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인간 - 식(食)과 생(生)의 숭고함에 관하여
헨미 요 지음, 박성민 옮김 / 메멘토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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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훗날 부활할 수도 있지만, 지금 일본에서는 ‘음식의 한恨’ 같은 말이 이미 죽어버렸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다카에서 방글라데시 최남단에 떨어져 있는 로힝야족 난민 캠프에 가보고 그 한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었다.

원조기관이 난민에게 식량을 배급했다. 그런데 그 양이 캠프 주변에 사는 주민들의 눈에 자신들이 가진 식량보다 훨씬 많아 보이자 그때까지 주민들이 난민에게 보이던 동정이 서서히 반발로 변해갔다.

음식의 양에서 드러나는 아주 미미한 차이. 거기에서 거품처럼 생기는 미묘한 감정의 무늬. 포식의 나라에서 자란 나의 혀와 위가 점점 잊어가는, 인간이 타고난 애처로운 맛의 상극이 이곳에 있었다.(36-37쪽)


예닐곱 살 무렵 사촌동생 남매가 우리 집에 잠시 얹혀 산 적이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 집은 아버지 아닌 할머니가 일으켜 세우신 터전이므로 큰아버지 자녀가 산다고 해서 얹혀 산다고는 할 수 없다. 어린 내 눈이 그리 오독했을 뿐이다. 그 오독은 할머니에게서 먼저 양육 받고 있던 알량한 기득권에서 나왔다.


사내아이가 식탐이 많았다. 이 또한 권력의 눈길이 빚어낸 오독일 가능성이 높다. 아이는 너무 굶주린 탓에 아귀아귀 먹었을 수도 있다. 일찍 객사한 큰아들, 허랑한 큰며느리 때문에 그 지경이 된 아이들을 애처롭게 여긴 할머니께서 조금 더 챙겨주셨을 수도 있다. 나는 아이가 두 눈 착 내리깔고 볼이 미어터져라 퍼먹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알 수 없이 치미는 부아를 견디지 못 해 구시렁거리곤 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 그 동생을 만났다. 소주 한 잔 하면서 사과의 마음으로 그때 이야기를 꺼냈다. 동생은 기억 자체가 없다며 허허 웃었다. 기억은 없지만 어린 시절의 신산했던 삶 자체가 동생의 생명력에 적지 않은 상처를 입혔음에 틀림없다. 어느 날 돌연히 동생은 세상을 떠났다. 내게는 아직도 동생과 함께 둘러앉았던 수레바퀴만한 둥근 밥상 풍경이 아린 기억으로 남아 있다. 동생은 ‘음식의 한’을 풀고 떠났을까. 그의 ‘음식의 한’에서 나는 과연 무엇일까. 눈물로는 부족한 회한이 끝내 남는다.


1991년의 로힝야족은 2017년에도 여전히 난민으로 떠돈다. 방글라데시는 연초에 그들을 사람이 살 수 없는 한 섬에 격리시킨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들을 탄압하여 난민으로 내몬 미얀마의 정치 지도자 아웅산 수치는 국제사회의 비판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 무엇을 얼마나 먹으며 살까. 그 주위 방글라데시 빈민은 무엇을 얼마나 먹으며 살까. ‘음식의 한’은 인간 존재 자체를 한으로 만든다. 존재 자체가 한인 인간을 정치가, 종교가 대놓고 만드는 세상이기에 나는 오늘도 5천 원짜리 백반 한 끼가 죄스럽다. 죄스러움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회한이 끝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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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이혼으로 상처를 받은 한 아이가 우울증 치료를 위해 제게 왔습니다. 아이는 부모 중 양육을 맡지 않은 쪽에 극렬한 적개심을 드러냈습니다. 필경 양육을 맡은 쪽에서 반복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주입한 탓일 것입니다. 양육자 본인은 강력히 부정했지만 저는 제 오랜 경험으로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는 비단 그 적개심뿐만 아니고 생각과 행동 전반이 심하게 편향되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양육자의 아바타로 키워지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것이 양육자가 얻는 이득일 테지만 아이한테는 엄청난 손실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우선 시급히 양육자에게 처방을 내렸습니다.


