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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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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명령이 아니라 성과를 향한 압박이 탈진 우울증을 초래한다.(26-27쪽)


  긍정성의 과잉 상태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animal laborans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성과주체는·······자기 자신의 주인이자 주권자이다.·······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28-29쪽)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와 “주인이자 주권자이다.”는 상호모순입니다. 한병철은 알랭 에랭베르의 오류를 지적하면서는 주권을 부정합니다. 반대로 <규율사회의 피안에서>라는 소제목 아래 있는 글을 마무리하는 바로 다음 문단에서는 주권을 인정합니다. 이것은 한병철의 논리적 실패일까요? 그렇습니다. 그러면 둘 중 하나만 맞을까요? 아닙니다. 둘 다 맞습니다. 한병철은 자기 자신이 인지하지 못한 논리적 실패를 통해 결과적으로 진실의 전경을 드러내 보인 셈입니다.


동질적 긍정성의 시대를 노동하는 성과주체가 스스로 열었다면 모순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노동하지 않으면서 타인의 노동의 열매를 수탈하는 자들이 이 시대를 열었기 때문에 모순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질적 긍정성은 실체적 진실이라기보다 수탈자들이 동원한 전략적 이미지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미지로서 언어가 실재를 오염·타락시키는 상태입니다. 마치 현 정권이 원칙이라는 언어를 전유함으로써 원칙의 실재를 오염·타락시키는 것과 동일합니다.


동질적 긍정성은 동질적 긍정성이면서 동질적 긍정성이 아닙니다. 우울증 환자가 스스로를 착취함으로써 착취자와 피착취자가 일치하게 되는 역설보다 이 역설이 더 근본적입니다. 이 역설이 우울증 역설의 원인이자 해결의 열쇠입니다. 이 역설의 인식과 실천을 누락시키면 우울증은 개인 문제로 환원되고 맙니다. 우울증은 정치경제학적인 문제입니다. 우울증에 입대는 사람은 자신이 공적 참여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한병철의 글은 모호해 보입니다.


우울증을 치료하면서 가장 많이 부딪치는 문제 가운데 하나가 가족들의 몰이해입니다. 거의 예외 없이 귀책사유가 환자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족, 특히 부모의 미명으로 가해의 실재를 덮고 환자 스스로 우울증에 빠져들었다고 몰아버리거나, 설혹 가해 실재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과거를 붙들고 있는 것이 잘못이라고 다그칩니다. 일부러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면서 아이들이 철이 없어 못 나왔다고 말한 세월호사건 해경의 태도와 같습니다. 동질적 긍정성이란 교묘한 음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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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6장 두 번째 본문입니다.

天地之道 可一言而盡也.

천지지도 가일언이진야. 

其爲物不貳 則其生物不測. 

기위물부이 즉기생물불측. 

天地之道 博也厚也高也明也愈也久也. 

천지지도 박야후야고야명야유야구야. 

夫天 斯昭昭之多 及其無窮也 日月成辰繫焉 萬物覆焉. 

부천 사소소지다 급기무궁야 일월성진계언 만물복언. 

今夫地 一撮土之多 及其廣厚 載華嶽而不重 振河海而不洩 萬物載焉. 

금부지 일촬토지다 급기광후 재화악이부중 진하해이불설 만물재언. 

今夫山 一卷石之多 及其廣大 草木生之 禽獸居之 寶藏興之. 

금부산 일권석지다 급기광대 초목생지 금수거지 보장흥지. 

夫水 一勺之多 及其不測 黿鼉蛟龍魚鼈生焉 財貨殖焉.

부수 일작지다 급기불측 원타교룡어별생언 재화식언.


