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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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피로는 정체성의 죔쇠를 느슨하게 풀어놓는다. 사물들은 반짝이고 어른거리며 가장자리가 흔들린다. 사물들은 더 불분명해지고 더 개방적으로 되면서 확고한 성질을 다소 잃어버린다. 그리고 이런 특별한 무차별성으로 인해 우애의 분위기를 띠기 시작한다. 타자들과의 사이를 가르는 경직된 경계선은 거두어진다. “그런 근본적인 피로 속에서 사물은 결코 그 자체로서만이 아니라 언제나 다른 것들과 함께 나타난다.·······결국은 모두가 함께 어깨를 맞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피로는 깊은 우애를 낳고 소속이나 친족관계에 의존하지 않는 공동체의 가능성을 열어준다.·······개별자들의 공동체·······(70-71쪽)


고립을 깨고 공동체의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여기 깊은 피로가 탈진의 피로와 전혀 다른 지점에 서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탈진의 피로처럼 구체적인 경험으로 구성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자 역시 본문에서 깊은 피로의 작용을 반복적으로 말할 뿐 손에 잡히는 내용을 구성해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대체 깊은 피로는 탈진 피로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요? 대체 깊은 피로의 깊이란 무엇일까요?


탈진 피로는 말 그대로 에너지가 소진되고 허무감을 동반한 우울증으로 내몰리는 상태입니다. 이런 현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성과를 향상시키기 위한 질주를 멈추면 피로가 풀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도리어 심해집니다. 병적 상태에 순응하면서 증상을 익숙히 대하다가 치료로 방향을 바꾸면서 일어나는 각성이 불편한 감각을 날카롭게 일깨우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피로의 양적 강도가 심화되는 것이 아니고 피로의 질적 전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피로가 입자성에 파동성을 증폭시키는 과정에서 경직은 유연으로, 고립은 연대로, 폐쇄는 개방으로, 차별은 우애로, 개체는 공동체로 전환됩니다.


피로의 질적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소속이나 친족관계는 해체됩니다. 그 대신 개별자, 그러니까 나‘들’의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나‘들’의 공동체는 ‘우리’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고립이 극단이듯 ‘우리’의 공동체도 극단입니다. 나‘들’의 공동체는 양 극단을 놓은 중도, 그러니까 정도의 실천 양식입니다. 이것은 양비론이 아닙니다. 이것은 화쟁입니다. 화쟁의 고단함이 낳은 야트막한 연대가 바로 무애세상입니다. 무애세상에서는 함께 어깨를 맞댄 나‘들’이 부정不定uncertainty의 삶을 구가합니다. 부정의 삶에는 성과가 부르는 피로가 없습니다. 놀이가 부르는 고단함이 있을 뿐입니다. 고단해서 향 맑을 뿐입니다.


딸이 저와 상담하는 60대 어머니가 찾아왔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자신의 흠결 없음을 증명하고 싶기도 했을 것입니다. 저는 분명하고도 상세하게 딸이 처한 의학적 상황을 설명했고 ‘100% 신뢰한다.’는 반응을 얻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당부했습니다. “치료가 끝나고 돌아가면 이전의 가족관계가 복원된다고 생각하셔서는 안 됩니다. 개별자, 그러니까 나‘들’의 공동체가 새로이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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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장 본문입니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非道也. 

도야자 불가수유리야 가리비도야. 

是故 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시고 군자계신호기소부도 공구호기소불문. 

莫見乎隱 莫顯乎微.

막현호은 막현호미.  

故 君子愼其獨也.

고 군자신기독야.


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發而皆中節謂之和. 

희노애락지미발위지중 발이개중절위지화. 

中也者天下之大本也 和也者天下之達道也.

중야자천하지대본야 화야자천하지달도야.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치중화 천지위언 만물육언.


하늘이 명하는 것을 성性이라 하고 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고 道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 道에서는 잠시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니 떠날 수 있다면 道가 아니다. 이 때문에 군자는 그 보이지 아니하는 곳에서 경계하고 삼가며 그 들리지 아니하는 곳에서 두려워한다. 숨은 것에서 가장 잘 나타나며 미세한 것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 있을 때 조심한다.

기뻐하고 성내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정情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상태를 ('속'이라는 의미로서) 중中이라 하고 나타나서 모두 절도에 맞게 된 상태를 화和라 한다. 중中이란 천하의 큰 뿌리이고 화和란 천하에 통하는 도리이다. 중과 화를 이루면 하늘과 땅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만물이 (제대로) 길러진다.

