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제약회사 - 거대 제약회사들의 살인적인 조직범죄
피터 괴체 지음, 윤소하 옮김 / 공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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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품 상술을 다루면서 환자단체를 언급하지 않고 지나갈 수는 없다. 환자 단체는 대개 거대 제약회사의 자금 후원을 받는다. 그래서 제약회사와 같은 목소리를 낸다.(185쪽)


과문한 탓에 저지르는 오류일 수도 있는데, 듣기로 인류 역사에서 동족을 공식으로 노비 삼은 종족은 우리밖에 없다고 한다. 만일 사실이라면 그 심리를 심층적으로 살펴야 한다. 얼핏 생각하면 동족끼리 어찌 그럴 수 있나 싶지만 사실은 그래서 더욱 잔혹이 깊어진다. 왜냐하면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타자를 학대한다는 죄의식이 형성되지 않는다. 타자에게 학대당한다는 피해의식이 형성되지 않는다. 둘은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수긍하기 어렵나. 사실 이런 잔혹은 오늘날에도 전승되고 있다. 같은 신앙인이라는 이유로 임금을 착취한 기업 이랜드, 같은 신앙인이라는 이유로 임금을 착취당하면서 견딘 이랜드 노동자가 대표적인 예다. 소규모 업장에서 피차 친족의 호칭으로 부르는 것도 여기에 당한다. 평소에는 가깝게 느껴지고 좋지만 이해 갈등이 발생하면 강자의 수탈 구실이 되고 만다. 혼인으로 맺어지는 가족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결혼식 가면 주례한테 흔히 듣는 말이 있다. 며느리라 생각 말고 딸이라 여겨라, 사위라 생각 말고 아들이라 여겨라. 그 결과가 대부분 어떻게 나타나는지 알지 않나.


이렇게 트인 눈으로 저간의 한국사회를 들여다보면 누가 어떻게 상전으로 군림했고 누가 어떻게 종노릇을 해왔는지 금세 알 수 있다. 상전 노릇 한 자들은 걸핏하면 국가와 민족을 들먹이며, 하나라고 속삭이며 등골을 빼먹어왔다. 종노릇 한 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제 살을 베어가며 그 하나를 지키는 것이 도리라고 믿어왔다. 그 잔혹사는 자신감에 눈이 먼 한 인간의 패악으로 절정을 이루었다. 민중이 그 멱을 따면서 막을 내렸지만 이제부터다. 하나라는 허위의식에서 놓여나야 한다. 피차 다른, 그래서 깍듯하게 존중해야 하는 존재임을 전제해야 비로소 하나의 참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민주주의는 이것을 이루어가는 과정이다.


어리석기 짝이 없으면서도 자신감에 가득 차 동족의 등골을 파먹었던 박근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영민함으로 무장한 다국적 제약회사가 이 마케팅을 놓칠 리 없다. 환자단체를 매수, 심지어 설립해서 환자를 단체로 죽이고 있다. 환자단체는 죄의식이 없다. 환자는 피해의식이 없다. 이 무지를 아는 제약회사만이 악마의 미소를 머금은 채 돈을 쓸어간다. 바로 그 돈으로 산 죽음의 독극물이 지금 이 순간 팔만 뻗으면 한두 알 쯤 집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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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제약회사 - 거대 제약회사들의 살인적인 조직범죄
피터 괴체 지음, 윤소하 옮김 / 공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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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익상충은 보통 ‘1차적 이익(환자의 복지, 연구의 타당성 등)과 관련된 전문직 판단이 2차적 이익(금전적 이득 등)에 의해 대체로 과도한 영향을 받는 상황’으로 정의한다.(123쪽)

  최고로 권위 있는 학술지들도 제약회사 임상실험을 다루면서 심각한 이익상충을 경험한다. 너무나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면 재쇄 판매 기회를 놓쳐 큰 손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학저널》의 전 편집장 리처드 스미스는 “의학지는 제약회사의 또 다른 마케팅 무기”라는 논문을 썼다.(124쪽)

  ·······제약회사들은 의사와 의학지 편집자를 매수함으로써 의학을 건강 증진이 목표인 공공재에서, 금전적 이득을 최대화하는 것이 1차적 기능인 상품으로 변모시켰다.·······유감스럽게도 의학지는 의학 부패의 실질적인 원흉이다.(131쪽)


내 아침 출근 과정에는 25분가량 산길 걷기가 포함된다. 관악산 까치능선 일부인데 숲을 이루고 있는 곳은 제법 원시림 느낌을 자아낸다. 큰 나무들이 자연사해서 곳곳에 쓰러져 있다. 지척에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건만 꾀꼬리, 꿩, 까마귀 같은 새들의 울음소리도 들을 수 있다. 청설모가 떨어뜨리는 도토리를 줍기도 한다. 이런 길을 걸을 때마다 나는 마치 50여 년 전의 오대산 길을 걷듯 마음이 고요해진다.


