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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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말, 글을 제대로 쓰는 일에 한 평생을 바친 이오덕 선생은 어린이나 민초들의 말글살이에 동사 문장이 살아 숨 쉬고 있다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학문깨나 할수록 명사 문장으로 기울어집니다. 저 또한 이런 흐름에서 자유롭지 못한 어설픈 지식인입니다. 우리말의 생태에 터 잡아 우리 식 상담을 하겠다고 나섰지만, 저 또한 부끄럽기 짝이 없는 말글살이를 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마음의 병도 사건이며 운동입니다. 생명의 일부입니다. 그러므로 상담은 동사적이어야 합니다. 함께 흐르고 바뀌면서 결을 잡아 건강한 생명력을 복원하는 게 상담의 요체입니다. 부동不動의 치료자가 부동의 개념으로 부동의 건강체를 ‘찍어내는’ 게 상담일 수는 없습니다. 상담을 청하는 사람과 상담에 응하는 사람이 함께 어우러지는 역동적 관계 속에서 생명의 공유가 일어납니다.(189-190쪽)


마음의 병을 품사론으로 풀자면 마음이 동사적 상태를 이탈하여 명사적 상태로 고착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정서의 역동적 교차가 자유롭게 이루어지지 않고 사실상 한 가지 부정 감정에 얽매이는 상태입니다. 명사적 교정은 이치를 따르지 않는 잘못된 사이비 치유입니다. 동사적 해방이 바른 방법입니다.


생명은 동사 현상입니다. 명사 구조는 동사 현상을 위한 방편입니다. 방편에 기울 때 죽음이 다가듭니다. 죽음으로 가는 힘을 권력이라 합니다. 권력은 이렇듯 죽음으로 가는 엔트로피를 먹고 시간 속에 머무는 좀비입니다. 생명다운 생명이라면 언제나 권력에 저항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사회는 대놓고 함부로 권력이 좀비 짓을 해왔습니다. 이 짓이 극에 달하자 민중은 극적으로 그러나 적당한 수준에서 철퇴를 가했습니다. 좀비는 잠시 멈칫하고 있지만 조만간 건재를 과시하며 좀 더 명사적인 수를 가지고 되돌아올 것입니다. 민중도 이제 다시는 물러서지 말고 더 동사적인 수로 맞서야 합니다.


이후 다시 우리가 물러선다면 또 다시 우리 아이들 차례입니다. 세월호 아이들로 정녕 모자란 것입니까. 지금의 체제는 이미 그 어떤 이슈화도 없이 적막 속에서 아이들을 살해하고 있습니다. 교육의 이름으로. 치료의 이름으로. 아이들을 향한 명사적 공격의 대표적인 예가 ADHD입니다. 이런 토건의 광기는 이미 전방위로 번져가고 있습니다.


빨갱이로 몰아 죽이는 일이 더는 통하지 않자 이제는 정신병자로 몰아 죽이는 것입니다. 정신병자로 몰아벌이면 일거양득이 됩니다. 돈까지 빼앗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은 바야흐로 거대한 감옥에서 거대한 병동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아, 이 얼마나 오금 저리는 풍경이란 말입니까. 좀비가 정신병동을 관리하는 세상이라니!


인간으로 살기 위하여 동사 감각을 회복해야 합니다. 회복만으로는 안 됩니다. 탱탱하고 말갛게 가꾸어야 합니다. 그렇게 가꾸어서 우리 삶을 역동적 관계의 춤으로 번져가게 해야 합니다. 건강하고도 농염한 춤사위를 부르는 추임새, 그 아름다운 모국어의 동사적 향연으로 우리 모두 달려갑시다. 함께 울고 웃으며 춤을 춥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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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고전읽기를 하는 까닭은 삶에서 어떻게 시공의 질서와 변화가 이루어지는가, 어찌하면 그 삶의 참된 주체로 설 수 있는가를 탐색하기 위함입니다. 어떤 고전이든 숱한 눈길을 거치며 세월보다 더 많은 의미 덩이들을  끌어안고 있겠지만 오늘 나의 눈으로 새롭게 읽지 않는 한 화석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무엇을 읽느냐 하는 문제보다는 어떻게 읽느냐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겠지요. 어떻게 읽으면 『중용』이 우리 시대에 살아있는 고전이 될까요?

