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농, 느림과 기다림의 철학 - 자연농의 대가와 문화인류학자가 담담하게 나누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생명의 길
쓰지 신이치.가와구치 요시카즈 지음, 임경택 옮김 / 눌민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아마존 연구에 따르면 정글에 있는 식물 모두 뿌리 끝의 90퍼센트가 지표에서 10센티미터 이내에 있다고 합니다. 정글을 걸어 다니다 보면 때때로 거목이 쿵 하고 쓰러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는데 그때 보이는 뿌리와 거기 붙어 있는 흙은 전병처럼 납작합니다.


가는 뿌리는 햇살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는 위쪽으로 둘러칩니다. 자연농의 논밭에서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부식토는 아주 조금이지요.·······논는 30년 동안 쌓인 약 10센티미터의 시체 겹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대단합니다. 그 얇은 층이 저만큼의 생명을 지탱하고 있으니까요.(112-113쪽)




‘뿌리 깊은’ 나무가 왜 없을까만 “90퍼센트가 지표에서 10센티미터 이내에 있다” 하니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그 얇은 층이 저만큼의 생명을 지탱하고 있으니” 참으로 고마울 따름이다. 그렇다. 문제는 깊이가 아니다.


2016년 7월 28일, 페이퍼에 <고매하지도 심오하지도 않다>라는 제하에 나는 이런 글을 올렸다.


높이도 깊이도 넓이의 메타포다. 공적 참여를 통한 사적 자아의 수평 확산운동에서만 참된 영성이 구현된다.


나는 이것을 인간 삶을 인식하는 내 통찰로 여겼다. 이제 보니 아니다. 식물과 흙이 이미 빚어놓은 유구한 진실이다. 깊이 내려갈수록 뭔가 대단한 것이 나올 것 같지만 견고한 어둠뿐이라는 진실은 식물에게서나 인간에게서나 꼭 같다. 식물은 이미 알고 있다. 인간은 아직도 모른다. 한사코 깊이 내려가려 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심오한 깨달음이란 없다. 설혹 있다손 치더라도 ‘10센티미터 이내’로 되올라 와야 한다. 거기서만 참된 영성이 보양되기 때문이다.


‘10센티미터 이내’, 그러니까 휴먼스케일에서 일어나는 영성적 삶은 공동체가 함께 희로애락을 나누며 살아가는 큰 수레다. 홀로 깊은 곳으로 내려가 똬리를 트는 삶은 작은 수레다. 작은 수레는 영성의 포르노다. 포르노는 달콤한 살해 기술이다.


오늘 오전, 한의사인 제자가 찾아왔다. 사이비종교적인 시스템으로 떼돈 버는 어떤 한의원 이야기를 했다. 한의사도 미쳐가고 직원들도 미쳐간단다. ‘10센티미터 이내’라는 경고문을 무시해서 일어난 돈의 포르노다. 일개 한의원이 그럴진대 의료계 전체는 어떠할 것이며 나라 전체는 또 어떠할 것인가. 자본주의 자체가 포르노다. 인류는 지금 스스로 홀로코스트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중이다.


결국 문제는 넓이다. 옆으로 번져가는 삶이다. 홀로 깊어지려는/두터워지려는 탐욕을 살짝 들어 얕더라도/얇더라도 함께 살려는 쪽으로 틀어야 한다. 결코 쉽지 않다. 우리, 그러니까 3·10공동체는 그 와중에 길 하나를 분명히 열었다. 열었으니 가는 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연농, 느림과 기다림의 철학 - 자연농의 대가와 문화인류학자가 담담하게 나누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생명의 길
쓰지 신이치.가와구치 요시카즈 지음, 임경택 옮김 / 눌민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을 살아가는 동식물의 생명이 죽지 않고 활동을 계속하고, 생물들의 생사의 순환이 흙을 무대로 축적되어 갑니다. 유형과 무형의 생명의 역사가 논밭 위에 쌓여갑니다. 이 역사를 무대로 다음의 생명은 온전히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모두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마련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존재합니다. 삶과 죽음이 반복되는 만큼 많은 생명을 키울 수 있는 풍요로운 무대가 되어 갑니다.·······일반적으로 뭉뚱그려 흙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부패한 “시체의 층”입니다.(108쪽)

