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각은 감각의 우주다


미각은 음식이 혀에 닿을 때 느껴지는 감각이다. 이것은 다만 하나의 출발점에 지나지 않는다. 미각의 80% 이상은 냄새다. 닿는 느낌 없이 미각은 형성되기 어렵다. 음식의 빛깔, 모양, 심지어 그릇의 생김새가 미각을 좌우한다. 씹을 때 나는 아삭거리는 소리가 미각의 한 축이며, 지나친 소음은 미각 형성을 방해한다.


미각을 담당하는 특수내장감각신경은 안면신경(제7뇌신경: 혀 앞부분 2/3), 설인신경(제9뇌신경: 혀 뒷부분 1/3), 미주신경(제10뇌신경: 혀 뒷부분 1/3)이다. 세 신경 모두 자율신경 가운데 부교감신경과 관련이 있다. 부교감신경은 한편으로는 위와 장[장신경]과 닿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뇌[중추신경]와 닿아 있다. 당연히 미각은 위·장 현상이며 대뇌 현상이다. 나이에 따라 다르고, 건강 정도에 다라 다르니 미각은 몸 전체의 현상이다.


나아가 미각은 정신 현상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먹으면 미각은 둔해진다. 자상하게 설명을 들은 뒤 먹으면 더 맛있다. 소울 푸드는 참으로 존재한다. 미각은 기억과 그리움을 따라 흐르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지평이 넓어지면 미각은 형언할 수 없는 무엇으로 열린다. 형언할 수 없는 무엇을 우리는 광활함spaciousness이라 부른다. 광활함을 뿜어내는 우주space의 감각이 바로 미각이다. 미각 우주를 통해 신과 닿는다.


미각의 시공에서는 그러므로 지성소 사건이 일어난다. 지성소 사건을 향락 스캔들로 영락시키는 백색문명 속에서 우리는 녹색미각을 수탈당하고 있다. 요리 포르노에 중독되어 미각이 거룩한 제의이자 신나는 놀이 사건이라는 진리를 놓치고 있다. 비대칭의 대칭 감각을 복원하는 일이 그 무엇보다도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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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우하다는 말은 본디 재주나 포부가 출중함에도 기회를 얻지 못하여 삶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이 많이 나오지 않도록 하는 열린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 사회가 건강합니다. 각자도생 약육강식에 구성원을 내모는 사회는 스스로 공동체이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매판독재분단세력이 우리사회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현실을 전복하지 않는 한, 지금 우리사회는 결코 공동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뻔뻔하고 잔혹하게 불우한 사람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여기 불우에 절은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방치되어 학교 교육조차 평범하게 받지 못했습니다. 일찍 직업을 구해 가족을 먹여 살렸습니다. 늦깎이로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유학가서 미국의 명문대 학위를 받았습니다. 돌아왔지만 그는 대학에서 자리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사교육 시장을 통해 삶을 지탱해야 했습니다. 비상한 능력과 노력으로 단기간에 경제적 안정은 찾았습니다. 중요하긴 해도 경제적 안정이 자신의 가치를 떠받치지는 못한다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자신이 불우하다는 생각에 점점 더 강하게 집착하기 시작했습니다. 과도하게 술에 의존했습니다. 인사불성 상태에서 사회를 비난하고 가족을 비판했습니다. 해결되는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자신과 가족이 피폐해질 따름이었습니다.


가족의 권유로, 그가 자신의 고통과 삶을 숙의하기 위해 제게 왔습니다. 그는 매우 감성적이면서도 치밀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누구며 어떤 생각을 지닌 사람인지 알려주려고 장문의 글을 써왔습니다. 그의 글은 기본적으로 탄탄한 사고력에 터하고 분석과 논리의 힘이 동반된 것이었습니다. 현실 비판적 태도에서 생긴 격정이 수시로 분위기를 뒤흔들지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데 크게 무리는 없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지나치게 이상적인 자아상과 세계관을 지니고 있어 일방적 훈계 어법을 구사한다는 데 있었습니다. 필경 이런 문제 때문에 가장 큰 상처를 입은 사람은 그의 가족일 것입니다. 실제로 그가 가족의 문제를 말한 글에 가족의 단점과 자신의 주장은 세밀히 적었지만, 가족의 장점과 자신의 반성은 전혀 적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의 비범함을 십분 인정한 터 위에, 자기성찰의 죽비로 어깨를 툭 쳤습니다.


“비범함은 스스로를 닦아세우는 초달입니다. 타인을 닦아세우면 범속입니다.”


사실 그의 배우자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고뇌와 감수성을 독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물며 딸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는 그 빤한 간극을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이 용렬庸劣은 그의 평범함이었습니다. 그가 모른 것은 바로 자신에게 도사린 평범함이었습니다. 자신의 평범함을 모르는 비범함은 범속 그 자체입니다. 붓다의 수단설법, 그리스도의 비유말씀이 아니어도 범속은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습니다.


