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집 말고 삶의 집을 짓고 있다는 소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식물의 사유 - 식물 존재에 관한 두 철학자의 대화
루스 이리가레.마이클 마더 지음, 이명호.김지은 옮김 / 알렙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더: 식물 신체는 식물의 영혼이 자신을 작동시키는 장소가 아니라 비파괴적인 생명 에너지가 흐르는 관입니다. 이 에너지는 다른 식물, 동물, 인간 존재들도 공유할 수 있도록 허용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의 윤리적 범주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습관적으로 일축해버리는 순수 도구(매체나 채널로 읽음)는 가상의 목적 그 자체보다 생명윤리에 더 부합합니다.(288)


앞선 글에서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식물은 도구가 아니다.” 이때 도구란 목적에 복무하는 수단을 뜻한다. 마더의 순수 도구는 전혀 다르다. “가상의 목적 그 자체보다 생명윤리에 더 부합한다는 진술을 뾰족하게 다듬으면 허구일 뿐인 목적을 제거하는 것이 생명윤리에 더 부합한다, . 목적을 제거했을 때, “비파괴적인 생명 에너지가 흐르는 관으로서 식물 신체는 순수 도구. 도구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통로이기 때문이고, 순수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 말고 다른 무엇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 신체도 관이다. 통로다. 생명 에너지가 흘러들어와 흘러나간다. 생명 운동은 네트워킹이다. 인간이 타락한 정신으로 이 진리를 왜곡했다. 소유와 축적이라는 목적 관념, 단도직입으로 말하면 돈에 대한 지배블록의 범죄적 합의가 생명 세계 전체를 이렇게 망쳤다. 이리가레와 마더가 식물의 사유를 화두 삼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할 일은 단 하나뿐이다. 식물 신체의 원리를 받아들여 에너지를 흐르고 돌아 번져가게 만드는 것. 에너지는 번져서 평등하게 크는 것이지 쌓아서 그리 되지 않으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식물의 사유 - 식물 존재에 관한 두 철학자의 대화
루스 이리가레.마이클 마더 지음, 이명호.김지은 옮김 / 알렙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리가레: 자연적 속성으로 돌아가 자연이 주는 생명 에너지를 회복하고 그 에너지를 다르게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는 한, 우리는 새로운 인간 존재로 이행할 수 없습니다........하지만 우리에게는 성욕이 일깨운 에너지에 관한 지침이 부족합니다........우리 전통은 성욕이 깨어나는 것에 관해서는 말할 수 있지만 육체적 사랑을 인간적으로 충족시키고 공유하는 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성을 성취하는 데 가장 핵심적 요인이지만, 대부분의 동양적 전통들조차 성욕의 차원을 경시합니다.......우리의 성적 속성과 그것의 공유를 키우고 가꾸는 일은 우리의 생명 에너지 경제를 찾기 위해 계속 추구해야 하는 과제라고 생각합니다.(128~129)


마더: 열매는 식물의 목적입니다. 따라서 열매는 식물 생명의 충족입니다. 사정은 성행위의 오르가즘적 목적입니다. 따라서 사정은 욕망의 충족입니다. 그러나 목적에 복무하지 않는 에너지, 최종 생산물의 에너지원이 되지 않으면서 내게서 혹은 나와 남들의 번영에서 충족을 찾는 에너지라면 어떨까요? 식물들을 소비하려는 욕구 바깥에서 식물들과 더불어 있는 것은 목적 없는 충족이 아닐까요?.......생명은 물리적 종점에서 충족되지 않고 타자들과 더불어 살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경험되는 에너지의 충만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다른 에너지를 명명할 필요가 있다면 만남 에너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만남은 에너지를 추출하기 위해 연소시킬 물체나 물질에 대한 작용이 아닙니다........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을 때, 내가 만나는 타자를 진정 필요로 여기지 않을 때, 만나는 존재에게서 무엇을 얻을지 내가 나 자신과 다투지 않을 때, 오직 그럴 때만 만남은 일어납니다........만남의 에너지는 생산적 파괴의 회로 안에서 작동하는 냉혹한 경제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남는 것이며 더해지는 것일 뿐 아니라.......자신이 더해지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만남 에너지는 경제적 틀을 초과한 저 너머의 무엇입니다.(283~284)

