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농, 느림과 기다림의 철학 - 자연농의 대가와 문화인류학자가 담담하게 나누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생명의 길
쓰지 신이치.가와구치 요시카즈 지음, 임경택 옮김 / 눌민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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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공생”, “생물 다양성”, “삶을 얻는다.”는 말을 자주 씁니다. 모두 소중한말인데, 자칫하면 “죽이고 있다.”, “생명을 받고 있다.”는 측면을 은폐할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사실에 눈을 감아서는 안 됩니다. “죽이고 있다.”는 것에 시선을 주면 “살아가고 있다."는 것도 보이고 살아 있는 것의 의미가 갑자기 무거워집니다.(148쪽)



함께 삶을 꾀하고 북돋워 풍요롭게 얻고 다양하게 펼친다는 생각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실천에 참여하는 일은 우리 가슴을 더욱 벅차게 한다. 이것은 삶 전체 진실의 절반이 채 안 된다.


산 자의 삶은 근본적으로 누군가의 죽음에 터한다. 다른 많은 생명의 주검 위에서야 내 생명이 유지된다는 사실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면 우리 삶은 지금보다 훨씬 야젓할 것이다. 우리 삶은 그 목숨 값에 걸맞은 사유와 실천으로 평화로울 것이다. 이것이 전체 진실의 절반 이상이다.


조금 더 생각을 펼쳐본다. 쌀 한 톨, 파 한 뿌리만 우리에게 그 생명을 바치는 것 아니다. 병들고 가난한 사람, 사회정치적으로 핍박 받는 사람, 장애로 차별받는 사람, 이성애자가 아닌 사람·······이들 모두 그렇지 않은 다수에게 목 길게 늘이고 엎드려 산다. 그 목숨 값으로 나머지 사람들은 풍요를 누린다.


다른 생명을 죽여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지녀야 할 가장 근본적인 마음 자세는, 그러므로 고마움이다. 고마움이 족함을 아는 마음을 부른다. 족함을 알면 탐욕은 도리어 성가시다. 제 호주머니에 마구 우겨넣기를 거절하는 순간, 아, 이 홀가분함이여.


오랫동안 나를 지켜봐온 오십 줄 제자가 어느 날 술좌석에서 정색하고 묻는다. “선생님은 아무리 흔쾌히 웃으셔도 왜 제겐 그 끝이 무겁게 느껴질까요?” 내가 답한다. “응, 내 웃음은 누군가의 울음 값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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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3 21: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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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4 13: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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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농, 느림과 기다림의 철학 - 자연농의 대가와 문화인류학자가 담담하게 나누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생명의 길
쓰지 신이치.가와구치 요시카즈 지음, 임경택 옮김 / 눌민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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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많은 젊은이들은 먹는다는 것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게 된 듯합니다.


이는 살아가는 의미를 잃어버렸다는 뜻이지요. 기본 생활에서 벗어났으므로 무엇이 기본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127-128쪽)



먹는다는 것은 산다는 것이다. 진릿값이 1인 명제에 해당한다. 역은 어떤가. 범속한 형식논리에서 보면 진릿값은 1일 수 없다. 정색하고 생각한다. 먹는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먹는다는 것은 좁은 의미의 사食현상을 넘어선다. 사食는 음식을 섭취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먹는다는 것은 숨을 들이마시는 것,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받아들이는 것, 타인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 타인과 느낌을 공유하는 것, 다른 생명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그러니까 생명으로서 살아가는 모든 관계 형성의 한 측면 모두를 아우른다.


아니다. 이런 사유는 통념적인 것이다. 진실은 거꾸로다. 음식이라는 게 본디 다른 생명이므로 최초·근본의 생명 현상은 사食현상이다. 나머지가 오히려 변주며 은유다. 산다는 것은 먹는다는 것이다. 이 명제야말로 진릿값 1을 지닌다.


너무 많이, 너무 맛있게, 너무 쉽게, 너무 함부로 먹어서 먹는다는 것의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말 속에는 삶의 의미를 상실했다는 말이 부분집합으로 들어 있다. 그러니까 먹는다는 것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현상에는 인간 삶의 무의미 말고 다른 무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다. 더 무섭고 깊은 어둠, 더 큰 멸절의 블랙홀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을 수도 있다.


먹는다는 것은 (더 이상) 우리 삶과 그 조건의 일부가 아니다. 기본이되 기본 너머다. 우리 운명 전체를 움켜쥔 무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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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0 23: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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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2 20: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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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농, 느림과 기다림의 철학 - 자연농의 대가와 문화인류학자가 담담하게 나누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생명의 길
쓰지 신이치.가와구치 요시카즈 지음, 임경택 옮김 / 눌민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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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농은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해준 아슬아슬한 선을 보여줍니다. 채집에서 재배로 이행하면 더 많은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다른 생명을 죽여서 살아간다는 점에서는 재배와 채집은 같지만, 재배를 통해 어디까지 인간의 것으로 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의 대답이 바로 자연농입니다.(122쪽)·······살기 위해 죽여서 먹는 행위는 아름답고 엄숙한 행위입니다.(125쪽)


아, ‘꼰대’가 되어 가나보다, 하다가도 이내 그 생각을 거둔다. TV 채널마다 먹는 이야기 아니면 도무지 할 말이 없다는 듯 떠들어대는 꼴을 보고서야 어찌 돌아서지 않으랴. 식민지와 전쟁을 겪으며 생존의 기본인 먹는 문제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던 세대의 일시적 범람이려니 해둔 세월이 너무 길다. 갈수록 먹을 것에 집착하는 추세다. 배를 채우는 먹기에서 곧 바로 향락적인 먹기로 넘어간 풍경이다.


