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농, 느림과 기다림의 철학 - 자연농의 대가와 문화인류학자가 담담하게 나누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생명의 길
쓰지 신이치.가와구치 요시카즈 지음, 임경택 옮김 / 눌민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양사상에서 생겨난 것이 서양의학, 동양사상에서 생겨난 것이 동양의학이라고 할 때, 그 동양사상에서 생겨난 한방의학을 거론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한방의학이 아닙니다. 사실 한방의학은 동서양의 구별을 넘어선 곳에 있는 생명의학이며, 어느 시대에서나 통하고 모든 사람들의 모든 질병을 고칠 수 있는 의학으로서 대성했습니다. 인류는 이미 완성된 의학치료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한방의학은 약2000년의 역사를 지닌 『상한론』, 『금궤요략』이라는 고전 의학서에 제시되어 있습니다.(186-187쪽)



농부의 입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나마 일본 농부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사실 대한민국에서 한의학을 이런 식으로 자리매김하는 한의사가 얼마나 될지 자못 의심스럽다. 더군다나 『상한론』,『금궤요략』이 완성된 의학을 제시했다고 생각하고 그 처방을 그대로 임상 현장에서 쓰는 한의사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상한론』,『금궤요략』을 존숭하는 집단이 있으나 그들도 요시마스 토도吉益東洞라는 에도 시대 의자의 협애한 해석을 추종하는데 요즘은 그조차도 전만 못하다.


『상한론』,『금궤요략』은 장중경張仲景이라는 동한 시대 인물에 가탁된 본초(약성식물) 전승 의학 텍스트다. 이를 바탕으로 7만 수首가 넘는 한약 처방이 나왔다. 한의학계 이외의 사람들도 가끔은 알고 있는 『황제내경』은 본초 전승이 아닌 별개의 침鍼 전승이다. 전자가 후자의 영향 아래 형성되었다는 통속적 다수설은 근거가 없다. 미상불 정치적 의도가 개입되었을 것이다. 역사적 직관으로 보면 전자는 동이東夷 전승, 후자는 화하華夏 전승일 가능성이 높다.


나는 『상한론』,『금궤요략』을 기본으로 하여 정신신경면역내분비학과 영양학을 고려한 독자적 처방을 쓴다. 물론 『상한론』,『금궤요략』 처방을 그대로 쓰는 것이 기조다. 나는 가와구치 요시카즈처럼 『상한론』,『금궤요략』이 완성된 의학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완성된 의학은 당최 없으니까 말이다. 설혹 있다 하더라도 의자가 완전하지 않는 한 무의미하다. 그러나 불완전한 의자 한 사람이 한평생 최선을 다해 병을 치료하는 과정을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상한론』,『금궤요략』은 차고도 넘치는 충분한 의학이다. 이렇게 보면 『상한론』,『금궤요략』은 완성된 의학이라 할 수도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여기며 『상한론』,『금궤요략』을 읽는다. 그 책에서 내 체취가 맡아질 정도로 말이다.


『상한론』,『금궤요략』으로 상징되는 생명의학을 한방의학이라 일컫는 것은 잘못이다. ‘한방’이라는 용어 자체가 한의학을 폄하하기 위해 조작된 것이다. 종래 한漢의학을 오늘 대한민국에서 한韓의학이라 바꿔 부르는 것도 그다지 탐탁하지는 않다. 나는 *(아래 아를 쓴 한)의학이라 한다. *의학은 동서를 넘나드는 의학이다. *의학은 고금을 꿰뚫는 의학이다.


*의학은 비대칭의 대칭이라는 세계진실을 적확히 반영한다. 가와구치 요시카즈가 『상한론』,『금궤요략』에 터하는 것은 숙명이다. 자연농이 바로 비대칭의 대칭이라는 세계진실의 구현이니 말이다. 산업농에 대하여 자연농이듯 산업의학에 대한 자연의학이 바로 *의학이다. *의학적 치유가 인류를 구원한다. *의학의 사회정치적 복권을 요청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연농, 느림과 기다림의 철학 - 자연농의 대가와 문화인류학자가 담담하게 나누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생명의 길
쓰지 신이치.가와구치 요시카즈 지음, 임경택 옮김 / 눌민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농사와 의료와 교육이라는 세 개의 길이 동일한 생명 과정의 세 가지 측면이라는 생각·······(186쪽)