 

2. 제1장은 주희가 썼다고 합니다. 처음엔 어기語氣와 내용의 기획성을 보고 그냥 후대의 편집 의도 때문에 선두에 놓인 것이라 추정했는데 나중에 대가들의 주석을 보니 주희 작품이라는군요. 그리고 주석들은 대부분 문장의 웅혼함과 압축미에 찬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런 제압 효과를 염두에 두고 주희는 깊은 고뇌 끝에 이 부분을 『중용』 텍스트의 도론導論이자 본문 제1장으로 배치했을 것입니다. 

 

주희의 의도대로 제1장부터 읽으면 『중용』은 주희의 독법으로 읽게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이 그 의도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맨 뒤로 돌리면 전혀 다른 독법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부족하나마 우리는 그 목적을 달성하려고 일관성을 유지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면 당최 주희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3. 제1장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앞부분은 마치 『중용』 전체의 대미大尾인 제33장을 요약, 선취先取한 듯도 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性과 도道와 교敎를 정교한 논리 관계로 제시하여, 독자가 중용에 단도직입으로 육박해 들어가는 길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성과 도와 교를 수직적 구조로 선명하게 구획함으로써 중용을 중세적 신분 질서 속에서 파악하도록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천上天의 작용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 한 것이야말로 지극한 것이다上天之載 無聲無臭 至矣” 라고 한 제33장의 대승大乘적 결론을 비틀고 깎아서  “그 홀로 있을 때 조심한다[신기독야愼其獨也]”는 소승小乘적 결론으로 축소해버렸습니다. 홀로 있을 때 조심하는 것은 중용의 개별적 성찰이자 전 사회적 실천의 발단입니다. 물론 불가결한 고갱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결론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이 일은 작정하고 그리 한 것이 아니라면 삼척동자도 하지 않을 짓입니다. 이런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후대 아류들은 신독愼獨을 선비의 최고 덕목으로 삼고 말았습니다. 신독은 백성과 쌍방향 소통하기 위한 조건일 뿐이거늘!

 

뒷부분은 더욱 노골적입니다. 중용을 말하는 텍스트의 도론導論에 아예 대놓고 중화中和로 못을 쳐버립니다. 후대 사람들이 아무리 중화와 중용을 일치시키려 애를 써도 주희가 구태여 중화란 용어를 쓴 연유를 알지 못하는 한 허깨비 놀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희의 중용은 그의 중화입니다. 중화는 중中을 중세적 관료주의 틀 안에서 실천하는 것和입니다. 아니 화는 중을 관철시키기 위한 중세적 관료주의 시스템[절節] 자체를 가리킵니다. 중은 천자天子이자 중화中華적 질서입니다.

 

그 집요한 명사적 어법! 게다가 그 ‘자랑스러운’ 이기理氣와 체용體用의 이분법!

 

최후로 깔끔하게 정리합니다.

 

“중과 화를 이루면 하늘과 땅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만물이 (제대로) 길러진다[치중화 천지위언 만물육언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그야말로 초超안정 시스템입니다. 하늘과 땅은 그저 제자리를 지킵니다[위位]! 만물도 中의 뜻대로 사육됩니다[육育]! 우리는 맨 마지막 문장에도 주희의 주도면밀한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이 빚어짐, 즉 화化를 빼버리고 육育만을 남긴 것은 변화를 불온하게 여기는 정치적 선택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4. 우리는 제1장을 제33장 뒤에 읽음으로써 이런 자유, 이런 통찰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던져줍니다. 사회정치적 헤게모니 블록이 제공한 인지 도식scheme에 갇혀 사고하면 결국 그들이 기획하는 그들만의 안정체제 안에서 꼼짝 없이 부품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중용』은 주희로 말미암아 공자의 손을 떠났습니다. 오늘의 우리는 『중용』을 주희의 손에서 떠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과제를 안고 『중용』 앞에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 대한민국을 사는 우리가 말하는 중용은 무엇일까요? 일단 각자의 가슴에 각자의 답을 품은 채 고요히 이 땅의 현실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기필코 총체적 진실에 단도직입으로 다가들어 경청해야 할 것입니다. 나와 내 공동체의 살아 있는 콘텍스트에서 중용을 묻지 않으면 그것은 참 중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실 우리의 질문은 ‘중용이 무엇인가?’가 아니고 ‘무엇이 중용인가?’여야 합니다.