 

『중용』이란 텍스트는 본디 예기에 속해 있었는데 남송의 주희가 독립시켰다고 합니다. 주희는 『중용』뿐만 아니라 『대학』도 그리 했고, 나아가 유가 경전 전체를 재구성하여 이른바 사서삼경이란 개념 자체를 만들었습니다. 결국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최종 텍스트로서 유가 경전 체계는 주희 한 사람의 편집 작품입니다.  

 

물론 내용은 저자로 가탁된 사람의 직접 언술도 포함하겠지만 후대의 가필과 수정도 있습니다. 고대의 책 쓰기는 지금과 전혀 달라 단일 저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홀로 써 완성한 경우는 없습니다. 이를테면 사회역사적 집단 창작이지요. 그러므로 깊이 있는 본문 비평이 필요한 것입니다. 일점일획이 다 성현 말씀이다, 이래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오늘 우리의 안목으로 사서삼경을 재구성할 수도 있습니다. 주희에게 있던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다면 사서삼경은 종교적 권위를 획득하게 되는데 이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겠지요. 체계 전체를 문제 삼지 않더라도 부분적인 구성이나 의미 해석에서는 이미 수도 없이 재구성이 이루어져 왔습니다. 

 

내용이든 형식이든 끊임없이 흔들리며 시대마다 새롭게 태어나야 오히려 참된 권위를 지닌 고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주희는 그 본보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주희만큼의 치열성이 있다면 누구라도 사서삼경을 우리의 문제의식에 맞게 재구성, 편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희가 활동했던 남송 시대의 사대부에게는 크게 두 가지 화두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통치 이념으로서 정통유가의 헤게모니를 확립하는 것입니다. 특히 불교 사상의 도전에 직면한 유가의 위기의식은 주희에게서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난 바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른바 오랑캐에게 수모를 당하고 남으로 밀려난 한漢족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중화 이념의 확립을 통해 중원 패권의 옛 영광을 대체 복원하는 것입니다. 이 두 흐름을 한 데로 묶는 정치경제학적 연결고리가 바로 중산층 사대부의 존재였습니다.

 

주희는 사대부 시각에서 한족 주체의 중국 전통 질서와 체계를 중심으로 모든 가치를 통합, 안정화하는 명사적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명사적 어법으로 텍스트를 재구성하고 읽어냈습니다. 이런 접근법으로 그가 처한 시대의 난관을 돌파했다는 점에서 주희는 참으로 탁월한 존재입니다. 

 

주희는 주희의 탁월함으로 빛납니다. 우리는 우리의 탁월함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과연 주희의 어떤 관점이 유효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보기에는 우리 사회가 주희와 너무나도 판이한 과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그만큼 다른 각도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의 과제는 무엇일까요? 앞서 품은 의문에 집중하여 생각하면 세월호사건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진실에 따른 사회정치적 실재를 세우는 일, 바로 그것이 우리의 과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월호사건은 단순한 대형 해양교통사고가 결코 아닙니다. 짧게는 지난 50여 년 동안 개발독재 세력이 저질러온 정치적 범죄의 전형이자 집적물입니다. 길게는 이 나라를 1400년 동안 수탈해온 매판적 지배세력의 헤게모니 유지·강화 전략의 전형이자 집적물입니다. 세월호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일은 이 나라 암울한 역사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일입니다. 세월호사건의 진실에 따른 사회정치적 실재를 세우는 일는 이 나라 견고한 지배구조를 전복시키는 일입니다.



이런 과제 앞에서 『중용』을 읽으려면 두 가지 다른 독법이 필수적입니다. 우선, 주희(와 주류 해석자들)처럼 명사적 어법으로 읽어서는 안 되고 반대로 동사적 어법으로 읽어야 합니다. 동사적 어법으로 읽을 때, 세월호 아이들은 살아 있는 역사가 됩니다. 그리고 주희(와 주류 해석자들)처럼 『중용』을 개인 수신 텍스트로 읽어서는 안 되고 정치 텍스트로 읽어야 합니다. 정치 텍스트로 읽을 때, 『중용』은 이 나라 자주·민주·통일을 위한 변혁의 텍스트가 됩니다.


