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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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혹시 바리공주를 아십니까? 바리공주는 제주도를 제외한 우리나라 전역에서 전승되어 내려온 고대 무가 설화의 주인공입니다. 딸만 일곱인 왕의 일곱째 딸로 태어났다가 버려져서 그 이름이 ‘바리데기’입니다. 자신을 버린 아비가 죽을병에 걸리자 아비를 살리기 위해 바리공주는 다시 한 번 스스로 버려 저승길로 갑니다. 결국 생명수를 구해 와 아비를 살리고 나중에는 죽은 자의 영혼을 하늘로 인도하는 구세주가 되었답니다. 버려진 존재이지만 결국 버린 자까지 구원하는 바리공주의 가없는 보듬기. 이는 여성이 지니는 공존과 포용의 생명 감각이 평상시에는 삶의 풍요로, 위기에는 구원의 힘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리공주 이야기는 심청전, 춘향전, 박씨전, 옥단춘전 등 수많은 이야기로 모습을 바꾸어 전승되면서 우리 가슴의 밑바닥에 깊은 울림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리공주는 이 땅 모든 여성을 대표하는 아이콘이 된 것입니다.

  설화의 세계에서 실제 역사의 세계로 건너오면 거기에는 황진이가 있습니다. 황진이는 바리공주의 화신입니다. 황진이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기녀의 신분으로 봉건적 양반 사회의 온갖 질서를 가로질러, 자신을 버린 자들의 가치를 훌쩍 뛰어넘습니다. 황진이의 거침없는 도발과 자유혼. 이는 여성이 지니는 도도한 생명 감각이 시대의 질곡을 풀고 새로운 지평을 창조하는 예술적 상상력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황진이에 이르러 여성의 생명력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메시지가 한층 더 미학적이고 극적인 면을 더합니다.

  바리공주와 황진이를 결합한 전형이 21세기가 맞은 총체적 위기 상황에서 우리에게 전하는 이런 감동적 메시지는 여성이 버림받은, 버림받는, 버림받을 존재라는 칼 같은 진실에서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여성이 장구한 남성문명 체제 속에서 그 존재를 스스로 부정하는, 자기모독의 무의식을 지니도록 강요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뼈에 사무치게 인정하지 않는 한 모든 노력은 한낱 물거품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이 문명 속에서 여성은 그 자체로 우울증입니다. 이를 받아들여야 비로소 이 문명을 극복하는, 아니 보듬어 안고 비상하는 대승이 나올 것입니다. 바리공주도 황진이도 결코 신선놀음 한 게 아닙니다!(136-137쪽)


  “나이 스물여섯, 자살이 아름다워 보이는 나이.”

  어제까지 웃는 표정의 가면을 쓰고 있던 소녀들이 화면의 절벽 밖으로 발을 디뎌버렸다. 그녀들을 둘러싼 웃음의 외피가 두꺼우면 두꺼울수록 그 안의 울음은 점점 더 낮게 잦아든다. 한때 그녀들의 이미지를 타전했던 매체들은 외친다. 그녀들을 세계 바깥으로 몰아낸 우울증을 치료하라! 우울증이 극단에 이르러 자살이라는 ‘행위로의 이행’이 이루어졌을 때, 그 사건에 기생하여 그것을 서사화하는 모든 매체들조차 치료의 미덕을 설교한다. 이것은 가장된 행복, 가장된 조증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관리술에 불과하다.

  현재 한국의 문화 향유자들이 즐겨 찾는 싸이월드의 미니 홈피나 각종 포털 사이트의 블로그에는 자신의 행복을 노출하려는 과장된 제스처가 넘쳐난다. 극단적인 이 조증mania은 집단적 광기mania와 다름없다. 명랑함과 조증은 나의 세계가 안전하다고 믿고 싶은 자아의 방어기제일 뿐이지 자아가 현실적으로 경험하고 지각하는 정서적 상태가 전혀 아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무기력한 수동성에 빠지지 않기 위한 관리의 제스처라 부를 만하다. 조증에 드리워진 우울증의 그림자.


