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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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결국 에피소드로 끝날 것이다. 에피소드란 막간극을 의미한다. 자유의 감정은 일정한 삶의 형태에서 다른 삶의 형태로 넘어가는 이행기에 나타나 이 새로운 삶의 형태 자체가 강제의 형식임이 밝혀지기 전까지만 지속될 뿐이다. 그리하여 해방 뒤에 예속이 온다.”(9쪽)


본디 생명 자체가 에피소드입니다. 장구한 죽음과 죽음 사이에 잠깐 일어났다 스러지는 드라마입니다. 죽음의 구조에 균열을 일으키는 사건입니다. 자유는 그 생명이 지니는 각성 상태의 지향으로 강제의 견고함을 깨뜨리는 상태 또는 행위입니다.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강제의 구조를 뚫고 올라오거나 맞서 싸워야 획득할 수 있습니다.


죽음과 강제의 구조를 깨뜨리는 생명과 자유 사건은 세계를 세계이게 하는 기축axis입니다. 생명과 자유라는 기축이 없으면 세계는 다만 적료寂廖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계는 생명과 자유가 죽음과 강제를 마주하여 함께 구성하는 비대칭의 대칭 운동구조 또는 구조운동입니다. 진실의 이러한 전체상에서 본다면 위 문단을 아래와 같이 바꾸는 것은 등가等價의 타당성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유는 끝내 액시스로 작용할 것이다. 액시스란 변화의 경계 축을 의미한다. 자유의 감정은 일정한 삶의 형태에서 다른 삶의 형태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나타나 이 새로운 삶의 형태 자체가 강제의 형식으로 굳어지지 못하도록 뒤흔든다. 그리하여 해방 뒤에 예속이 떤다.


자유가 에피소드로 끝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과 자유가 끝내 변화의 액시스로 작용할 것이라는 신뢰감은 모순에 가깝지만 분리 불가능한 실재입니다. 위기가 아니면 변화를 말하지 않습니다. 자유의 위기는 강제의 위기입니다. 문제는 자유를 문제 삼아야 하는 대다수 민중의 사유 현실입니다. 부정성을 향해 열려 있다면 해방의 역사를 쓸 수 있습니다. 중독으로 닫혀 있다면 예속뿐입니다.


오늘 여기 대한민국 민중의 자유는 결국 에피소드로 끝날 것입니까? 변화의 액시스로 작용할 것입니까? 500일 전 우리는 대한민국 역사가 세월호사건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500일 후 우리는 대부분 이 말을 잊어버렸습니다. 팽목도 안산도 광화문도 적료에 휩싸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대로라면 우리의 자유는 결국 에피소드로 끝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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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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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사유야말로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한병철


김연아가 누구의 손을 뿌리쳤다며, 노란 리본을 달았다며, ‘국민 팥쥐’니 ‘종북’이니 날뛰는 자들의 훤화가 어제 오늘 풍경은 아니지만 갈수록 도를 더해 마침내 인면수심의 경지에 도달한 듯합니다. 어쩌다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 아프고 슬프고 또 막막합니다. 이 사유하지 않는 자들의 통치가 차라리 국권 상실 시대보다 더 모멸스럽습니다.


자유의 위기를 말하는 한병철에게 사유는 스투디움Studium으로서 자연Sein이 아니라 푼크툼Punctum으로서 당위Sollen입니다. 대우 명제로 바꾸면 뜻이 정확하게 들어옵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않는 것은 사유가 아니다.”


사유가 매끈한 보편성, 그러니까 투명성을 깨뜨리는 순간입니다. 사유는 명백하고도 구체적인 지향 에너지를 수반한 개념 지음이며 구성이며 판단이며 추리입니다. 자유와 필연적으로 결합해 들어가는 투쟁의 논거입니다.


자유를 가져오는 사유의 조건은 부정성입니다. 부정성은 의문의 자궁에서 태어납니다. 의문을 품지 않는 자에게 주어지는 자유가 바로 중독입니다. 중독으로서 행복은 노예의 환상 또는 도착 또는 분열입니다. 노예의 환상 또는 도착 또는 분열을 키우고 잡아먹는 긍정주의 악귀에게 던져줄 부적에는 똑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과연 그런가?”


자유에 관한 한 사유는 의문입니다. 의문은 바로 오늘 여기 우리 앞에 놓인 강요된 ‘사실’을 향합니다. 김연아 가슴에 달린 노란 리본은 이런 의문을 담고 있습니다.