우리 과제와 거기 따른 우리 독법에 유념하면서 이제 『중용』 세계를 열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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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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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도 인연이고, 같은 말을 쓰는 공동체도 인연입니다. 인연은 시공을 따라 흐릅니다. 한때 단단했던 공동체도 흔적 없이 사라지고는 하지요. 만주족이 대표적입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말 공동체는 매우 길고 험한 역사를 헤치며 살아남았습니다. 한자, 일본어가 차례로 이 공동체를 지배했고, 지금은 영어가 점령하고 있지만, 우리말은 엄청난 위협과 천대에도 굴하지 않고 인연의 끈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인연을 가꾸어 가는 우리의 고단한 삶에서 슬픔, 불안, 두려움, 절망, 우울의 어둠이 생겨났다면 그 마음을 담아내는 우리말로 보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말은 우리말인데 담긴 내용이 서구의 것이라면 소화 안 되는 음식을 먹는 일과 다를 바 없겠지요. 물론 인간이기에 지니는 보편 정서가 있기는 하겠지만 버터에 빵을 먹는 것과 김치에 밥을 먹는 것만큼이나 서구인과 우리는 다른 마음결을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상담을 통한 마음 치료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우리말의 얼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201쪽)


  과거 아주 오랜 세월 중국어에 침해를 받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우리말이 사라지고 한자말로 대체되었습니다. 나아가 우리말은 한자말과 수직관계의 하위에 놓이면서 의미가 억제되었습니다. 일제에게 국권을 잃었던 35년 동안에는 일본어의 침탈은 물론이려니와 우리 이휘의 70% 이상이 한자어라고 주장하는 식민주의 학자들의 조작으로 수많은 우리말이 한자어로 둔갑했습니다. 국권 회복 이후에는 영어에 제압당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는데, 급기야 온 나라가 영어 몰입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이 문제의 앞날은 심히 어둡습니다. 여기서 누가 어떤 노력과 희생을 통해 세상 이치에 맞는 흐름으로 되돌려 놓을지 모르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중대 과제라는 사실 만큼은 변해서는 안 됩니다. 절망과 결기가 교차하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우리말에 담긴 느낌과 생각, 그리고 삶의 자세를 토대로 소통함으로써 마음의 고통을 풀어나가려는 제 소망이 너무 때늦은 뒷북이 아니기를 간절히 빌어 봅니다.(238-239쪽)


『문학동네』 2016 봄 호에 황현산 선생과 신형철, 문강형준의 대담이 실렸습니다. 그 내용 가운데 ‘변방의식’에 관한 것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자기의 사유와 경험을 ‘중심’에 두고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현장을 ‘첨단’으로 여기지 않는 우리의 자기소외 행태를 지적한 것입니다(533-536쪽).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변방의식’을 조금 더 세밀하게 문제 삼아보겠습니다. ‘변방’이란 표현은 공시적synchronic인 것입니다. ‘첨단’이란 표현은 통시적diachronic인 것입니다. 엄밀히 보면 서로 어긋난 표현입니다. ‘변방의식’은 자신을 선순위에 두지 않는 ‘후순위의식’이라 표현해야 정확할 것입니다. 건강한 자기의식은 ‘선순위의식’입니다. ‘선순위의식’은 자기 현장을 첨단으로 여깁니다.


‘변방의식’ 아닌 변방의식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도리어 문제가 되는 것은 중심의식입니다. 자기를 중심에 두는 사유와 경험은 자타 분열의 결과를 낳습니다. 공존을 꾀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변방에 두되 자기를 선순위에 놓아야 자타가 공존하는 세상을 건설해 나아갑니다. (2015년 9월 25일에 제가 쓴 『심리정치』 리뷰18-<오직 바보>를 참고하십시오.)


변혁은 변방에서 일어납니다. 변방에서 자기 선순위의식을 지니고 사유와 경험을 빚어가는 사람이 변혁의 주체입니다. 사유와 경험은 결국 언어의 문제입니다. 이 땅의 자기소외는 결국 언어소외입니다. 모국어를 후순위에 두는 피학증입니다. 한글 전용 따위의 중심의식으로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타자의 사유를 표준으로 삼아 선두에 세운 뒤, 거기에 자신의 사유를 뒤따르게 하고는 보편의 맥락을 획득한 양 하는 매판 분자의 가소로운 허위의식이 사라져야 하는 일입니다. 이 끄달림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똑똑 바보가 여전히 우리사회의 주류이며 상류입니다. 우리사회의 주류이며 상류인 자들이 낭자하게 뿌려놓은 매판의 언어에서 모국어를 해방하는 일이 우리 공동체의 근본 변혁입니다.


