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맘은 코다


인간의 맘은 어디, 그러니까 몸의 어느 부분에 깃들어 있을까? 서구의학은 당연히 뇌에 있다고 한다. 물론 아니다. 한의학은 심장에 있다, 즉 심주신명心主神明이라 한다. 물론 아니다. 맘은 몸의 뇌· 심장을 포함한 모든 장기와 조직, 심지어 세포 하나하나가 서로 마주하는 가장자리(경계)에 있다. 좀 더 정확히는 이 어름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 즉 사건으로 존재한다.


맘이라는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뇌와 심장이라는 사실은 상식이다. 그 동안 서구의학은 심장을 등한히 했다. 한의학은 뇌를 등한히 했다. 요즘은 심장-대뇌계라는 말로써 이 두 기관의 융합을 나타낸다. 이 심장-대뇌계 만큼이나 중요한 맘의 장場이 둘 더 있다. 피부· 소화기관[장腸]이다. 그리고 간·심·비·폐·신의 5장臟 역시 맘 사건의 중요한 계기다.


<6. 백색의학은 본말 전도다>에서 이미 태초의 생명이 피부에서 시작하여 소화기관-5장-뇌로 진화해 오는 과정을 밝혔다. 맘은 피부 생명의 단계적 진화과정이 빚어낸 정보·지식·사유·영성의 중층 시스템이다. 맘은 특정 장소에서 일방적으로 생성되고, 저장되는 무엇being이 아니다. 생명의 총체적 상호 운동doing 그 자체다. 맘이 비대칭적 대칭성을 본령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비대칭적 대칭의 자리, 그러니까 피부·소화기관·5장·뇌가 상호 운동하기 위해 마주한 가장자리들이 겹친 시공에 코가 있다. 코는 피부 맘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다. 그렇다. 맘은 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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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에도 애착을 끊은 표정은 저렇구나, 싶은 작고 깡마른 얼굴의 청년이 들어섰습니다. 그의 걸음걸이는 어쩐지 그 자체로 변명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공황장애 병력이 있고 우울증도 심했습니다. 무엇보다 문제는 불면증이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지난 몇 년 동안 2-3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불현듯 생각났다는 듯 말했습니다.


“비염 치료를 받은 뒤부터 불면증이 더 심해졌습니다.”


아뿔싸! 이것은 일종의 의료사고입니다. 제가 진단한바, 그가 앓는 비염은 전형적인 알레르기비염이 아니었습니다.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이라는 긴 이름의 특별한 비염이었습니다. 서구의학 임상에서 이 둘을 실제로 구분하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대부분 알레르기비염으로 진단하고 항히스타민제를 처방할 것입니다. 이 방법이 증상을 억제할 수는 있겠지만, 제대로 된 치료는 아닙니다. 이 방법을 쓰면 나타나는 부작용 가운데 하나가 바로 불면증입니다. 면역학의 이치상 그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서구 임상의들은 알지 못 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그에게 상세히 해주었습니다. 제대로 된 지식 전달 자체가 치유의 한 축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항히스타민제의 원리와 다른 한약을 지어주었습니다.


제가 지어 보낸 한약의 치료원리는 우울장애 치료와 같은 기반을 지닌 것이었습니다. 무얼 의미할까요? 혈관운동신경성비염과 우울증이 본질상 서로 맞닿아 있는 병이란 얘기 아닐까요? 이 통찰은 저 자신의 병력과 관련이 있습니다. 저는 우울증 때문에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을 앓은 경험이 있습니다. 15년 이상 치료가 안 되어 고생하다가 40대 후반, 어떤 양방병리학 책에 첨부된 소논문을 읽다가 벼락같은 한 문장을 만났습니다.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은 대개 슬픔· 원망 등의 감정 요인이 작동하므로, 심리치료 말고는 현재 의학의 수준에서 마땅한 치료법이 없다.”


그제야 저는 여태까지 했던 노력이 왜 부질없는 것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즉시 저는 실천에 옮겼습니다. 애써 다른 전문가를 찾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심리 상담을 진행했습니다. 칠흑 같은 밤의 어두움 속에서 침묵과 절규를 가로지르며 극진히 자기 대화 나누기를 서너 시간, 이윽고 희붐하게 동이 터오고 있었습니다. 어느 한 순간 문득, 연거푸 나오는 재채기·엄청난 양의 맑은 콧물·코 막힘·가려움·미열·두통 등의 증상들이 아침 해 뜨면 물안개 사라지듯 없어지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이내 소름 돋는 느낌이 와락 달려들었습니다. ‘아, 병은 이제 없구나!’ 그렇습니다. 그것으로 제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의 긴 역사는 막을 내렸습니다.


임상 현실에서 혈관운동신경성비염에 심리치료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일 의료인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제 경험을 토대로, 진단 과정에서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인가, 아닌가를 면밀하게 살핍니다.


