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이나 자동차 내부 비밀을 지키기 위해 흔히 선팅을 한다. 선팅은 노출증사회의 반증이다. 가릴수록 관음증은 격화된다.


나는 밤과 새벽에 묵상할 때, 창문을 연다. 창밖은 온갖 나무, 풀, 새, 벌레, 흙, 그리고 드물지만 행인, 때로 눈, 비, 안개, 바람이 살아 움직이는 자그만 산이다. 신들의 영지다. 방에 불을 밝힌다. 나는 신들에게 오롯이 보인다. 신들은 내게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직 그들의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을 뿐이다. 묵상이 끝나고 잠자리에 들거나 하루를 시작할 때, 불은 끄되 창문은 꼭 닫지 않고 쪼끔 열어둔다. 잠자는 동안에도 신들의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는다. 내가 집을 떠나 있을 때는, 내 묵상의 공간이 그 소리와 냄새를 간직해둔다.



나는 신들의 비밀을 보려 욕망하지 않는다. 신들의 아픔과 슬픔의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기 위해 집중하고 주의를 기울일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후각 폄훼의 철학적 흐름 선두에, 정상에 섰던 사람이 바로 칸트다. 그는 시각, 청각, 촉각은 객관적 능동적 감각이고, 후각(따라서 미각)은 주관적 피동적 감각이라고 구분 지었다. 전자는 이성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고, 후자는 강요되어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후자는 혐오 대상이다. 주체로서 이성을 구축하고자 했던 그에게 이 구분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물론 오류무아지경, 무지삼매경 맞다. 그러나 칸트는 절대군주였다. The King can do no wrong! 칸트의 이런 강박적 이성독재는 헤겔의 중립화와 포이어바흐의 복권을 거쳐, 니체의 돋을새김이 있기까지 전 유럽을 지배했다. 니체는 후각이야말로 진정한 쾌락의 전령이며 공감, 직관적 통찰, 자비심, 윤리의식, 자기성찰의 기원이라고 갈파했다. 그러나 아직도 니체의 칸트 해체는 비주류 딱지를 완전히 떼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사실 이것은 서양 철학사에서 특별히 새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다. 아폴론적 전통과 디오니소스적 전통 사이의 대칭성, 그 대칭성의 파괴를 둘러싼 오래된 에피소드의 근대 버전이다. 이성독재의 길고 긴 세월 동안 코는 그야말로 숨 쉬는 도구로, 그러니까 당연히 있는, 배경 같은 존재로, 더군다나 텅 빈 구멍으로 인식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후각, 그러니까 감성을 ‘쌍것’ 취급하는 전통의 결과다.


이런 관성은 진화론적 뇌 과학에 큰 빚을 지고 있다. 파충류 뇌에서 포유류 뇌로, 그리고 영장류 뇌로 진화하면서 본능-감성-이성·의지의 계층구조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진화론적 뇌 과학 이론이다. 전반적인 이야기 흐름을 이해하지 못 할 바 없다. 하지만 나중에 생긴 것이 고등한 것이라는 식의 발상은 동의할 수 없다. 진화라는 표현 자체에 이미 선형적 발전의 인식론이 전제되어 있는지 모르지만 변화가 다 발전은 아니다. 달라진 삶의 조건에 다른 방식으로 적응하는 것일 따름인 변화를 모두 진화/발전으로 보는 것은 서구의 직선적 또는 종말론적 시간관의 투영이 아닐까 싶다.


이런 프레임을 내려놓으면 오히려 거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생명에서 가장본질적인 것이 생긴 뒤, 생명현상을 더욱 유연하고 풍요롭게 하기 위해 비본질적, 부차적 기능들이 생겨났다고 말이다. 비본질적, 부차적인 것이 인간의 특징이기 때문에 특별하게 여기는 생각을 딱히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다. 그렇지만 본질적인 것을 혐오 대상으로 삼는 생각까지 용인할 수는 없다. 건강할 때든, 병들었을 때든, 치료할 때든, 감성, 곧 후각은 그 어떤 감각보다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이성과 감성이 극단적· 순간적으로 맞물릴 때, 감성이 이성을 제압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감성은 자연이고, 자연은 실재이기 때문이다. 이성은 당위이고, 당위는 요청이기 때문이다. 근대정신이 이성을 왕으로 옹립하려 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그러나 왕의 정체가 드러났다. 왕의 귀는 당나귀 귀였다!