허윤진 비평집 『5시 57분』에 실린 <춤추는 우울증>의 일부(128쪽)입니다. 우울증 치료라는 관리술을 엮음의 매개로 하는 조증과 우울증이 비대칭의 대칭을 이루고 있는 사회 풍경을 정확히 묘파한 장면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충분히 암시되어 있습니다. 다만 글의 전체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어제까지 웃는 표정의 가면을 쓰고 있던 소녀들이 화면의 절벽 밖으로 발을 디뎌버”린 까닭이 무엇인지에 관한 언급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 문제를 정색하고 제기해야만 합니다.


왜, 하필 스물여섯의 그녀들이란 말입니까? 그녀들은 그러면 어쩌다가 절벽 밖으로 발을 디뎌버렸단 말입니까?


사람을 조증, 그러니까 광기로 몰아가는 ‘투명사회’(한병철)의 지배 메커니즘은 그 몰아감에도 차별을 둡니다. ‘금 수저’를 모는 방법이 다르고 ‘흙 수저’를 모는 방법이 다릅니다. 수많은 종류의 ‘흙 수저’가 있으되 남성가부장적사회에서 그녀들은 당연히 ‘흙 수저’입니다. 아무리 ‘금 수저’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다시 그 안에서는 ‘흙 수저’입니다. 혹시 예외적으로 ‘금 수저’ 대우를 받는 자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 경우는 남성화 또는 버금 남성화된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거의 대부분 그녀들은 바리데기일 따름입니다. 그녀들은 존재 “그 자체로 우울증입니다.” 절벽 밖으로 발을 디뎌버릴 수밖에 달리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그것은 안 될 일입니다. ‘투명사회’는 호들갑을 떨면서 그녀들의 덜미를 낚아채어 치료에 투입합니다. 수탈할 것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 토건사업은 집요하게 되풀이되어야만 합니다. 조증으로 내몰리든 우울증으로 버려지든 그녀들에게는 근본적 차이가 없습니다. 목숨 다하는 그 순간까지 쌍끌이 수탈에 당하는 것이 운명입니다. 모진 운명의 사슬을 어찌하면 끊을 수 있을까요?


운명을 바꾸는 길은 그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서 출발합니다.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말은 순응하거나 체념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운명을 바르게 문제 삼아서 옹골차게 대응한다는 말입니다. 운명을 제대로 “받아들여야 비로소·······극복하는, 아니 보듬어 안고 비상하는 대승이 나올 것입니다.” 인간이 홀로 존재하지 않듯 운명 또한 개인 단위로 분획되어 있지 않습니다. 운명공동체라는 진부한 표현에는 결코 빛바래지지 않는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바리데기로서 그녀들의 운명에 나를 야무지게 깃들게 하여 슬픔의 생명연대에 참여하는 길 말고 다른 길은 없습니다.


슬픔의 생명연대는 그러므로 두 가지 결단을 요구합니다. 하나는, 낮은 삶을 선택하고 그 ‘욕됨’을 견디는 것입니다. 높은 삶 그 자체로 죄악인 대한민국 오늘에서 낮은 삶을 의롭다 해야 하겠지만 저들이 ‘근본 없는 것들’이라 업신여기니 그 업신여김을 달게 받는다는 것입니다. 둘은, 삶의 모든 국면에서 여러 겹, 여러 결의 공유가 일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물질은 물론 지식과 문화까지 광범위한 나눔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 둘 모두를 일찍이 실행에 옮긴 분이 다름 아닌 원효입니다. 원효를 그 삶으로 이끈 분이 다름 아닌 요석입니다. 요석과 원효 이야기는 김선우의 장편소설 『발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필독(강신주의 해제는 췌언이므로 제외)서입니다. 김선우가 그려낸 7세기 원효와 요석의 아미타림에 영혼을 디디고 21세기 우리는 각자 원효와 요석이 되어 바리공동체 꿈을 꾸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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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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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설·······

  남성의학·······형식논리에 기대어 병을·······적으로 취급하는·······의사는 전사戰士로서 악한 병마와 싸워 이겨야 하는 존재입니다. 전사에게는 말(언어)이 필요 없습니다. 남성의학의 주체가 말을 꺼리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말을 꺼린다는 것은 은유를 꺼린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말은 은유이기 때문입니다. 은유를 꺼린다는 것은 역설을 꺼린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은유의 절정은 역설이기 때문입니다. 역설은 형식논리의 무덤입니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은유에 능하다는 것입니다.·······은유에 능하다는 것은 역설을 향해 활짝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가 여성·······여성의학의 시공간입니다. 여성은 그 몸에, 마음에 삶에 역설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월경-임신-출산-육아-완경이 바로 그 역설입니다.