농사와 의료와 교육(정확히는 산육)의 공통분모는 “심어 기르고 거두기”다. 이 가운데 의료는 질병 상태를 전제하지만 질병이란 유한성의 한 형태, 또는 발달불균형 상태를 뜻하므로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


본디 이 세 가지는 인간 누구나 스스로 또는 스스로에 준하는 기본 규모, 이를테면 150인 이내 생명공동체가 행하는 필수적인 일이었다. 스티브 테일러 어법으로는 ‘타락’ 이전, 내 어법으로는 비대칭의 대칭이 이루는 동적 평형이 깨지기 이전 시대에 이들은 삼위일체였다. 이 시대 농사는 자연(원예)농이었다. 이 시대 의료는 자연의료였다. 이 시대 교육은 자연교육이었다. 여기에 따로 정치가 필요했을 리 없다. 에덴에서 시작하여 이로쿼이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이런 고요에서 살았다.


문제는 산업농이다. 문제는 산업의료다. 문제는 산업교육이다. 동적 평형을 넘어 흐른 잉여생산이 욕구를 탐욕으로, 갈무리를 불안으로, 지족을 무지로 튀겨버렸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탐욕·불안·무지의 극한에서 돈으로 농사·의료·교육 모두를 외주 주어버렸다. 외주는 전문가 집단의 팽창을 전제로 한다. 팽창된 전문가 집단은 포르노를 생산하기 마련이다. 결국 현대문명은 그 자체로 포르노다. 포르노 쌀밥으로 몸을 지탱한다. 포르노 프로작으로 마음을 지탱한다. 포르노 교과서로 사회를 지탱한다.


나는 자연농, 자연의료, 자연교육을 하나로 사는 꿈을 향해 간다. 물론 의자니까 침 들고 환자 앞에부터 서겠지만, 낫 들고 벼 앞에 서든, 책 들고 제자 앞에 서든 뭐가 다르랴. 오늘 여기의 나 너머 진정한 나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연농, 느림과 기다림의 철학 - 자연농의 대가와 문화인류학자가 담담하게 나누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생명의 길
쓰지 신이치.가와구치 요시카즈 지음, 임경택 옮김 / 눌민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교조가 생겨나는 시점에서 사람의 길과 종교의 진정한 길에서 벗어납니다. 신자를 끌어 모아 늘리면 안 됩니다. 교단을 유지하는 일에 비중을 기울이면 안 됩니다. 진실을 가르쳐 이끌고 진정한 자립으로 내보내는 것이 종교인의 역할입니다.·······교조라는 말을 사용하려면,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교조가 되어야 합니다.·······


석가는 교단을 조직하지 않았지요.


그렇지요. 하지만 석가는 제자를 깨닫게 해서 돌려보내는 방식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점점 제자들이 늘어나 대집단 대이동의 설법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자립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각각의 무대, 각각의 길로 내보내야 합니다.(171-172쪽)


마음 치유를 하면서 맞닥뜨리는 아뜩함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가장 안타까운 것 중 하나. 아픈 사람은 조금씩이나마 변하는데 그를 그렇게 만든 삶의 조건은 전혀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매번 같은 조건 속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아픈 사람은 견디지 못 하고 도로 주저앉은 상태로 온다. 반복된다. 이런 상태에서 마음 치유는 조건, 특히 요지부동인 주위 사람들을 대하는 다양한 방법, 심지어 싸우는 기술까지 익히는 전방위인문치유일 수밖에 없다.


당연히 갈등이 일어난다. 주위 사람들은 환자를 비난한다. 나아지라 보냈더니 더 못돼져서 돌아왔다고. 결국 비난은 내게로 귀착된다. 고치라고 보냈더니 더 망가뜨려 보냈다고. 사실 주위 사람들이 바라는 바는 하나다. 신경 안 쓰게 해달라는 거다. 그에 맞서려면 치유연대는 불가피하다. 치유연대는 자립을 가로막는 교단이 아니다. 교단이라면 주위 사람들이 바로 교단이다. 그 힘을 직면하기 위한 최소한의 어깨동무가 치유연대다.


