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블루 in 그린세러피

 

 

코로나19가 뒤집어엎고 있는 세계는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예측불가입니다. 소시민, 특히 조직에 속하지 않고 개인 힘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삶이 뿌리째 뽑혀나갑니다. 오늘의 질곡보다 내일의 속수무책이 더 아뜩하게 느껴집니다. 변방 개원의인 저 또한 추호도 예외 아닌 상황에 속절없이 무릎 꿇은 채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코로나19환자 치료는커녕 가벼운 통증 환자의 발길조차 끊어지고 있습니다. 이 와중, 코로나블루라 이름 할 수밖에 없는 병을 앓는 분이 찾아와 상담과 약으로 치료하고 있습니다. 오늘을 견디면서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최소한의 말을 남겨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입니다. 어제와 내일을 조촐히 초대하면서


0. 코로나블루가 왔다

 

~ 코로나블루가 코로나19보다 더 무섭구나!” 지난 11월 말쯤 트위터에서 본 글입니다. 전후 문장이 없어 맥락 파악은 불가능하지만 코로나블루를 쉽게 여겼던 선입견의 전복을 표현한 것 아닐까 하는 짐작이 가능합니다. 사실 그 동안 우울증 자체를 쉽게 입에 올리고 쉽게 여기는 것이 사회풍조였습니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다.” 대표적인 bullshit입니다. 초국적 제약회사 마케팅의 소산임은 물론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자살로 치달아가는 다른 무서운 병이 이 말고 더 있습니까. 블루라는 표현이 주는 낭만적 느낌과 무관하게 코로나블루든 무슨 블루든 우울증은 무서운 병입니다. 블루인 사람이든 아닌 사람이든 같은 경각심이 필요합니다.

 

경각심의 주체는 개인만이 아닙니다. 코로나블루를 견인하고 있는 것이 코로나19 팬데믹이기 때문입니다. 국민국가 단위는 물론 문명공동체로서 인류 전체가 공공적 경각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불의의 습격 같지만 필연적 과정을 거쳐 우울증은 인간의 근본 의제로 상정되었습니다. 코로나블루라는 우연적 비의학적 명칭은 인류 질병역사에 길이 남음과 아울러 머지않아 보통명사로 자리 잡을 것입니다. 이 사태를 관통하고 있는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근본적이고도 급진적인 개벽의 카이로스로 전화해내야 합니다. 개벽은 거창한 혁명이 아닙니다. 재난의 불평등을 뒤집어쓰고 미끄러져 내려가는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조용한 행진입니다.

 

코로나19는 현실적으로 동네 개인진료소에서 직면할 사안이 아닙니다. 코로나블루는 원인을 포함한 발병 조건이 코로나19라는 사실만 빼면 일반 블루, 즉 우울증과 다를 리가 없으므로 세밀하고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저는 40년 동안 상담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15년 전부터는 정신장애, 특히 우울증을 상담으로 치료하는 임상의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뼈아픈 실수도 많았고 죄책감에 빠져 허우적거려야 했던 실패도 많았지만 실수와 실패의 시간이 그냥 날아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감격에 겨운 다른 시간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 경험과 깨달음에 기대 코로나블루를 초군초군 다시 들여다보고 치유 길을 찾아보기로 하겠습니다


블루 in 그린은 불멸의 재즈곡 blue in green』(마일스 데이비스, 빌 에반스)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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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사유 - 식물 존재에 관한 두 철학자의 대화
루스 이리가레.마이클 마더 지음, 이명호.김지은 옮김 / 알렙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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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파노 만쿠소가 이런 요지의 말을 했다.

 

동물은 외부 자극의 종류가 다양함에도 언제나 동일한 솔루션을 이용해 응급상황에 맞선다. 이 대응이 바로 이동이다. 이동은 해결책이 아니라 난관을 회피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식물에게 중요한 것은 효율적인 문제 해결책을 찾는 것이다. 더위나 추위, 혹은 천적의 출현에도 불구하고그 자리에서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다양하게 변화하는 상황에 직면해 지속적으로 솔루션을 혁신한다.”(식물 혁명(146~147))

 

사실 그 동안 나 역시 동물의 이동을 회피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식물의 해결책도 능동적 혁신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한 소식 접하면 망집이 궤멸된다. 한 생각 돌이키면 세상이 전복된다. 인간이 일으킨 거대한 전쟁은 말할 것도 없고 찬란한 문명도 눈부신 과학도 숭고한 윤리도 본질은 도망질이었다. 한 자리에 뿌리 내려 살기로 한, 무참히 밟히고 꺾이고 베어짐에 적응하기로 한 선택은 지구 바이오매스 거의 전부를 차지한 식물의 적극 행동이었다.