  월경이 왜 역설일까요? 출혈은 죽음을 의미하니 달마다 죽습니다. 삶의 한가운데에서 주기적으로 죽음을 용인합니다. 여성은 삶과 죽음이 맞물리는 제의를 집전하는 제사장입니다. 임신이 왜 역설입니까? 텅 빈 제 몸 한가운데에 구토를 일으킬 만큼 낯선 다른 생명을 용인하여 채워 넣습니다. 여성은 비움과 채움이 맞물리는 제의를 집전하는 제사장입니다. 출산이 왜 역설입니까? 출산의 아픔은·······밀라레빠의 고통을 넘어섭니다.·······동시에 지고한 깨달음痛悟이자, 기쁨입니다. 아픔과 기쁨, 괴로움과 깨달음이 맞물리는 제의를 집전하는 제사장입니다. 육아가 왜 역설입니까? 어머니는 아기의 우주입니다.·······그 우주는 깨집니다.·······여성은 나와 남, 일치와 단절이 맞물리는 제의를 집전하는 제사장입니다. 완경이 왜 역설입니까? 달마다 죽던 일은 멈추었습니다.·······그러나 생명을 짓던 일 또한 멈추었습니다.·······다시 여성은 삶과 죽음이 맞물리는 제의를 집전하는 제사장입니다.

  자신이 역설 속에 있고 또 역설을 창조하는 여성의 생명 감각으로 사람과 삶, 그리고 병을 보면 그 눈에 박멸해야 할 적이란 없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 맞은편의 존재는 죽여야 한다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치졸한 유아기적 형식논리에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습니다. 서로 다른 진실이 말을 통해 은유로 화해하고 역설로 하나가 됩니다. 의사와 환자 사이, 건강과 병 사이의 대립적 구별은 사라집니다.·······(134-135쪽)


본디 안식년이란 고대 히브리 역법에서 7년 주기의 마지막 해로서, 땅을 갈지 않고 묵혀 두고, 가난한 자와 짐승들을 먹이고, 빚을 탕감해 주고, 종들을 해방시키는 사회적 휴식 제도였습니다. 이것이 현대 산업사회에 와서는 재충전의 기회를 갖도록 하기 위해 주는 1년 정도의 장기 휴가로 일반화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최근 들어 이 문제를 조금 더 깊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의사는 그다지 행복한 직업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든 병든 사람과 마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병든 사람은 그것이 몸이든 마음이든 아픔 속에 있기 때문에 날카롭고 급하며 심지어 이기적이기 마련입니다. 자신의 말이 앞서고 상대방의 말은 뒷전이기 쉽습니다. 가령 진료 받으러 와서 온갖 증상을 나열하고 난 뒤 반드시 붙이는 ‘이거, 왜 이래요?’ 라는 질문은 의사의 대답을 듣기 위한 진정한 질문이 아닙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아픈 거요? 얼른 고쳐요!’ 이런 말입니다. 통증의 진실을 알려서 참된 건강으로 인도하는 의사의 말을 미리 차단하는 전략이 담겨 있습니다. 통증이 소통을 제압하는 상황입니다. 끝없이 반복되는 진료실 풍경입니다. 이 풍경 속에서 오랜 날들을 견디다 보면 어느 순간 수직으로 치솟는 단절감, 심지어 분노를 감지합니다. 얼핏 보면 환우들을 향한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은 소통의 부재에 있습니다. 그 소통의 부재는 모순만 노정되지 역설로 넘어가지 못하고 가로막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모순의 노정이란 ‘그렇다’와 ‘아니다’가 적대적으로 마주 볼 뿐인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양자가 ‘그러나’를 사이에 두고 그저 존재적으로 공존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와 ‘아니다’가 ‘그러므로’를 매개로 하나의 생명장生命場으로 들어서는 것을 역설이라고 합니다. 역설은 관계를 맺은 상태입니다. 관계가 맺어져야 비로소 소통이 성립합니다. 의사가 환우와 함께 역설을 빚어내지 못하고 모순 속에 마주서 있기만 할 때, 그것을 더는 견뎌내기 힘들 때, 바로 이때, 안식년이 필요합니다!