“과연 아이들은 왜 죽었을까?”


자유롭기 위하여 사유하려고 이 한 권의 책을 집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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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분노 - 자본에 저항하는 불온한 사랑
박성미 지음 / 아마존의나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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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저는 지은이 박성미를 아주 조금 압니다. 어둠 속의 낮은 연대들 변방에 서 있곤 했던 제 삶의 길목 이곳저곳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제가 알량하였으므로 그는 알토란같았습니다. 그가 선물한 영화 작품 CD를 소중히 지니고 있습니다. 그가 책을 냈기에 또 한 번 ‘장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슥한 눈으로 읽었습니다.


1. 고뇌 끝에 성직의 길을 버리고 생계를 위해 우유 배달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아파트 관리인이 어느 날 느닷없이 이 엘리베이터, 당신 우유 배달하라고 만든 거 아니라며 이용을 금지시켰습니다. 주민들의 항의가 있었다고 명토 박았습니다. 저는 조용히 응수했습니다.


“저도 주민입니다.”


그 일은 거기서 종료되었고 당연히 제 생각도 거기서 멈추었습니다. 만일 주민이 아니었다면 제가 어떻게 그 상황을 타개했을지 20년 넘게 더 산 지금이지만 그리 명쾌한 설득의 맥락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 때 박성미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 하나를 들려줍니다.


조금 된 일이다. 강남의 어느 아파트에 “우유와 신문 배달원은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말라”는 공고가 붙었다고 했다. 그 사실은 인터넷을 통해 널리 퍼졌고, 사람들은 분노했다. 그러나 한편 아파트 주민의 임장에서 쓴 글도 설득력이 있었다. 배달원이 엘리베이터를 매층 붙들어놓기 때문에 급한 볼일을 봐야 하는 주민들이 제때 움직일 수가 없고, 엘리베이터 고장도 잦아 불편이 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특별한 강남 주민 텃세도 아니고 날고 오래된 아파트의 평범한 주민들의 평범하고 합리적인 결정일 수도 있었다. 대책회의를 하다 보니 그런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실수한 지점이 분명히 있었다. 그들은 회의를 하면서 단 한 가지 생각을 놓친 것이다.


“그럼 그 배달원들은 어떻게 다니지?”(44-45쪽)


『선한 분노』는 바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입니다. 박성미는 이런 이야기를 지어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이야기 지음은 박성미의 사랑으로 가능해집니다. 이런 사랑이 “단 하나의 옳은 것”(34쪽)이기에 거기서 진짜 혁명이 나옵니다. 진짜 혁명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책이 사랑스러운 까닭은 자분자분하고 쉽기 때문입니다. 자분자분하고 쉬운 이야기가 담아내는 진실에서 어려운 현실을 우지끈 부러뜨리는 힘이 나옵니다.


2. 사랑과 혁명 사이에 돈이 놓이는 것은 필연입니다. 사랑에서 시작하여 사랑으로 끝나는 삶을 살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돈이므로 혁명은 부정의 부정으로서 피할 수 없는 당위입니다. 지은이가 사랑과 혁명보다 돈 이야기를 많이 하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돈의 실체와 작동 구조를 알아야 사랑과 혁명의 따로 또 같은不二而不一 이치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돈은 필요의 임계점을 넘는 순간부터 악이 됩니다. 이는 비단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의 문제입니다. 시대의 문제입니다. 문명의 문제입니다. 지은이는 사랑과 맞은편에 돈을 세우면서 실용적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평행 문장 둘을 선보입니다.


옳은 일을 할 때엔 사랑을 쓴다. 옳지 않은 일을 할 때엔 돈을 쓴다.”(291쪽)


옳은 일도 다 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글을 보고 순진하다 하겠지만 정작 순진한 것은 지은이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은이의 속뜻은 이런 것일 테니까요.


“옳은 일을 할 때 쓰는 이른바 돈은 실제로 사랑이다. 옳지 않은 일을 할 때 쓰는 이른바 사랑은 실제로 돈이다.”


