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안다는 우스개 아닌 우스개가 있습니다. 앞의 말, 즉 실사實辭가 아무리 중요해도 맨 나중에 배치되는 ‘이다’, ‘아니다’라는 허사 한 마디로 의미가 뒤바뀌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변적, 비본질적인 것이 중심적, 본질적인 것을 좌우하는 셈입니다. 대륙에서도 주변이고, 해양에서도 주변인 우리의 지정학적 특수성과 연결하면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지만, 실제 역사에서 우리가 경험한 주변부적 삶에서 이 어법의 기원을 찾는 일이 마냥 허황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두 중심 세계가 마주선 가장자리에서 거머쥔 ‘캐스팅 보트’의 역동적 감성이 지니는 절묘함을 안다면 우리말의 이런 특성을 문제 해결의 열쇠말로 삼을 수 있습니다.

  요컨대 나-중심을 끊임없이 버리면서 남-경계, 주변, 가장자리로 나아갈 때 진정한 경청, 진정한 소통이 가능해집니다. 나를 규정하는 것은 중심인 내가 아니라 주변인 남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 남의 처지에서 보면 내가 주변이므로 이런 상호 관계가 소통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바탕이 됩니다. 실사를 움직이는 힘이 허사에 있다는 말은 이렇게 유력하고, 구성적이고, 가시적이고, 비범하고, 중요한 것들 중심으로 사고하는 패권주의를 거부한다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무력하고, 무위無爲적이고, 비가시적이고, 평범하고, 하찮은 것들을 끌어안는 어머니의 시각을 담고 있다는 뜻을 지닙니다. 이것은 수천 년 맞-가장자리에서 살아온 우리에게 하늘이 내린 인식론적 축복입니다.(191-192쪽)


“악마는 프랑스에서 탄생했다는 말이 있다. 악마를 부르는 the other나 l'autre가 영국에서 나폴레옹을 부르는 말이기도 해서 그런 말이 나왔겠지만, 이 이전에 프랑스의 어떤 근성, 밑바닥까지 내려가 뿌리를 파려는 그 투지에 원인이 있다.”


얼마 전 황현산 선생이 트위터에 올린 글입니다. ‘명석하지 않으면 프랑스어가 아니다.’라는 말도 있거니와 사유란 언어를 통해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치고 보면 프랑스적 사유의 ‘근성, 밑바닥까지 내려가 뿌리를 파려는 그 투지’는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릅니다. 전공자가 아닌 제 일천한 독서 경험만으로 보더라도 프랑스적 사유는 확실히 그런 면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그 근성 또는 투지를 바라보는 황현산 선생의 시선이 액면 그대로 ‘악마’적이라는 평가를 담고 있지 않음은 분명합니다. 이 문제의 스펙트럼을 흔들어가며 조금 더 큰 맥락에서 살펴보겠습니다.


현대 프랑스적 사유의 대표 가운데 하나인 자크 라캉과 그 추종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심각하게 맞닥뜨린 것은 그 집요한 천착穿鑿, 천착주의라고 할만한, 아니 천착증이라 해야 할 지나친 후벼 파기와 뒤집기였습니다. 도저함 너머 철저함, 철저함 너머 허망함으로까지 질주하는 ‘근성과 투지’가 저 같은 범박한 독자에게는 휴먼스케일human scale을 가뭇없이 벗어난 것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휴먼스케일을 벗어난 사유는 휴먼스킬human skill로 구체화될 수 없습니다. 정말 그랬는가 알지 못하지만 이런 정도라면 자크 라캉은 자신의 사유로써 정신장애 환자를 실제로 치료해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 ‘근성과 투지’는 임상적 관심을 사소한 것쯤으로 여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디디에 앙지외 이야기를 해보면 이 추정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디디에 앙지외의 『피부자아』를 번역한 사람이 권두에 쓴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 후 유명한 프랑스 여배우인 위게트 뒤플로가 자신을 박해한다는 망상에 시달린 끝에 그녀를 살해하려다 실패하고,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피해망상증 진단을 받고는 파리 생트-안느(Saint-Anne) 대학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여기서 그녀는 그 유명한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을 만난다. 자크 라캉과 디디에 앙지외, 정신분석학의 두 거목 사이의 기묘한 인연이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라캉은 그녀를 치료하기보다 그녀의 사례를 자기 논문에 이용하기 위해서 그녀로부터 정보를 수집하는 데 골몰했고, 그 결과 앙지외의 어머니에게 갈등과 적대감만을 남긴 채 1년간의 치료를 마치게 된다. 라캉이 ‘에메(Aimée)사례’로 이름붙인 이 사례는 그의 유명한 박사학위 논문인 「인격과의 관계 속에서 편집증적 정신증에 관하여」(1932)의 기초가 된다.