천지의 도는 한마디로 다 할 수가 있다. 그것은 그 모습이 둘로 나누어지지 않기 때문에 만물을 생성하는 것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천지의 도道는 넓고 두텁고 높고 밝고 유원하고 오래 지속된다. 지금 하늘은 곧 밝고 밝은 것이 많이 모인 것이지만 그 무궁함에 이르러서는 해와 달과 별들이 거기에 매달려 있고 만물이 그것에 덮이어 있다. 지금 땅은 한 줌의 흙이 많이 모인 것이지만 그 넓고 두터움에 이르러서는 화산華山과 악산嶽山을 싣고 있어도 무거워함이 없고 강과 바다를 수용하고 있으면서도 새지 않으며 만물이 거기에 실려 있는 것이다. 지금 산은 한 주먹만 한 돌이 많이 모인 것이지만 그 광대함에 이르러서는 초목이 거기에서 자라고 금수가 거기에서 살며 보물들이 거기에서 생겨난다. 지금 물은 한 술씩 많이 모인 것이지만 그 헤아릴 수 없음에 이르러서는 큰 자라·악어·교룡·물고기·자라가 거기에서 살고 재화가 거기에서 불어난다.

2. 이 문단 해석에 결정적인 구실을 하는 부분을 앞 문단 내용에서 그대로 가져오겠습니다.

“온전히 적확하고 치열한 실천[지성至誠]은 자신의 엄정한 조건 속에서 스스로를 강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세상을 바꿉니다. 그렇게 바꾸어 낸 세상과 혼연일체가 되어 흘러갑니다. 애써 자랑하지 않아도 다 압니다. 구태여 힘주지 않아도 바꿀 수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조종하지 않아도 잘 되어갑니다.”

이 문단에서 “그 모습이 둘로 나누어지지 않기 때문에 만물을 생성하는 것을 예측할 수 없다.”고 한 부분을 문맥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풀어 보겠습니다. 중용 실천을 하는 주체와 그 실천을 통해 일구어지는 새 세상은 결코 둘이 아닙니다. 중용 실천자가 주체면 새 세상이 객체다, 이런 논리로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주체면 ‘서로 주체’이니 대상화, 즉 물화物化될 그 무엇은 없다는 말입니다. ‘서로 주체’의 평등한 쌍방향 소통이 무한 연쇄로 일어나는 한, 둘로 나눌 수 없는 게 이치다, 이런 말이지요. 중용 실천의 집단성, 공동체성, 사회성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따라서 여기의 측測은 근본적으로 예측한다는 의미를 썩 넘어서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물리학적 진실부터 이야기하지요. 만유인력을 계산하는 뉴턴의 공식이 있습니다. 만유인력 상수에다, 물체들의 질량 곱 값을 물체들 사이 거리 제곱으로 나눈 몫을 곱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공식은 두 가지 한계가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 공식은 두 물체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타당합니다. 그리고 세 개 이상의 물체 사이에는 통하지 않습니다.  

헌데 우주에서 멈춰서 있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완벽하게 두 물체만 따로 떨어져 있을 수도 없습니다. 결국 뉴턴의 공식은 특수 상황에서만 통하는 하나의 이론 모델일 뿐입니다. 하물며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무수한 소통을 무언가 도구를 써서 측정한다는 것, 나아가 예측한다는 것임에랴·······.

더군다나 서로 주체성의 무한 확장으로 넘실거리는 중용 세상이고 보면 측정, 예측이 문제가 아니라 서로를 도구화하여 구별하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도덕적 측면까지 생각해야 합니다. 측은 분리를 전제합니다. 측은 누군가를 대상화, 물화해야 가능합니다. 천지의 도리에서 그런 일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3. 사소함의 평등한 상호 소통이 모여 위대함이 됩니다. 그 위대함은 사소함의 위대함입니다. 그 사소함은 위대함의 사소함입니다. 천天, 지地, 산山, 수水, 그 어디에도 이런 도리의 예외는 없습니다.