‘그렇다’와 ‘아니다’ 이야기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하겠습니다. 환우의 통증이 ‘그렇다’이고 의사의 치료가 ‘아니다’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환우의 통증은 부정되어야 할 나쁜 것이므로 주류 의학적 사고방식에서는 앞뒤가 바뀝니다. 주류의학은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순을 해체하는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때려 부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모순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실재의 모순은 노정된 채로 있습니다. ‘통증을 잡는 것이 병을 치료하는 것이다’라는 주류의학의 생각은 근본적으로 오류입니다. 통증은 본질적으로 병을 알려주는 전령입니다. 없애야 할 무엇이 아니라 경청해야 할 무엇입니다. 경청은 ‘그렇구나!’입니다. ‘그럴만해서 그렇다’입니다. 나아가 통증은 일차적·자체적 치료행위입니다. 없애야 할 무엇이 아니라 응원해야 할 무엇입니다. ‘그래, 잘하고 있어! 도와줄게.’입니다. ‘그렇다’를 대뜸 부정해서 ‘아니다’로 만드는 것은 진정한 치료가 아닙니다. ‘그렇다’를 ‘그렇다’고 인정해줌으로써 스스로 본디 건강한 상태인 ‘아니다’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진정한 치료입니다. 모순의 노정을 ‘그러나’에 터하여 폭력으로 해체하는 주류의학은 부분이 전체를 지배하는 독재 의학입니다. 모순의 노정을 ‘그러므로’에 터하여 역설로 해결하는 의학이 진정한 의학입니다. 사실, 역설도 그리 탐탁한 표현은 아닙니다. 원효의 화쟁이 월등한 표현입니다. 더 월등한 표현은 [아래아 한]입니다. [아래아 한]의 진실은 이렇습니다.


“그렇다. 그러므로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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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山無人

海無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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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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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성적 직관·······

  남성과 여성이 대립할 때 팽팽한 평행선을 달리는 까닭은 여성은 공감을 요구하고, 남성은 수긍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공감은 감성의 문제이고, 수긍은 이성의 문제입니다. 여성들끼리 수다문화가 형성될 수 있는 기반은 공감에 터 잡은 맞장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남성들끼리 계약문화가 형성될 수 있는 기반은 수긍에 터 잡은 맞바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공감은 말의 내용이 지니는 울림에 대한 직관적 반응입니다. 수긍은 말의 내용이 지니는 타당성에 대한 이지적 반응입니다.······

  ·······감성적 직관으로 사람과 삶, 그리고 병을 느끼는 것은·······이성으로 판단하고 인과관계를 추적하는 일과는 다릅니다. 이성은 보는 감각이고, 직관은 듣는 감각입니다.·······들음으로 시작하는 의학은 겸손합니다. 환자와 따스한 공감, 평등한 소통, 나아가 일치와 통섭을 지향합니다. 눈물이 있고 환희가 있는 세계를 꿈꿉니다. 보고 판단하는 의학으로는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이상입니다.