  ·······물과 바람이 흘러내려 가면서 바위가 부서지고 돌이 부서지고 모래가 부서져 흙이 되고, 거기에 동식물들의 생사의 순환에서 생겨난 시체가 썩은 흙도 뒤섞여 논밭의 흙이 됩니다. 흙 자체는 생명 활동을 하지 않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생명 활동의 일환을 담당하고 있고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흙이 없어도 벼나 채소는 자랍니다. 흙을 풍요롭게 해야 한다, 흙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은 잘못된 인식입니다.·······흙을 풍요롭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흙은 풍요롭게 만들 수 없습니다. 하지 않아도 됩니다. 흙을 무대로,·······생명이 살아 생사를 되풀이하면, 스스로 시체의 층을 쌓고 생명들을 살리는 풍요로운 무대가 만들어집니다.(109-110쪽)


흙은 바위가 부스러져 생긴 가루인 무기물과 동식물에서 생긴 유기물이 섞여 이루어진 지구 표면 물질이다. 가와구치 요시카즈가 흙이라는 말을 엄밀하게 사용하지 않은 점이 있으나 문제 삼을 일은 아니다. 그보다 흙을 “생명들을 살리는 풍요로운 무대”로 정확하게 인식한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다시 한 번 돋을새김해서 보자.


흙을 풍요롭게 해야 한다, 흙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은 잘못된 인식입니다.·······흙을 풍요롭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흙은 풍요롭게 만들 수 없습니다.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 지적은 우리의 유서 깊은 무지를 냉엄하게 베어버린다. 갈고 거름 주는 일 따위로 흙을 풍요롭게 할 수도 없거니와 설혹 그렇다 해도 부질없는 짓일 뿐이라니 실로 무참하다. 무참의 진경은 그러나, 따로 있다. 흙은 다만 생명을 키우는 “무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 생명은 흙과 흙 사이, 그 소미한 가장자리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각각의 생명은 자신의 스케일에 맞게 흙과 흙 사이를 힘껏 넓혀가며 살아가다가 다시 극미한 공간을 남기고 무로 돌아간다.


흙과 더불어 일어나는 생명 사건에는 가와구치 요시카즈조차 무참하게 하는 진경이 또 하나 있다. 식물 대부분이 생명 유지에 필요한 양분의 90%를 흙 가장자리가 아닌 대기에서 공급받는다는 사실 말이다. 자연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흙 밭이 아니라 대기 ‘밭’이다. 대기를 왜곡·오염시키지 않는 것이야말로 자연농의 요체다.


농투성이가 원전, 기후 변화, 결국은 정치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소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불가능한 고립에 고의를 두는 것은 범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연농, 느림과 기다림의 철학 - 자연농의 대가와 문화인류학자가 담담하게 나누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생명의 길
쓰지 신이치.가와구치 요시카즈 지음, 임경택 옮김 / 눌민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것이 자연농이다.”라는 기본적인 지점을 말씀해주십시오.


가장 중요한 기본은 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논밭의 표면을, 지구의 표면을 결코 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료를 쓰지 않으며, 나아가 풀이나 벌레를 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세계에는 해충과 익충의 구별이 없습니다. 다 까닭이 있어서 존재하는 생명일 뿐 결코 적이 아니며 없어서는 안 될 생명들입니다. 그것이 기본입니다. 그리고 날씨, 토질, 작물의 성질, 그곳의 환경에 맞게 따라가고 맡기는 것입니다.(101-102쪽)


강원도 깊은 산골 마을에서 태어난 내게 소로 밭갈이하는 풍경은 잊지 못할 그리운 향수로 남아 있다. 땅을 파 뒤집는 일은 풍년을 기원하는 하나의 제의였다.


두엄을 마련하기 위해 ‘풀 베는’ 일은 농촌 마을의 빼놓을 수 없는 품앗이 가운데 하나였다. 그날은 얼추 잔칫날 분위기를 자아냈다. 두엄간에 쟁여지는 풀 더미에서 풍겨 나오는 압도적인 식물 향의 기억은 바로 이 순간에도 코끝을 찌르는 듯 생생하다. 이웃 아저씨들이 풀지게를 내려놓으며 손에 쥐어주던 개암 맛의 기억도 새롭다.


