서는 안 되는데 둘로 쪼갠 것이다. 후자는 하나여서는 안 되는데 하나로 포갠 것이다.


진단은 이 쪼갬과 포갬을 소상히 살피는 일이다. 치료는 쪼갬과 포갬 때문에 훼손된 생명의 전체성, 그러니까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비대칭의 대칭구조·운동을 복원하는 것이다. 이 복원 행위가 바로 우스개며 우르개다.


(2) 조직적이지는 않지만 테리 이글턴을 좇아 우스개의 여러 면모를 살피는 동안 그것이 어떻게 우르개와 비대칭의 대칭을 이루는지 틈틈이 언급했다. 그 대강을 정리하면, 의미: 재미, 자유: 평등, 구축: 해체, 분리: 합일, 정신: 육체, 에너지(삶): 정보(앎), 일: 놀이, 감동: 동감, 구심: 원심, 통렬: 통쾌다. 특정 내용 중에 언급된 것은 수렴: 발산, 곡진: 허령, 색: 공이다.


마음병에 적용하면, 우울형 장애: 분열형 장애, 강박형 장애: 전환형 장애가 된다. 서구의학에서 말하는 좁은 의미의 우울증, 정신분열증, 강박장애, 전환장애와 각각 다른 범주적 표현이다. 특히 전환은 그 뜻 자체가 전혀 다르다. 이 넷은 공포·불안에 대한 병적 반응이므로 공포·불안 자체가 병이 되는 공포·불안형 장애와 비대칭의 대칭을 이룬다.


폭력적으로 쪼갬을 당해 생긴 병으로서 한사코 포개지려는 증상을 공시적으로 드러내면 우울형 장애, 통시적으로 드러내면 강박형 장애다. 폭력적으로 포갬을 당해 생긴 병으로서 한사코 쪼개지려는 증상을 공시적으로 드러내면 분열형 장애, 통시적으로 드러내면 전환형 장애다. 공시·통시는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니 결국 마음병은 셋과 다섯 사이를 요동한다.


(3) 우울형 장애를 예로 들어 진단·치료에서 우스개와 우르개, 그 감각을 어떻게 쓰는지 임상 경험을 토대로 말해본다.


전형적인 우울증 포함 다양한 우울형 장애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의 병을 알지 못한 상태로 찾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언행 자체가 그대로 증상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증상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치료자의 감각이며 능력이다. 무엇보다 아픈 사람이 마음을 열고 말하거나 울고 웃을 수 있도록 문턱을 없애는 일부터 해야 한다. 아픈 사람과 치료하는 사람 사이의 높낮이를 없애는 수평화, 이것이 우스개의 시작이다.


내 상담실은 너무 밝지 않은 부분 조명이 가능하게 되어 있다. 내 쪽을 더 밝게 하면 조금 더 어두운 쪽에 앉아 있는 아픈 사람이 덜 노출되므로 편안해진다. 두 사람이 마주앉는 책상 위는 전체적으로 정돈된 듯 보이지만 많은 물건들이 올망졸망 저마다의 방향을 잡고 널려 있어서 푼푼한 느낌을 준다. 날카로운 분석적 인상을 풍기는 왼쪽 얼굴보다 동네 아저씨 같이 푸근한 인상을 풍기는 오른쪽 얼굴이 아픈 사람을 향하도록 한다.


이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해도 아픈 사람은 동감에 든다. 조용한 우스개다. 여기서부터 아픈 사람은 말하고 울고 웃기 시작한다. 아픈 사람의 말, 웃음, 울음은 모두 접혀 있거나 구겨져 있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하는 말·부풀리는 말·비판이 가득한 말이 그렇다. 늘 웃다시피 하는 웃음·웃을 상황이 아닌데 툭 웃는 웃음·허허거리는 뒤끝 긴 웃음이 그렇다. 흐느끼는 울음·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는 울음·꺽꺽거리는 울음이 그렇다.