 

이리가레와 마더가 주고받은 편지는 여기서도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얘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구태여 감추려 하지 않는다. 독자 입장에서 이런 질문을 하면 다리가 놓아지려나. “인간의 육체적 사랑은 만남의 에너지를 일으키는 양태 또는 전달하는 매체인가?” 두 사람은 식물 세계 에너지와 인간의 육체적 사랑, 이 두 문제에서 각각 장군과 멍군을 주고받는다.

 

마더에 따르면 식물 에너지는 인간 에너지와 다르다. 그것은 만남 에너지다. 추출, 파괴 양태로 획득하지 않는다. 전달, 확산의 방법으로 사용한다. 육체적 사랑이 인간성을 성취하는 핵심 요인이라는 통찰을 마더의 만남 에너지에 적용했더라면 이리가레는 에너지 성격과 사용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달리 사용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심지어 에너지 경제를 추구한다.


이리가레에 따르면 인간의 육체적 사랑은 인간성을 성취하는 핵심 요인이다. 옹골찬 성차화의 원인이자 결과로서 당연하다. 식물 에너지가 만남 에너지라는 통찰을 이리가레의 성차화에 적용했더라면 마더는 육체적 사랑을 만남 에너지를 일으키는 양태 또는 전달하는 매체로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정을 언급함으로써 이리가레의 육체적 사랑을 오해의 사정권 안에 배치한다.

 

적어도 식물세계가 건네준 생명력으로 충만해진 인간의 육체적 사랑이라면 기존 인간 세계의 에너지와 동일한 것을 일으키거나 전달할 수 없다. 일방적이든 쌍방적이든 파괴하지도 추출하지도 소유하지도 축적하지도 않는다. 어떤 목적에 복무하는 수단일 수 없다. 누가 누구를 필요로 하지도 않고,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얻어가지도 않는다.

 

이리가레가 식물의 만남 에너지의 결을 지각하고 충만해짐으로써 명징하게 드러냈어야 할, 마더가 성차화를 살갑게 지각하고 흔쾌히 만남의 에너지 장으로 해석했어야 할 인간의 육체적 사랑은 타자와 더불어 살고 성장하는 과정의 진수다. 경제의 틀을 초과한 저 너머의 무엇이다. “식물과 더불어 식물을 경유한”(285) 이 새로운 육체의 사랑으로만 새로운 인간 존재로 이행할 수있다.

 

새로운 육체의 사랑을 통해 이행한 새로운 인간 존재의 모습과 풍경을 스케치해보자. 사랑하는 사람 각자는 향락적 퇴폐적 육욕과 학대에서 자유로울 만큼 충분히 독립되어 있다. 각자 자신을 위해 열심히 삶으로써 서로를 이롭게 한다. 천천히 가는 연인을 기꺼이 기다려준다. 약점 때문에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루는 삶은 적절한 빈틈이 있다. (우종영의 사유를 원용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식물의 사유 - 식물 존재에 관한 두 철학자의 대화
루스 이리가레.마이클 마더 지음, 이명호.김지은 옮김 / 알렙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리가레: 어떤 면에서 시바는 우리에게 숲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힌두 신입니다. 그는 특히 명상, , 사랑을 통해 자신의 개별성에 도달하기 위해 숲에 머뭅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성취하기 위해 식물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그의 운명은 자기 자신의 형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생명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식물이 되기 위해 식물 존재를 모방하거나 전용하기 위해 식물과 공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니체 식 가르침을 빌리자면 그는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식물과 공존합니다.