선입견을 내려놓고 생각해보면 인간 생명은 감성에서 시작하여 감성으로 끝난다. 인간의 모든 정신 현상의 중심과 경계에는 감성이 자리 잡고 있다. 흔히 말하는 감정은 감지感知 감성이다. 흔히 말하는 이성은 이지理智 감성이다. 흔히 말하는 의지는 지향志向 감성이다. 새로운 왕의 탄생이다. 아니 참된 왕의 귀환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숙의를 통해 수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사람마다 서로 다른 결의 삶을 살아갑니다. 비범해 보이는 사람이라고 해서 오래 기억나지는 않습니다. 평범해서 오히려 뇌리에 깊이 박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평범함이 비범함 아래 있다고 생각하는 오랜 인습을 버리면, 평범함에 깃든 은은한 숭고를 목도할 수 있습니다.


그는 평범함의 화신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얼굴도 목소리도 말투도 웃음도 울음도 직업도 모두 평범함이라는 인감을 찍어놓은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심지어 그의 우울장애조차도 평범하다 고백하는 듯했습니다. 그와 숙의하는 과정도 똑 그와 같았습니다. 그 스스로도 그렇게, 저 또한 그렇게, 평범하게, 나직나직, 우울과 삶을 이야기해 나아갔습니다.


우수 서린 눈, 허스키한 목소리, 느릿느릿한 말투에서 이미 그의 내면 전경이 배어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생애초기부터 똑똑하지 못 해서, 잘생기지 못 해서 공공연히 비교 당하며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단 한 번도 그에게 인정해주는 말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계신 것 자체만으로 상처를 덧나게 했습니다.”


학교에서도 대부분 아무런 존재감이 없거나 소외된 채로 지냈습니다. 대학에 와서는 우울증 상담치료를 받기도 했습니다. 초등학교 교사가 되는 과정도 그리 순탄하는 않았습니다. 교사가 되고 나서도 자신의 능력에 늘 불안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아이들과 상대하는 것도 어렵기만 했습니다. 새 학년도나 새 학기가 시작되면 우울은 어김없이 깊어졌습니다.


저와 상담을 하면서도 그는 여일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눈에 띄게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그것을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눈에 띄게 좋아지지 않는다고 실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제가 민망할 정도로 담담하게 숙의를 계속했습니다. 그 신근한 평범함이 그를 나직나직 높은 곳으로 이끌어갔습니다. 어느덧 그는 자신의 행복 설정치가 한 뼘 높아진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저와 맺은 인연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연애하고 혼인하고 아이 낳고 양육하는 긴 과정 내내 그는 가족과 함께 잊지 않고 저를 찾아옵니다. 극적인 감동과 보람을 안겨준 어떤 환우보다 제게 그는 보석 같은 존재입니다. 보석의 가치는 스스로 빛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소중히 간직해주는 데 있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준 사람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는 매우 오랫동안 기조우울증(서구 정신의학에서는 쓰지 않는 용어다. 삶의 기조로 자리 잡은 만성적인 우울장애를 지칭하기 위해 내가 만든 용어다.)으로 고통 받았다. 고통의 다양한 양상이 있지만, 그 가운데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것이 바로 아침지옥이다. 졸저 『안녕, 우울증』68쪽에 소개한바, 잠에서 막 깨어나 일어나기 전까지 시간에 맛보는 정서의 지옥 상태는 형언할 수 없는 불편함으로 온 영혼을 짓이겨버린다. 삶의 무의미감, 혐오감, 곤혹감, 그리고 아뜩함 때문에 하루 생활이 시작되기도 전에 심신은 파김치가 된다.


아직까지 드러내어 말한 적은 없지만, 자려고 잠자리에 누워서 잠들기 전까지 시간대도 본질이 같은 불편함으로 영혼이 무너져 내린다. 아침지옥과는 달리 이 시간에는 물 먹은 솜 같이 주저앉는 고단함, 는적는적 해체되는 느낌, 끝날 것 같지 않은 생의 피로감으로 깊은 신음을 토해내게 된다. 내일 아침 다시 눈 뜨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속절없이 젖어든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이렇게 맞으면 그 날 전체가 송두리째 지워진다. 본디 이 두 시간대는 농밀하고 은밀한 자기신뢰의 본진이다. 틈 정도의 짧은 시간이지만 다시없이 소중한 ‘자기 허니문’이다. 우울증 앓는 사람은 자기부정의 덫에 걸렸으므로 이 자기 허니문은 지옥으로 변해버린다. 이른바 ‘건강한 사람’은 이 자기 허니문의 소중함을 모른 채 덧없이 흘려보내고 만다. 아파봐야 깨닫는 인간숙명을 알아차리고서야 이 자기 허니문의 애용 이치를 증득한다.