열 살 이전의 어설픈 손길이지만 감자밭에서 호미로 김매던 기억 또한 삼삼하다. 내가 김맨 밭의 감자가 유난히 알이 실해 신기하다시던 할머니 음성이 지금도 귓전을 울리는 것만 같다.


이 모든 것이 이른바 관행농이 빚어낸 에피소드다. 자연농이 내 어릴 적 추억으로 남았다면 전혀 다른 풍경이 내면을 채웠을 것이다. 마지막 호미질에서 반백년도 썩 지난 오늘 자연농을 단도직입의 화두로 들면서 고요히 옛 풍경을 애도하려 한다. 그렇다.


가장 중요한 기본은 갈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 놔두는 것.


다 까닭이 있어서 존재하는 생명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것.


바로 이 풍경으로 복귀한다. 이 말은 진즉부터 내 의학과 치유의 종자 논리를 이루어왔다. 농農과 마주하여 그 일치함에 살포시 놀라는 것이 딴은 새삼스럽다. 내가 마음병과 마주할 때 근본이며 기본이라 여기는 것은 아픈 사람도 나도 현재 있는 그대로를 해석 없이 받아들이는 일이다. 파 뒤집지 않는다. 부추기거나 칭찬하지 않는다. 아픈 사람에게 고유한 특성과 조건을 살피며 “따라가고 맡기는 것”이 최대한이자 최소한의 일이다. 아픈 사람의 역사, 거기 집적된 희로애락의 지층에 예의를 갖추고서야 그 스스로 자라고 꽃피우고 열매 맺는 과정에 내가 비로소 참여할 수 있다.


자연농투성이 가와구치 요시카즈는 자연의醫투성이 나의 은유 너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연농, 느림과 기다림의 철학 - 자연농의 대가와 문화인류학자가 담담하게 나누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생명의 길
쓰지 신이치.가와구치 요시카즈 지음, 임경택 옮김 / 눌민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놀랄 때는 깜짝 놀란다. 이 놀람은 놀라는 순간에 자신이 놀란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놀람이다. 알아차리는 놀람이 있다. 모름지기 기다렸던 무엇이 일상의 평범함 속에서 상대적으로 느리게 감동을 주며 스며들 때 고개 끄덕여 맞아들이는 놀람이 그것이다.


『자연농, 느림과 기다림의 철학』에서 쓰지 신이치는 미우라 바이엔의 말을 인용한다.


마른 나무에 꽃이 피는 것을 보고 놀라기보다 살아 있는 나무에 꽃이 피는 것을 보고 놀라라.’(98쪽)


이에 답하는 가와구치 요시카즈의 말은 이러하다.


생명의 세계가 자아내는 생명 영위의 불가사의, 절묘함, 훌륭함을 알고 그 심연의 생명 영위의 존엄함을 깨달으라는 것이겠지요. 예를 들면, 겨울에 잎이 지고 봄이 되면 싹을 틔우고 이윽고 너무나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그러고는 불가사의하게도 열매를 맺지요. 그 영위의 근원을 응시하여 생명 영위의 경이로움을 알아라, 존엄함을 깨달아라, 라는 것이지요.”(98쪽)


과연 타당한 말이다. 그러나 이 타당함은 비가 오면 습하다는 말처럼 밋밋하다. ‘마른 나무에 꽃이 피는 것을 보고 놀라기보다’라는 구절이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놀람에도 비대칭의 대칭이 존재한다는 진실을 놓치고 말았다.


자연농이 삶과 죽음이 마주한 가장자리에서 빚어내는 역설 운동임을 익히 알고 있는 가와구치 요시카즈가 왜 이런 경량급 발언을 했을까? 책 전체를 통해 드러나는 그의 삶이 넌지시 답을 알려준다.