  이성적 판단은 분석과 평가라는 개념의 매개가 필요합니다. 이 개념의 매개 때문에 이성은 생명의 본령에 더듬거리며 접근해야 합니다. 쓱쓱 나아갈 수 없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거침없이 다가가지 못합니다. 결국 절대고수가 될 수 없습니다.·······절대고수는 자기가 하는 일에서 소외되는 법이 없습니다.(132-133쪽)


20대 중반의 청년 하나가 제법 오랜 기간 상담하러 옵니다. 물론 초기 몇 달을 제외하고는 오다 말기를 반복하며 시난고난 흘러온 세월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격렬하게 비판하는 병적 이성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삶의 모든 부분을 갈기갈기 찢어놓습니다. 올 때마다 쏟아내는 폭포수 같은 말들은 거의 모두 자기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가, 그래서 얼마나 무가치한 인간인가에 대한 것들입니다. 그러는 한편 괴로움에 빠진 자기 자신을 무조건 받아들여줄 사람을 찾습니다. 정작 받아들여지면 거기에 공감하지 못하고 또 다른 사람을 찾습니다. 끊임없이 떠도는 것이 불가피합니다. 물론 그는 의사인 제 진단과 처방조차 깊이 공감하지 못합니다. 병적 이성에 갉아 먹혀 파리해진 이성으로 겨우 수긍만하다가 속절없이 놓치고 맙니다. 훈습의 가능성이 닿지 않는 긴 시간을 헤매다가 가뭄에 콩 나듯 찾아오기를 거듭합니다. 지금 이 순간도 그는 ‘부모자아’가 내면화한 허구적 이성에 제압되어 자기 자신을 분석·비판하면서 괴로워하고 있을 것입니다. 안타깝습니다. 아픕니다.


흔히 말합니다. 냉철한 이성과 불굴의 의지로 고통을 이겨낸다고. 그러나 그렇게 이겨내진 고통은 사실 별 것 아닙니다. 그 정도에 냉철한 이성과 불굴의 의지라는 표현을 쓴 것은 알량한 승자의 허세입니다. 냉철한 이성도 불굴의 의지도 작동할 수 없는 엄혹한 정서적 통증으로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모독입니다. 여전히 그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조롱입니다. 냉철한 이성도 불굴의 의지도 모두 무력하게 만드는 정서적 통증이라는 것이 과연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들에게 되묻습니다. 냉철한 이성도 불굴의 의지도 모두 무력하게 만드는 암은 인정하면서 어찌 그런 우울증은 인정하지 않는가? 정서의 통증이 몸의 통증에 비해 그렇게 하찮은 것인가? 그렇다면 냉철한 이성과 불굴의 의지는 어디서 나오는 힘인가? 저 통속한 승자의 허구적 논리는 정서나 감성에 대한 무지와 무시에서 나온 것입니다.


저는 정서나 감성에 대한 독자적인 쓰임새를 정해두고 있습니다. 정서는 질병, 그러니까 고통으로 열려진 감정의 가능태를 말하며 감성은 건강, 그러니까 소통으로 열려진 감정의 가능태입니다. 둘의 실재가 달라서 그리 구분한 것이 아닙니다. 비대칭의 대칭으로 나타나는 사건을 언어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한 방편입니다. 하여 제 경우 감성적 통증이나 고통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정서적 직관이나 공감이라는 표현도 쓰지 않습니다. 여기서 두 말의 공통 기반인 중용적 감정이라는 말을 이성과 의지에 마주 세워서 그것의 정체를 밝혀보겠습니다.


감정은 몸에서 일어난 최초의 마음 사건입니다. 반대로 마음에서 일어난 최초의 몸 사건입니다. 감정은 몸이자 마음입니다. 감정은 몸만도 아니고 마음만도 아닙니다. 변방의 마음입니다. 변방의 몸입니다. 마음 가운데 가장 단단하고 셉니다. 몸 가운데 가장 말랑말랑하고 여립니다. 감정을 거치지 않고 몸이 마음으로 가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감정을 거치지 않고 마음이 몸으로 가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런 진실을 놓칠 때 질병이 생깁니다. 감정의 상처가 상처의 본질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성도 의지도 상처 받지 않습니다. 이성과 의지가 흔들릴 때 상처받는 것은 이성과 의지 자체가 아니라 바로 감정입니다. 그 방향의 감정을 정서라고 이름 한 것입니다.


이 진실을 놓칠 때 치유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감정의 치유가 치유의 본질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성도 의지도 치유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성과 의지가 흔들릴 때 치유해야 하는 것은 이성과 의지 자체가 아니라 바로 감정입니다. 그 방향의 감정을 감성이라고 이름 한 것입니다.