4. 세월호사건 직후 공영방송인 KBS 보도국장이란 자가 “한꺼번에 300명이 죽어서 많아 보이지만 교통사고로 죽는 연간 인원을 생각하면 그리 많은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소수 문제니까 크게 떠들 것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 소수는 다만 소수가 아닙니다. 그들은 매판·독재·통속종교 지배집단이 우리사회를 어떻게 망쳐놓았는지, 드러내주는 증인들입니다. 그들이 백성의 대표입니다. 상징입니다. 그들과 백성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들과 백성 사이에 측測질은 통하지 않습니다. 중용은 준엄하게 말합니다.


“백성은 개인으로 쪼개지지 않는 하나다. 낱 백성이 온 백성이다. 고등학생 한 사람의 죽음이 온 백성의 죽음이다. 분리하지[측測]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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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6장 첫 번째 문단입니다.

 

故 至誠無息. 

고 지성무식. 

不息則久 久則徵 徵則愈遠 愈遠則博厚 博厚則高明.

불식즉구 구즉징 징즉유원 유원즉박후 박후즉고명.  

博厚所以載物也 高明所以覆物也 愈久所以成物也. 

박후소이재물야 고명소이복물야 유구소이성물야. 

博厚配地 高明配天 愈久無疆. 

박후배지 고명배천 유구무강. 

如此者 不見而章 不動而變 無爲而成.

여차자 불현이장 부동이변 무위이성.


그러므로 지극히 성실함은 쉼이 없다. 쉬지 아니하면 오래 지속되고 오래 지속되면 효험이 나타나고 효험이 나타나면 유원해지고 유원해지면 넓고 두터워지며 넓고 두터워지면 높고 밝아진다. 넓고 두터운 것은 물物을 싣는 것이고 높고 밝은 것은 물物을 덮는 것이며 유구한 것은 물物을 이루는 것이다. 넓고 두터운 것은 땅과 짝이 되고 높고 밝은 것은 하늘과 짝이 되며 유구함은 끝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나타내지 아니해도 빛나고 움직이지 않아도 변하며 작위가 없어도 이루어진다.

 

2. 실천 중용이 구체적으로 역사와 사회 속에서 그 신호와 에너지를 전달해 나아가는 과정을 잘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온전히 적확하고 치열한 실천至誠은 다함이 없는 법입니다[무식無息], 중단하지 않는 법입니다[불식不息]. 늘 깨어 있으면서 시간과 함께 단련되어 갑니다[구久]. 물이 흐르기를 멈추면 썩는 것처럼 “이만하면 됐다” 하고 주저앉는 순간 기득권 의식이 독으로 자라납니다. 시간의 물결에 늘 씻기면서 실천은 더욱 더 퍼들퍼들 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야 살아 있는 상태를 지속할 수 있습니다.

 

시간을 견디며 후패하지 않아야 살아 있는 깃발이 됩니다[징徵]. 다함없는 실천은 그 자체로 증거이자 징조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일으키는 힘이며 깨닫게 하는 신호입니다. 굳센 에너지가 되려면, 경쾌한 파동이 되려면 시간 속에 살아 펄럭여야만 합니다.

 

그 깃발이 펄럭여 아득히 먼 데까지 표지로 작용합니다[유원愈遠]. 그야말로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지평선 저 멀리 있는 사람에게까지 푯대가 되어 나아갈 방향을 정해주고, 걸어갈 용기를 줍니다. 참 실천은 반드시 또 다른 실천을 낳는 법입니다.

 

그 실천의 아득한 파장은 점점 멀리 퍼져 나아가고 겹겹이 쟁여집니다[박후博厚]. 참된 소통은 생명의 시너지를 일으킵니다. 잠자던 생명의 감각이 눈부시게 살아납니다. 감각들의 공현共絃은 깊은 울림이 되어 서로를 감싸줍니다. 퍼지되 얄팍해지지 않고 깊어지되 편협해지지 않습니다.

 

결국 사람과 사회와 자연의 생명력을 드높이고, 그 평등한 연대성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고명高明]. 중용의 자랑은 중용 실천자의 덕이나 경지가 아니고 중용 실천으로 드러나는 대동 세상 그 자체입니다. 생명의 쌍방향 소통, 그 자체의 향기가 긍지입니다.