이 증상들에 깊이 침륜되어 있는 아픈 사람에게 사실을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치료자의 우선적 임무다. 연약한, 어찌 보면 한심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담히, 심지어 흔쾌히 끌어안게 하는 이 정보 전달은 매우 중요한 우스개다. 예컨대 흐느껴 우는 사람을 한참 지켜보다가 울고 나면 속이 후련한가, 묻는다.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듣고, 흐느낌 자체가 병의 한 증상임을 알려준다. 아, 그렇구나, 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나는 흐느끼다 말고 문득 어떤 깨달음과 조우한 아픈 사람에게 화장지를 통째로 안겨준다. 그리고 말한다. “엉엉 소리 내어 통곡하세요!” 바로 이때 리미널리티가 쏜살같이 날아든다. 아픈 사람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대성통곡의 문을 열어젖힌다. 나는 그 소리에 영혼을 적시며 고요히 기다린다. 더 부추기지도 않는다. 아픈 사람이 통곡을 멈출 무렵 축하의 말을 건넨다. 원 없이 통곡한 사람은 해시시 웃는다. 내 언행은 우르갠가 우스갠가?


울게 했으니 우르개 맞다. 통곡은 접힌 것을 펴는 예술적 표현이었으니 우스개 맞다. 원 없는 통곡은 해시시 웃는 웃음을 머금고 있었으니 역설적 중첩이다. 해시시 웃는 웃음은 또 다른 눈물을 머금고 있으니 중첩은 다시 중첩을 일으킨다. 또 다른 눈물은 앎이 삶으로 전화되는 물적 과정을 창조한다. 자기부정으로 소거되던 삶에서 자기인정의 경계를 그려가는, “경박한 동일시를 추방하는 그 다름(마사 누스바움)을 복원하는 본격 치료다.


우스개와 우르개는 서로를 가로질러 간다. 서로 포개지면서 쪼개지면서 무적의 무애를 빚어간다. 우울을 팡파르와 레퀴엠으로 노래하면서 장엄쥐뿔을 이루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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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란 무엇인가 - 농담과 유머의 사회심리학
테리 이글턴 지음, 손성화 옮김 / 문학사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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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라고 하는 엄청난 질문이 병자들을 돌보고, 굶주린 자들을 먹이는 세속적이고 일상적인 일로 내려오듯이, 카니발적 점강법은 기독교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다.(247쪽)


이 책의 마지막 장은 <유머의 정치학>이다. 마지막 장 마지막 부분에서 기독교 구원 이야기를 한다. 테리 이글턴이 쓴 『신을 옹호하다』를 읽었다면 뭐 그리 이상하게 생각할 것도 없다. 아니, 마르크스주의자로서 그의 사상을 생각한다면 자연스러운 연결로 여겨질 것이다. 그는 『신을 옹호하다』에서 구원, 예수, 하느님나라를 이렇게 묘사했다.


“구원은 정치적 사랑으로서 굶주린 사람의 배를 채워주고, 이민자들을 환대하며, 아픈 이들을 찾아가 돌보고, 부자들의 횡포에서 가난한 사람과 고아와 미망인을 보호하는, 일상적 관계의 질을 높이는 문제다.”


“예수는 가혹한 죽음으로서 삶을 완성해내는, 격렬한 사랑, 자기부정의 하느님 참 모습을 보여주는 유일한 형상이다. 그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인간쓰레기, 그러나 하느님나라에서는 주춧돌로 쓰일 사람들을 대표하는 존재로서 매 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 처형당한 정치범이다. 그는 죽음의 격한 공포를 겪으면서도 철저하게 자기를 버림으로써 병든 사람, 장애를 지닌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를 되찾아주는 혁명적 실천의 전형이다.”


“하느님나라는 정권의 교체로 이루어지는 무엇이 아니다. 죽음과 공허, 광기, 상실, 그리고 헛수고를 폭풍처럼 거치는 격동적 과정이다. 엉망진창으로 뒤틀려 있는 세상에서 자기를 버리는 행위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변화다.”


사실 여기에 무슨 말을 덧붙이는 것은 “카니발적 점강법”에도 “기독교의 핵심”에도 사족일 뿐이다. 이 얼마나 통쾌하며 또 얼마나 통렬한 사건인가. 이 얼마나 장엄한 우스개와 우르개의 화융인가. 테리 이글턴의 맨 마지막 말은 우스갤까 우르갤까?