·······앙지외는, 1949년에 정신분석가가 되기 위해 파리정신분석협회(Société Psychanalytique de Paris(SPP))에 소속되어 라캉의 분석 수련생이 된다. 라캉과 자신의 어머니와의 관계는 전혀 모른 채 말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게 되기 전부터 앙지외는 라캉과의 분석에 깊은 불만을 품었고, 라캉은 앙지외에게 자기와의 분석에서 일어난 일들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며, 불편했던 4년간의 분석을 마치게 된다. 앙지외는 라캉과의 분석이 끝나고 나서야 자기 어머니가 라캉의 환자였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다. 그리고·······반 라캉 운동에 몸담게 된다. 비록 앙지외의 반 라캉 운동은 정신분석에 대한 이론적, 임상적 견해의 차이로 비롯된 것이지만 둘 사이의 이런 악연이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지 않았겠느냐는·······말들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어쨌든 앙지외는 구조주의, 언어학, 철학 등의 영역을 정신분석에 도입한 라캉주의 흐름과는 달리, 분석 받는 사람들 각각의 독특한 필요에 따라 해석의 기법과 분석 기법들을 변형하는, 실용적인 영미권의 정신분석이론들을 프랑스에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앙지외는 심각한 내적 상처들로 고통 받는 그의 내담자들을 감싸주고, 공감하고,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준 탁월한 정신분석가였고, 임상심리학과 정신분석학에서 중대한 이론적 공헌을 남긴 사상가였다.·······그는 어머니의 빈자리를 훌륭하게 대신한 아버지와의 친밀하고도 따뜻한 관계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그의 개인적인 아픔을 승화시켜, 보다 환자의 입장에서 치료하는 적극적인 정신 분석가가 될 수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은 앙지외가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어린 시절의 피부자아 형성의 중요성을 본인 스스로 실증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11-13쪽, 밑줄은 인용자 강조)


삶의 단순한 삽화가 아닌 중대한 서사로 얽혀들어 있는 자크 라캉의 핵심적 면모와 대비되면서 디디에 앙지외의 삶의 맥락이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난 글입니다. 디디에 앙지외의 삶의 맥락은 ‘실용’의 흐름 안에 있습니다. 그 실용의 흐름은 ‘구조주의, 언어학, 철학 등의 영역을 정신분석에 도입한 라캉주의 흐름’을 반대한 것입니다. 라캉주의 흐름을 반대한 이유는 실용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용적이지 않다는 것은 휴먼스케일을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휴먼스케일을 벗어난 까닭이 바로 자크 라캉의 천착증에 있습니다. 천착증은 프랑스 사유의 ‘중심의식’이 빚어낸 집착이며 강박입니다. 이 집착과 강박은 타인을 향한 공격과 지배로 번져갑니다. 자크 라캉이 디디에 앙지외와 그 어머니에게 그랬듯.


휴먼스케일을 벗어난 사유, 천착증을 불교적으로 번역하면 아라한입니다. 아라한은 소승적 깨달음의 극단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 깨달음의 극단이 주는 쾌락에 늘 머물러 있는 것을 지복으로 삼습니다. 그들은 중생의 고통에 관심이 없습니다. 있다 해도 구제의 실천을 하지 못합니다. 휴먼스킬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크 라캉이 그랬듯. 소승적 깨달음의 극단을 내려놓고 회향을 단행, 그러니까 휴먼스케일로 복귀하는 것이 보살입니다. 보살의 길은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한 대승적 되 깨달음의 길입니다. 대승적 되 깨달음이 바로 붓다입니다. 붓다는 휴먼스킬을 지니고 있습니다. 디디에 앙지외가 그랬듯.


붓다의 길이 허사의 길입니다. 허사의 길은 나-중심을 끊임없이 버리면서 남-경계, 주변, 가장자리로 나아가 진정한 경청, 진정한 소통이 가능해지도록 합니다. 허사의 길은 유력하고, 구성적이고, 가시적이고, 비범하고, 중요한 것들 중심으로 사고하는 패권주의를 거부합니다. 허사의 길은 무력하고, 무위적이고, 비가시적이고, 평범하고, 하찮은 것들을 끌어안는 어머니의 시각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여기 대한민국에서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치유의식’을 지닙니다. 치유의식은 “어떤 근성, 밑바닥까지 내려가 뿌리를 파려는 그 투지”, 그 아라한의 천착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천착에 머무르는 아라한이야말로 ‘악마’의 실재입니다. 살해 국가의 중심, 그 실사를 무너뜨리기 위해 부단히 구원 공동체가 살아 숨 쉬는 변방, 그 허사를 일으키는 보살의 치유의식은 지금 슬픔과 고통의 땅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팽목항에. 동거차도에. 안산에. 광화문에. 밀양에. 강정에. 그리고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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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4장 본문입니다.

 

子曰 道之不行也 我知之矣. 知者過之 愚者不及也. 道之不明也 我知之矣. 賢者過之 不肖者 不及也. 人莫不飮食也 鮮能知味也.

