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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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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의 부정성은 사색의 본질적 특성이기도 하다. 예컨대 참선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들이닥쳐 오는 것에서 스스로를 해방함으로써 무위의 순수한 부정성, 즉 공空에 도달하려 한다. 그것은 극도로 능동적인 과정이며 수동성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참선은 자기 안에서 어떤 주권적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연습, 중심이 되고자 하는 연습이다.(53쪽)


아닙니다. 틀렸습니다. 참선은 변방이 되고자하는 연습입니다. 왜냐하면 주권은 권력의 중심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권은 변방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변방으로 가면 ‘당신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을 만나려고 나를 선두에 세워 변방으로 나아가는 연습이 참선, 참眞 선입니다. 나의 변방과 ‘당신들’의 변방이 만나는 곳이 참 중심입니다. 참 중심은 자기 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空입니다. 공空은 공共입니다. 공共이 참 무위입니다.


2013년 5월 13일, 제가 이 서실에 올린 <참 나는 남에게 있다>라는 글입니다.



대승의 큰 지식이

참 나를 찾으라니

땡초는 나를 보고

중생은 남을 본다


천하시인 김선우의 <참나라니, 참나!>(『녹턴(문지, 2016)』수록)를 읽습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이슬의 역설이라 하옵지요.

비루를 덜기 위해 저잣거리를 떠났던 자이오나

참나의 환영에 속았음을 알게 됐습죠, 참나라니, 나참.

속았으니 냉큼 돌아올밖에.

마음 깊이건 영혼 끝이건

나를 초월한 어딘가에 있을 나를 찾아 영영 헤매라뇨, 참나,

먹지도 자지도 훼손되지도 않는 영롱한 참나의 이데아라뇨, 나참,

비루할지라도 당신,

당신들과의 접촉면에서 이슬이 맺히죠.

이슬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죠.

나 아닌 존재와 연결되어야만 내가 되는 영롱함,

나의 밤을 깊이 두드리면 내가 없다는 걸 알게 되는 아침이

드물지만 오기도 합디다.

당신이 기쁠 때 왜 내가 반짝이는지 알게 되는

이슬의 시간,

닿았다 오면 슬픔이 명랑해지는

말갛게 애틋한 그런 하루가 좋습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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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31장 본문입니다.

 

唯天下至聖 爲能聰明睿知 足以有臨也 寬裕溫柔 足以有容也 發强剛毅 足以有執也 齊莊中正 足以有敬也 文理密察 足以有別也 薄博淵泉 而時出之. 

유천하지성 위능총명예지 족이유림야 관유온유 족이유용야 발강강의 족이유집야 제장중정 족이유경야 문이밀찰 족이유별야 박박연천 시이출지.

薄博如天 淵泉如淵 見而民莫不敬 言而民莫不信 行而民莫不說. 

박박여천 연천여연 현이민막불경 언이민막불신 행이민막불열. 

是以 聲名 洋溢乎中國 施及蠻貊. 

시이 성명 양일호중국 시급만맥. 

舟車所至 人力所通 天之所覆 地之所載 日月所照 霜露所隊 凡有血氣者莫不尊親 故 曰配天.

주거소지 인력소통 천지소복 지지소재 일월소조 상로소대 범유혈기자막하존친 고 왈배천.


오직 천하의 지극한 성인만이 총명예지하여 임臨함이 있을 수 있고 관유온유하여 용납함이 있을 수 있고 발강강의하여 잡아줌이 있을 수 있으며 제장중정하여 공경함이 있을 수 있고 문리밀찰하여 분별함이 있을 수 있으니 두루 넓고 깊게 근원하여 때에 알맞게 나타난다. 두루 넓음은 하늘과 같고 깊이 근원함은 못과 같다. 나타나면 백성이 공경하지 아니함이 없고 말을 하면 백성이 믿지 아니함이 없고 행동하면 백성이 기뻐하지 아니함이 없다. 이 때문에 명성이 중국에 넘치고 다시 퍼져 만맥蠻貊 지방까지 미친다. 배와 수레가 이끄는 곳과 사람의 힘이 통하는 곳과 하늘에 덮이어 있는 곳과 땅에 실리어 있는 곳과 해와 달이 비추는 곳과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곳에 무릇 피와 기운을 가지고 있는 것은 높이고 친애하지 아니함이 없으니 그러므로 하늘과 짝을 이룬다고 한다.