“아이 앞에서 전 배우자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말, 엄금합니다. 아이 영혼이 죽어갑니다.”


무엇을 꿈꾸고 있는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를 물으며 아이 마음이 어떻게 다쳤는지 살폈습니다. 아이는 연령에 비해 정신 발달의 지체가 뚜렷했습니다. 유아적 마법사고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양육자와 그 직계존속의 애지중지 학대를 계속 받아 현실 삶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는 능력이 현저하게 약했습니다. 저는 아이의 우울증을 치유하기 위해 삶의 조건을 바꿀 수 있다면 바꿔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양육자에게 전 배우자와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쪽 이야기도 들어봐야 치우침 없는 상담일 할 수 있고 무엇보다 아이의 양육 조건의 변화 가능성을 타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세 사람이 만났습니다. 계속 이런 만남이 이어질 것 같지 않아서 저는 양육자 아닌 쪽에게 많은 질문을 하고 그의 말에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그러자 양육자가 낯빛을 바꾸며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제가 아이를 병들게 한 사람의 편을 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내린 긴급처방에서 느낀 불편함과 연계된 반응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제가 두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아이 때문에 이혼한 것이 아닌 한, 이 문제에 아이를 연루시키면 안 됩니다. 두 분이 서로에게 품은 감정을 아이가 물려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제가 누구의 편을 드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날 이후 양육자가 더 이상 아이를 제게 보내지 않았음은 물론입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아이의 특이한 말버릇, 표정이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어찌 살고 있을까 궁금합니다. 짐작컨대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을 듯합니다. 그때 보여준 양육자의 성향으로 미루어 그의 생활 조건은 바뀌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돌이켜보면 그때 제가 아이 양육 조건의 열악함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모, 특히 양육자의 면모를 좀 더 지켜보고, 아이와 양육자의 신뢰rapport가 생길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렸어야만 했습니다. 만사에는 때가 있는 법이고 그 때란 것이 일방의 열정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는 진실 앞에 겸허히 엎드립니다. 천명을 안다는 나이를 넘기고도 이런 인연지음 하나조차 간수 못했다는 자책감이 지금도 여전히 똬리 틀고 있습니다. 오늘 그 아이가 제게 온다면 어찌 할 수 있을까요? 그때보다 훨씬 유연하고 여유롭게 감응하여 아이를 치유해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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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인간 - 식(食)과 생(生)의 숭고함에 관하여
헨미 요 지음, 박성민 옮김 / 메멘토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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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이 70cm쯤 되는 커다란 양철 쟁반에 수북이 쌓인 브리야니(볶음밥)와 밧(흰 밥)에 식욕이 솟아올랐다. 한결같이 뼈에 붙은 닭고기와 양고기들이 듬뿍 쌓여 있다.

옆에서는 녹색 선향 대여섯 개가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브리야니는 4타카(1타카는 약 15원이다.-옮긴이), 밧은 5타카·······다. 이렇게 적은 돈으로 먹을 수 있다니, 신이 난 나는 비싼 쪽을 주문했다.

방글라데시에서 첫 번째 식사다.·······


쌀 문화는 역시 좋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두 입, 세 입 잇따라 먹었다. 그리고 뼈에 붙은 고기를 입으로 가져가려고 할 때였다.

“잠깐!” 갑자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먹다 남은 음식이에요.”

·······자세히 보니 고기에는 분명 베어 문 자국이 있었다. 밥도 이미 누군가의 오른 손에 짓눌린 듯했다. 선향은 썩은 냄새를 없애려고 피운 것이다.

욱! 내가 접시를 내려놓았다. 그 순간 마치 말린 고기처럼 가느다란 팔이 옆에서 불쑥 들어오더니 접시를 빼앗아 갔다. 열 살쯤 되는 소년이다. 돌아보니, 쩍 벌어진 입으로 뼈에 붙은 고기를 덥석 뜯어 물며 주위는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내게 충고한 사람은·······말했다.

“다카에는 부자들이 남긴 음식을 파는 시장이 있어요. 음식 찌꺼기 시장이죠. 도매상, 소매상도 있어요.”