자왈 도지불행야 아지지의. 지자과지 우자불급야. 도지불명야 아지지의. 현자과지 불초자 불급야. 인막불음사야 선능지미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도가 행해지지 않음을 나는 알겠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나치고 어리석은 사람은 모자라다. 도가 밝아지지 않음을 나는 알겠다. 어진 사람은 지나치고 못난 사람은 모자라다. 사람이 마시고 먹지 않음이 없으나 그 맛을 아는 경우가 드물다.” 

 

2. 중용의 도가 실행되기 어려운 이유는 이미 앞 장에서 암시한 바 있습니다. 최고의 경지이니 그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대뜸 실천에 옮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이 어려움을 신비와 탈속의 차원에서 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불가佛家나 선가仙家의 ‘공부工夫’ 식이라면 처음부터 중용을 말할 까닭이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그것은 인간의 사회적, 문화적 삶 속에서 행해질 수밖에 없는, 또 그래야 하는 수준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어려움은 중용 자체의 경지 문제라기보다는 우리가 형성하는 사회, 문화 관계의 문제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근거가 제시됩니다.

 

지혜로운, 또는 아는 사람은 지나치고 어리석은, 또는 모르는 사람은 모자란다고 공자께서 진단하셨습니다. 여기서 지자知者와 우자愚者가 대비된 것은 문자 그대로 보면 이상합니다. 우자가 모자란 것은 당연한데 어찌하여 지자는 지나친 것일까요? 참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그럴 리 없지 않겠습니까?

 

결국 여기 지자는 ‘이른바’ 아는 사람이란 뜻이지요. 스스로 그리 여기는 사람이라고 보아도 별 무리는 없겠지만, 제 생각에는 사회적인 의미에서 지자로 여겨지는 집단으로 보는 게 더 나은 이해인 듯합니다. 요즘 잘 쓰는 말로 사회 지도층인 셈이지요. 권력, 돈, 지식을 통해 사회를 쥐락펴락하는 지배층이 바로 그들입니다. 

 

지배층의 앎은 어리석은 자들과 선을 그은 상태에서 규정된 정치적 차원을 획득하게 됩니다. 당연히 어리석은 사람들, 즉 일반 백성은 ‘아랫것’이 되는 것이지요. 하여 그들은 입만 열면 백성을 훈계하려 듭니다. 우리사회에서 그 표본을 너무나 여실히 목격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앎은 소인의 앎입니다. 그와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군자의 앎, 곧 대지大知가 제6장에 나옵니다. 대지는 자신과 어리석은 사람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여기 지자는 사회를 분열시킴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 기득권을 유지하는 천박한 지배층, 즉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의 정글 법칙을 구가하는 집단입니다.

 

어리석은 사람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스스로 패배주의에 빠진 개인들을 의미할 수도 있겠지만, 지배집단에서 배제된/분리된 사회정치적 존재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전자는 후자를 만든 전략의 산물일 테니 말입니다. 

 

3. 중용의 도가 밝게 펼쳐지지 않는 까닭 또한 이치적으로 동일합니다. 이른바 어질다고 하는 사람은 지나치고 이른바 못났다고 하는 사람은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지자와 현자를 구태여 구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知와 행行을 연결하고 현賢과 명明을 연결한 것은 어찌 보면 엇갈린듯하지만 오히려 이론과 실천을 통일적으로 이해하는 실사구시의 관점이라고 이해하면 훨씬 선 굵은 읽기가 가능하겠지요. 

 

4. 지나치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특별하다’는 뜻입니다. 특별하려면 극단적 프로세스를 써야 하고 극단적 프로세스를 쓰려면 소통을 거절해야 하므로 중용을 어긴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소통을 거절하면서 ‘아랫것’들의 무지를 탓하겠지요.

 

모자란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특별한’ 자들에게 소외, 억압당하는, 그래서 소통에서 제외된 상태를 뜻합니다. 또한 그것을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결국 그 상태는 이른바 어리석고 못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존재에 반하는 선택을 하도록 몰아갑니다. 지난 세월 동안 우리사회에서 수도 없이 목도한 바 있으니 더 이상 군더더기를 붙일 까닭이 없겠군요.


5. 우리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마시고 먹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을 단순히 생명 유지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여긴다면 구태여 맛을 거론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 분위기대로라면 맛과 그것을 아는 것은 중용의 도를 설명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봐야 합니다.  

 

마시고 먹을 때 그 음식의 맛을 알고, 모르는 것은 대체 어떤 맥락에서 중용의 도를 설명하는 핵심 사례가 되는 것일까요? 아마도 맛에 탐닉하는 자들과 맛조차 모른 채 허겁지겁, 또는 딴 생각에 사로잡혀 마시고 먹는 자들의 극단을 염두에 두면서 한 말이었을 것입니다.

 

‘특별한’ 자들은 자체 생명인 음식의 고유한 향미를 넘어선 즐거움을 탐하므로 중용을 어겼습니다. ‘아랫것’들은 맛은커녕 연명에 급급하여 생명인 음식의 가치로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둘 다 음식의 형태로 마주선 생명과 소통하지 못했습니다.