 

2. 완전한 성인의 속성을 말하는 어법을 구사하고 있으나 실은 그런 실천을 해야 완전한 성인으로 볼 수 있다는 요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백성과 함께하며[임臨], 백성의 뜻을 받아들이며[용容], 백성을 든든히 잡아주며[집執], 백성을 공경하며[경敬], 백성 앞에서 사리 분명한 실천을 해야[별別] 완전한 성인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용』의 성인은 철학적, 종교적 차원에서 말해지는 신비성과 거리가 멉니다. 일상적 삶의 현실에서 백성과 마주하는 정치권력을 단도직입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순과 문무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결국 위 요건은 오늘날 정치권력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실천 강령입니다.

 

그 요건을 따르면 백성이 공경함으로 되갚고[경敬], 신뢰하며[신信], 기뻐합니다[열說].

 

본문 내용을 아무리 정교하게 해설해도 더는 심오한 내용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명쾌하고 소박합니다. 정치권력이 어찌 하면 백성은 또 어찌 반응하는지 여기서 더 장황하게, 현학적으로 설명해야 할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다만 우리는 사소한, 그러나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짚고 넘어가려 합니다. 정치권력과 백성이 공경함敬을 서로 나눈다는 사실! 그러나 그 순서는 정치권력이 먼저라는 사실!


3.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전혀 다릅니다. 완전히 거꾸로입니다. 세월호에 가두어 수백 명을 한꺼번에 죽여 온 국민을 비탄에 빠지게 하고도, 메르스를 방치해 수십 명을 죽여 온 국민을 공포에 빠뜨리게 하고도, 이 지배집단은 국민과 도무지 함께하지 않습니다[불림不臨], 뜻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불용不容], 든든히 잡아주지 않습니다[불집不執], 공경하지 않습니다[불경不敬], 사리 분명한 실천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불별不別].


어느 국민이 제 손으로 뽑은 대통령을, 그 정권을 공경하고敬, 신뢰하고信, 기뻐하고說 싶지 않겠습니까? 그가 ‘요순’이나 ‘문무’이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실로 엄청난 인내를 발휘해 온 이 선한 주권자에게 입만 열면 지시·금지를, 말만 하면 훈계를 들이대는 권력자를 대체 어찌 하면 좋겠습니까?

 

4. 이럴 줄 알고 『중용』은 드넓음the Spaciouness에 기대어 한 번 더 당부합니다.

 

“무릇 피와 기운을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높이고 친애하라[범유혈기자막부존친凡有血氣者莫不尊親].” 

 

다른 생명은 고사하고 제 국민만이라도 공경, 즉 존귀하게 여기고尊, 피붙이처럼 사랑하면親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권력자는 국민 아닌 자기 자신만을 존귀하게 여깁니다. 국민 아닌 자기 추종자들만 피붙이처럼 사랑합니다. 짝해야[배配] 할 하늘을 전혀 엉뚱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여 그는 울어야 할 때 웃고 다닙니다. 즐거워야 할 때 화를 내고 일어섭니다. 그는 끝까지 국민과 주고받는 공경만이 참 공경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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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사회를 특징짓는 전반적인 산만함은 강렬하고 정력적인 분노가 일어날 여지를 없애버렸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오늘날은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간다.(50쪽)


우리말에서 감정 상태를 나타내는 어휘는 흔히 쓰는 것이 대략 430여개 정도이며, 그 중 72% 이상이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일상에서는 감정 어휘들을 대개 두루뭉술하게 씁니다. 건강한 사람한테야 크게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감정에 상처입어 질병으로 자리 잡은 사람한테 이렇게 접힌 어휘 사용은 그 자체로 질병일 뿐만 아니라 질병을 더욱 깊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정확한 뜻과 섬세한 느낌을 되살리는 일이 필요합니다.


상담치료에서 마음 아픈 사람을 풍부하고 정확한 감정 표현으로 이끌어내는 일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입니다. 마음 아픈 사람은 대부분 한두 가지 감정에 묶여 있고 나머지 것에는 아예 무감각하거나 모호한 느낌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때 치료자 자신이 풍부하고 정확한 어휘 역량을 갖추고 도와야 함은 물론입니다. 감정개념의 방을 만들고 거기에 느낌을 채워 넣는 일은 아픈 사람 혼자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마음 아픈 사람이 실생활에서 아주 많이 시달리는 감정 상태가 다름 아닌 짜증입니다. 짜증을 내는 사람이 어떻게 느끼는가와 상관없이 저는 그 동안 이렇게 말해왔습니다.


“짜증은 항복 선언입니다.”