입에서 신물이 줄줄 솟아올라 나는 연신 침을 뱉어냈다.·······(29-30쪽)


“안 먹을 수 있다면 좋잖아요? 그런 음식······.”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실은 18세기 프랑스의 미식가로 유명한 브리야시바랭이 『미식 예찬』에서 한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짐승은 먹이를 먹고, 인간은 음식을 먹는다. 교양 있는 사람만이 비로소 먹는 법을 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람도 가끔 짐승과 똑같이 ‘먹이를 먹는다.’

‘교양 있는 사람’, 돈 있는 사람은 우아한 모습으로 먹이를 먹을 뿐이다. 먹다 남은 음식을 먹는 사람, 대량 수입한 음식을 먹고 남기는 사람, 음식의 신이 있다면 틀림없이 전자를 보고 눈물을 흘리고 후자에게는 언젠가 배고픔과 목마름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하지 않을까?(35쪽)


1960년대 도시빈민 아이로 성장했던 내게 아뜩한 기억 가운데 하나가 아버지의 장기 실직 상태로 말미암은 기약 없는 굶주림이었다. 끼니를 건너뛰는 일은 항다반사였고 며칠을 내리 굶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그럴 때는 학교를 가지 못했는데 담임선생님의 지시로 급우가 찾아오면 차마 굶어서 그랬다는 말을 할 수 없어서 쩔쩔맸던 기억이 남아 있다.


요즘 세태라면 옆집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도 모를 터이나 그 시절만 해도 앞뒷집 정도는 내색하지 않아도 다들 알아차리곤 했다. 다들 사정이 고만고만했기 때문이다. 동네 사람들이 다들 ‘남씨 아주머니’라고 부르는 분이 바로 뒷집에 살고 계셨다. 여느 날처럼 굶은 채로 휑한 아침 시간을 견디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살며시 문을 열더니 나오라고 손짓을 하셨다. 영문 모른 채 따라나섰더니 당신 댁으로 나를 데리고 가셨다. 안방에는 밥상 하나가 놓여 있었다.


“부담스러워하지 말아라. 먹다 남은 밥이다.”


숟가락 자취 선명한 쌀밥이 반짝이고 있었다. 다스운 기운이 여전한 것으로 보아 아저씨가 출근하고 얼마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아주머니와 내 이야기를 나누신 뒤 아저씨께서 일부러 밥을 남기셨음이 분명했다.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아주머니가 가만히 내 등을 다독여주셨다. 10살짜리 아이는 그 밥 다 먹도록 눈물을 멈추지 못 했다.


남이 먹다 남긴 밥인 줄 모르고 저자가 사먹는 풍경 자체에 우리가 꽂힐 필요는 없다. 그가 그 체험을 통해 증언한 참담한 ‘먹는 인간’ 문제에 직면하는 일이 필수다. 참람한 ‘먹는 인간’과 날카로운 대립구도부터 세워야 한다. 참람한 ‘먹는 인간’이 참담한 ‘먹는 인간’을 만들어내고 지속적으로 수탈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먹다 남긴 밥을 빼앗아 먹은 열 살 쯤 되는 소년과 이웃집 아저씨가 남겨준 밥을 울면서 먹은 10살짜리 내 처지는 개인적 측면에서 많이 다를 것이다. 사회정치적 측면에는 분명히 같은 점이 있다.


1971년 파키스탄에서 독립한 방글라데시는 정치적 불안정이 심각한 나라다. 오래토록 내전에 시달렸으며, 군부 쿠데타도 4번이나 일어났다. 공식적으로 1990년 군부 통치가 막을 내리고 1992년부터 민주정부가 통치를 시작했다. 불안과 빈곤은 여전했다. 소년이 저자가 남긴 밥 접시를 빼앗아 먹은 것은 이 무렵으로 추정된다.


1945년 일본에서 독립한 대한민국은 정부수립 2년 뒤 내전이 일어났다. 이승만의 장기독재는 1960년 4·19혁명으로 막을 내렸지만 이듬해 박정희가 일으킨 쿠데타로 다시 독재의 기나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나는 1965년 서울로 와서 도시빈민으로 살기 시작했고 남씨 아주머니 덕분에 먹다 남긴 밥이나마 얻어먹은 것은 그 직후였다.