아침 허니문은 거대 의식, 그러니까 자각·통제 가능한 의식을 가꾸는 데 쓴다. 아침에 일어나 고요히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인다. 하루의 삶을 담담히 펼쳐본다. 이것을 소리 내어 말한다. 그렇게 하루를 연다. 거대 의식을 앞세우고 걷는다. 밤 허니문은 소미 의식, 그러니까 자각·통제가 불가능한 무의식을 가꾸는 데 쓴다. 잠자리에 들면서 고요히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인다. 하루의 삶을 담담히 정리해본다. 이것을 소리 내어 말한다. 그렇게 하루를 닫는다. 소미 의식에 맡긴 채 잠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4. 코의 문화철학


인간의 사유는 언어적 표현 안에서 가능하다. 언어적 표현을 통해 사유가 이끌려 나오기도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일반 현상은 사유의 결과가 언어적 표현을 통해 나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쓰는 언어적 표현들을 보면 주의하고자 하는 대상에 관한 그 시대의 사유를 알아차릴 수 있다.


코에 대한 언어적 표현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것은 아마도 ‘개 코’일 것이다. 냄새를 아주 잘 맡는다는 뜻으로 쓰는데 이 말이 주는 어감은 애당초 그리 좋지 않다. 나중에는 욕설의 일부가 되어버리고 만다. 코에 대한 부정 언어학은 비단 이뿐이 아니다. 코 묻은 돈. 코 빠뜨리다. 코 꿰이다. 코가 석 자다. 코 떼어 주머니에 넣는다. 코 아니 흘리고 유복하랴. 콧구멍 같은 집에 밑구멍 같은 나그네 온다.······ 다른 감각기관에 비해서 긍정적인 표현이 현저하게 적은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코에 대한 이런 인식은 아마도 냄새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냄새, 또는 냄새 맡는 기능이나 행위에 대한 평가가 그대로 코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냄새란 말 자체가 이미 좋지 않은 느낌을 간직한 채 사회문화적으로 유통되고 있다. “향기”라는 한자어와 기능이 수직 분화되어 정착된 것을 보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냄새난다.”는 표현도 당연히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흐른다. “향기롭다.”와 대조하면 대뜸 알 수 있다. “냄새 맡다.”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범죄자들의 직감을 표현하는 비유로 동원한다. 이처럼 냄새는 좋은 수식어, 예컨대 “엄마”가 붙지 않으면 좀처럼 좋은 뜻으로 읽히지 않는다.


이것은 순 우리말에 대한 우리사회 특유의 자학현상만으로 해석하기 어렵다. 냄새 자체에 대한 사회문화적 태도가 반영된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말을 보면 들어보다, 맛보다, 만져보다, 맡아보다, 와 같이 모든 다른 감각 위에 시각이 있다. 시각만은 못하지만 청각 역시 매우 중요한 감각으로 인식해온 것이 우리의 사회문화적 전통이다. 경청傾聽/敬聽이란 표현도 그렇고, “귀가 보배다.”라는 속담도 그렇다.


물론 우리보다 서구사회가, 근대 이전보다 이후가 훨씬 더 치우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성독재”의 시공간이기 때문이다. 18세기 이후 이성은 감성(감성은 감정을 퍼텐셜의 측면에서 이해한 것으로 여기서는 감정과 동의어로 씀)을 계몽 대상으로 발아래 둔다. 감성은 동물적, 원시적, 여성적 본능의 영역으로 비하된다. 여기서 이성에 속하는 것은 시각, 청각, 촉각이다. 감성에 속하는 것은, 당연히 후각과 미각이다. 그런데 미각의 80% 이상이 후각이므로, 결국 이성독재의 시공간에서 희생양이 된 것은, 실질적으로 오직 후각, 그러니까 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