모국어를 해방하는 일은 언어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언어를 살아가는 사람의 문제입니다. 모국어로 매판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치유하고 그렇게 치유된 사람이 건강한 모국어적 삶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이 일은 그러므로 인문의 의학이며 의학의 인문입니다. 의학도인 저는 인문의 지평으로 나아갑니다. 거기 인문학도 그 누가 의학의 지평으로 나아오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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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름지기 고전은 고전인 까닭이 있습니다. 자고 나면 새로운 베스트셀러가 ‘떠서’, 마치 그것을 읽지 않으면 크게 뒤쳐지기라도 할 듯 요란 떨지만, 묵묵한 고전에서 날로 새로운 깨우침이 일어나는 법입니다. 세월의 더께 때문에 고전은 날로 가벼워져 묻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전이 고전인 까닭은 오늘 여기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비록 권위 있는 어떤 시공간에서 최종적으로 완성된 텍스트가 있을지라도 고전은 신성불가침의 경전이어서는 안 됩니다. 경전으로 떠받들리는 찰나 그것은 이미 고전이 아닙니다. 경전이 만들어내는 믿음에는 거짓의 독버섯이 무성합니다. 거짓을 걷어내고 살아 있는 진실을 마주하려면 경전을 가차 없이 베어버려야 합니다. 경전을 베는 마음 고갱이에는 의문이라는 용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의문은 내 앞에 놓인 삶의 고통이 빚어낸 눈물입니다. 그 눈물 없이는 당최 고전의 존재이유가 없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우리는 절체절명의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는 사건과 급격하게 마주쳤습니다. 꽃 같은 아이들 이백오십 명의 생명이 시시각각 죽어가는 것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바라보아야만 했습니다. 사건이 터지자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국가는 온통 거짓과 조작, 그리고 다양한 폭력을 동원해 국민을 우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수많은 날들이 흐른 지금까지 진실 규명은커녕 아무런 실질적 후속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희희낙락 살아가는 자들의 훤화 소리만 낭자하게 흩어지고 있습니다.


대체 아이들은 왜 죽었을까? 아니 왜 죽였을까? 이 사건을 단순 사고로 눙치고 이렇게 넘어가야 할까?


이 의문 앞에서 저는 아프디아프게 『중용』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난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문제가 야기한 이른바 촛불정국 때 저는 중학생인 딸과 함께 ‘왜?’라는 의문 속에서 『중용』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의문은 풀리지 않았고 세상은 더욱 두려움에 잠기고 말았습니다. 침묵의 시간을 흘려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침묵을 깨뜨린 아이들의 죽음이 저에게 다시 『중용』 읽기를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질문하기를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결국 그 때 그 아이들의 의문이 지금 이 아이들의 의문의 죽음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 권력이 그 아이들에게 ‘종북’ 딱지를 붙였듯, 지금 이 권력 또한 이 아이들을, 부모들을 ‘종북’으로 몰아 고립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 그 아이들을 죽이지 못한 분풀이를 이제 이렇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의문을 품는 것은 물론 갑절로 두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두렵기 ‘때문에’ 다시 읽기 시작하려 합니다. 바다 속 아이들은 이보다 더 두려웠을 테니 말입니다. 두려움의 연대로 인문의 새벽을 열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든 또 이런 비극은 일어날 테니 말입니다. 지금이야말로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고전 하나 들어 올려 아이들에게 헌정하는 일이 불가피한 때입니다.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면서 중용 헌정의 길로 삼가 걸어 들어가겠습니다.