 

3. 이처럼 온전히 적확하고 치열한 실천[지성至誠]은 자신의 엄정한 조건 속에서 스스로를 강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세상을 바꿉니다. 그렇게 바꾸어 낸 세상과 혼연일체가 되어 흘러갑니다. 애써 자랑하지 않아도 다 압니다. 구태여 힘주지 않아도 바꿀 수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조종하지 않아도 잘 되어갑니다.   



 

4. 대한민국의 현임 대통령은 이른바 유체이탈 어법으로 자신이 여느 사람과 전혀 다른 차원에 있는 존재임을 과시합니다. 이를테면 ‘교주’ 리더십입니다. 이는 주권자인 국민과 소통해야 할 민주공화국의 대통령과는 거리가 먼, 자신을 높이고 국민을 얕잡아 보는 시대착오적인 태도입니다. 그런 대통령의 정치적 실천이 어떻게 적확하고 치열할 수 있겠습니까? 원론만 꺼내 놓고 사라지는데. 어떻게 다함없을 수 있겠습니까? 이 정도면 됐다고 늘 자랑하는데. 어떻게 깃발이 될 수 있겠습니까?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지 않는데. 어떻게 또 다른 소통을 낳겠습니까? 백성이 울고 있음에도 혼자 웃으며 다니는데. 어떻게 생명의 시너지가 일어나겠습니까? 생떼 같은 아이들 250명을 죽이고도 못 본 체 하는데. 어떻게 평등한 생명 연대가 일어나겠습니까? 저토록 강고하게 국민을 아랫것 취급 하는데.


중용은 자기 엄정성無息에서 출발하여 평등한 생명 연대高明로 나아가는 유기적 통합의 흐름 속에 있습니다. 자기에게 관대함으로써 남을 억압하게 되는 정치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온전히 자신을 채워 온전히 자신을 비우는 군자 나기가 이 땅에서는 그렇게 어려운 걸까요? 평범한 시민의 작은 촛불 하나를 큰 가치로 받들 줄 아는 통치자 나기가 이 땅에서는 그렇게 어려운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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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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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따라서 타자의 부정성을 물리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면역학적 기술로는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11-12쪽)


  ·······신경성 폭력은 시스템에 이질적인 부정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시스템적인 폭력, 시스템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우울증도,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나 소진증후군도 긍정성 과잉의 증후이다. 소진증후군은 자아가 동질적인 것의 과다에 따른 과열로 타버리는 것이다. 활동과잉에서 과잉은 면역학적 범주가 아니며, 다만 긍정적인 것의 대량화를 의미할 뿐이다.(22쪽)


한병철은 신경증 또는 신경성 질환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을 대표적인 예로 꼽았습니다. 그런데 ‘신경증’의 개념은 진단 체계가 없어져 미국정신의학협회의 DSM에서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세계보건기구의 ICD는 ‘신경증적’이라는 개념을 협의로 사용(F40-49)하고 있지만 여기에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등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소진증후군은 1974년 미국의 한 심리학자가 만든 용어로 세계보건기구의 ICD나 미국정신의학협회의 DSM에서 인정하는 공식용어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한병철의 이런 용어 사용과 이런 질병들이 21세기 초의 병리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다는 판단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요?