 

수운 최제우의 사상에 동의함으로 말하건대, 음식은 하늘입니다. 하늘이 하늘을 기르는[양천養天] 거룩한 사건이 마시고 먹는 것입니다. 이런 어법대로라면 음식의 맛을 아는 것은 바로 그 거룩함을 알아차리는 일입니다. 마시고 먹는 사건의 거룩함은 유미주의와 실용주의를 가로지르는 경계에서 피는 꽃입니다.

 

6. 마시고 먹는 일상의 사소한(!) 일을 예시하신 공자의 의중은 무엇일까요? 길고 깊게 수런거릴 일 없습니다. 중용 자체가 평범함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니 그렇고, 그 평범함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시공간이 바로 사소한 일상이니까 그렇습니다. ‘사소함은 과소평가된 위대함’이란 사실을 간파한 통찰이 숨 쉬고 있습니다.

 

마시고 먹는 일은 관통과 흡수로 요약되는 중용의 본령이 가장 구체적 현실로 드러나는 장場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일/놀이와 잠, 대화, 성性, 호흡 등도 동일한 중용 도량道場임에 틀림없습니다. 사실 눈에 보이는 이런 일상의 거룩함에 터 잡지 않은 가치,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이념, 사상, 종교 따위의 이른바 거룩함은 죄다 뜬 구름일 따름입니다. 그야말로 사소한 예 하나로 대소大小, 성속聖俗 이분법이 즉각 사망 처리됩니다. 지우知愚, 현불초賢不肖 이분법은 더 이상 숨 쉴 수 없습니다.  

 

7. 이치와 달리 현실 세상은 수직이분법의 세상입니다. 공자의 절망, 중용의 좌절은 바로 세상을 둘로 갈라야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특별한’ 소수 집단이 권력, 돈, 지식을 독식한 데서 연유합니다. 그들의 독단은 언제나 도를 넘어섭니다. 공자의 앞에서도 그러하고, 오늘 우리 앞에서도 그러합니다.


 

국민은 죽어나가는데 연일 웃는 얼굴 아니면 짐짓 엄숙한 얼굴로 대문짝만 하게 신문, TV에 나오는 사람들이 나라를 말아먹고 있는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은 도리어 국민에게 끊임없이 뭔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숭배든, 복종이든, 희생이든, 표든.......대놓고 함부로 취합니다. 음식 맛 아닌 제 입맛에 맞추어 거리낌 없이 욕설을 퍼부으면서 독식사회를 구축해 갑니다. 걸핏하면 편향, 변덕, 무지를 들먹이며 ‘아랫것’을 꾸짖습니다. 자신들만 중용의 도를 실천한다고 스스로 속이면서 바로 이 순간도 세상을 위아래로 갈라놓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특별한’ 무리들은 매판·독재·분단고착을 통해 나라를 망치고 도를 망칩니다. 이들에 맞서 자주·민주·통일을 이루려면 어리석다, 모자라다 낙인찍힌 사람들, 평범한 변방의 사람들이 사소한 일상에서 삶의 감각을 되찾아야 합니다. 모국어 맞춤법은 틀리면서 영어 몰입 교육 운운하는 자에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산화탄소를 이산화가스라고 하면서 5개 국어 한다고 떠드는 자에게 휘둘리지 말아야 합니다. 아니 그보다 먼저, 매일 마시고 먹는 음식의 맛부터 제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이 진짜 혁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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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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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말의 어휘 가운데 유난히 발달돼 있는 것은 형용사입니다. 가령 빨갛다, 붉다, 불그스레하다, 같이 적색을 표현하는 어휘만 무려 16가지에 이릅니다. 영어 어휘가 두세 가지인 점과 비교하면 큰 차이지요. 이런 특성은 우리가 개념화와 분류에 익숙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줍니다. 현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말입니다. 개념과 분류를 통해 생각을 틀 속에 가두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더군다나 우리말의 형용사는 인도-유럽어 계통과 달리 명사에 가까운 말이 아니고 동사에 가까운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형용사가 발달했다는 사실은 우리 사고의 역동성을 뒷받침해줍니다. 현실 세계의 흔들림과 떨림을 가감 없이 느끼려 한다는 것입니다. 변화무쌍한 세계를 불변하는 법칙으로 묶어서 간접적으로 파악하는 게 아니라 변화 그 자체의 결을 따라 직접적으로 읽어낸다는 뜻입니다.