정서의 통증이나 고통을 치유하려 할 때 요청되는 것은 냉철한 이성과 불굴의 의지가 아닙니다. 감성적 직관이나 공감입니다. 감성적 직관이나 공감으로 정서의 통증이나 고통이 치유되면 이성과 의지가 정상 작동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닙니다. 인간 생명이 자라온 역사의 과정이 그렇다고 말해줍니다. 인간 생명이 지니는 에너지의 역학관계 또한 그렇다고 말해줍니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선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정에서 넘어진 자, 감정을 짚고 일어섭니다. 정서적 통증으로 넘어진 자, 감성적 직관, 그러니까 공감을 짚고 일어섭니다. 같은 것이 같은 것을 치료합니다.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치료합니다. 바로 이것이 동종의학입니다. 아니 공현의학입니다.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치료되지 않는 위중한 질병에게 남은 단 하나의 길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울증은 바야흐로 우리에게 최후의 불치병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하루에 40명씩 자살하는 나라입니다. 냉철한 이성과 불굴의 의지를 지닌 자들은 오로지 돈과 권력에 눈멀어 있는 나라입니다. 이 대한민국에서 우울증을 치유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그대, 넘어져서 아픈, 똑같아서 서러운, 예은이 이름만 떠올려도 왈칵 눈물 나는 사람입니다. 감성적 직관으로 일어섭니다. 공감으로 나아갑니다. 기대 없는 설렘으로 함께 갑니다.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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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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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체·······

  ·······남성은 부분에 집중합니다. 자기가 보고자 하는 것만 봅니다. 그러므로 그 밖의 것은 눈에 안 들어옵니다. 이를 ‘중심 시각’이라고 합니다. 이런 감각은 원시시대 사냥의 경험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설도 있는데, 전체를 부분의 합이라고 보고 부분을 분석하는데 집중하는 삶의 태도와 본질적으로 같은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렇게 부분을 분석해서 다 모아 놓아도 전체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른 채 집중 또 집중합니다.·······

  여성은 부분에 집중하기보다는 전체 상황을 한눈에 읽는 데 능합니다. 중심 시각을 흩트리지 않으면 불가능한 감각입니다. 아마 월경-임신-출산-육아-완경으로 이어지는 변화와 돌봄의 삶, 그리고 전통적인 가사노동의 경험 등에서 비롯한 감각일 겁니다. 한 번에 모든 것의 명암과 흐름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과 늘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성은 생각도, 행동도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진행할 수 있습니다.·······

  병도 생명 현상의 일부입니다. 그러므로 병만 뜯어서 본다는 것은 처음부터 어불성설입니다. 병‘만’ 보다가는 병‘도’ 못 보는 어리석음을 저지릅니다. 의사는 궁극적으로 병을 고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과 삶을 고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전체에 주의하는 생명 감각이 아니면 참의사가 되기 어렵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의사 두 분이 붓다와 예수라면 그 분들의 공통점은 사람과 삶을 전체로 꿰뚫어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감각에 포착된 사람과 삶은 다름 아닌 슬픔이었습니다. 붓다의 자애로움에 슬픔이 녹아 있기에 자비慈悲라고 말합니다. 예수의 사랑에 슬픔이 녹아 있음을 신약성서는 특별하게도 ‘예수께서 우셨더라.’는 말을 세 번이나 등장시킴으로써 드러냅니다(웃으셨다는 말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의사의 감각이 머물러야 할 지점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요.(130-131쪽)


『고수의 생각법』이라는 책을 낸 ‘바둑 황제’ 조훈현이 최근 정치를 하겠다고 큰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을 보고 ‘멘붕’이 와서 바둑 발전을 위해 집권여당으로 들어간다고 했다니 과연 고수의 생각법입니다. 대한민국 정치판에 대한 정밀한 형세판단 끝에 내린 결론이라 전제하고 일단 추이를 지켜보겠습니다.