한병철이 이 책을 쓰면서 인용한 사람들은 거의 모두 사회적 담론을 생산하는 사람들입니다. 미루어보건대 한병철이 직접 의학이나 면역학의 영역으로 들어가 철학하듯 탐구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가 미주에서 말한 대로 사회적 담론과 생물학적 담론 사이의 상호작용(74쪽), 좀 더 정확히는 사회적 담론의 프레임으로 생물학적 내러티브를 재구성한 결과들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하겠습니다. 사실 이런 넘나듦은 언제 어디서도 일어납니다. 불가피하고 불가결합니다. 문제는 넘나드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촘촘하지 못하거나 전경을 드러내지 못하는 통찰입니다. 한병철이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증후군을 면역학적 부정성 아닌 긍정성 과잉으로 인한 질병의 대표로 꼽은 근거에 관해 생각해보면 대뜸 성기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네 질병 사이에 어떤 연관성에 터한 것도 아니고 엄격한 기준에 따라 제한적으로 열거한 것도 아닙니다. 설명하기 맞춤한 것들을 챙겨 뽑아들었다는 느낌입니다. 하필 양극성장애 아닌 우울장애를, 하필 발달장애에 속하는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를, 하필 자기애성 성격장애 아닌 경계성 성격장애를, 하필 엉성한 개념의 소진증후군을 특히 긍정성 과잉으로 인한 질병의 대표로 삼은 토대가 그다지 탄탄해보이지 않습니다. 그가 쉽게 단순하게 사유하는 게 아닌가, 불현듯 의구심이 생깁니다.


한병철에게 이런 틈이 생기는 것은 무엇보다 그가 서구의 한복판에서 세계의 통시적 맥락과 공시적 지평을 구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21세기를 동질적 긍정성의 과잉 시대로 읽는 것에는 그 자체 타당성 여부와는 별개로 중대한 논점을 누락시킬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21세기의 이런 변화는 무엇보다 민주주의와 공화정이 인류의 당위로 자리 잡은 20세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와 공화정은 타자적·이질적 부정성, 그 폭력을 물리치려는 저항의 산물입니다. 그 저항은 서구를 중심으로 일어나 서구에서 꽃을 피웠습니다. 꽃이 피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입니다. 서구의 민주주의와 공화정은 인류가 주체로서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제도임과 동시에 기층민중과 식민지를 대상화함으로써 이룩한 피의 제도입니다. 21세기는 신자유주의와 신식민지 전략을 통해 민주주의와 공화정의 어두움을 스마트하게 가리고 가짜 동질성과 가짜 긍정성을 보편화하고 있습니다. 21세기 동질성은 이질성의 가면입니다. 21세기 긍정성은 부정성의 가면입니다. 시스템적 폭력, 시스템에 내재하는 폭력은 위장된 것입니다. 신식민지의 변방에 서면 사유가 어렵고 복잡해집니다.


오늘 518입니다. 광주를 피로 물들여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여전히 오리발을 내밀며 호의호식하고 있습니다. 그 자는 일해재단 만들어 기업가들을 협박해서 불법으로 축재했습니다. 청문회 나와서 말했습니다. 강요한 적 없다. 자발적으로 돈 주더라. 그 말을 곧이들은 사람 없습니다.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증후군의 동질성·긍정성은 과연 곧이들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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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5장 본문입니다.

 

誠者 自誠也 而道 自道也. 誠者 物之終始. 不誠 無物. 是故 君子 誠之爲貴. 誠者 非自成己而已也 所以成物也. 成己 仁也 成物 知也 性之德也 合內外之道也. 故時措之宜也.

성자 자성야 이도 자도야. 성자 물지종시. 불성 무물. 시고 군자 성지위귀. 성자 비자성기이이야 소이성물야. 성기 인야 성물 지야 성지덕야 합내외지도야. 고시조지의야.


성誠은 자기 자신을 이루는 것이고 도道는 자기를 인도하는 것이다. 성誠은 물物을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하는 원동력이다. 성誠하지 아니 하면 물物이 없다. 이 때문에 군자는 물物을 귀하게 여긴다. 성誠은 스스로 자기를 완성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물物을 완성하는 수단이 된다. 자기를 완성하는 것은 인仁이고 물物을 완성하는 것은 지知이니 성性의 덕이며 안과 밖을 합하는 도이다. 그러므로 때에 맞게 조처하는 마땅함이다.