자, 다시 고쳐 질문합니다. 무엇이 우리의 중용일까요? 단도직입으로 답변해보겠습니다. 매판독재분단세력에 맞서 자주, 민주,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평범한 사람들의 평등한 소통, 그 연대 행동이 다름 아닌 우리의 중용입니다. 이 깨달음을 급격하면서도 간절하게 일으킨 것이 세월호 아이들의 죽음입니다. 아이들의 죽음, 그 진실을 걸고 그 목숨 값을 걸고 우리는 우리의 중용을 실천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만있지 말고 중용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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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33장 본문입니다.

 

詩曰衣錦尙絅 惡其文之著也.

시왈의금상경 오기문지저야. 

故 君子之道 闇然而日章 小人之道 的然而日亡. 

고 군자지도 암연이일장 소인지도 적연이일망. 

君子之道 淡而不厭 簡而文 溫而理 知遠之近 知風之自 知微之顯 可與入德矣. 

군자지도 담이불염 간이문 온이리 지원지근 지풍비자 지미지현 가여입덕의. 

詩云潛雖伏矣 亦孔之昭. 

시운잠수복의 역공지소. 

故 君子內省不疚 無惡於志 君子之所不可及者 其唯人之所不可見乎. 

고 군자내성불구 무오어지 군자지소불가급자 기유인지소불가견호. 

詩云相在爾室 尙不愧于屋漏. 

시운상재이실 상불괴우옥루. 

故 君子 不動而敬 不言而信. 

고 군자 부동이경 불언이신. 

詩曰奏假無言 時靡有爭. 

시왈주가무언 시미유쟁. 

是故 君子不賞而民勸 不怒而民威於鈇鉞. 

시고 군자불상이민권 불서이민위어부월. 

詩曰不顯惟德 百辟其刑之. 

시왈불현유덕 백비기형지. 

是故 君子篤恭而天下平. 

시고 군자독공이천하평. 

詩云予懷明德 不大聲而色.

시운여회명덕 부대성이색.  

子曰聲色之於以化民 末也. 

자왈성색지어이화민 말야. 

詩云德如毛 毛猶有倫 上天之載 無聲無臭 至矣.

시운덕유여모 모유유륜 상천지재 무성무취 지의.


시경에 이르기를 “비단옷을 입고 홑옷을 걸쳤다”고 했으니, 그 문채의 드러남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어두우나 날로 드러나고, 소인의 도는 확연하지만 날로 없어진다. 군자의 도는 담담하나 싫어지지 아니하고 간략하지만 세련되었으며 따뜻하면서도 조리가 있다. 심원한 이치가 가까운 데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임을 알고, 바람이 저절로 불고 있는 것임을 알며 은미한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것임을 알면 더불어 덕德의 세계에 들어 갈수 있다. 시경에 이르기를 “잠겨 있어서 비록 숨어 있지만 또한 매우 드러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군자는 속으로 돌이켜보아 없는 바의 것은 오직 남에게 보이지 아니하는 것이로다. 시경에 이르기를 “너의 집에 있는 것을 보니 오히려 옥루에서도 부끄럽지 아니하다”하였다. 그러므로 군자는 움직이지 아니하여도 공경 받으며 말을 하지 아니하여도 신용을 얻는다. 시경에 이르기를 “신의 강림을 빌 때에 말이 없었다. 그때 다툼이 있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군자가 (정치를 하면 백성에게) 상을 주지 아니하여도 백성은 힘쓰고, 화를 내지 아니하여도 백성은 도끼보다 두려워한다. 시경에 이르기를 “드러나지 아니하는가, 오직 이 덕이여, 모든 제후들이 그것을 본받는도다.”하였다. 이 때문에 군자는 독실하고 공경스러워서 천하가 화평하다. 시경에 이르기를 “나는 명덕明德을 그리워한다. 소리를 크게 하거나 안색으로써 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소리나 얼굴빛이 백성을 교화하는 수단에 있어서는 말단이다.” 시경에 이르기를 “덕은 가볍기가 터럭과 같고 터럭은 오히려 비교할 수 있거니와 상천의 작용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 한 것이야말로 지극한 것이다.

 

2. 드디어 『중용』의 마지막 장입니다. 물론 제1장 공부를 맨 뒤로 돌렸으니 사실은 한 장이 더 남아 있는 것이지만 텍스트 상으로는 최종 결론인 셈입니다.

 

“상천上天의 작용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 한 것이야말로 지극한 것이다(上天之載 無聲無臭 至矣).”