고해인 김민지 김민희 김수경 김수진 김영경 김예은 김주아 김현정 문지성 박성빈 우소영 유미지 이수연 이연화 정가현 조은화 한고운 강수정 강우영 길채원 김민지 김소정 김수정 김주희 김지윤 남수빈 남지현 박정은 박주희 박혜선 송지나 양온유 오유정 윤민지 윤솔 이혜경 전하영 정지아 조서우 한세영 허다윤 허유림 김담비 김도언 김빛나라 김소연 김수경 김시연 김영은 김주은 김지인 박영란 박예슬 박지우 박지윤 박채연 백지숙 신승희 유예은 유혜원 이지민 장주이 전영수 정예진 최수희 최윤민 한은지 황지현 강승묵 강신욱 강혁 권오천 김건우 김대희 김동혁 김범수 김용진 김웅기 김윤수 김정현 김호연 박수현 박정훈 빈하용 슬라바 안준혁 안형준 임경빈 임요한 장진용 정차웅 정휘범 진우혁 최성호 한정우 홍순영 김건우 김건우 김도현 김민석 김민성 김성현 김완준 김인호 김진광 김한별 문중식 박성호 박준민 박진리 박홍래 서동진 오준영 이석준 이진환 이창현 이홍승 인태범 정이삭 조성원 천인호 최남혁 최민석 구태민 권순범 김동영 김동협 김민규 김승태 김승혁 김승환 남현철 박새도 박영인 서재능 선우진 신호성 이건계 이다운 이세현 이영만 이장환 이태민 전현탁 정원석 최덕하 홍종용 황민우 곽수인 국승현 김건호 김기수 김민수 김상호 김성빈 김수빈 김정민 나강민 박성복 박인배 박현섭 서현섭 성민재 손찬우 송강현 심장영 안중근 양철민 오영석 이강명 이근형 이민우 이수빈 이정인 이준우 이진형 전찬호 정동수 최현주 허재강 고우재 김대현 김동현 김선우 김영창 김재영 김제훈 김창헌 박선균 박수찬 박시찬 백승현 안주현 이승민 이승현 이재욱 이호진 임건우 임현진 장준형 전현우 제세호 조봉석 조찬민 지상준 최수빈 최정수 최진혁 홍승준 고하영 권민경 김민정 김아라 김초예 김해화 김혜선 박예지 배향매 오경미 이보미 이수진 이한솔 임세희 정다빈 정다혜 조은정 진윤희 최진아 편다인 강한솔 구보현 권지혜 김다영 김민정 김송희 김슬기 김유민 김주희 박정슬 이가영 이경민 이경주 이다혜 이단비 이소진 이은별 이해주 장수정 장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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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딸아이와 『중용』 읽기를 시작했습니다. 촛불 정국과 맞물리며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2010년에 알라딘 서재에 내용을 다시 다듬어 올렸습니다. 그러다가 세월호사건을 맞닥뜨리자 『중용』을 현실 정치의 구체적 콘텍스트에서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절실해졌습니다. 하여 기본적인 해석은 유지하되 전체 맥락을 세월호사건과 연결하는 것으로 대폭 수정하였습니다. 탈고한 뒤 출판사들과 접촉하였습니다. 책을 내주겠다는 반응은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출간을 포기하고 알라딘 서재에 올리기로 하였습니다. 오늘부터 시작하여 연재가 끝나는 날까지를 제 애도기간으로 삼고자 합니다. 


중용416

-세월호 아이들에게 헌정하다-







차 례


들어가기에 앞서

제1강 들어가며

제2강 제2장-평범함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제3강 제3장-백성은 화산이다

제4강 제4장-특별함이 도를 망친다

제5강 제5장-패도 천하에 중용 설 자리 없다

제6강 제6장-중용은 평등이다

제7강 제7장-중용은 선택의 문제다

제8강 제8장-사소한 것이 위대하다

제9강 제9장-평범해서 어렵다

제10강 제10장-어울리되 휩쓸리지 않는다

제11강 제11장-군자는 스타가 아니다

제12강 제12장-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다

제13강 제13장-네가 있어 내가 있다

제14강 제14장-내 삶은 내 몫이다

제15강 제15장-강이 되어 흐른다

제16강 제16장-바른 길 가되 자랑하지 않는다

제17강 제20장(1)-생명의 연대 속에 중용이 있다

제18강 제20장(2)-하늘은 그대 안에 있다

제19강 제20장(3)-중용은 영원한 과정이다

제20강 제20장(4)-수신으로 열어 수신으로 닫는다

제21강 제20장(5)-현실에서 통찰한다

제22강 제20장(6)-자신에게 떳떳하면 세상에도 떳떳하다

제23강 제20장(7)-중용은 독한 실천이다

제24강 제21장-참된 인식은 실천을 품고 있다

제25강 제22장-더불어 새로워지고 자란다

제26강 제23장-곡진함이 세상을 바꾼다

제27강 제24장-실천으로 꿰뚫어 본다

제28강 제25장-함께 흘러 생명이 된다

제29강 제26장(1)-온전히 채우면 온전히 비워진다

제30강 제26장(2)-만물은 하나다

제31강 제26장(3)-맑고 순수한 소통이여, 영원하라!

제32강 제27장-성인은 각자 자신의 성인이다

제33강 제28장-오늘은 오늘의 실천을 한다

제34강 제29장-군자는 명예를 백성의 가슴 속에 둔다

제35강 제30장-군자는 백성을 이기려 하지 않는다

제36강 제31장-군자는 백성과 공경을 주고받는다

제37강 제32장-진실의 전체성을 향해 투명하게 열리다

제38강 제33장-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

제39강 제1장-우리는 우리의 중용을 말한다

제40강 나오며

나온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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