먹는 행위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살림과 죽임의 경계를 일으키는 사건이다. 누군가를 죽여야만 누군가를 살리는 일이 비로소 가능해지는 외길에서 불가피하게 치르는 제의이자 축연이다. 이 비대칭의 대칭이 지닌 뜻을 망각하고 향락으로 빠져버린 오늘의 우리 농업과 식문화는 그 자체로 위중한 질병이다. 포르노다.


포르노는 아름답지 않다. 포르노는 엄숙하지 않다. 아름답고 엄숙한 농업, 아름답고 엄숙한 식사는 생명을 살리기 위한 것일 때만 성립한다.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짓고 먹을까, 결정할 때 영양도 맛도 생명을 살리는 균형점에서 이탈하면 안 된다. 중용의 밭에서 낸 중용의 음식으로 중용의 식사를 하기 위해 탐욕의 손을 거둬들이는 일이 오늘 우리에게 가장 급진적radical이고 근본적radical인 혁명이다.


너무 많이 먹으려 너무 많이 죽인다. 아름답고 엄숙하지 않다. 너무 맛있게 먹으려 너무 잔혹하게 죽인다. 아름답고 엄숙하지 않다. 너무 쉽게 먹으려 너무 무심코 죽인다. 아름답고 엄숙하지 않다. 너무 함부로 먹으려 너무 무례히 죽인다. 아름답고 엄숙하지 않다.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해준 아슬아슬한 선” 위에 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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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 - 세월호에 대한 철학의 헌정
백상현 지음 / 위고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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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을 소개한 신문을 보았을 때 내용이 와락 궁금해졌다. 게다가 ‘세월호에 대한 철학의 헌정’이란 부제는 내 궁금증을 한껏 증폭시켰다. 그러던 차에 알라딘 서재의 나와같다면 님께서 고맙게도 선물해주셨다. 고마움이 더해져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책을 집어 들었다.


2. 책 앞날개에 있는 저자 소개. 정신분석학자가 선두에 서고 이어 라캉 관련 내용이 주르륵 흐른다. 그 순간, 내 가슴은 두근거리기를 멈춘다.


喝! 마음 단속하고, 찬찬히 첫 문장부터 읽기 시작한다. 서구 유학파 인문학자의 체취를 물씬 풍기며 들이닥치는 문장들에 아연 지적 긴장이 날을 세운다 싶더니 얼마 못 가 시들해지고 만다. 서구 유학파 인문학자들에게서 거의 대부분 나타나는 종자논리의 허술함이 단박에 드러나 버렸기 때문이다.


3. 책을 관류하는 핵심 개념은 단연 슬픔이다. 슬픔을 마주하여 행하는 애도가 지니는 절대적 중요성은 췌론의 여지가 없다. 저자는 그런 애도를 허투루 대한다. 허투루 대한다는 말은 처음부터 애도를 바르게 규정하지 않았거나, 적어도 상이한 두 맥락의 용법을 분별없이 버무리고 있다는 뜻이다.


저자가 처음 애도를 언급한 것은 플라톤이다. 그가 말하듯 “서구철학은 그렇게 진리 상실의 슬픔에 대한 기나긴 애도의 절차로서 시작되었다.”는 그 애도다. 플라톤의 애도는 한 평생 계속되었고, 수천 년 동안 서구철학의 흐름 속에서 무수한 사람들을 통해 수행되고 있다.


저자는 다음 맥락에서 이와는 다른 애도를 말한다. “슬픔의 종결”을 위한 애도다. 슬픔을 고정-관념 언어로 포획하여 병적 요소를 소진시키는 작업으로서 애도다. 이 애도는 상실이 가져온 공백을 다른 상념으로 메움으로써 병리적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방어적 자세”다. 여기서 실패하면 공백에 떠밀려 “슬픔의 편력”을 떠난다. 세월호 유가족이 바로 그렇게 편력을 떠났다 한다.


저자의 이 논의는 매우 성기고 무책임해 보인다. 우선 여기 슬픔을 종결하기 위한 애도와 앞의 플라톤의 애도가 같은 것인지 아닌지 명확하지 않다. 같다고 해도, 다르다고 해도 논리가 흐트러진다. 무엇보다 나중의 애도는 그 자체로 분명히 병리적 요소를 안고 있음에도 이를 맥락 정리 없이 세월호 가족에게 적용한 점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플라톤의 애도는 슬픔에 감응response하는 행위다. 슬픔을 종결하기 위한 방어적 자세로서 애도는 슬픔에 반응reaction하는 행위다.