본디 자연농이라는 표현 자체가 형용모순이다. 모순이 맞물리는 극의 시공에서 시리고도 다사로운 생명 사건으로 연루되어가는 일이 자연농이다. 자연농으로서 삶은 이치상 비대칭의 대칭이라는 진실 논리 안에서만 성립한다. 가와구치 요시카즈는 이 삶을 누군가에게 배운 것이 아니다. 시행착오를 견디며 스스로 깨친 것이다. 그의 깨침은 ‘입자’적 경험을 통한 귀납 과정에서 나왔다. 정색하고 연역하여 ‘파동’적 종자논리를 갈무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멍이 남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이렇게 구멍 난 가와구치 요시카즈의 질박함이 좋다. 나 같은 먹물한테는 없는 단단함이 있다. 그의 말을 따라가 볼 테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05-09 2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10 0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선불교의 철학
한병철 지음, 한충수 옮김 / 이학사 / 2017년 3월
평점 :
일시품절


한병철을 발견하고 처음 읽은 책 세 권에 차례로 꼼꼼히 주해 서평을 썼다. 다음에 읽은 책 두 권에는 주해 서평을 쓰지 않았으며 더 이상 그의 책을 읽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지난 3월 어느 날 서점에서 그의 『선불교의 철학』을 보았다. 선불교에 입을 댔다기에 호기심이 동해 집어 들었다. 말하자면 더는 읽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변화를 일으킬 만한 내용을 기대했다는 뜻이다. 결론: 2002년 저작이라는 점을 감안하고라도 읽는 데 들인 공이 아깝다. 단, 옥간의 그림을 알게 해준 것은 고맙다.


법률상 국적이 어딘가와 무관하게 한병철은 독일인이다. 독일어로 사유하고 독일어로 글을 쓴다. 그의 사유와 글이 독일 땅에서 ‘대박 난’ 것은 한국 출신이라는 요인이 작용했다기보다 시선과 내용에서 독일 적합성이 탁월하게 드러났기 때문일 터다. 실제로 그의 사유와 글에서 한국 적합성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내가 이 지점에서 제기하는 의문은, 한국인이면 한국적인 시선으로 철학을 해야 하지 않느냐, 적어도 한국 현실을 고민하는 내용쯤이라도 담아야 하지 않느냐, 뭐 이런 거 아니다. 한국인이 독일어로 사유하고 독일어로 써 독일에서 대박 난 글을 한국인이 한국어로 번역해 한국에 내놨더니 역시 대박이 났다, 자 이 현상 뒤에 똬리 튼 실체적 진실은 대체 무엇이냐, 이런 거다.


손쉽고도 게으른 대답은 한병철 철학의 보편성 운운이다. 이건 그 동안 외국 유학파 지식인들 대부분이 공유해온 너절한 전제다. 철학이 당최 무엇인가, 보편이 과연 있기는 한가, 묻는 것보다 실례를 하나 들면 문제의 핵심을 바로 볼 수 있다. 미국의 명문중명문인 St. Johns College는 재학생 필독서 100권(2014년 판)에 서구 이외 세계의 책을 단 한 권도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 따위 자세를 한국인이 내면화해서 생긴 현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한병철 신드롬이다. 거꾸로 생각해보자. 한국의 한 대학이 동아시아 고전만으로 필독서 100권을 정했다면 이 땅 지식인, 특히 유학파는 과연 뭐라 말했을까. 췌론의 여지조차 불필요하다.


보편은 없다. 보편철학도 없다. 한병철의 철학은 독일철학이다. 한국인이 독일철학을 알아서 안 될 일이 무엔가. 지향과 내용을 따져 배울 만하면 배우는 게 맞다. 사실 여태 우리는 이런 유의 행위에만 골몰해오지 않았던가. 문제는, 그러면서 보편을 배우는 거라 스스로 속였다는 사실이다. 열 걸음 물러서자. 그래, 그들에게서 보편을 배워왔다 치자. 두 가지 질문을 한다. 우선, 왜 보편철학은 저들만 빚어내는가? 다음, 저들이 빚어낸 보편철학을 배워 들여 이 땅에서 설파하는 목적은 뭔가?