 

이 마지막 문장은 참으로 화룡점정의 값어치를 지녔습니다. 완전한 중용 실천은 지극히 평범하다고 나지막이 말함으로써 여백의 결론에 갈음하고 있습니다. ‘이게 중용이다’라고 위세 떨지 않으며[무성無聲] ‘이렇게 중용했다’라고 생색 내지 않아야[무취無臭] 제대로 된[지至] 중용입니다. 그게 바로 중용의 본령[성性]입니다. 거꾸로, 생명의 본령이 중용입니다. 중용이 아니면 참 생명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묘사를 반복적으로 하고 있지만 앞에 있는 모든 내용은 마지막 이 한마디를 예비한 것입니다. 일일이 그 묘사를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내용을 크게 둘로 나누어 조망함으로써 간결한 결론에 도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전반부는 중용의 실천이 스스로 내세우지 않지만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암연이일장闇然而日章]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중용 실천은 한마디로 “평범한 선善”입니다. 그것은 특별하다고 자랑하지만 마침내 악惡이 되고 마는[적연이일망的然而日亡] 소인배의 언행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후반부는 중용의 실천이 결국은 백성과 나누는 자유자재한 소통임을 강조합니다. 이러저러한 술수[성聲]나 전략[색色]을 동원하여 백성을 엎드리게 하는 것은 소인배의 짓입니다. 군자는 고요한[부동不動] 침묵으로[불언不言] 백성을 새롭게 빚어냅니다[화민化民]. 백성은 공경敬과 신뢰信로 화답합니다. 이것이 소통입니다. 이것이 대동大同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것이 중용 실천의 영원 궤도입니다.

 

3. 그 동안, 때로는 온건한 원칙론으로, 때로는 거침없는 직격탄으로 중용을 지금의 사회정치 상황과 연결하여 읽는 일을 계속해 왔습니다. 이쯤이면 대한민국 사람 누구라도 제33장 말미에 우리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특별하다고 자랑하지만 마침내 악이 되고 마는 언행 때문에 백성에게 공경과 신뢰를 받지 못하는 소인배가 누구인지, 그래서 우리가 여태 무엇을 주의해 왔는지, 앞으로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침묵 속에서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툼 없는 나날[시미유쟁時靡有爭]을 그리워합니다. 모두 함께 손뼉 치며 행복을 나누는 나날을 꿈꿉니다. 누군가와 맞서는 나날이 평범한 백성에게 얼마나 고단한 시간인 줄 안다면 최고 권력자는 하루라도 빨리 모질고 사나운 마음을 내려놓아야 할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겪었듯 최고 권력자는 느끼지도 알아차리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럴 수 있었다면 진즉 그리 하였을 것입니다. 생떼 같은 아이들을 차고 어두운 바다에 빠뜨려 죽이고도 하구한날 형형색색 옷 갈아입으며 희희낙락했던 그입니다.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부모들의 애원을 무표정으로 외면했던 그입니다. 중동독감이 창궐하는 와중에도 국가원수로서 책임지는 말 한 마디를 하지 않았던 그입니다. 이미 죽은 벼에 대고 물대포 쇼를 벌였던 그입니다. 일제 부역 세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교과서를 획일화하는 그입니다. 같은 여성이면서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을 10억 엔에 팔아넘긴 그입니다. 여전히 국민을 백안시하는 군주의 언행을 되풀이하고 있는 그입니다. 과연 기탄없는無忌憚 그입니다.


대체 이 노릇을 어찌 하면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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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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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66쪽)


“당신의 소유가 증가하면 할수록 당신의 존재는 줄어들 것이다.”_칼 마르크스


제게는 아주 돈이 많은 제자가 하나 있습니다. 새해 맞으면 청와대에서 연하장이 날아올 정도의 부자입니다.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돈이 많아지니까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 자꾸 없어집니다, 선생님. 없어지는 대상에 저도 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그 때는 미처 몰랐습니다. 얼굴 못 본 지 이미 오래입니다.


그가 가난한 학생이었던 시절에는 제게 와서 밥도 먹고 교통비도 받아갔습니다. 부자가 되고 나서는 돈을 꾸러 온 친구에게 ‘내가 은행이냐?’고 했답니다. 돈이 많아지니까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 자꾸 없어진다는 말의 뜻을 문득 깨닫습니다. 그는 돈으로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아라한은 구름 아래로 내려오지 못합니다.