  ·······사람도, 병도 모두 다릅니다. 사연도, 병정도 모두 다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각각 맞는 치료의 도정이 있습니다. 치료자가 자신의 개념적 지식의 틀에다 환자를 우겨넣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을 온전히 내려놓고 아픈 이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경청함으로써만 진정한 치료가 시작됩니다. ‘불그스름한’ 사연과 ‘불그죽죽한’ 사연의 차이를 섬세하게 느낄 줄 알아야 마음을 만질 수 있습니다.(190-191쪽)


어제 낮, 점심 식사 끝내고 글을 쓰기 위해 책상에 앉았으나 나른함 때문에 얼마 견디지 못하고 일어섰습니다. 접수실로 나가 잠시 TV에 눈길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립던 얼굴 하나가 환한 미소와 함께 홀연히 나타났습니다. 한 동안 소식이 없었기에 더욱 반가웠습니다. 그는 제법 오래 전 결혼에 실패한 적이 있었습니다. 마음 아파하던 세월 동안 제가 그 옆에 앉아 있어주었습니다. 예고 없이 나타나더니 다시 불쑥 무엇을 내밀었습니다. 청첩장이었습니다. 대견하다며 안아주니 행복한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아픈 세월에 대한 마지막 위로를 전하자 깊은 사랑을 경험했던 시간이었다며 오히려 감사로 되 건네주었습니다. 임신 돕는 한약 한 제를 결혼 선물로 약속했습니다. 고마움으로 받고 돌아서는 마흔네 살 싱그러운 처녀를 보내며 모처럼 따스한 마음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제 눈에 비친 그 마흔네 살의 여인은 누구보다도 싱그러운 처녀였습니다. 제가 그에게서 싱그러움을 읽어내는 데에는 어떤 “개념화와 분류”로도 포착할 수 없었던 그의 지난 삶에 대한 증인의 눈길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는 모든 준비가 끝나 예식만 올리면 되는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파혼을 당했습니다. 그 결혼예식의 주례를 맡기로 했던 사람이 바로 저였습니다. 주례를 맡긴 결혼 상대방은 제 후배였습니다. 호되게 야단을 쳤으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후배는 그 뒤 결국 저와 인연을 끊었습니다. 저는 후배가 버린 그를 보살피고 치유하는 희한한 인연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후배는 몹쓸 병에 걸려 일찍 세상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 소식을 그에게 전하지 않았습니다. 마흔넷의 싱그러움에 갖추는 마지막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병도 모두 다릅니다. 사연도, 병정도 모두 다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각각 맞는 치료의 도정이 있습니다.” 지천명도 지난 치료자였으나 상담 초기 저 또한 “현실 세계의 흔들림과 떨림을 가감 없이 느끼”지 못한 채, 제 지식의 체계 안에 사람과 병을 가두려 했습니다. 충격적 실패를 경험하고서야 제 틀을 깨고 사람과 병의 적나라한 진실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과 병 “그 자체의 결을 따라 직접적으로 읽어낸다는” 것의 요체를 깨닫고부터는 상담의 계획을 아예 짜지 않았습니다. 그때그때 상담의 현장에서 사람과 질병의 움직이는 진실 속에서 함께 방향을 잡고, 내용을 펼쳐갔습니다. 지금은 상당한 정도 일심-화쟁-무애의 흐름에서 노닐 수 있습니다. 상담이 사적 행복과 공적 참여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수준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형용사적 감수성 덕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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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3장 본문입니다.

 

子曰 中庸 其至矣乎 民鮮能久矣.

자왈 중용 기지의호 민선능구의.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중용은 최고의 도리다. 백성들은 오래 지속하기 어렵다.”

 

2. 평범함에서 늘 벗어나지 않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실천의 덕목입니다. 자신의 기득권에 대한 애착과 집중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같은 정도로 대우해야 하는 상대방과 소통하려면 필승의 전략이 아닌 공감의 진정성을 지녀야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성으로 세상을 살기 얼마나 어려운가, 그런 자세로 살면 백전백패할 것인데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영혼 깊숙이 동의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2장에서 보았듯이 ‘특별한’ 존재로 인정 받고, 거리낌 없이 사는 사람들이 세상의 권력, 돈, 지식을 거머쥐고 있는데 그들 밑에서 힘없이, 궁핍하게, 더듬거리며 한 평생을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리 애쓰며 살아도 고작 백년 안쪽인데 도덕이며, 가치며, 아름다움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런 생각에 누군들 빠져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소인에 맞서 상생의 세상, 대동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군자의 길에 선뜻 나서, 내내 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마도 여기 백성, 곧 민民이라 함은 소인다운 삶의 자연Sein적 매력과 군자다운 삶의 당위Sollen적 기품 사이에서 흔들리는 다수 시민을 가리킬 것입니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특별한’ 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존재이므로 참 소통의 길, 즉 군자의 길에 목말라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소인의 저 ‘특별한’ 소유도 가없는 열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어느 순간 분연히 떨쳐 일어나 군자의 결기를 세워 보지만 이내 주저앉게 됩니다. 자긍심에 상처 입은 처자식의 슬픈 눈망울을 뿌리치는 일이 권력, 돈, 지식을 뿌리치는 일보다 쉽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자신의 남편이, 자신의 아버지가 중용의 삶을 살아갈 때 흔쾌히 동의하고 동참할 아내와 자식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 길을 모델로 제시하며 따르도록 강요할 권리를 가진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오래 지속하기 힘듭니다. 그들은 하루하루를 눈물겹게 살아가기에도 버거운 몫을 지니고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입니다. 