이 고요를 깨뜨리는 고약한 사람이 두엇 있다. 70대 전후한 남성인데 라디오를 허리춤에 차고 걷는다. 그 라디오에서는 어김없이 뉴스가 흘러나온다. 나는 그들을 대할 때마다 착잡한 심경에 사로잡힌다. 저들에게 뉴스는 이미 단순한 소식이 아니다. 종교적 진리며 신의 계시다. 깨달음의 원천이며 구원의 근거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세뇌한바 저들은 무한한 신뢰로써 뉴스 앞에 엎드려 큰절한다.


어디 저들뿐이랴. 제약회사가 건네주는 자료를 의사들은 뉴스로 믿는다. 그런 자료를 받아 적은 의사의 논문을 의학지는 뉴스로 싣는다. 의학도나 관련 일반인들은 의학지를 뉴스로 읽는다. 결국 뉴스의 본질은 가짜가 된다. 가짜 뉴스는 이른바 ‘늬우스’교를 일으키는 태초의 말씀으로 군림한다. 하염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늬우스’를 경청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라디오든 의학지든 결국 예배를 위한 지성소다. 산책도 아니고 연구도 아닌 것이다. 어처구니없다 싶다가도 처연해진다. 대체 인간이란 게 고작 이뿐인가, 울컥해진다.


마케팅과 연구가 혼효를 일으킬 때 거기서 생산되는 과학담론은 개소리가 된다. 홍보와 정견이 혼효를 일으킬 때 거기서 생산되는 정치담론은 개소리가 된다. 구복과 구원이 혼효를 일으킬 때 거기서 생산되는 종교담론은 개소리가 된다. 개소리가 접수한 백색사회는 의도된 무지를 탑재한 자들과 알고 나서도 ‘그래서 뭐 어쩌라고’를 장착한 자들을 사냥개로 풀어놓는다. 녹색인간은 물어 뜯겨 피를 흘린다. 핏빛이 붉을수록 녹색은 선명해진다. 녹색의 선명함 하나를 잃지 않으려고 모든 것을 내준다. 진욕進辱이 개벽을 앞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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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학대를 경험한 여성의 84.5%는 그 경험의 부정적인 영향이 평생 지속되며, 자신의 몸과 자아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하는 경향이 크다. 그들은 성적 학대를 경험하지 않은 여성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거나 유지하지 못하며, 자신의 연인이나 배우자와 있을 때도 옷을 벗거나 불을 켠 채로 사랑을 나누는 것에 불편함을 느낀다.(351쪽)


‘여성의 적은 여성이다’라는 말을 페미니스트는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보편명제로 올리기에 하자 있는 말임이 분명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비수 같은 말임 또한 분명하다.


성적 학대를 경험한 한 여성이 어떤 인문학공부 모임에서 그 사실과 그로 말미암은 고통에서 쉽사리 해방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하여 이야기하자 들은 사람들의 한결같은 반응은 ‘왜, 그걸 내려놓지 않느냐?’였다. 자기 연민에 빠져 징징거리는 것은 인문적 삶에 반한다는 비판이 날아들었다. 놀랍지도 않게, 그들은 모두 여성이었다. 놀랍지도 않게, 그들의 리더, 아니 스승은 뜨르르한 철학자였다. 스승은 공개적 질타가 치유라며 가차 없이 그 여성을 공격했다. 그 여성은 다음부터 그들을 무서워했다.


이게 그들한테만 특수하게 일어나는 일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태도는 성폭행 당했다고 울부짖는 여고생 딸의 따귀를 후려갈기며 ‘몸 간수를 어떻게 했기에’라는 개소리를 지껄이는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여주인공의 엄마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놀랍지도 않게 이 태도는 남성을 내면화한 것이다. 놀랍지도 않게 정서적 공감에 터한 평등한 소통을 내던진 채 이성적 분석에 터한 일방적 훈계를 집어든 남성을 인문학이랍시고 뻐기는 것이다. 놀랍지도 않기만 한 이 풍경에서 쪼끔 놀라운 상상을 한 번 해보자.