인간 영혼의 말랑함은 홀로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과 더불어 삶을 공유할 때 그리 되는 것입니다. 남과 더불어 삶을 공유하는 것이 인간 존재의 본령입니다. 인간으로서 존재하려면 소유를 줄여야만 합니다. 과도한 성과의 향상을 단호히 포기해야만 합니다. 단호한 성과 포기가 말랑한 영혼의 전제입니다.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가는 길을 잡아준다.”_함민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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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32장 본문입니다.

 

唯天下至誠 爲能經綸 天下之大經 立天下之大本 知天地之化育. 

유천하지성 위능경륜 천하지대경 입천하지대본 지천지지화육. 

夫焉有所倚. 

부언유소의. 

肫肫其仁 淵淵其淵 浩浩其天 苟不固聰明聖知達天德者 其孰能知之.

순순기인 연연기연 호호기천 구불고총명성지달천덕야 기수능지지.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스러움만이 천하의 큰일을 경륜할 수 있으며 천하의 큰 근본을 세울 수 있으며 천지의 화육을 주관한다. 대저 어디에 의지하는/치우치는 바가 있겠는가. 정성스러워 어짐 그 자체이고 깊고 깊어 못 그 자체이며 넓고 넓어 하늘 그 자체로다. 진실로 본래 총명예지하여 하늘 덕德에 도달한 자 아니면 누가 그를 알 수 있겠는가.

 

2. 이상적 차원에서 본 성誠, 즉 중용의 실천은 온 세상의 흐름을 이끌어[경륜經綸], 바르게 방향 짓고[입立], 새롭게 빚어[화육化育] 갑니다. 따라서 그것은 치우침[의倚]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정확히 가운데란 뜻이 아닙니다. 본디 가야 할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랑으로 가득차고[인仁] 사려 깊으며[연淵] 너그러운[호浩] 삶이 바로 그런 실천입니다. 

 

이렇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투명하게 열려 있지[달천덕達天德] 않으면 중용을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기수능지지其孰能知之]. 자기반성이 생략된 특정 이데올로기, 신조, 학문적 이론, 심지어 유아적 편견에 입각하여 자기중심으로 세상을 강제하려 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중용할 생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찌 해야 전체성을 향해 투명하게 열려 있을 수 있을까요? 답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중용』이 수도 없이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평등한 쌍방향 소통’ 그 하나입니다. 평등한 쌍방향 소통을 하려면 자기중심을 버려야 합니다. 중심을 버려 가장자리, 아니 자기 경계선 밖의 어둠과 혼란으로 걸어 나와야 비로소 또 그렇게 걸어 나온 생명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나도 너도 기존 문명이 제공해준 권력과 오만과 독선을 내려놓아야 서로를 향해 열려 있는 심장, 그 붉고 뜨거운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권모술수도 위세도 손익계산도 끼어들 수 없습니다. 오직 서로를 버려 벌거숭이가 된 자연 생명, 그 단도직입의 마주함만이 있을 뿐입니다.

 

네 것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닌, 새로이 빚어지는[화육化育] 우. 리. 의 가치를 창조하는 영원한 실천, 동사動詞의 시공간이 바로 중용입니다. 그러므로 중용은 개인의 품성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중용은 전제된 실체, 명사名詞의 시공간이 아닙니다. 중용은 온 생명의 집단적이고도 공동체적인 실천입니다. 그 집단, 그 공동체 또한 늘 이루어져 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이 과정에 간절함으로 참여하는 것이 지극한 경지에 이르는 길입니다. ‘함께’ ‘몸으로’ 하는 명상/참선이 진정한 명상/참선입니다. 

 

3. 매판적 본질을 지닌 현 지배집단은 독선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그 독선은 오직 하나의 표적만 봅니다. 돈! 돈 말고는 다른 게 보이지 않습니다.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도, 국민을 죽이는 행위도 돈만 된다면 옳게 여깁니다. 진실의 전체성은 당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돈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진실은 그들에게 음모와 술수의 계기일 따름입니다. 덮고 비틀고 뒤집고 조작하고·······. 전천후 협잡으로 투명함의 덕을 모독합니다. 세월호는 이렇게 다시 한 번 침몰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다시 한 번 살해당하고 있습니다.


저들의 사악하고 집요한 분탕질을 보며 문득 떠오른 말이 있습니다.

 

“천지가 만물을 낳고 성인이 만사에 응하는 이치는 오직 단.도.직.입 한 마디 뿐이다天地生萬物聖人應萬事惟一直字而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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