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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인간 - 식(食)과 생(生)의 숭고함에 관하여
헨미 요 지음, 박성민 옮김 / 메멘토 / 2017년 3월
평점 :
흐린 잿빛 하늘 아래 노부인 세 명이 몸을 떨고 있다.
서늘한 빛을 띤 흰색의 상복 같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다. 세 사람 모두 시퍼렇게 빛을 내는 자그마한 식칼을 감추고 있다.·······
그 칼끝을 자신 쪽으로 한 채 움켜쥐고 있다. 가슴을 향해 칼끝을 번쩍 추켜올리려던 찰나, 억센 형사들에게 세 사람은 맥없이 제압되고 말았다.·······1994년 1월 25일 오전 11시쯤이었을 것이다.·······일본대사관 앞에서 벌어진 일이다.(326쪽)
김복선(68), 이용수(66), 문옥주(70).자라난 환경·성격·생김새가 모두 제각각이지만, 세 사람을 연결하는 단 한 가지 공통점은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사실이다.(327쪽)
김 할머니와 나는 각각 비빔밥과 냉면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점심식사를 하면서 주고받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처음 당했을 때 1주일 동안 피가 흐르는 바람에 누워만 있었어. 아기가 생겼지.”
전라남도 강진군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1944년 9월 무렵,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던 해에 군복을 입은 일본인에게 끌려갔다.(3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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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김복선 할머니의 명복을 빈다(2012년 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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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식사를 하면서 주고받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이 문장에서 읽기가 중단되었다. 눈물이 쏟아져서 더는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글을 쓰려고 다시 이 문장에 눈길이 닿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글을 쓰는 도중에도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 오타가 거듭 난다.
그래. 옳다. 이 참담하고 육중한 이야기를 밥 먹으면서 주고받을 수는 없다.
글쓰기를 멈추고 망연히 앉았다가 돌이켜 생각해본다.
아니다. 옳지 않다. 이 이야기야말로 밥 먹으면서 주고받아야만 한다.
밥이 하느님 아니신가. 더욱 극진히 이야기를 주고받으려면 밥상에 앞서 주안상을 내면 될 일이다. 나는 실제로 마음 아픈 사람과 상담실 숙의가 끝나면 선주후면先酒後麵의 예를 지켜 밥상대화를 이어간다. 밥을 같이 먹는 것만으로도 신뢰·일치의 호르몬인 옥시토신이 분비된다고 한다. 밥상공동체는 가히 진리에 값한다고 할 것이다.
자신이 생명 세상에 들어온 해에 죽음 세상으로 끌려 나간 소녀 이야기를 들으며 저자가 느꼈을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잠시 공감을 청해본다.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온다. 먹먹한 가슴에 눈물이 더해져 얼른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환자 대기실에 켜 놓은 대형 TV 화면에 질탕한 ‘먹방’이 흐른다. 쩡 소리를 내며 심사가 두 쪽으로 갈라진다. 바람 소리 내며 돌아와 분노를 장착한 슬픔으로 다시 글을 쓴다.
문재인 정부가 박근혜 일당이 일본에 헌정한 12·28합의를 전면 재검토한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이다. 저자가 이 소식을 들었다면, 아마 김복선 할머니와 나눈 식사와 이야기를 떠올렸을 것이다. 나도 지금 이 순간 내 젖은 영혼으로 김복선 할머니와 헨미 요의 밥상공동체에 참여한다. 다시 한 번 김복선 할머니의 영혼에 큰절 올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