상처 때문에 일시 흐려졌지만 그가 맑은 영혼임을 알기에 저는 그 뒤 그가 빚어갈 내러티브를 신뢰합니다. 세월이 흘러 이제 그도 노년에 접어들었습니다. 그와 다시 만나 ‘필름 끊기도록blackout’ 한 번 마셔보면 어떨까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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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진행되던 지난 여름

썩어가는 나무 등걸과 둥치

후미진 땅과 그늘진 자리에

작고 작은 생명들이 솟아나

내 영혼을 온통 사로잡았다

소미 하느님 신이神茸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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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미각, 그 여러 겹의 아우라


인류 역사상 맛味이란 말에 가장 웅혼한 미학을 부여한 사람은 단연 원효다. 원효 사상의 결정판인 『금강삼매경』은 일미관행一味觀行으로 요약된다. 일미一味는 일심一心을 실천적·감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일심은 장엄을 향해 가는 삶의 내용, 방향, 동기, 가치, 효력 모두를 포괄한다. 이 모두를 소미한 것에서 소미하게 감각할 수 있도록 일미라 표현했다. 일심 사상이 거대 관념론으로 흐르는 것을 원천 차단한 셈이다. 요컨대 가장 광활하면서도 가장 소미한 영성, 그 비대칭의 대칭을 맛, 그러니까 미각에 담은 묘미가 일미에 있다.


원효의 일미와 비할 바 아니거니와, 우리에게 제법 낯설지 않은 장 앙텔름 브리야 사바랭의 ‘네가 무엇을 먹었는지 말하라. 네가 무엇인지 말해주겠다.’를 거론함직하다. 먹는 음식에서 신분이 드러난다는 취지의 말이 번역 과정에서 ‘네가 먹는 것이 곧 너다.’로 왜곡되었다고 비판하는 견해가 있다. 뭐 왜곡이랄 일만은 아니다. 한 사람이 즐겨 먹는 음식, 그러니까 추구하는 맛을 통해 그의 상황이나 성향을 짐작하는 것에는 분명한 일리가 존재한다. 아니 어쩌면 그가 하는 말, 사회적 행동보다 훨씬 더 신뢰할만한 정보를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 미각에 착오는 있을지언정 고의적 위선은 거의 불가능하니까 말이다.


하마 아득히 잊힌 작년 여름 일 하나가 떠오른다. 이정현이 새누리당 대표에 선출되자 축하파티를 열어 샥스핀과 송로버섯 먹인 박근혜의 미각학예회다. 얼마 뒤 국민 손에 쫓겨날 줄 모른 채, 제 속살을 함부로 대놓고 드러낸 천박한 미각적 커밍아웃이랄까. 선거 때 재래시장 가서 어묵 쇼했던 이명박도 실은 뒤에서 저희들끼리는 뭘 처먹는지 역으로 드러낸 것이니 미각의 천박함에서는 도 긴 개 긴이다. 비싸고 맛있는 음식 먹으면 기품 있는 인간이라는 생각은 돈 있으면 근본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과 동일하다. 한마디로 개 웃기는 얘기다.


미각의 사유와 실천이 한 사람의 상황이나 성향을 결정한다 하면, 보통 서둘러 무엇을 먹을까 궁리부터 한다. 이 또한 본말 전도다. 무엇보다 여태까지 자신의 미각이 어떻게 형성·지속·왜곡되어왔는지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현실에는 태아 때 어머니의 식성에서 시작하여 지구 기후변화 문제에 이르기까지 중층의 요인이 개입한다. 자기 삶을 돌아보면서 어떤 미각, 어떤 음식에 원근·호오의 반응을 하게 되었는지 면밀히 살피고 감응하는 치유부터 해야 한다. 미각의 쏠림을 조절하고 대칭성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음식을 새로 선택하고 교감하는 일이 흐름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나는 다른 이들과 달리 어렸을 때부터 단 맛에 끌리지 않았다. 도리어 쌉싸래한 맛을 좋아했다. 시생대 모유의 절대 결핍이 유발요인이었을 법하고, 강원도 산골의 산나물이 강화요인이었음직하다. 양념 맛이 강한 음식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도리어 원재료의 맛에 예의를 갖추는 한에서 양념을 쓴 담담한 음식을 좋아한다. 시생대 모유 대신 먹은 미음이 유발요인이었을 법하고, 할머니의 백김치가 강화요인이었음직하다. 이런 미각을 삶의 소중한 일부로 받아 안는 과정이 우울증을 깨닫고 치유하는 과정과 겹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뜨르르한 셰프와 장인들이 시전하는 저 맛의 향연에 나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렇게 높은 맛의 높은 경지에 이르고 싶은 욕망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 경지를 포르노라고 부른다. 포르노를 상락아정으로 구가하는 미각 아라한이야말로 아우라 극단에서 어슬렁거리는 비렁뱅이다. 미각이 거느리는 아우라 스펙트럼에도 중도와 회향의 진리가 통한다. 개인적 상처와 지구의 기후변화를 가로지르는 삶의 통찰과 몸과 맘 전체를 가로지르는 미각의 조절은 중후하면서도 경쾌한, 의미심장하면서도 재미무인지경인 경계 시공을 탄다. 그 경계 시공에서 원효의 일미와 나의 담담 쌉싸래한 미각은 둘이자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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