이치로 따지면 자연농 자체가 치유연대다. 가와구치 요시카즈는 벼 자연농을 이렇게 말했다.


자연 그대로 맡기는 것이 아니라 벼가 다른 풀에 지지 않도록 조금 손을 빌려주는 것입니다. 자연 그대로 그냥 맡겨버리면 그것은 채집 상태일 뿐이기 때문에·······목적으로 하는 벼가 지지 않도록 적기에 적확하게 손을 빌려주고, 나중에는 맡깁니다.”(150쪽)


질 수밖에 없는 환자를 조건에 그냥 맡겨버리면 치유 이전 상태로 돌려놓는 일이기 때문에 내가 환자와 연대하는 이치는 자연농에서 농부가 벼와 연대하는 바로 그 이치다. 농부가 벼와 연대하는 이치는 농부가 농부와 연대하는 바로 그 이치다. 여기가 가와구치 요시카즈의 맹점이다.


왜 이 맹점이 생겼을까? 강고한 당시 카스트제도, 왕정 등의 사회 조건을 고려하면 공화주의 평등공동체인 석가의 승단은 불가피한 최소 연대였음을 그는 알지 못했다. 이런 지식의 결핍은 그에게서 사회학적 상상력이 자라나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지식과 상상력의 문제 이전에 종자논리의 문제다. 자신의 종자논리를 말갛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가와구치 요시카즈 같은 각자조차도 자신이 서 있는 경계의 땅이 얼마나 빛나는 자리인지 알 수 없었던 거다. 실로 허탈하고 어쩌면 무서운 일이다.


자연농이 자연에 거스르지 않고 맡기되 양육 과정에서 생명을 돌보듯 마음치유 또한 이치에 맞게 스스로 살아가도록 맡기되 숙의를 통해 아픈 사람을 돌본다. 이 돌봄의 과정과 시간을 촘촘히 챙기지 않고 자립, 각자 교조를 거론하는 것은 어떻게 보아도 섣부르다. 오늘도 나는 마음 치유의 도상에 선다. 나는, 나와 마주앉은 아픈 사람은,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연농, 느림과 기다림의 철학 - 자연농의 대가와 문화인류학자가 담담하게 나누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생명의 길
쓰지 신이치.가와구치 요시카즈 지음, 임경택 옮김 / 눌민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기서 자연농을 시작했을 때는 단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많은 사람들이·······찾아와서 자연농의 사상을 접하고 배우고, 어떤 사람은 실제로 농사를 시작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연농 사상을 퍼뜨리기도 하여 조용히 계속 확산되어왔습니다. 이런 전개를 예상하셨습니까?


전혀 상상하지 않았습니다. 제 자신의 삶으로 시작한 것이기 때문에 얼마나 확산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세상을 바꾸려는 생각도 없었습니다.·······제가 그랬듯이 삶은 스스로 바꿀 수밖에 없습니다. 타인을 바꿀 수 없다는 깨달음이 중요합니다.(163쪽)



나 아닌 남이 내 삶을 바꾸는 경우란 없다. 물론이다. 그러나 어떤 인연도 짓지 않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직관으로 내 삶을 바꾸는 경우는 더더욱 없다. 가와구치 요시카즈 자신도 농약 때문에 병들었을 때 들은 의사의 말이 한 생각 크게 돌이키는 계기가 되지 않았던가. 현재 삶에 문제가 있음에도 스스로 바꾸지 않는 사람이 반드시 의도적으로 그 길을 고집한다고 할 수는 없다. 문제되는 줄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알아도 대체 어찌해야 하는지 모를 경우도 있다. 그럴 때 누군가 무심히 해준 한마디가 엄청난 변화의 단초로 작용하기도 한다. 타인을 바꿀 수 없다는 말과 스스로 바꿀 계기를 마련해줄 수 있다는 말은 양립 가능하다. 자연농의 확산에 관심도 없고, 세상 바꿀 생각도 없다는 말에서 불가피하게 풍겨 나오는 사무라이 또는 소승의 냄새. 그가 아무리 그런 소신을 지닌다고 하더라도 그를 배워간 “어떤 사람은 자연농 사상을 퍼뜨리기도 하여” 사람도 세상도 스스로를 바꾸고 있었다. “인연 없는 중생은 제도할 수 없다無緣衆生不可渡.” 말한 붓다도 40년 이상 세상을 떠돌며 설법을 펼쳤다. 자비심으로 곡진히 말을 건네는 것을 능력 차원에서 다룰 까닭이 없다. 욕망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들은 자가 어찌 하는가는 최종적으로 들은 자 자신의 소관이다. 그러나 말하는 자의 어떠함이 듣는 자에게 전혀 영향을 끼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불이불일의 종자논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소치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함민복). 경계로 나아가는 일이 깨친 자의 천명이다. 깨친 자의 천명은 개체 너머의 울림이다. 개체 너머 울림은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꾼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연농, 느림과 기다림의 철학 - 자연농의 대가와 문화인류학자가 담담하게 나누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생명의 길
쓰지 신이치.가와구치 요시카즈 지음, 임경택 옮김 / 눌민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절대”, “하나”, “전체”라는 말에 대해서인데,·······‘총체적인“이라는 말과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부분 모두를 끌어 모은 것을 전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158쪽)