먹다 남은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생기는 것은 그가 그런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도 아니고 부모가 무능·무책임하기 때문도 아니다. 전쟁, 불평등, 수탈을 토건으로 일으키는 극소수 지배층의 탐욕 때문이다. 참람한 ‘먹는 인간’이 “우아한 모습으로 먹이를 먹”고 남기면 참담한 ‘먹는 인간’은 그것을 받아먹을 수밖에 없다. 이제 한 그릇 밥 앞에서 불현듯 생각해보자.


“이것은 과연 먹다 남은 밥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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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에서 온 것 아니면 그 무엇도 참으로 안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지만, 경험하지 않으면 제대로, 아니 전혀 알 수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은 진실입니다. 몸으로 알아야 할 것이 무엇보다 그러합니다. 몸에 가까운 앎일수록 경험은 육중한 표지입니다.


인간의 감정은 근본적으로 직접적인 몸 느낌의 파동정보입니다. 그 직접적인 몸 느낌에서 비롯하여 겹과 결이 다양하게 갈라져 나갈 뿐입니다. 공포-불안-공황은 가장 직접적인 몸의 감정에 속합니다. 병리적 공포-불안-공황은 간접 경험이나 이론으로는 전혀 앎이 일어나지 않는 감정입니다.


한숨과 한숨 사이로, 나직나직 속삭이듯, 재빨리 말하는 청년과 띄엄띄엄 몇 달 동안 상담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출생 직후부터 10대 초반까지 어머니 아닌 할머니 손에서 자랐습니다. 연속과 인정, 그리고 수용으로 이어지는 모성은 그에게 그리움과 원망으로 존재할 뿐이었습니다. 그는 단절과 부정, 그리고 거부가 몰고 온 공포·불안, 고립, 무력감에 휘말려 버둥거리고 있었습니다. 학령기 이전부터 시작된 정신장애는 청년 초기 정점을 찍었습니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고야 말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가족은 그의 진실을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소심하고 무능해서 그러니 다 제 팔자지 어쩌겠나, 정도로 방치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같은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나는 버려졌다, 나는 (사회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 나는 남들이 무섭다, 남들은 나를 모른다, 남들은 나를 (모르면서도) 비난한다, 나는 순수하고 진실한데 세상은 부조리하다·······. 저는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들어주면서 조목조목 딱 하나의 같은 질문을 반복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처음에는 화를 내며 아, 정말이라니까요, 하더니 점차 그는 제 질문의 실체를 알아차리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물론 아닌 거 다 압니다. 그런데 아는 대로 움직일 수가 없네요,”


저는 그렇지 않은 맞은편 진실을 단순명료하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렇게 조금 씩 조금 씩 세상 쪽으로 돌아서는가 싶더니 어느 날부터 홀연히 발길을 끊었습니다.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돌아보면서 제게 부족한 점이 무엇이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사실 그 무렵까지 마음 치유하는 의자로서 제 관심사와 감각은 우울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경험이 가져다준 알토란같은 앎으로 말미암아 우울은 훤히 들여다보였습니다. 아픈 사람의 체취만으로도 우울장애의 유형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픈 사람의 마음결에 스미듯 깃들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길이 머무는 곳을 정확히 알 수 있었습니다.