그들 가운데 동성애자가 있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자기 연인이나 배우자가 성적 학대의 “부정적인 영향이 평생 지속되며, 자신의 몸과 자아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으며, 자신과 함께 “있을 때도 옷을 벗거나 불을 켠 채로 사랑을 나누는 것에 불편함을 느낀다”면 어찌 반응했을까? 정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이성애자 남성이고 비-학습 양성평등주의자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상상할 수 없다. 다만 여성 동성애자라도 자신이 남성을 내면화한 채 살아간다는 사실을 모르는 한, 태도는 달라질 것이 없으리라 볼 뿐이다.


성적 학대에서 인식과 삶 전체의 왜곡까지 여성은 중첩적으로 수탈당한다. 피해자인 여성이 수탈에 부역하면 중첩은 더욱 교묘해진다. 이 질곡에서 벗어나는 길은 수탈당한 여성을 치유하는 사후 방책에 있지 않다. 수탈의 원천을 봉쇄해야 한다. 수탈의 원천을 봉쇄하려면 이 남성문명, 그러니까 백색문명의 멱을 따야 한다. 백색문명의 멱은 일극집중의 거대구조다. 일극집중의 거대구조는 소미심심의 네트워크로써만 무너진다. 소미심심의 네트워크는 아픔과 슬픔으로 나지막이 직조된다.


아픔·슬픔의 네트워크에 트인 남성이 한 축이 될 필요는 있다. 남성이 아픔·슬픔의 네트워크를 주도해서는 안 된다. 두 번 겪을 일은 아니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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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달리 막 김치 대하기가 힘들었다. 막 김치란 정성 없이 막 담았다는 뜻이 아니다. 누가 차마 김치 담는 마음을 평가하랴. 내가 막 김치라 하는 것은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이다. 배추의 본디 자태-나는 강원도 평창의 깊은 산골에서 태어나고 자라 오달진 배추의 자태를 잘 안다-에서 소외된 빈곤과 슬픔의 김치가 막 김치다. 빈곤과 슬픔을 담은 그 막 김치는 바로 우거지김치다.


도시 빈민으로 흘러들어 보낸 10대의 혼돈 한복판에서 어미 없는 나를 지켜주신 할머니의 빈곤은 늘 시장의 변두리 채소가게 언저리를 맴돌곤 했다. 거긴 우거지가 있었다. 돈 없어도 새끼 굶겨죽이지 않을 한 움큼 희망이 있었다. 할머니는 ㄱ자 허리를 이끌고 우거지를 주우셨다. 어린 나는 그 할머니 마음 한 자락을 부여잡고 주춤주춤 따라 나섰다. 가고 싶지 않았다. 굶어죽을지언정 우거질랑은 먹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할머니 억장 무너질까 헤아려 매번 따라나서던 착한(?) 손자 녀석이 어느 날 발작을 일으켰다. 더는 견딜 수가 없었던 거다. 괴성을 지르며 할머니 손을 뿌리치고 도망쳐버렸다. 한 식경 떠돌다 집으로 들어갔다. 밀가루 풀죽 같은 수제비국 옆에 우거지김치가 할머니처럼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훌쩍거리며 그 우거지김치를 다 먹었다. 애먼 수제비국은 식어만 가고.


우거지김치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한 채 할머니는 세상을 버리셨다. 할머니가 짊어지셨던 빈곤의 근본을 여적 보듬고 사는 나는 막 김치를 볼 때마다 할머니 우거지김치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우거지김치는 몸서리쳐지는 빈곤을 찰나에 복원한다. 우거지김치는 할머니의 청초한 설움을 단박에 소환한다. 빈곤과 할머니를 끌어안고서야 어찌 무심코 막 김치를 먹을 수 있으랴. 집에서는 아예 막 김치 또는 막 김치 상태인 김치를 식탁에 올리지 않는다. 밖에서 먹을 때, 막 김치가 나오면 애써 피한다. 반백 년 세월이 그렇게 흘러갔다.