속물적 순진성에 막무가내 신앙을 불어넣는 시중의 자기계발서를 모조리 내다버린 지은이가 자신의 책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래서 조금 다른 자기계발서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이것은 자기계발서이지만 혼자 살기 위한 자기계발서가 아니라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한 자기계발서다. 당신이 열심히 열망하면 당신이 성공해서 잘 살 수 있다고 얘기하는 시크릿이 아니라, 당신이 열심히 열망하면 함께 하는 사람들과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은밀히 속삭이는 책이다.”(13-14쪽)


열 명 중 한 명만이·······되는 방법을 열 명에게 가르치는”(168쪽) 사기술에 불과한 시중의 자기계발서의 목적은 단 하나, 양 한 마리 가진 아홉 명을 속여 아흔아홉 마리 가진 한 명에게 몰아주는 것입니다. 서점가를 석권한 자기계발서가 결국 수탈체계로서 자본주의의 나팔수란 사실을 일깨우며 이 책은 여기서 벗어나는 길을 발맘발맘 따라가고 있습니다.


3. 박성미의 사랑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돈에 미치지 않았다면 필부필부에게 있는 그저 평범한 사랑이었을 것입니다. 그 평범한 사랑으로 족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이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뒤집힌 세상에서 사랑은 평범한 사랑일 수 없습니다. 뒤집힌 세상을 본디 모습으로 되 뒤집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사랑이 혁명입니다. 혁명으로서 사랑이기에 그것은 옹골차게 정치적인 것입니다.


열심히 사랑하는 일이 그토록 정치적인 것이라면 나는 기꺼이 정치적이겠다.”(62쪽)


그의 이런 정치적인 사랑은 예수의 사랑에 젖줄을 대고 있습니다.


“예수의 ‘서로 사랑하라’는 말.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은 단순히 그저 ‘좋은 말’이 아니다. 그것은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다시 재편할 만큼 혁명적인 말이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만약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신뢰하고, 누구든 자기 몸처럼 생각한다면, 진실로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는 예수의 그 말만 알고 있지 그 말을 실천했을 때 변화될 극단적인 세상의 모습을 거의 상상해본 일이 없다.”(288쪽)


우리사회에서 이른바 ‘개독교’ 현상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 글을 역시 순진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정작 순진한 것은 예수와 ‘개독교’를 동일시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이 땅의 ‘개독교’에 예수가 있을 리 없습니다. 권력과 자본에 부역하고 있는 ‘개독교’야말로 예수가 다시 온다면 앞장서서 십자가에 못 박을 것입니다. 예수의 “사랑이 지나치게 혁명적”(59쪽)이기 때문입니다. 박성미의 생각입니다. 그는 순진하지 않습니다. 그는 순수합니다. 예수처럼 사랑했기에 말입니다. 예수처럼 사랑해서 얻은 깨달음을 분명히 지니고 있습니다.


“나를 살려 달라 할 때보다 저 사람을 살려 달라 할 때 훨씬 크고 강한 움직임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았다.”(281쪽)


그의 깨달음이 이제 저와 그대에게도 번져오고 있지 않습니까.


4. 박성미의 혁명적 사랑, 사랑의 혁명에 함께 참여하고자 할 때 우리는 이 부분을 사무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장발장의 절도 사건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건은 보통 신부의 선함과 훌륭한 품성이 돋보이는 사건으로 이해되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계급사회가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빼앗은 것을 돌려주는 순간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 순간을 신부가 장발장을 용서한 것으로 이해하였다면 오해다. 그것은 과거 서민들로부터 자신이 부당하게 착복하고 있었던 사실들에 대해 신부가 장발장에게 용서를 구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42쪽)


물론 이 해석은 미리엘 신부의 이 말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 은식기들이 우리들의 것인가요? 내가 부당하게 그 은식기들을 오랫동안 갖고 있었어요.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었어요.”(41쪽)


그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이 이 구절을 미리엘 신부의 “선함과 훌륭한 품성”의 빛에서 읽어왔습니다. 이 세상의 실체적 진실을 드러낸 말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타성에 젖어 피상적으로만 세상을 읽는 우리의 남루한 영혼 때문입니다. 박성미는 이렇게 정리하고 정의합니다.


  “미리엘 신부가 장발장에게 은식기와 은촛대를 준 것은·······가난한 이들로부터 빼앗은 것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당연한 균형 감각’ 때문이었다.