3. 하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비록 오래 지속할 수는 없으나 백성은 때때로 화산이 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짧은 순간 집중된 결기로 중용이 수직적 성취를 이룰 수 있게 하는 거대한 힘이 된다는 것 말입니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백성의 존재는 숭고합니다. 또 그래서 백성이 백성인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중용의 도를 오래 지속하지 못하는 백성을 두고 한탄하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닙니다. 본디 중용의 도를 지속시키는 것은 군자의 몫입니다. 군자는 그 길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그가 선택한 만큼이 그의 삶이니 그로써 군자 되는 것이 군자의 숙명입니다. 군자라면 그 숙명 속에서 백성을 만나 그들과 소통함으로써 변혁의 여울목으로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중용의 여정은 군자 다로 백성 따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군자 따로 백성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크게 하나大同입니다.


4. 우리 역사를 잠시 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물경 일천오백 년에 걸친 매판사적인 이익을 위하여 외국 자본의 앞잡이가 되어 제 나라의 이익을 해치는 일이나 사람의 장구한 역사 가운데 인조반정 이후 단 한 번도 패권을 놓아본 적이 없다는 서인 노론 시대 이야기(신영복 선생의 주장에 대한 기본적 동의를 전제한 것임.)만 간추려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 군자연君子然했으며, 그 무엇보다 중용의 도를 지켰다고 자부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앞장서서 제 나라 조선을 일제에 팔아먹었습니다. 식민지 35년 동안 충실히 부역했습니다. 그들이 매판으로 떵떵거리며 사는 동안 백성은 독립혁명투쟁을 일으켰습니다. 3.1혁명을 비롯한 여러 만세운동이 그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장투쟁이 그것입니다.


해방 뒤에도 서인 노론 집단은 반성은커녕 반공주의를 무기 삼아 다시 집권세력이 되었습니다. 매판과 독재, 그리고 분단체계를 하나로 묶어 지금까지도 승승장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매판으로 떵떵거리며 사는 동안 백성, 그러니까 국민은 또 다시 목숨 걸고 자주·민주·통일을 위한 혁명 투쟁을 일으켰습니다. 4.19혁명이 그것이고 5.18혁명이 그것이고 6.10혁명이 그것입니다. 촛불집회 또한 같은 맥락에 있는 것입니다.


국정원과 군부의 명백한 선거 개입, 심지어 개표 시스템 조작을 통한 총체적 부정이라는 문제 제기까지, 이른바 정통성 시비에 휘말린 현 집권세력은 급기야 세월호사건을 일으키고 사고로 조작했습니다. 서인 노론 식 공작정치의 전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이제 국민은 어떻게 화산이 될 수 있을까요? 과연 중용의 수직적 성취를 이룰 수 있을까요?



현실 상황으로 판단컨대 고전적 혁명의 가능성은 낮아 보입니다. 사회정치적 모든 지표가 여실히 전해주고 있습니다. 빅 데이터의 예측이 그리 말하고 있습니다. 지표와 예측을 넘어서는 어떤 순간을 우리는 기다립니다. 기다리기 위해 우리는 먼저 길을 나섭니다. 그 길이 바로 인문의 길입니다. 인문의 길은, 혁명을 오래된 미래로 품고 있습니다. 화산의 풍경을 삭힌 감성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때리지 않고 울려서 성벽을 무너뜨립니다.


오늘 여기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인문 역시 고전적 인문은 아닙니다. 허구와 관념적 성찰의 영지에서 떠올리는 문학이나 철학이 주도하는 인문은 무력하고 한가합니다.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고 지향하는 경험의 서사가 지휘하는 실재the Real인문이 우리의 길입니다. 픽션과 논픽션, 문학과 의학, 철학과 과학, 심리학과 사회학, 시와 소설이 서로 경계를 가로지르며 실재 세계를 구성하는 길이 실재인문의 길입니다. 실재인문의 숨결에 우리 공동체의 마지막 감동이 달려 있습니다. 그 마지막 감동을 화산이게 하지 못하면 우리 공동체는 소멸하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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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장은 어기語氣나 내용이 기획적인 것으로 보아 후대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증 여부와 상관없이 그런 판단에 의거, 맨 뒤에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2. 제2장의 본문입니다.

 

仲尼曰 君子 中庸 小人 反中庸. 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小人之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

중니왈 군자 중용 소인 반중용. 군자지중용야 군자이시중, 소인지중용야 소인이무기탄야.


중니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중용을 하고 소인은 중용을 거꾸로 한다. 군자가 중용을 하는 것은 군자다우면서 때에 알맞게 하고, 소인이 중용을 거꾸로 하는 것은 소인스러우면서 꺼리는 것이 없다.” 이하 기본적으로 이기동의 『대학·중용 강설』 역을 따름.