불안 쪽은 사뭇 달랐습니다. 가벼운 정도의 고소공포를 제외하고는 공포·불안 계통의 병리적 경험이 없었던 탓에 기본 감각과 공감능력이 우울장애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습니다. 약물치료만 하면 되는 정신과 양의사라면 크게 문제될 게 없지만 상담,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상호소통을 하려는 저로서는 여간 답답한 노릇이 아니었습니다. 이론적 대응만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터라 막막해서 두려운 상황이 그때그때 연출되었습니다. 이런 동요는 분명히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이 청년과 더 좋은 인연을 맺지 못한 자책감에 잠겨 있던 어느 날 제게 하늘이 주신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제가 공적인 공격을 받아 제법 긴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공포·불안에 시달리는 사건이 터져버린 것이었습니다. 다수의 관공서를 드나들며 겪은 공포·불안은 어린 시절 가족 간에 겪은 그것과는 결이 달랐지만 그 뒤 공포·불안 스펙트럼 환우들과 마주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 청년을 지금 만난다면 어떨까, 부질없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때 저와 나눈 대화가 마냥 무용했다고 할 수는 없고 어떤 형태로든 효과를 나타냈으리라는 추측도 해보지만 여전히 그의 그 뒤 삶이 궁금 넘어 걱정됩니다. 지금이라도 조금이라도 평안의 땅으로 나올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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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인간 - 식(食)과 생(生)의 숭고함에 관하여
헨미 요 지음, 박성민 옮김 / 메멘토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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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봄, 박근혜가 자행한 대학살 이후, 나는 줄곧 울보로 살았다. 눈물이 주책없지는 않아졌을 무렵 어느 날, 책 한 권에 인연이 닿았다. 누가 추천한 것도, 어디서 서평을 읽은 것도 아니다. 책은 다만 그 흑백의 얼굴을 하고 진열대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나도 스치듯 지나다 문득 보고 손을 내밀었다. 책을 읽으면서 다시 눈물이 주책없어지고 말았다.


‘내가 먹는 음식이 곧 나다.’라는 진부한 말에는 그 진부함을 골백번 받아 안고도 남을 진실이 있다. 논자마다 다른 말을 할 수 있을 테니 나는 그저 내 이야기를 하겠다.


나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이따금 육식도 한다. 홀로 일부러 육식을 하는 경우는 거의 전혀 없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그를 내 생각에 말아 넣지 않으려고 흔쾌히 먹는다. 홀로일 경우는 국수에 얹은 쇠고기 고명조차 빼고 먹는다. 이런 경향성은 내 삶의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1950년대 중반 강원도 평창의 깊은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먹을거리를 포함한 삶의 조건 전체가 식물적이었다. 나는 또래 아이들에 비해 식물과 각별한 애착을 형성하고 있었다. 색깔, 모양, 냄새, 감촉, 소리 모두에서 민감했다.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연두 빛 아기 호박, 앙증맞게 허리가 휜 새끼손가락만한 오이, 석유 냄새 비슷하던 돌미나리 향, 까만 흙을 털어내면 드러나는 하얀 햇감자의 매끈한 피부, 바람에 서걱대는 옥수수 이파리·······모두 10살 이전의 기억인데 한사코 순도 99.99%의 선명함을 자랑한다. 이들을 내가 단순히 먹을거리라는 수단으로 인식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여전히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해 식물들과 생명의 연속성에서 두텁게 이어져 있다.


내가 채소를 먹는 것은 이른바 먹방에 출연한 연예인들이 고기를 먹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아니 그들이 채소를 먹는다 해도 그 또한 나와 다르다. 나는 적어도 포르노를 찍지는 않는다. 먹는 행위에 담긴 거룩한 제의와 흥겨운 놀이의 의미가 역설적 일치를 이루도록 하는 섬광 같은 순간이 전혀 배제된 경우란 내게 있을 수 없다. 그게 내가 체득한 강원도 산골 표 ‘먹는 인간’의 정체성이다.


여기에 하나가 더 추가된다. 10살 이후 겪은 도시빈민의 삶, 서서히 그러나 단단하게 자라난 사회정치적 각성, 그리고 의자로서 실천해야 할 과제가 결합된 ‘먹는 인간’의 정체성이다. 여기에는 대단히 선명하면서도 복잡한 판단 기준이 얽혀 있다. 먹는 행위를 가로질러 정치적 올바름, 반 향락적 절제, 산업농 비판은 한 끼 식사마저 무심코 할 수 없게 만든다.


이런 고뇌를 안고 있던 차에 고요히 닿은 『먹는 인간』은 지독한 가난의 기억에 연결된 내 소울 푸드 중용국수 한 그릇마저 부끄럽게 만들었다.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눈물과 함께 읽었다. 감정이 이끄는 대로 계획 없이 몇 마디 적어보기로 한다. 출발점은 여기다.


“본디 도道는 먹는 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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