“불이不二”라는 말이 있습니다.·······현상적으로 구별되는 두 가지가 본질적으로는 하나고 일체라는 것입니다.


두 개가 있지만 분리할 수 없는 하나. 또는 하나면서 구별하면 두 개.(159쪽)




최근 들어 나는 “종자논리”란 말을 스스로 만들어 쓰고 있다. 이 말은 내가 터할 사유 틀을 구축하려고 애써온 40여 년 세월 동안 겪은 고뇌를 갈무리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뜨르르한 지식인의 글을 읽고 배우면서 남곤 했던 아쉬움이 있었다. 그 내용의 탁월함에 놀라기를 수없이 반복하면서도 끝내 허탈해했던 이유를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특히 서구 유학파들의 글에는 거의 예외 없이 나타나는 그 허술함을 뭐라 해야 할까. 바로 그것을 담는 그릇으로 내가 생각해낸 것이 다름 아닌 종자논리란 말이었다.


종자논리는 사유의 나무로 자라 실천의 열매로 맺히게 될 씨앗인 이치다. 이 종자논리를 어떻게 세우느냐에 따라 길은 사뭇 달라진다. 물론 끝내 자신의 종자논리가 무엇인지, 어디에 구멍이 났는지 모른 채 고급 지식인 행세를 하며 살다 가는 사람도 있다. 아니, 많다. 이 단호함의 근거는 다름 아닌 그들의 글이고 삶이다. 치명적인 예가 바로 라캉이다.


종자논리라고 해서 무슨 특이하고 별스러운 것이 아니다. 가령 가와구치 요시카즈가 말한바 “두 개가 있지만 분리할 수 없는 하나. 또는 하나면서 구별하면 두 개.” 그러니까 불이불일不二不一 같은 것이다. 동아시아 종자논리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아는 사람도 그 요체 파악에서 보이는 다른 결은 실로 백인백색이다. 완벽하냐는 문제가 안 된다. 매순간 성찰하느냐가 문제다.


불이불일은 전체와 부분(정확히는 개체)의 명제와 결국 같은 것이다. 전체성을 확보하려면 부분의 총합을 넘어서야 한다. 부분의 총합을 넘어서려면 부분과 부분 사이에서 창조되는 경이가 필수불가결하다. 경이를 창조하려면 완전히 쪼개지지도 않고不二 완전히 포개지지도 않는不一 거래를 해야 한다. 이 거래를 일러 화쟁이라 한다. 화쟁하면 일즉다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세계가 열린다. 라캉과 그 아류는 결코 갈 수 없는 길이다.


가와구치 요시카즈는 어떤가. 不二不一, 一卽多 多卽一이란 종자논리를 구사하는 과정에서 ‘사무라이’의 냉기가 흐른다. 그 냉기로는 화쟁의 화학작용을 일으키기 어렵다. 화쟁이 이룩하는 화엄의 전체성에는 온기가 향 맑게 흐른다.


“총체적”은 “전체”를 의미하는 “whole”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 “whole”은 건강을 의미하는 “health”나 치유를 의미하는 “healing”의 “heal”과 어원이 같다고 합니다.(200쪽)


화엄은 치유다. 치유를 입에 올리면서 냉기를 배설하는 지식인은 자신의 종자논리부터 확인할 일이다. 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