거꾸로 접근하는 진료도 필요합니다.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진단할 때 코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특히 우울장애일 경우는 이 진단을 빠뜨릴 수 없습니다. 문진과 경추압진頸椎壓診-목뼈를 손가락 끝으로 누르는 진단 방식-을 하면 거의 완벽하게 알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우울장애와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은 ‘혈통’이 같은 병입니다. 기억 속에 저장된 아픈 감정을 되살려내어 마음의 장애를 유발·지속·증폭시키는 것이 후각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이치가 아닐까 합니다. 이런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오랫동안 우울장애와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을 따로 생각하면서 시달려 온 전형적인 예가 바로 제 자신입니다. 제가 자기 상담으로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을 치료한 것은 결국 우울장애의 치료를 겸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이치를 저는 그에게 그대로 적용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과도하게 집착하는 어머니가 주입한 근거 없는 기준으로 말미암아 어린 시절부터 자기혐오를 격렬히 겪었습니다. 외모·학교·전공 뭐 하나 내세울 게 없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반복해서 일어났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속 깊이 나누며, 그는 점차 불면과 비염과 우울의 동굴에서 빠져나왔습니다. 나와서 돌아보니 하나의 동굴이었다는 진실을 간직한다면, 언제 어느 때 또 그런 동굴을 만나도 그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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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코의 인간학


  (1) 몸은 코다


남자사람의 몸에는 입· 눈· 귀· 코· 항문· 요도의 아홉 개의 큰 구멍이 있다. 물론 여자사람의 경우는 질이 있으므로 한 개가 더 많다. 이 구멍들은 각기 필요에 따라 제멋대로 뚫려 있는 게 아니다. 소화기관을 기축으로 해서 입· 눈· 귀· 코는 위쪽에, 항문· 요도· 질은 아래쪽에 배치되어 있다. 결국 몸은 하나의 커다란 대롱인 셈이다. 위쪽에 난 구멍은 외부에서 내부로 무엇인가 받아들이는 기능과 관련을 맺는다. 아래쪽에 난 구멍은 내부에서 외부로 내보내는 기능과 관련을 맺는다. 코와 질은 예외다.


코는 받아들이고 내보내는 일을 쌍방향으로 한다. 하여, 교대이긴 하지만, 항상 열려 있다. 여닫음이 가능하거나 차단 막· 근육을 지니고 있는 다른 구멍과 차이가 난다. 부단한 소통을 위해 늘 자신을 비우는 허령虛零한 존재가 바로 코인 것이다.


코는 입· 눈· 귀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이들과 모두 관계를 맺는다. 다만 관계를 맺는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실제로 후각은 감정과 기억을 통해 미각· 시각· 청각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후각 없이는 몸의 제대로 된 소통이 어렵다. 늘 열려 있어 쌍방향 작용을 하는 코를 통해 외부세계와 끊임없이 소통함으로써만 몸은 살아 있는 몸이다. 코는 소통인 몸의 허브hub다. 코는 몸이다. 아니, 몸은 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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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비학 기치旗幟: 문제는 코다


코, 이것은 가장 처음부터, 가장 나중까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조건이다.

하지만 코는 그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 채 억눌려 있다가

인간이 파멸 위기로 내몰린 오늘의 상황과 홀연히 마주하게 되었다.

만일 이 순간 코의 코됨을 되살리지 못한다면

인간은 이대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렇다.

문제는 코다.


코는 호흡의 관문이다.

하면 몸-생명의 중심이 아닌가?

코는 냄새를 맡는다.

하면 감각-생명의 중심이 아닌가?

코는 대뇌의 기원이다.

하면 마음-생명의 중심이 아닌가?

코는 나와 남의 면역적합성을 알아차린다.

하면 코는 관계-생명의 중심이 아닌가?

그렇다.

문제는 코다.


코를 통해 느끼고

코를 통해 생각하고

코를 통해 실천하기 위하여, 우리는

비학의 깃발을 든다.


지금 여기서부터 코는 일부가 아니다.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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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시내버스에서 가방은 인정을 나누는 방편이었다. 운 좋게 자리에 앉은 사람은 으레 앞에 선 사람의 가방을 받아주었다. 특히 커다랗고 뚱뚱한 고등학생 가방은 꼭(!) 받아주는 ‘국민 보따리’였다. 가난과 고단함을 함께 하는 온욱한 풍경의 총아였다.


어느 때부턴가 시나브로 사람들은 더 이상 가방을 받아주지 않았다. 시내버스에 짐 싣는 시렁이 생기면서부터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만 생각할 것은 아니다. 시렁이 차서 가방을 손에 들고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의 가방도 받아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인심이 변한 거다. 각자도생의 사회 분위기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제는 가방을 받아주겠다고 하면 오히려 이상한 시선이 돌아올 수 있는 지경이 되었다. 아예 남에게 관심이 없는데 남의 가방에 무슨 관심이 있으랴.


최근 몇 년 동안 가방은 한 걸음 더 나아간 사회현상의 매개물이 되었다. 이를테면 가방 폭력이다. 가방으로 다른 사람을 밀고 심지어 치고 지나가도 가방 주인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싶은 부류 사람만 무례히 그런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거의 누구나 그런다는 느낌이다. 주로 백 팩이 문제가 되기는 하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인심이 강퍅해진 거다. 세월호 유족이 단식하는 앞에서 치킨 뜯어먹는 막장인간들이 설치는 세상이라는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마침내, 남한테 해코지를 해서라도 나 잘 사는 게 갑이라 생각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만 것이리라.



엊저녁 식사 자리에서 딸아이가 중년 사내의 백 팩이 얼굴 가격한 이야기를 했다. 단지 그 사내 한 사람 문제가 아니라며 혀를 찼다. 오늘 아침 지하철 안에서 나도 비슷한 일을 당했다. 20대 후반 청년인데, 그래 놓고도 표정이 전혀 없다. 순간, 그가 커다란 가방으로 보였다. 대화 불가능이란 판단이 서서 그냥 웃고 말았다. 이런 사회에서 가방 아닌 노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못 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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