한병철은 이 땅에서 보편철학을 빚어낼 힘이 없다. 한병철은 이 땅에서 한국철학을 빚어낼 마음이 없다. 한병철이 독일, 그러니까 서구로 날아간 이유 둘이다. 이 둘은 결국 하나가 된다. 그래야만 철학자로서 권위를 인정받으며, 거기 상응하는 대접받으며 살 수 있다, 로. (신)식민지 지식인에게 익숙한 판단법이다. 철학과 현실 삶을 구별하고 오로지 철학을 위한 독일이었노라 하는 말은 일제 세상이 백년 갈 거라 믿었다 한 미당의 말보다 훨씬 비굴하다. 한병철이 실제로 이런 말을 한 적은 없을지 모른다. 정녕 그런 생각을 지니지 않았다면 자신의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대박 나)는 일은 거절했어야 이치에 맞다.


EU를 이끄는 국가로서 제일세계의 한 축인 독일의 탁월한 사회정치적 조건에서 한병철은 그의 담론을 생산한다. 매판독재분단세력의 수탈에 시달리면서 민주공화국의 기초를 다시 놓아야 하는 한국인에게 그의 담론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철학인가. 그것은 어떤 맥락에서 인문정신인가. 의미는 너무 아득하고 맥락은 너무 동떨어진 것 아닌가. 이런 의문의 결정판이 다름 아닌 『선불교의 철학』을 향한다.


독일에게 선불교의 철학적 사유는 모름지기 충격이다. 서구 사유 전승의 기라성들과 맞대면시키면서 한병철이 풀어낸 선불교 담론은 서구의 有적 집착을 일거에 베어버리는 호쾌한 無의 검이다. 이 검은 자본주의 최첨단에 서서 수탈체제를 향유하는 오늘 독일에게 다시없이 통렬한 죽비일 것이다. 한국에게도 그런가. 적어도 내게는 추호의 울림조차도 없었다. 중국과 일본 자료를 독일어로 번역한 것을 인용하며 꾸려가는 한병철의 이야기는 형언하기 어려운 기갈마저 자아냈다. 물론 독일의 독자를 대상으로 한 저작이니 그들이 닿지 못하는 원문 자료를 인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한국어 원전은 거의 전혀 번역되지 않았을 터이니 설혹 그가 읽고 영향 받았다 하더라도 한국 선불교 사유를 인용할 길이 원천 봉쇄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이 길목 저 모퉁이 허다히 등장하는 하이쿠를 지나치면서 깊은 한숨을 쉬곤 했다. 이 책의 번역자는 나와 같은 고민을 하지 않은 듯하다. 번역에 즈음해 한 마디 말도 없는 걸 보면 저자 또한 나와 같은 고민을 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끝내 나는 질문하고야 만다.


한병철에게 철학이란 대체 무엇일까?


나는 그의 철학관을 모른다.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안다. 그가 생각하는 철학이 내가 생각하는 철학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사실. 나는 더는 한병철을 소비하지 않을 것이다. 카를로 로벨리의 물리학이 그러하듯 한병철의 철학 또한 내게는 포르노로 다가온다. 보편이 아니어도 좋고 철학이 아니어도 좋다. 나는 나 스스로 나와 나의 삶의 조건인 공동체의 구체적 관계 속에서 나를 묻고 세계를 묻는 일을 할 것이다. 내게서 비롯하여 네게로 번져가는 삶의 궁구를 철학이라 할 만하다면 나는 그렇게 철학하고 싶다. 그뿐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군자 2017-05-30 1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날카로운 물음과 비판 좋은데...오늘날 독일로 떠난 사람을 (신)식민지 지식인에 빗대는 시대착오는 무엇이오? 한국인이란 대체 무엇일까? 본문에 따르면 ˝매판독재분단세력의 수탈에 시달리면서 민주공화국의 기초를 다시 놓아야 하는˝ 인간. 내가 생각하는 한국과는 판이하게 다른...

잘생긴방통 2017-09-14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뽀르노도 수준 높은 고급 뽀르노는 나쁘지 않습니다.ㅋㅋ 지루하고 저급한 심각한 체하는 책들보다 훨 낫죠.

youhj22 2025-04-20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한병철의 책을 시집으로 읽어요. 최근의 책들에서 이런 문장들을 보기 힘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