 

2. 적확하고도 치열한 실천[성誠]은 내면의 힘에서 나옵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용의 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소통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즐겁고 행복해서 관통하고 흡수하는 것입니다. 남한테 내세울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남에게 겸손하게 청하여 함께 그 기쁨을 나눌 일입니다.

 

3. 적확하고도 치열한 실천은 사건[물物]을 일으키고 마무리합니다. 그 실천이 없다면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진정으로 상호 소통하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실천은 그 사건들의 생명주기와 함께 합니다. 사건의 주체와 사건 그 자체는 불가분 일체입니다.

 

그러므로 적확하고도 치열한 실천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이루어 가는 일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생태적 소통의 사건을 이루어 가는 일입니다. 사회와 자연과 절연된 개인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입니다. 인간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입니다.

 

4. 자기 자신을 이루어 가는 일은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인仁] 가능합니다. 자기 자신은 스스로가 규정하는 게 아닙니다. 타인에게 부름 받아 규정됩니다. 그의 사랑을 받아 이루어집니다.

 

사건을 이루어 가는 일은 사건의 흐름과 방향을 알아차려야[지知] 가능합니다. 이 알아차림은 실천에서 나오는 증득證得의 지혜입니다. 함께 흘러감으로 생겨난 슬기로움입니다.

 

사랑하는 것과 알아차리는 일은 본질[성性]에서 통합됩니다, 그러니까 합내외合內外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아는 만큼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은 소통의 서정이며 알아차림은 소통의 지성입니다.

 

5. 소통은 생명입니다. 생명은 시간입니다. 그 때 그 때 알 맞는 영양과 보살핌이 마땅히 있어야[시조지의時措之宜] 생명은 유지되고 확산됩니다. 생명은 다만 은총인 것이 아니고 정성스럽게 가꾸어야 할 인연인 것입니다.

 

6. 한 개인이 자기 생을 살면서 이루어내는 성취는 그 자체로 매우 귀한 것입니다. 이 성취를 꿈꾸지 않는 자 그 누구이겠습니까. 그러나 이 성취는 사회적 기여와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가령 수많은 사람의 희생 위에 세워진 성취라면 그것은 결코 성취가 아닙니다. 탈취입니다. 가령 수많은 사람 덕분에 이룬 것이면서 자기 혼자 이룬 것인 양 독선을 피운다면 그것은 결코 성취가 아닙니다. 갈취입니다.


지금 대한민국 사회는 탈취와 갈취의 귀재들이 온갖 패악을 저지르는 아수라장입니다. 모든 분야의 정상에 서 있는 자들 가운데 이런 부류의 인간 아닌 경우가 드뭅니다. 무엇보다 빅 쓰리, 그러니까 정치·경제·종교를 쥐고 있는 자들은 단연 독보적 존재입니다. 이들이 형성한 카르텔은 대한민국 전체를 견고한 착취구조로 만들었습니다. 그 착취구조는 여러 층위와 구획의 방대한 체계를 만들어 공존의 가치를 철저히 박멸하고 있습니다. ‘대박’이라는 사행적·개인적 용어에 중독된 사람들이 너나없이 생각 없이 착취구조의 부역에 나서고 있는 판입니다. 그렇게 세월호를 잊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중동독감을 묻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역사를 비틀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의 피맺힌 한을 지워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바보인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바보 중에 군자 있습니다. 남을 사랑함으로써 자신을 이루고 사회 흐름을 꿰뚫는 지혜로써 더불어 온 생명을 살아가는 군자는 결코 ‘대박’ 난, 그러니까 ‘뜬’ 사람이 아닙니다. 권력자도, 재벌도, 국민 멘토도 아닙니다. 평범한 다수의 시민과 시절인연을 맺으며 함께 흘러가는 거리의 사람입니다. 지배집단이 뭐라고 거들먹거리든 상관없이 이 나라를 지키는 것은 바로 이런 거리의 사람이란 사실, 슬프고도 장엄한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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