대부분 이 말에 공감하거나 수긍하지 못하지만 짜증은 접힌, 아니 구겨진 감정입니다. 분노의 외양을 갖추지만 분노의 에너지는 처음부터 없습니다. 이미 체념한 상태에서 던져보는 투덜거림, 굴절된 신음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부분, 내면이 아이 상태에 있는 사람이거나 학대받은 여성에게서 나타나는 찌꺼기 감정, 정확히는 감정의 찌꺼기입니다. 결국은 현실에 더 잘 순응하기 위한 위악적 추임새인 셈입니다. 짜증나서 총을 집어 들었다고 떠들어봐야 짜증은 길바닥에 뱉는 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총을 집어 들려면 분노로 총을 집어 들어야 합니다. 시를 쓰려면 분노로 시를 써야 합니다. 술을 마시려면 분노로 술을 마셔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려면 분노로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의로우려면 분노로 의로워야 합니다. 분노, 이것이야말로 2014년 4월 16일 이후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정확하고도 아름답게 다듬어야 할 최우선의 감정입니다. 지금 우리가 분노를 어영부영 건너뛰면 나머지 모든 감정을 송두리째 탈취당할 것입니다. 분노의 칼날을 딛고 끝까지 발을 베이지 않은 채 이백 쉰 명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역사 현실로 불러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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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30장 본문입니다.

 

仲尼 祖述堯舜 憲章文武 上律天時 下襲水土. 

중니 조술요순 헌장문무 상률천시 하습수토. 

辟如天地之無不持載 無不覆幬. 

비여천지지무부지재 무불복주. 

辟如四時之錯行如日月之代明. 

비여사시지착행여일월지대명.

萬物竝育而不相害 道竝行而不相悖. 

만물병육이불상해 도병행이불상패. 

小德川流 大德敦化. 此天地之所以爲大也.

소덕천류 대덕돈화. 찬천지지소이위대야.


공자께서는 요 임금과 순 임금을 으뜸으로 계승하시고 문왕과 무왕을 본받아서 (그 법도를) 밝히셨으며 위로는 천시를 본받으시고 아래로는 물과 흙의 상황에 맞추시었다. 비유하면 하늘과 땅이 붙들어 실어주지 아니함이 없고 덮어서 감싸주지 아니함이 없음과 같다. 비유하면 사계절이 번갈아 운행됨과 같고 해와 달이 번갈아 밝아지는 것과 같다. 만물은 함께 자라도 서로 방해하지 않고 도는 함께 행하여져도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작은 덕은 냇물처럼 흐르지만 큰 덕은 일시에 변화시킨다. 이것이 천지가 위대하게 되는 까닭이다.

 

2. 공자의 중용은 사람의 실천과 자연의 운행을 두루 이치로 삼습니다. 사람의 실천에서 나타나는 도덕성과 창조성, 자연의 운행에서 나타나는 법칙성과 풍요성을 통합하는 혜안이 있었던 것이지요.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꿰뚫는 혜안은 크게 두 갈래의 통찰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통시적通時的diachronic인 맥락을 따라 그 변화의 결을 감지하는 통찰입니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 그 변화에는 반드시 특이점이 존재합니다. 이런 상황을 간파하고 전후의 맥을 짚을 수 있다면 과거의 반성, 오늘의 성찰, 내일의 전망이 모두 가능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공시적共時的synchronic인 지평을 한눈에 보고 분석, 종합하는 통찰입니다. 변화를 견디는 구조와 그 역학관계를 알아차림으로써 현안 문제를 이해하고 풀어내는 조정능력을 지니게 됩니다.

 

결국 시공간적 대칭 또는 모순을 역설로 통합하는 능력입니다. 변화와 지속, 역사와 사회, 개체와 전체, 문명과 자연, 정의와 사랑, 자유와 평등, 결속과 대립·······. 그 요동치는 경계에서 영예로움으로 남을 수 있는 선택을 하는 능력! 바로 이것이 중용이고, 공자의 실천입니다.

 

3. 그 역설적 통합 능력을 본문은 우선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은 함께 자라도 서로 방해하지 않는다.”