  시바는 식물 세계와 소극적 교감만 나누는 데 만족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에너지를 적극적으로 키우고 그 에너지가 적절히 구현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그 에너지가 얼어붙거나 불타지 않도록 하여 에너지가 척박하거나 파괴적이 되지 않게 하고, 그의 살아 있는 에너지가 미래의 생성에 활용될 수 있게 하는 데 어울리는 동반자가 필요합니다.(121~122)

 

마더: 혼자 있으면서 혼자 있지 않다는 느낌은.......더불어 성장하면서 이산한다는 생각으로 돌아갑니다.........이런 중간 상태는 세계와 융합되는 대양적 느낌과 유아론의 대안으로서 성장 운동에 참여합니다. 중간 상태는 타자와 더불어 있으면서 또한 더불어 있지 않습니다. 아니 타자와 더불어 있지 않음으로써 더불어 있습니다.(275~276)

 

내가 숲에서 만난 다른 사람과 나는 우리의 만남이 일어났던 숲 덕분에 만났습니다. 이 만남의 결과로 우리 각자는 조금 더 인간이 되었습니까? 우리가 스쳐간 그 짧은 순간에 우리 사이에는 암묵적 연대가 있었습니다. 그 연대는 서로를 향한 직접적 헌신의 형태가 아니라 식물 세계에 대한 책임의 형태를 띠고 있었습니다. 만남의 침묵은 식물 생명의 침묵을 반향하고 있습니다. 그 침묵은 우리 서로와 식물을 향한 존중의 기호였습니다. 우리 두 사람의 침묵이 공명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침묵이 식물의 침묵에 공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278~279)

 

개별성을 기축으로 한 이리가레의 어조는 단호하고 높직하다. 운명을 성취하기 위해 인간은 적극적으로 교감하고 구현한다. 이때 숲은 무슨 작용을 어떻게 하는가? 이리가레는 여전히 말하지 않는다. 중간 상태를 기축으로 하는 마더의 어조는 모호하고 나직하다. 인간의 연대는 암묵적이다. 숲의 침묵을 반향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침묵은 공명한다. 그 침묵이 식물의 침묵에 공명하기 때문이다.

 

이리가레가 숲의 작용을 말하지 않는 것과 마더가 숲의 침묵을 말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같은가? 숲의 침묵이 아무런 작용도 아니라고 전제할 때는 그렇다. 숲의 침묵이 아무 작용도 아니라면 구태여 숲이어야 할 이유는 뭔가. 숲의 침묵은 사막의 침묵과 다르다. 모든 푸나무는 각기 고유한 생체진동수를 지니며, 그들이 어울린 숲은 무한히 다양한 전자기장을 형성한다. 여기서 나오는 신호 화학, 소통 물리학과 상호작용하며 살아온 시간이 인간 진화 경험의 99.5%인데, 0.5%의 문명사가 인간의 바이오필리아를 맹렬히 둔화시킨 탓에 느끼고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뿐이다. 숲의 작용과 인간의 감응에 대한 논의가 도구와 효능의 땅을 선뜻 떠나지 못하고 떠도는 까닭이 바로 여기 있다.

 

숲은 도구가 아니다. 숲은 효능 따라 이용하는 대상이 아니다. 숲은 인간 존재의 근간이며 시원이다. 오감과 육감을 열어 섬세하고 온전하게 느끼도록 극진히 애써야 하는 살아 있는 생명 네트워킹이다. 숲이야말로 인간의 숭고하고 우아한 삶을 더불어 펼쳐야 할 파트너다. 그와 동시에 인간이 인간만의 특성으로 빚어야 할 장엄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영성의 본진이다. 이 경계에서 나와 숲은 더불어 연대하는 다른 인간, 또는 성차화된 동반자를 창조한다.