 

3. 군자라는 용어는 익숙한 만큼 어려운 말입니다.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게 함정이지요. 그래서 추상적이고 모호한 개념으로 둥둥 떠다니는 겁니다. 무엇보다 미리 전제된 개념이라는 인식이 일을 더욱 어렵게 만듭니다. 구체적 문맥에서 군자의 내포를 찾지 않고 막연한 카리스마를 부여함으로써 은연중에 통치자나 지배집단과 등치시키는 상징조작에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구체적 문맥에서 보면 중용을 실천하는, 그러니까 “중용하는” 사람이 군자입니다. 구체적 문맥을 보편적 지평으로 재빨리 전환하는 전술이 바로 주어와 술어의 위치를 바꾸는 것이지요. 중국인들이 전가의 보도로 쓰는 어법입니다. 검증 과정 없이 역명제를 연역법의 선두에 세우는 일,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중용을 실천하고서야 비로소 군자가 될 수 있기에 중니께서는 뒤에 “도가 아마 행해지지 않을 것이다.”(제5장)라고 하여 군자가 ‘형성’될 수 없는 세상을 한탄하셨습니다. 바로 다음, 순 임금의 실천을 근거로 들며 “이로써 순이 되었다.”(제6장) 즉 “중용을 실천함으로써 군자가 되었다.”라고 갈파하셨습니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보건대 기본적으로 군자는 순 임금의 실천을 따르는 공자 자신을 가리킵니다. 이는 마치 신약성서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人子’라 하신 것과 같습니다. 제자들이 하느님을 보여 달라고 하자 “나를 본 것이 곧 하느님을 본 것이다.”라고 일갈하신 것과도 같습니다. 결국 이를 신성모독으로 간주한 모세종교 집단의 손에 예수가 죽었듯이 군자-자의식을 가진 공자는 끝내 제후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공자가 군자면 저들은 필연적으로 소인일 테니 말입니다. 

 

이런 맥락의 연장선에서 보면 군자란 공자를 대표단수로 하는 당시 사대부 계층 혁신 세력, 그 사상, 그 실천의 지향점을 가리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늘날 표현으로 바꾸면 “깨어 있는 민중 지성” 정도라고 할까요. 지나친 비약이 아닌 까닭은 다시 제6장에 나옵니다. 순 임금이 “묻기를 좋아하고 평범한 말을 살피기를 좋아했다.”는 사실 말입니다. 평범한 말이 무엇인 줄 안다면 군자를 이렇게 아래로부터, 그리고 집단적으로 자리매기는 데 이의를 달기 어려울 것입니다. 


4. 이렇듯 주희의 뜻과는 상관없이 군자는 약육강식, 승자독식을 추구하는 기득권 특수층 세력에 맞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려는 혁신적, 저항적 주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군자의 사회적 행동의 강령인 중용은 약육강식, 승자독식에 맞서는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맥락에서 볼 때 중용은 거의 모든 주석들이 답습하는 것처럼 명사적 어법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명사적 이해에서는 중中이 핵심 가치이고 그 중이 불변하는 법칙임을 천명하는 게 용庸이라는 식으로 규정됩니다. 명사로서 중이 무엇이냐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지만 사실은 그럴수록 관념성만 깊어질 뿐입니다. 명사라는 것이 그 본령 상 추상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중용 자체를 동사 구문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 동사 구문 전체가 군자의 사회행위를 드러내는 술어가 됩니다. 중은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을 지닌 동사입니다. 용은 말 그대로 “평범하다.”는 뜻입니다. 결국 중용은 “평범함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간결한 뜻을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약육강식, 승자독식 사회에서 강자, 승자가 되려면 극단적 프로세스를 선택하는 ‘특별함/특수함’을 무기로 지녀야 합니다. 뭇 제후가 공자에게 바란 것이 바로 이런 ‘특별한/특수한’ 프로세스였고 그들이 그것을 통해 휘몰아가는 세상이 바로 춘추전국의 피바람이었지요.  

 

권력, 돈, 그리고 종교(지식)의 삼각동맹으로 사회이익을 독점하려고 준동하는 제후의 탐욕에 맞서 평범한 다수의 삶의 가치에 굳건히 닻을 내리려 했던 공자의 몸부림이 다름 아닌 중용입니다. 그러면 평범한 다수의 가치인 그 ‘평범함’은 무엇일까요?

 

평범하다는 것은 그저 그렇다는 뜻이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산다는 뜻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산다는 것은 모순적 대칭구조로 이루어진 세계를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 대칭의 경계에서 부단히 모순의 공존융통을 위해 ‘거래’하는 삶이 바로 평범함입니다.