 

생명은 제각각 최대한 살기 위해 애씁니다. 때로는 경쟁관계에 서기도 합니다. 물론 공생 관계를 맺기도 합니다. 경쟁이든 공생이든 함께 자라간다는 큰 지평에서 보면 조화로운 질서 안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조화는 소통을 전제로 합니다. 결국 좋은 정치란, 즉 중용의 정치란 소통을 꾀하는 정치입니다. 사회 각 부문 간, 계층 간, 세대 간, 소통을 통해 서로 방해하지 않고 더불어 행복해지는 세상을 만들어가도록 조절하는 게 당위로서 우리 앞에 놓인 정치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땅의 지배집단은 조절커녕, 아예 국민과 기초적인 소통조차 할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국민끼리 쪼개져 싸우도록 부추깁니다. 지역 정서를 조장하고 계층 갈등을 증폭시킵니다. 모든 사람한테 무조건 색깔을 뒤집어씌웁니다. 정권을 보위하기 위해 일으킨 세월호사건 유족들을 무능한 부모로, 시체장사꾼으로, 세금도둑으로, 경기의 침체의 원흉으로, 심지어 빨갱이로 몰아 고립시킵니다. 서로 방해하는 존재로 떼어 놓아야 수탈하기 좋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영구히 국민을 패배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반대로 억압 받는 국민은 깨어서 서로 방해하지 않고, 나아가 서로 북돋우며 대동의 꿈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억압이 극에 달하고 역사가 위기에 놓일 때, 이 국민은 스스로 일어나 지배집단이 망쳐 놓은 나라를 추스르고 다시 세워왔습니다. 지금 순간에도 이 국민은 낮은 연대로 함께 자라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결코 지배집단이 이 국민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난망하거니와 간절히 바라기는 지배 집단이 언젠가 그 뜻을 으뜸으로 계승하고, 곧 조술祖述하고, 본받아서 밝히는, 곧 헌장憲章하는 것입니다.  


4. 그 다음엔 이렇게 말합니다. 

 

“도는 함께 행하여져도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현실 세계에서 방법道은 많이 다릅니다. 극단의 것은 서로 모순됩니다. 그러나 그 비대칭의 대칭이 세계를 이루는 이치입니다. 예컨대 우리 몸에는 스스로 움직여 항상성을 유지하는 자율신경 시스템이 있습니다. 교감신경이라 불리는 ‘전쟁’신경과 부교감신경이라 불리는 ‘평화’신경이 마주보고 있습니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몸 전체로 보면 그 둘은 밀고 당기면서 한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바로 이런 게 생명 속에 깃든 길항관계의 본질입니다.


마주서 있다고 해서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하는 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런 생각은 서구의 형식논리가 빚어낸 파리한 부분적 진실일 뿐입니다. 생명은, 세계는 훨씬 더 깊고 넓은 포함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생명의, 세계의 대칭성은논리를 다양한 스펙트럼을 창조합니다. 풍부할수록, 두터울수록 좋습니다. 중용 정치란 바로 이 풍요와 후덕을 빚어가는 일 아닐까요?  


5. 이 땅의 지배집단은 자신과 다르면 다 적으로 몰아버립니다. 그 적의 대표적인 이름이 바로 ‘좌빨’입니다. ‘종북’입니다. 2008년 촛불소녀들한테도 이 이름을 붙였습니다. 세월호사건 유족에게도 이 이름을 붙였습니다. 중동독감 괴담의 있지도 않은 주체에게도 이 이름을 붙였습니다. 역사교과서 획일화를 반대하는 시민에게도 이 이름을 붙였습니다. 심지어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옆을 지키는 시민단체에도 이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런 강박적 편협성은 부메랑이 되어 자신들의 정체를 폭로합니다. 즉 그들이 숭미모일崇米慕日 매판독재 세력이란 사실 말입니다. 그들 자신이 이 백성과 어긋나 있기 때문에 백성에게 거꾸로 뒤집어씌우는 것이지요. 그러나 종당 이 파렴치 집단은 백일하에 그 마각을 드러내고 살아 있는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살아 있는 역사, 그것은 바로 국민입니다.


지배집단이 조작한 또 하나의 적이 있습니다. 지난 2008년 ‘촛불’을 두고 소설가 이문열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디지털 포퓰리즘의 위대한 승리다. 그러나 끔찍하다.” 주권자가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연유는 제쳐놓고 그 현상을 포퓰리즘이라 폄하하고 과장한 것입니다. 이문열 부류의 사람들은 세월호사건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그들의 뜻에 반하여 시민의 지지를 받는 모든 일에 대하여 그런 말을 지껄입니다. 본디 포퓰리즘이 어떤 뜻을 가지고 있건 간에 저들은 자신을 엘리트로 전제하고 대중을 수준 낮은 적의 무리로 보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실로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입니다. 대한민국의 그런 알량하고 한심한 엘리트일 것이면 차라리 대중이고 말겠습니다. 실제로 저들의 그 폄하와 과장은 일시에 되게 하는, 곧 돈화敦化하는 큰 덕을 느끼기 때문에 생긴 방어반응입니다. 소수 엘리트가 조작하고 통제함으로써 명품 시혜 체계를 만들어 길이 즐기는, 곧 천류川流하는 일에 반하기 때문에 갖는 거부반응입니다. 그 반응은 다름 아닌 도둑의 제 발 저림입니다.