엊저녁 우연히 나는 막 김치 앞에 앉게 되었다. 그 막 김치 앞에서 벼락처럼 나는 할머니 우거지김치를 직면한다. 유심히 젓가락을 댄다. 순간, 아침 햇살 비취면 물안개 사라지듯 막 김치 앞의 응어리가 홀연히 사라진다. 엉엉 울면서 그 막 김치를 다 먹는다. 이제는 무심히 막 김치를 먹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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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7-11-02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응....이 글 너무 좋아요

bari_che 2017-11-02 13:2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글 쓸 때도 엉엉 울었더니만...^^
 
위험한 제약회사 - 거대 제약회사들의 살인적인 조직범죄
피터 괴체 지음, 윤소하 옮김 / 공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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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제정된 미국 조직범죄통제법의 핵심은 RICO법(Racketeer Influenced & Corrupt Organizations Act)이다. 모리배 짓(racketeering)이란 특정 형태의 범법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갈취·사기·연방마약법 위반·뇌물 수수·착복·사법 방해·법률 집행 방해·증언 방해·정치적 부정부패를 포함하는 행위다. 거대 제약회사들은 이 중 대부분을 늘 저지르고 있으므로, 제약회사의 비즈니스 모델은 의심의 여지없이 조직범죄 기준에 부합한다.(85쪽)

  ·······우리가 보는 것은 조직범죄다. 이 업계는 완전히 썩었다.(87쪽)


마침 우리사회 현안이 된 적폐 청산, 그 적폐본진의 아이콘 이명박이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그를 흔히 MB라고 부른다. 나는 일찍이 그 MB가 Monkey Business의 이니셜이라고 풍자한바 있다. Monkey Business는 협잡挾雜, 그러니까 “모리배 짓(racketeering)”이다. ‘모리배’ 또한 MB, 그러니까 이를테면 MoriBae의 이니셜이라는 word play가 가능하니 퍽 재미있다. 모리배 짓이라는 본문 단어를 보고 대뜸 떠올린 것이 이명박이니 우연의 일치 치고는 거의 음모 수준이 아닌가.^^


‘^^’ 일 아니다. 연방마약법 위반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모두가 이명박이 전매특허 행동 목록이다. “갈취·사기·뇌물 수수·착복·사법 방해·법률 집행 방해·증언 방해·정치적 부정부패” 어쩜 이리 이명박이 앞에 놓고 묘사한 듯 생생한가. 내친 김에 한 고개를 더 넘어가자. MB는 또한 Medicine Business의 이니셜도 되니 제약회사 식 조직범죄의 화신으로 번역해도 손색이 없는 과연 전천후 이명박이다. 추호의 순간이나마 섬쩍지근한 느낌이 살을 베고 지나간다.


실없는 이야기 아니다. 거대 제약회사의 조직범죄는 그 수법에서 특별하지 않다. 새로울 것도 없다. 딱히 갱단에서 시작되었다고 하기도 그렇다. 백색문명 지배집단 모두가 공유하는 전가의 보도 아니던가. 최근 9년 동안 이명박근혜를 필두로 이 나라 적폐본진이 힘과 돈과 이름을 얻기 위해서라면 서슴없이 대놓고 함부로 자행한 짓거리 아니던가. 하필 제약회사가 독극물을 가지고 약이라 개소리 떠벌이는 협잡 판에 의학이라는 고급담론과 의사라는 엘리트집단이 앞잡이 노릇을 해서 더욱 분노를 자아낼 따름 아니던가.


그렇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조직범죄다. 이 계는 완전히 썩었다.” 제약회사와 의사들의 조직범죄를 경험하면서 우리는 완전히 썩은 세계를 본다. 사람의 생명을 협잡의 대상으로 삼았다면 더 갈 데가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우선 여기부터 혁파하자. 백색의학부터 응징하자. 당장 우리 손에 들린 백색독극물부터 내려놓자. 남성들은 비아그라에 흘리던 침부터 거두자. 시작하면 끝이 있겠거니.


이 글을 쓰던 중, 점심시간이 되어 마을 소박한 백반 집으로 갔다. 제약회사와 의사가 던지는 백색 독극물 이야기를 하다가, 백반 집 여성 주인이 모두 손수 만들어주는 녹색음식을 먹자니 그렇게 싱그러울 수가 없다. 한의원으로 돌아와 잠시 쉴 겸 페이스북을 여니 MB가 떠 있다. 세월호사건에는 입도 뻥긋 않던 물건이 일본 쓰나미 1주년이라고 찾아가 고개 숙인 사진이 걸렸다. 아, 잊을 뻔했다. 이명박이 협잡에는 매판짓거리가 하나 더 추가된다는 사실 말이다. 아, 식민지 녹색혁명은 산 첩첩 물 겹겹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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