 

거래는 상호 ‘관통과 흡수’를 전제합니다. 쌍방향적 관계 형성입니다. 소통입니다. 제후적인 일방통행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쌍방향 소통을 하려면 자아의 중中, 곧 가운데를 버리고 ‘경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기득권으로서 중을 버려야 비로소 중용을 이룬다는 역설이 여기에서 성립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동사로서 중의 실질적 내용은 “끊임없이 경계로 나아간다.”는 역동적 경향성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경계를 향해 나아가는 주체적 결단에서 늘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경계에는 자신과 동등한 주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와 만나 일구어내는 ‘서로 주체성’철학자 김상봉의 용어의 세상이 바로 군자의 세상입니다. 군자의 세상은 거창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습니다. 상호 소통, 거래, 관통과 흡수가 일어나는 일상적 사건 그 자체입니다. 그것이 용입니다. 그 용을 바르고 아름다운 흐름으로 만드는 것이 중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종래 중용 이해는 거꾸로 된 것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주희와는 맞는지 모르나 공자와는 맞지 않는, 아니 우리와는 맞지 않는 식민지적 해석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용도 실천이요 중도 실천이니 둘 다 동사입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도리어 용에 있습니다.

 

5. 대칭구조로 된 현실세계에서 모순을 ‘공존융통’시키는 건강한 거래, 공정한 소통은 시의성, 곧 시중時中이 생명입니다. 찰나마다 서로 주체의 상황은 변하므로 그에 알맞게 소통해야 합니다. 영원불변하는 규범이란 논리적인 차원에서라면 모르되 현실적으로는 무의미한 것이지요. 죽어도 해야 한다, 죽어도 해서는 안 된다, 이런 강박적 기준은 제후의 가치입니다. 군자는 때에 맞추어 그저 올바르게 할 따름입니다.

 

6. 중용의 공간적/공시적synchronic 지평은 서로주체성의 평등, 평화 사회이념으로 나타나고 시간적/통시적diachronic 맥락은 투명한 혁신, 저항의 역사의식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이해야말로 평범한 사람, 즉 중용의 사람이 읽는 중용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주희와 그 아류를 따르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7. 군자가 위와 같이 자리매겨진다면 소인은 당연히 ‘홀로주체성’에 입각해 분열적, 강박적으로 강자의 길, 승자의 길을 추구하는 저 춘추전국 시대의 제후 무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주희 아류의 사람 또한 거기에 소속되겠지요. 더 나아가 오늘 우리를 살펴본다면 약탈적 자본주의,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지배집단이 바로 소인입니다.

 

입만 열면 “국민을 위한다.”면서 말끝마다 국민을 향한 훈계를 달고 사는, 아마도 속으로 자신들을 군자라고 생각할, 이른바 사회지도층이 바로 소인 집단임에 틀림없습니다. 저들은 스스로 중용한다고 함으로써 오히려 소인임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으니 소인답습니다. 저들은 부정선거, 뇌물 수수, 부동산 투기, 주가조작, 이중국적 취득, 탈세, 병역 기피, 위장 전입, 심지어 살인까지 거리낌 없이[무기탄無忌憚] 행하고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니 가히 소인의 중용답습니다.

 

되는 대로 지껄이고 닥치는 대로 말을 바꿉니다. 개인적 신념과 국가 경영철학을 혼동합니다. 사적 처지와 공적 지위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 한다면서 지역감정에 편승합니다. 양극화가 극으로 치달으며 서민경제는 파탄의 나락으로 떨어지는데 민영화 운운 제 곳간 채우려는 궁리만 합니다. 과연 기탄없습니다.


무엇보다 이 소인배는 소통을 거부합니다. 자기 말만 하고 귀를 닫습니다. 유체이탈 어법으로 초월자 놀이를 물색없이 즐깁니다. 자기 잘못을 남에게 투사합니다. 악행을 저지르고 정의구현을 외칩니다. 거짓말을 하고 정직을 훈계합니다. 이런 뻔뻔한 일방통행, 그 사이코패스가 낳은 최악의 범죄가 바로 2014년 4월 16일의 세월호사건, 저 천인공노할 대량학살genocide입니다. 일방적으로 저지르고 일방적으로 조작하고 일방적으로 왜곡했습니다. 지금도 일방적으로 역사에서 지우려고 온갖 협잡을 마다하지 않고 있습니다. 소인배도 이런 소인배는 다시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막히게도 이들이 바로 우리사회를 이끌어가는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권력, 돈, 종교(지식)를 석권한 ‘뜬 사람’celebrity입니다. 이들 눈에는 ‘평범한’ 국민들이 중용과는 아무 관련 없는 무지렁이로 보이겠지요. 허나 그들의 그 ‘특별함’이야말로 ‘무기탄’과 동의어임을 어느 누가 부인할 것입니까?


8. 군자는 늘, 때에 알맞게 평범함에서 벗어나지 않음으로써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기득권적 중심을 버리고 스스로 경계로 나아가 타인과 소통함으로써 대동大同 세상을 만들어 갑니다. 그러므로 그의 영혼은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시대정신에 맞서는 투명한 날카로움으로 빛납니다. 군자의 영혼이야말로 원철학적 혁명이요, 기품 있는 좌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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