  이 균형 감각을 우린 사랑이라고 한다. 내 행복이 누군가의 아픔에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고, 빼앗긴 이에겐 돌려주어야 한다는 균형 감각이다. 너무 많이 갖고 너무 많이 성장하여 다른 이들을 해치기 시작하면 멈춰야 할 시점을 아는 것이고, 세상이 한쪽으로 기울면 다른 한쪽에 함께 서 주는 것이며, 있는 힘껏 힘의 반대쪽으로 달려가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사랑은 세상에 대한 균형 감각이다.”(42-43쪽)


균형 감각은 진실이 지닌 이치에 맞게 살고자 하는 영적 지향성을 전제합니다. 이치에 맞게 살고자 하는 영적 지향성은 진실 전체를 향해 열려진 마음에서 나옵니다. 진실 전체를 향해 열려진 마음으로 현재의 자신을 돌아볼 때 용서를 비는 자세가 나옵니다. 우리 모두는 이제 여기서 용서를 비는 것으로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할 미리엘이 아닐는지요.


0. 2015년 8월28일, 오늘 250명 아이들을 바다에서 잃은 지 500일이 되었습니다. 진실은 더욱 깊숙이 묻히고 있습니다. 유족을 따돌린 채 권력이 엄폐 인양을 밀어붙이는데도 대한민국은 괴괴합니다. 500일은 선한 분노의 만료 기간일 수 없습니다. 대체 우리가 이 아이들한테 용서받을 수나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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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알만한 분은 다 알고 계시지만 삼각지 뒷골목에 <옛집>이라는 허름한 국수집이 있습니다. 우연히 알게 되어 무더위 기승이 여전한 지난 일요일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찾아갔습니다. 소문대로 손님이 꽉 차 있었습니다. 밖으로 나와 간이 식탁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온溫 국수를 시켰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국수가 나왔습니다. 워낙 국수를 좋아하는 터라 서빙하시는 아주머니께 물었습니다.


“혹시 이 국수도 곱빼기가 있습니까?”




아주머니께서는 선선히 되물으셨습니다.


“양이 적으시다면 더 부어드릴까요?”


저는 그 말뜻을 즉시 알아차리지 못한 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나중에 아예 하나 더 시키지요.”


잠시 후 아주머니는 작은 그릇에 국수를 담아 들고 다시 오셨습니다. 가득 차도록 부어주셨습니다. 제가 심상히 다시 질문했습니다.




“곱빼기 값은 얼마입니까?”


아주머니는 또 선선히 대답하셨습니다.


“저희는 곱빼기 값을 따로 더 받지 않아요.”


어허, 이런! 이 사실 하나만으로 <옛집>은 우리 시대 지상의 국수집입니다. 한 가난한 소년에게 로망이었다가 수십 년이 지나 치유로 자리 잡은 소면 국수에 이런 내러티브를 얹어주는 국수집. 다음에는 그 주인 할머니와 눈 맞춘 채 이야기 한 번 나누리라 다짐하며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을 일으켰습니다. 이제 삼각지는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만이 아닙니다. 덥혀진 제 영혼이 발맘발맘 돌아가는 삼각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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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5 15: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25 15: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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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은 두려움의 경험에서 옵니다. 두려움은 인간의 근본 조건입니다. 근본 조건을 피할 길은 없습니다. 피할 길 없는 대상은 직면하고 맞아들여 온전히 살아내야 합니다. 온전하게 함께 살려면 불안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불안에 귀 기울이면 불안이 건네주는 생의 전언을 들을 수 있습니다. 생의 전언대로 극진히 나아가면 불안은 격정으로 증폭되지 않습니다. 격정으로 증폭되지 않는 불안은 충분히 귀중한 생의 일부입니다.


온전히 자유로운 개인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자유로운 개인이 어느 날 국가가 이백오십 명의 아이들을 바다에 빠뜨려 죽이는 장면을 TV 화면을 통해 봅니다. 두려움이 들이닥치고 절망이 덮쳐오고 슬픔이 밀려드는 급박한 상황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고 맙니다. 그 순간 이후 자유는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습니다. 울울한 불안이 온 영혼을 점령해버렸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불편함이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484일이 지나도록 숨 막히는 악몽이 떠나가지 않습니다.


불안을 의도적으로 증폭시키는 국가에 종속된 민중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불의한 권력과 탐욕스런 자본, 그리고 타락한 종교가 담합하여 국민을 두려움과 불안으로 몰아넣는 현실에서 개인은 개인일 수 없습니다. 개인의 정서는 없습니다. 개인의 격정은 없습니다. 개인의 정신장애는 없습니다. 불안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불안의 병리는 개인의 병리가 아닙니다. 불안에서 오는 질환은 개인의 질환이 아닙니다. 불안은 공공의 문제입니다. 불안은 대한민국이라는 생명공동체 전체의 문제입니다.


각자도생의 치유와 행복을 넘어 공적 참여로 여는 생명연대가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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