 

그 창조는 내가 스스로 생명의 기존 거점을 지울 때 일어나는 새로운 생명의 무한 확산으로 먼저 빚어진다. 증득한 역설 잠재태다. 구가는 그 뒤에 온다. 현실태로서 성차화된 동반자는 다양한 결을 지니고 찾아온다. 숲을 모방하거나 전용한 것이 아니다. 숲과 만남으로써 인간 생명 주파수의 정확하고도 예술적인 발현이 각성된 것이다. 성차화가 단순하거나 통속하지 않다는 사실은 식물 세계의 그것이 그러하다는 사실의 반향이다. 이 문제의식은 인간에게 아직 그리 본격적으로 열리지 않았다. 숲속에서 만나는 다른 인간을 얼마나 어떻게 감지하고 경험하느냐에 따라 그 속도와 폭이 달라질 것이다.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경이로운 세계가 기다릴 텐데 정작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시간이 없다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식물의 사유 - 식물 존재에 관한 두 철학자의 대화
루스 이리가레.마이클 마더 지음, 이명호.김지은 옮김 / 알렙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리가레: 우리의 자연 정체성에 충실한 사회적 조직을 짜고 그 정체성을 개별화하고 키우는 일에 기여하는 작업은 오늘날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생명에 본질적인 자연 환경을 돌보는 일뿐만 아니라, 우리가 인간으로서 발전시켜야 할 사회적 환경을 조성하는 일에도 소홀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어떻게 인간 동반자를 찾을 수 있을까요?

  나는 학자들, 시인들 그리고 문학 전반의 독서에서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그런데.......기쁨을 얻거나 위안을 받은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기쁨과 위안이 일어날 때는.......자연 환경에서였고 또 자연에 대한 사랑의 공유와 함께 할 때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숲이나 산에서 내 탐구를 추구하기로 결심했습니다.(113~115)

 

마더: 살아 있는 신체가 안으로 자란다는 것은 매우 병리적인 현상입니다........비유적으로 표현하면 우리는 사는 것이 아니라 곪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구 전역에 걸쳐 세대를 망라하여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는 집단 화농의 통탄할 만한 결과를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환경 위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자신을 회복하려면 밖으로 자라고 이상성장하는 법을 배워 우리 자신을 더 잘 잃어야 합니다. 그것은 땅에 뿌리를 내리면서 비인간 타자들과 더불어 자라는 법을 아는 일입니다. 이 공부를 할 수 있는 최상의 장소는 숲입니다........ 더불어 자라는 것.......은 전체로 묶이지 않는 다자들의 내재 분열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산하지 않는 더불어-성장은 없습니다. 이것이 식물민주주의 공리입니다.(264~268)

 

인간이 검증 않고 지니는 참으로 이상한 종자 믿음이 몇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이상한 것은 바로 나는 내가 가장 잘 안다고 철석같이 믿는 것이다. 심지어 이 사실을 인지조차 못하고 있다. 오신한 채로 한 평생을 살다 죽는다. 나의 내부가 있으며 그 내부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나한테만 있다고 오해하기 때문이다. 그런 내부는 존재하지 않으며 설사 있다 하더라도 그걸 인식할 수 있는 능력 또한 내 능력이 아니다. 나와 내 능력이란 개념은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개별 인간이 가로채 전유한 것이다. 이 존재론적 타락을 외면하고 불교의 이른바 큰스님이라는 화상들이 걸핏하면 참 나를 찾으라고 을러대지만 그런 식으로 찾아지는 참 나는 참 나가 아니다. 아니래도. 아니라니까. 참 나~

 

참 나는 있지도 않는 나의 내부에서 찾을 것이 아니다. 참 나는 너에게서 찾아야 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너와 맺는 관계가 참 나다. 관계는 사건이다. 그 사건은 피부 표면에서 일어난다. 피부 표면이야말로 가장 깊은 곳이다. 피부 사건이 참 나다. 피부 사건을 일으키는 너는 다른 사람이다. 사람 이전에 동물이다. 동물 이전에 식물이다. 식물이야말로 참 나 사건을 일으키는 근원의 너다. 근원의 너는 모습으로 빛깔로 냄새로 소리로 맛으로 느낌으로 알아차림으로 받아들임으로 나를 관통한다. 네가 나를 관통하는 찰나마다 나는 나를 잃는다. 나를 잃어 참 나를 얻는다. 찰나마다 죽어서 찰나마다 새로이 태어나는 참 나는 더불어 일으키는 사건의 불연속적 연속이며, 비연장적 연장이다. 그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