 

식물 혁명에 따르면 식물의 생명 성취는 상호 필수불가결한 기축으로 구동된다. 분산(분권) 시스템, 군집 지능(집단 지성), 공동체 네트워킹의 셋이다. “초록민주주의”(137). 이는 원효를 좇으며 내가 40여 년에 걸쳐 구성해온 사상체계의 핵심과 일치한다. 놀랍지 않다. 정말 놀라운 것은 식물 세계가 이미 도달한 자연Sein을 인간 세계는 아직 당위Sollen로 추구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도망질을 딱 멈추고 전방위·전천후로 식물에 귀의해야 한다.

 

식물에 귀의해 인간은 그 무엇보다 이 요구가 특이 시점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각성부터 한다. 인간의 광적 도망질이 빚어낸 지구생태 위기가 매순간을 종말론적 카이로스로 자리매김 하기 때문이다. 각성은 지구 전체에 동시적으로 일어나, 평등하고 평화롭고 평범한 분권 연방체 구성, 평등하고 평화롭고 평범한 생명 간의 상호소통으로 수승한 집단 지성 생성, 평등하고 평화롭고 평범한 150인 공동체 200만 개 이상의 네트워킹 가동으로 번져간다. 헛꿈 아니다.

 

인류는 목하 코로나19 팬데믹을 겪고 있다. 어찌 감염만 순식간에 지구 전체로 확산되겠나. 위기를 실감한 인류는 동시에 수십억 장의 마스크로 코와 입을 가리지 않았나. 지구생태 위기에 대한 식물 생명적 각성에서 비롯하는 일련의 운동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대대적 사막화가 문명폭발의 뇌관이 되었듯, 지구적 전염병은 문명개벽의 도화선이 될 것이다. 이 개벽은 인간 텍스트에 터한 인간 혁명이 아니다. 이 개벽은 식물 텍스트에 터한 식물 혁명이다.

 

식물 혁명은 Revolution not through but by vegetal being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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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사유 - 식물 존재에 관한 두 철학자의 대화
루스 이리가레.마이클 마더 지음, 이명호.김지은 옮김 / 알렙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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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가레: 나는 책 제목을.......식물 존재를 통하여through로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내게 통하여는 맑은 공기를 가져다주는 식물 덕분에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 식물은 다소간 우리 자신의 생성 단계에 해당한다는 것, 식물은.......우리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있는 그대로.......고려하는 세계를 향해 나아가게 해주는 환경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160~161)

 

마더: 식물의 세계, 혹은 그 세계 안의 어떤 존재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 않으면서 식물의 세계로 열리는 감각을 키우는 일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또한 식물의 생명을 경험하고 경험하는 토대 위에서, 인간관계가 더 이상 경제적이지 않고 생태적 공유에 도움이 되도록 인간관계를 리모델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327)

 

에필로그다, 마침내. 이리가레는 식물 존재를 환경으로 자리매김 한다. 식물을 도구적으로 대하는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식물 존재의 무엇이 어떻게 성차화 육성을 추동하는지 말할 수 없는 소이다. 마더는 인간이 식물 세계로 열려야 한다는 것과 그 경험을 토대로 인간관계를 리모델링해야 한다는 것을 함께 말함으로써 일방적 태도는 벗어났다. 그럼에도 여전히 무슨 경험이 어떻게 인간관계를 리모델링하게 추동하는지 말하지 않는다.

 

자연을 아는 것은 자연을 느끼는 것의 절반만큼도 중요하지 않다.는 레이첼 카슨의 말은 (자연 이야기는 아니지만)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낀다.”는 최영도의 말과 어떤 관계에 있을까. 각자 무슨 의도로 한 말인 줄 아는 만큼 두 말의 양립 가능성을 수긍한다. 내 경험은 이렇다.

 

식물의 사유를 읽고 주해리뷰를 쓰는 동안 일어나는 갈증, 그러니까 저자들이 표상하는 기호로는 식물이 와 닿지 않아서 생기는 답답함을 견디기 힘들어 식물 책을 6권 째 읽고 있다. 최근에는 광화문 교보 가면 아예 식물 관련 서고 앞에 가방을 내려놓고 진(?)을 친다. 독서, 그러니까 알아가는 일이 느껴가는 일에 도움이 되는가? 된다. 그것도 많이. 저마다 지닌 곡절을 함부로 짐작하면 안 되지만 이리가레와 마더가 실제 개별화된식물 공부를 하는지 내내 궁금했던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공부와 그들의 함구 사이에서 어슬렁거린다.

 

물론 이런 시도의 들머리임을 모르지 않지만 나는 철학자가 아니라 임상가다. 나 자신과 내 삶, 특히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일 자체가 깃들어야 할 식물성에는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느낌과 실천이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 식물 생명은 내 개체적 생명과 인생의 기조다. 나아가 세상을 평등하고 평화롭고 평범한 생명 네트워킹으로 만드는 공적 참여의 모델이기도 하다. 꼭 그만큼, 식물 생명의 소식과 생기와 구조는 나를 관통한다. 나는 그린샤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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