반응으로서 애도는 격정emotionalism 슬픔의 프레임에 갇힌 것이다. 그 애도는 슬픔을 결코 종결하지 못한다. 고정-관념 언어로 포획하든 다른 상념으로 메우든 슬픔은 소진되지 않는다. 아니 더 근원적으로, 진정한 애도는 당최 슬픔의 종결을 지향하지 않는다. 진정한 애도는 슬픔을 삶의 일부로 수용하는 과정이다.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임으로써 격정의 프레임을 벗어난 슬픔이 건네준 깨달음을 통해 변화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능동적 각성 행위다. 이 능동적 각성이 바로 슬픔이 빚어내는 혁명의 인프라다.


세월호 가족은 슬픔을 종결하기 위한 방어적 자세로서 애도를 시도한 적 없다. 당연히 실패한 적도 없다. 세월호사건을 일으킨 권력이 그런 애도를 강요했고 가족은 그것을 거절했다. 권력이 실패했다. 전체 문맥이 이런 사실을 전달해주긴 하지만 저자의 어정뜬 애도 개념은 끝내 독자로 하여금 애도를 오해하게 한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말은 “만지지 말라”, 곧 “애도하지 말라”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애도 개념을 명확히 이해했다면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이랬을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진리는 언제나 애도할 것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본디 슬픔은 요청의 대상이 아니다. 요청의 대상이 되는 ‘슬픔’이 바로 애도다. 애도의 빛을 통과하기 전의 슬픔은 그저 어둠일 뿐이다. 슬픔을 빛일 수 있게 하는 애도로써 슬픔은 비대칭의 대칭이라는 진리로 구현된다. 슬픔이 아픔의 자리이자 깨침의 자리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애도로 말미암는다.


슬픔에서 발생하는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을 철학이라 할 때, 철학은 애도 그 자체다. 구태여 말하자면 애도는 슬픔의 ‘슬픔’이다. 깨달은 ‘슬픔’이다. 거듭난 ‘슬픔’이다. 대승의 ‘슬픔’이다. 혁명의 ‘슬픔’이다. 철학은 슬퍼하지 않는다. 철학은 애도한다.


4. 촛불의 애도 혁명이 시작되어 세월호사건을 일으킨 권력의 외형은 붕괴되었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매판독재분단세력의 거대한 힘에 결정적·근본적 균열을 일으키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애도에 다시없이 구체적이고 옹골찬 디테일을 더해야 한다. 푹신한 성실을 깔아야 한다. 질기디질긴 승부욕을 든든히 먹어두어야 한다. 다음번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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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농, 느림과 기다림의 철학 - 자연농의 대가와 문화인류학자가 담담하게 나누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생명의 길
쓰지 신이치.가와구치 요시카즈 지음, 임경택 옮김 / 눌민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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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삶의 시작 자체가 잘못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요. 농사의 본연, 생활의 본연, 인위의 방식이 자연의 섭리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 문제입니다.·······재배 생활, 농업 생활 자체가 원래 환경 파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그렇지 않은’ 것이 자연농입니다.(114쪽)


  ·······역사에서는 보통 괭이에서 가래로 발전했다는 식으로 흙을 뒤집는 도구와 함께 농사가 시작되어 진화해왔다고 여깁니다.······자연농은 그 이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시도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그 이전”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부합하는 올바른 형태”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약 1만 년 전, 채집 생활을 기반으로 농업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채집과 농업이 겹치는 시기가 분명히 있었습니다.(120쪽)




‘겹치다’는 말은 인간 언어에서 근원적 위상을 지닌다.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한, 또는 이것만도 아니고 저것만도 아닌 세계 진실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 겹치는 시공에서 그려지는 풍경화는 괴괴한 얼치기가 아니다. 변혁의 역동적 과정을 드러낸다.


1만 년 전, 채집의 가장자리에 최소한의 재배가 등장했다. 숲에 밭을 깃들게 하는 손 내밀기 변화였다. 인간이기 위한 최초 혁명이었다. 오늘 산업농의 가장자리에 또 다시 최소한의 재배가 등장한다. 밭에 숲을 모시는, 손 거두기 변화다. 인간이기 위한 최후 혁명이다.


숲과 밭의 차별 없는 일심의 터전에서 채집과 재배가 맞물리는 화쟁의 노동으로 어우러지는 무애자재의 삶을 꿈꾼다. 불가능한 꿈인가? 그래서 꿈꾸지 않는다면 진정한 리얼리스트가 아니다. 체의 목소리가 가 닿는 궁극의 지점은 다름 아닌 ‘숲밭’이다.


모든 혁명의 궁극 목적은 더불어 거룩하고도 흥겹게 먹는 것이다. 거룩하고도 흥겹게 먹는 것이야말로 생명에게 가장 긴급하고도 근원적인 사건이다. 생명 활동의 지성소는 ‘숲밭’이다. ‘숲밭’에서 윤리도 예술도 정치도 교육도 의료도 참되어 나온다.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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