 

6. 봄기운이 만물을 일제히 소생시키듯 상호소통으로 공유하게 된 백성의 생명감각은 어! 하는 사이에 새 세상을 일으킵니다. 대덕大德입니다. 군자는 대덕을 따릅니다. 소인은 대덕을 이기려 합니다. 탐욕에 눈멀어 백성을 이기려 덤비는 저 사악하고 가소로운 무리들에게 화 있을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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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각 반응하는 것, 모든 충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미 일종의 병이며 몰락이며 탈진이다.(48쪽)


행동의 주체는 오직 잠시 멈춘다는 부정적 계기를 매개로 해서만 단순한 활동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우연의 공간 전체를 가로질러 볼 수 있다. 머뭇거림은·······행동이 노동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는 데 필요불가결한 요소다.(49쪽)


마음병 상담 오는 아픈 사람 본인은 물론 그 가까운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묻는 것은 ‘지금 뭘 해야 합니까?’입니다. 제 대답은 기본적으로 이렇습니다. ‘지금은 뭘 해야 할 때가 아닙니다. 뭘 하지 말아야 할 때입니다.’ 제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은 그들의 바로 그 질문에 드리워진 질병의 내러티브를 읽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뭘 그렇게 한 결과 병에 걸렸음에도 자꾸 뭘 (더) 해야 하느냐고 묻는 것은 문제를 직면하지 않고 가능하면 빨리, 가능하면 기존의 논리를 통해 병 이전 상태로 돌려놓겠다는 욕망의 표현입니다. 이 욕망의 작동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으려고, 뭘 하지 말아야 한다는 “부정적 계기”를 정색하고 제시하는 것입니다.


뭘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이치상 그 자체로 능동적인 내용을 구성하지 않습니다. 아픈 사람이나 그 가까운 사람들이 여태까지 해온 일을 하지 않으면 됩니다. 아픈 사람이 처해 있는 현실을 해석·평가·전망하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잘못된 상식 또는 어설픈 인문적 지식을 동원해 오해하며, 윤리적·인격적 흠결 문제로 몰아 비난하며, 하루 빨리 없애야 한다고 다그치거나 대체 고쳐지기나 하겠느냐며 절망하는 일, 그 관성 앞에 일단 무조건 멈칫하고 서야 합니다. 멈칫하는 찰나 한 생각 돌이키는 틈이 생깁니다. 틈은 시간을 발효시키고 공간을 주름지게 합니다. 발효는 우연을 치밀하게 파고들고 주름은 전체성을 풍요롭게 드러냅니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소비 향락을 재빨리 흡입하는 것이 성공과 행복의 지표인 시대에서 머뭇거림은 다만 강박스펙트럼의 한 가지일 따름입니다. 치료라는 이름의 교정 대상일 뿐입니다. 이렇게 시대정신은 자신의 병을 상대에게 뒤집어씌웁니다. 자신의 몰락을 대박으로 규정합니다. 자신의 탈진을 헌신으로 미화합니다. 도착적이거나 분열적인 시대정신의 커튼 뒤에서 정작 고요히 머무르는 자들은 따로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천국을 누리는 순수 천사들이 있습니다.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서 병과 몰락과 탈진의 절대다수 목숨 값을 향유하는 극소수 존엄이 있습니다. 이들의 과두정이 민주주의를 미끼로 인류의 파멸을 낚고 있습니다.


혁명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혁명의 시대는 지나갔으므로. 다만, 머뭇거리라고 말합니다. 혁명의 시대가 지나간 시대의 새로운 혁명이므로. 루저의 잠시 머뭇거림이 위너의 고요한 머무름에 금을 내는 단 하나의 길입니다. 위너의 수탈은 루저의 “즉각 반응”에 힘입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루저가 즉각 성과를 내지 못하고 멈칫거리면 위너의 수탈은 지체됩니다. 위너의 수탈이 지체되는 틈에서 루저의 각성이 촉진됩니다. 루저의 각성은 머뭇거림이 병이 아니라는 것, 나아가 동질적 긍정성이 가짜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은 자발적 머무름의 주체를 뒤바꿉니다. 머무름의 주체를 뒤바꾸는 것이 혁명입니다. 참 진짜 혁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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