한 방면에서 ‘도가 트이면’ 모든 방면의 안목이 열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견성한 승려들만 지니는 생각이 아닌 모양입니다. 하기는 산꼭대기 올라가 보면 발아래 깔린 수많은 길들이 결국 한곳으로 모이니 자신이 올라온 길이 아니라 해도 손바닥 안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테지요. 특이한 것은 우리사회의 경우 그런 고수들이 정치에 발을 담글 때는 대부분 수구집단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입니다. ‘도가 트인’ 사람들이라 범속한 사람들은 모르는 깊은 뜻을 지니고 그러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들이 그 동안 내왔던 정치적 결과를 통해 판단하건대 그 깊은 뜻이라는 것은 사실상 실체가 없는 허깨비임이 분명합니다. 이 길로 ‘도가 트인’ 사람이라고 해서 저 길로도 ‘도가 트인’ 행동을 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지 싶습니다. 강자의 위선 클럽에 합류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보는 것이 명쾌한 설명 아닐까요.


이치를 따지자면 인간 그 누구도 전체적 안목을 완벽하게 지닐 수 없습니다. 그런 한계를 인정하고 매순간 더 큰 맥락을 고려한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세계가 비대칭의 대칭으로 구성되고 운동한다는 진실 안에서 삶의 감각을 벼려내야 합니다. 한 쪽 극단으로 치우치거나, 한 방향으로 경도되어 부분적 사실에 집착하는 것은 자체 오류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마침내 권력으로 변하여 타자를 강제하고 착취합니다. 모든 사상과 종교가 그렇습니다. 심지어 과학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늘 날 부분의 전체 지배는 불가피한 최소한을 뒤집고 제약 불능의 최대한으로 군림하며 전 인류를 제압하고 있습니다. 이 폭력은 가파르게 진화하고 있습니다. 알파고 같은 인공지능은 언젠가 기술특이점을 형성하면서 극소수 지배층의 신노예제사회 전략에 획기적인 공헌을 할 것입니다. 이 비관적 예측이 단지 예측으로 끝나려면 “수많은 감정들, 수많은 긴장감들, 이 느낌들이 모이고 쌓여 인간에 존경심으로 귀결되는” 전체적 생명 감각을 일깨워야 합니다. 돈만이 가치이고 돈 버는 능력만이 자랑인 이 세상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오늘 아침 김소연 시인이 쓴 <인간의 감정들>이라는 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인공지능 알파고와 이세돌 기사가 네 차례의 대국을 치렀다. 처음엔 알파고에 대해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점차로 이세돌 기사에게 관심이 옮겨가는 게 느껴진다. 승패의 결과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인터뷰나 기자회견 같은 것조차 이세돌에게만 가능하지 않은가. 사람들은 이세돌을 진심으로 존경했다. 알파고는 우리의 존경을 얻기엔 가지지 못한 것이 너무도 많아 보였다. 더 이상 이세돌이 알파고를 이길 수 없게 되더라도, 우리가 알파고를 존경할 일은 아예 없거나 요원해 보였다. 그는 조마조마해했고, 바둑알을 손끝에 쥐고서 떨었다. 떨리는 손끝에 흔들리는 인간의 마음이 실려 있었으니, 그 손끝을 지켜본 사람들은 그 손끝에 마음을 주었다. 사람들은 패배에 대해 그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말을 할지가 궁금했고, 그는 가장 차분하고 가장 깨끗한 대답을 했다. 듣는 우리는 감탄을 했다. 당황하고 긴장한 표정, 잔뜩 찌푸린 미간, 초조가 극에 달했을 때에 담배를 피우며 보였던 뒷모습. 아슬아슬했던 순간들에 우리는 마치 내 일처럼 아슬아슬해했다. 그는 세 번을 졌으면서 마침내 이겼고 함박웃음을 보였다. 세 번을 졌으면서도 마침내 이길 수 있는 게 진정 인간의 모습이라는 말 따위는 할 필요도 없다. 이기고 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수많은 감정들, 수많은 긴장감들, 이 느낌들이 모이고 쌓여 인간에 존경심으로 귀결되는 것을 알파고는 누리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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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3-15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수들의 수구집단행에 대한 말이 인상적입니다. ;^^

2016-03-17 2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