하느님은 우리를 역경에서 구하기 위해 자신의 외아들을 보내는데, 우리는 그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그 외아들을 죽여버린다! 결례도 이런 끔찍한 결례가 없다.(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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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란 무엇인가 - 농담과 유머의 사회심리학
테리 이글턴 지음, 손성화 옮김 / 문학사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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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 유머와 유토피아 유머를 결합한 방식이 존재한다. 카니발이다.(236쪽)


카니발 담론은 양날의 칼이다. 변형된 자유, 유대, 평등 세계를 추구하기는 하지만, 그 세계를 달성하기 위해서 조롱하고, 풍자하고, 망가뜨린다. 따라서 카니발의 비판적 기능과 긍정의 기능은 한 몸이 된다.(237쪽)


미하일 바흐친에 따라 카니발이 지니는 비대칭의 대칭을 한참 전개하다가 어느 순간, 테리 이글턴은 정색하고 멈춰 선다. “바흐친의 과도한 찬가에서 어떤 이상화의 낌새를 감지”(244쪽)하고, 점검에 나선다.


가장 먼저 그가 제기한 문제는 “카니발은 어쩐지 비극을 추방해버린 세계처럼 보인다.”(244쪽)는 것이다. 유토피아 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지적이다. 자연스럽게 “픽션화된 형태의 반란일 수는 있으나, 그처럼 체제전복적인 에너지의 안전판 역할을 하기도 한다는 점”(245쪽)으로 이어간다. 동의한다.


찰스 아이젠스타인의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리뷰 <28. 문명의 위기와 재난공동체>(2018. 7. 16)에서 인용한 이문재 시인의 <대재난을 응시하라>(2013.10.9. 경향신문) 일부를 다시 읽어본다.


“지구의 전부, 문명의 전 과정이 올라오는 식탁에서 인류의 미래를 염려하다가 ‘지푸라기’ 하나를 발견했다. 레베카 솔닛의 탐사보고서 <이 폐허를 응시하라>. 솔닛은 대지진, 대공습, 테러 등 재난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우애와 환대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는지를 입체적으로 관찰한다. 소수 권력자나 대중매체는 재난 속에서 인간은 야만으로 돌변한다고 강변하지만, 정작 시민들은 지옥 속에서 ‘꽃’을 피워낸다. 이타주의, 연대, 즉흥성, 창의성이 어우러진 자율적 공동체를 조직한다는 것이다. 솔닛은 “재난은 지옥을 통과해 도달하는 낙원”이라고 말한다.·······


솔닛의 ‘지옥 속의 유토피아’는 그것이 예고 없이 형성되고, 또 지속적이지 못하다는 단점을 갖고 있다. 솔닛은 멕시코 남동부 산악지대에서 재난 공동체의 영구화 시도를 발견한다. 멕시코 오지 사파티스타 마을 입구에는 이런 푯말이 붙어 있다. “이곳에서는 민중이 통치하고, 정부가 복종한다.” 대재앙이 우리 앞에 있다. 자연재해를 막을 수는 없다. 100% 안전한 원전도 보장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지속가능한 재난 공동체가 ‘마지막 비상구’ 중 하나일 것이다. 지옥에서 인간 본성을 다시 만나고, 국가의 맨얼굴과도 마주치게 될 것이다.”


만일 시인이 2014년 4월 16일 이후 우리사회에 일어났던 일련의 일들을 겪고 나서 요즘에 썼다면 어땠을까. 416학살과 그 재난으로 태어난 공동체, 박근혜 파면을 이끌어낸 촛불혁명, 2016년 총선에서 시작되어 마침내 2020년 총선이 분명히 드러낸 이탈과 전향의 징후, 이 과정을 꿰뚫는 518공동체의 필연적·지속적 물질 아우라를 포착하지 않았을까.


이 물질 아우라는 카니발리즘이 휘감은 카니발에서 나올 수 없다. 이것은 리미널리티(빅터 터너)가 불붙인 커뮤니타스(빅터 터너)에서 나온다. 커뮤니타스는 비극을 추방하지 않는다. 물론, 비극을 추종하지도 않는다. 비극을 삶의 한복판에서 끌어안고 그 지옥을 가로지르며 욼음으로 유토피아를 일궈낸다. 우스개와 우르개가 비대칭의 대칭성을 펼쳐가는 이 우아·숭고야말로 장엄을 전미래적으로 선취하는 한맛이다. 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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