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위대한 질문 - 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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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에 있는 플리트 센터에서는 대선에 출마한 민주당 존 케리 상원의원의 지명을 위한 민주당원 모임이 있었다. 존 케리 의원은 당시 무명에 가까운 한 인물에게 찬조연설을 맡겼다. 그는 일리노이 주 민주당 상원의원에 출마한·······버락 오바마였다.

  ·······그의 연설은·······이러한 말을 건넨다.


저는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저는 제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다. 저는 제 자매를 지키는 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나라를 작동하게 합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개인적인 꿈을 추구하지만 미국이라는 하나의 가족으로 모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럿으로 구성된 하나E pluribus unum입니다.·······


  오바마가 말한 “저는 제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다.”라는 구절은 <창세기> 4장 9절과 깊은 연관이 있다. 신이 아벨을 살해하고 숨어 있는 가인에게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가인은 질문으로 답한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오바마의 연설은 가인의 질문에 답한 것이었다.


  ·······주사위는 이제 우리 각자에게 던져졌다. 당신은 나만·······지키는 자인가. 아니면 우리사회 안에서 불행을 겪는 모든 이들을 지키는 자인가. 신은 우리 모두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묻는다.(80-82쪽)


“최순실이 국민들 싫어할 일은 다 하고 다녔다. 내 앞에선 그냥 조용히만 있어서 그런 일 했는지 전혀 몰랐다.”


이른바 대통령이 가장 최근에 한 말입니다. 물론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그는 거짓말을 통해서도 진심을 드러냅니다. “너의 아우 순실이가 어디에 있느냐?” 국민의 물음에 이리 대답한 것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시민은 이제 이런 유체이탈 어법에 반응조차 거의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이런 짓을 되풀이합니다. 머릿속에 오직 자신 밖에 없는 그가 바로 ‘가인’입니다. 그 가인은 이미 ‘아벨’, 곧 수많은 국민 아니 국민 전체를 살해했으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있습니다. 마침내 ‘오장육부’였던 아우마저 죽이려고 되묻습니다. “제가 순실이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참으로 참담합니다. 대통령이라 불리는 사람의 입에서 이런 유의 말들이 마구잡이로 튀어 나와 돌아다니는 나라 꼬락서니가 비할 데 없이 비참합니다.


아메리카합중국 시민을 감동시키며 등장한 오바마 대통령이 실제로 아메리카합중국의 형제·자매를 지켜내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한 모양입니다. 재선했고 마지막까지 지지율이 매우 높은 것을 보면 말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대한민국 형제·자매는 그의 형제·자매 범위에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명박과 박근혜의 범죄 행각, 특히 대선부정과 세월호사건의 진실을 전혀 몰랐다고 하기에는 그의 자리가 너무 막강했습니다. 그의 막강함이 대한민국 형제·자매에게는 종잇조각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우리에게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클레이튼 커쇼가 메이저리그 최우수선수로 뽑힌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일국의 대통령이 될 사람의 입에서 나온 이런 말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만일 시카고 남부에 글을 읽지 못하는 소년이 있다면, 그 아이가 제 아이가 아닐지라도 그 사실은 제게 중요합니다. 만일 어딘가에 약값을 지불하지 못하는 노인이 의료비와 월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가 제 할머니가 아닐지라도 제 삶마저 가난하게 됩니다. 만일 어떤 아랍계 미국인이 정단한 법적 절차 없이 체포당했다면, 그것은 제 시민권에 대한 침해입니다.”(81쪽)


생때같은 아이들 250명이 죽어가는 7시간 동안 국가원수가 공식집무를 이탈해 있었던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꿈도 꿀 수 없는 이야기 아닙니까. 일본제국주의 성노예로 희생당한 어르신들을 10억 엔에 팔아먹고도 국민을 야단치고 협박하는 이른바 대통령 입에서는 도무지 나올 수 없는 이야기 아닙니까. 최순실 말 듣고 수많은 국민의 생존이 달려 있는 개성공단을 폐쇄해버리고도 뭘 잘못했느냐고 반문하는 최고 헌법기관에게 어찌 기대할 수 있는 이야기이겠습니까. 오바마가 박근혜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정치를 펼쳤을까 상상해봅니다. 미합중국보다 훨씬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제 곳간만 채우는 매판독재분단세력의 강고한 카르텔에 맞서 싸워 이길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일 또한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최순실이 국민들 싫어할 일은 다 하고 다녔다. 내 앞에선 그냥 조용히만 있어서 그런 일 했는지 전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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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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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꼭 이루어야 할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그것을 이루기 위해 지금 어디까지 왔는가? 에덴동산에서 방황하던 아담과 이브처럼, 삶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우리에게 신은 묻는다.


“너는 어디에 있느냐?”(56쪽)


איכה(아예카) 딱 한 단어 초 간단 의문문으로 신은 인간에게 처음 묻습니다. 심오해 보일 것이 전혀 없는, 그저 어디냐는 물음입니다. 하지만 본디 시제가 없는 표현이므로 이 물음은 과거-현재-미래를 관통합니다. 관통함으로써 형성되는 방향과 위치를 모두 머금게 되는 것이 이 물음의 지평입니다. 목적과 목표의 여부, 여하를 모두 향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로서 합당한가, 심지어 현재의 심리 상태까지 겨눈 물음입니다.


신의 언어로 자신에게 물어본 적이 있으신지요.


“너는 어디에 있느냐?”


신의 언어는 그러면 무엇일까요? 내 안의 타자에서 시작하여 우주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인간의 자아에서 시작하여 물방울 하나에 이르기까지 소미한, 대칭의 관통이 바로 신의 언어입니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저기서부터 여기까지 흐르고 번지는 것이 바로 신의 언어입니다. 우리는 요 몇 주간 신의 언어로 묻는 일을 계속해왔습니다.


토요일마다 광화문 근처에서 누군가와 통화할 때 가장 먼저 가장 많이 묻는 것은 너 어디냐, 입니다. 이것은 물론 매우 단순한 목적을 지닌 간결한 물음이지만 통화자 상호간에 이미 전제된 더 큰 목적을 품고 있습니다. 민주공화국, 그러니까 우리 현실에서 추구할 수 있는 하나님나라를 머금은 물음입니다. 어떻게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서로 묻는 것입니다. 때로는 놀이처럼 때로는 제의처럼 그렇게 백만 개의 물음을 빚었습니다.


신의 언어로 우리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어디에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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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위대한 질문 - 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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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 8편 5~6절을 히브리어 원문으로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신이 인간을 신처럼 창조했다고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시고, 그에게 영광과 존귀의 왕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주께서 손수 지으신 만물을 사람이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사람의 발아   래 두셨습니다.


  히브리어 성서에서 인간은·······원죄를 지니고 태어난 죄인이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일 뿐이다. 그런데 많은 한글 성서나 영어 성서에서는 이 구절이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로 번역되어 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어쩌다 ‘천사’로 둔갑한 것일까?

  ·······자신들이 생각하는 신과 인간에 대한 사고 안에서 ‘의도적인 오역’이 일어난 것이다.(19-20쪽)


수많은 사회문제를 일으켜 ‘개독교’라 불리는 통속한 주류 기독교, 특히 개신교가 이렇게까지 타락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교리적 원인은 바로 원죄설입니다. 원죄설은 기독교도를 피학적·노예적인 사유·행동 프레임에 가두었습니다. 스스로 학대하는 노예는 불의한 권력·부도덕한 교권에 무조건 굴종합니다. 굴종의 인습은 거대한 수탈문명의 비겁한 후원체제로 자리 잡았습니다. 후원의 대가로 떨어지는 떡고물에 배가 부르자 그들에게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위대한 인간이 더는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장담컨대 ‘개독교’가 내부혁명으로 환골탈태할 가능성은 날아가는 새의 똥에 맞을 확률보다 낮습니다.


덧없는 시간 속에서 흐르듯 잊히고 마는 인간임에도 신이 기억한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근원에 심어져 있는 신의 “영광과 존귀”, 그러니까 장엄의 빛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뒤집어 보겠습니다. 자신보다 조금 나은 신을 사유하고 행동함으로써 인간은 존재의 장엄을 복원해갑니다. 존재의 장엄으로 나아가는 인간이 자기 경계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사건이 바로 신입니다. 사건인 신은 부동불변의 실체가 아닌 역동적 변화과정입니다. 변화의 찰나마다 장엄은 섬광으로 나타납니다. 섬광장엄은 부동불변의 풍경화로 그릴 수 없습니다. 변화의 결마다 달리 드러나는 경이의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신이 기억하는 인간은 스스로 경계를 무너뜨릴 때 나타나는 섬광장엄뿐만이 아닙니다. 섬광장엄이 나타날 때 찰나마다 죽는 자아, 그 또한 신의 기억에 남습니다. 자아의 죽음은 비대칭의 대칭으로 이루어집니다. 자기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거대한 균열을 내는 폭발적 번짐과 소미한 틈을 내는 은근한 스밈의 쌍방향으로 일어납니다. 전자는 알량한 에고를 부수는 거친 동력입니다. 후자는 망상적 에고를 녹이는 부드러운 접촉입니다. 터져서 죽으나 녹아서 죽으나 죽긴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스스로 죽는 인간과 장엄으로 빛나는 인간 사이가 신의 기억입니다. 신의 기억은 참 인간에서 발원합니다.


어제 애제자의 페이스북을 통해 #1111이 안산 세월호합동분향소 번호이며 여기로 문자를 보내면 분향소 전광판에 뜬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통신3사 모두 무료인데 아는 시민이 많지 않아 하루 다섯 통도 문자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안타까운 소식까지 듣고 안 되겠다 싶어 본디 글을 조금 다듬어 제 트위터에 올렸습니다. 트위터리안의 반응이 놀라웠습니다. 오늘 오후 5시 30분 현재 12만 5천 명 이상이 읽고 3천여 번의 리트윗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분향소 전광판에 뜨는 우리의 문자가 바로 신의 기억입니다. 신의 기억으로 나타나는 우리의 죽음과 장엄이 우리를 인간다운 인간이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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