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제약회사 - 거대 제약회사들의 살인적인 조직범죄
피터 괴체 지음, 윤소하 옮김 / 공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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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자들 대부분은 여러 종류의 약을 한꺼번에 처방받는다. 노인 환자들은 특히 그렇다.·······이 약들은 모두 인지장애, 착란, 낙상을 유발할 수 있는데, 노인들에게는 꽤 높은 사망률을 유발하는 증상이다. 그리고 대개 환자 본인과 보호자들은 그런 증상을 고령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나, 치매 또는 파킨슨병 같은 질환의 징후로 잘못 해석한다. 하지만 의사가 약 처방을 중단하면 환자들 중 다수는 분명히 몇 살쯤 젊어져서, 균형을 잡지 못해 사용하던 바퀴 달린 보행보조기를 치워버리고 다시 활동적인 모습으로 돌아간다.(235쪽)


<8. 약 유행병이 창궐하고 있다>에서 이미 70대 노인 쯤 되면 양약 서너 가지는 기본으로 복용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설마 하겠지만, 사실 노인 환자들에게는 약 욕심이 있다. 이것은 모름지기 이들 세대가 지나온 식민지, 전쟁, 독재의 세월에서 겪은 가난과 맞물린다. 밥 많이 먹어라가 축원이었던 시절이 여적 그들 가슴 속에는 살아 있다. 더욱 설마 하겠지만, 사실 노인 환자들에게는 약 자랑까지 있다. 한 보따리 약은 자신이 얼마나 고생하며 살아왔는지에 대한 훈장으로 반짝인다. 왜 아니겠나. 공감한다. 공감한다고 해서 공갈범의 희생양이 되는 꼴을 두 눈 뜨고 보아 넘길 수는 없다.


이런저런 양약 치료 받으며 전전하다가 목욕탕에서 ‘침 함 맞아봐라’ 하는 소리 듣고 찾아온 노인들에게 일일이 물어 양약을 확인한다. 양의들은 한약 암만 봐도 모르지만 나는 양약을 잘 안다. 내가 유식해서가 아니다. 약학정보원에서 잘 알려준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거지만 노인들은 대부분 과다중복처방을 받고 있다. 이를 피터 C. 괴체는 다중약물요법이라 하는데, 내가 ‘과다’ ‘중복’이라 한 것은 그만한 까닭이 있다. 같은 질병에 같은 기작을 지닌 약물을, 심하면 서너 가지까지 겹쳐 처방하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을 상세히 말해준 다음, 양의한테 가서 항의하지 말고 힘들어 그러니 줄여 달라 하라까지 초군초군 일러준다.


넘어져서 타박상이나 염좌를 일으켜 오는 노인에게는 특히나 신경을 쓴다. 약 때문에 넘어진다는 사실을 말해주면 대부분 미심쩍어한다. 넘어지면 사망 확률이 높아진다고 말할 때에야 비로소 눈이 동그래진다. 넘어져서 대퇴 골절이 일어나는 경우 절반가량이 1년 이내에 사망한다는 통계를 들이밀어야 할 경우도 없지 않다. 상황이 이런데, 본인도 가족도 양의사도 무슨 증상이 생기면 거기 맞추어 약을 추가로 먹어야 한다고만 생각한다. 아는 자는 알아도 모르는 자는 몰라서 노인을 소리 없이 학대하고 죽음으로 몰아간다. 백색의학에게 노인은 여성, 아동과 더불어 또 하나의 봉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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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걷는 인간homo ambultus이라는 진실을 아는 것만으로 생기는 의미란 없다. 거기에 마음을 두어야 비로소 의미가 생성되기 시작한다. 관심을 가지는 것. 주의를 기울이는 것. 유심히 대하는 것. 그리고 상상하는 것.


상상은 사랑의 기미다. 사랑의 기미는 엄두 낼 수 있게 한다. 엄두 내어 걷기 시작하면 사랑은 몸에 시시각각 각인된다. 몸에 각인된 사랑은 상상을 무한히 갈래지게 한다. 무한히 갈래진 상상 속에서 걷기의 탱맑은 느낌이 소소하게 미미하게 돋아난다.


느낌. 이것은 몸의 움직임, 그 놀림에 마음을 맡기는 상태다. 걸을 때 솟아나는 몸 느낌, 정서의 변화를 그저 감각으로 마주한다. 가벼운 근육통, 숨참, 촉촉한 땀, 싱그러운 바람이 일으키는 피부 감각, 상쾌함, 잡념이 사라지는 순간의 망아, 평화로움들.


알아차림. 이것은 자신이 걷고 있다는 사실을 찰나마다 의식하는 것이다. 무심코 잡념에 휘감겨 걷지 않고 유심히 걷는다. 몸의 움직임, 진행 방향, 주위 조건과 맞닥뜨림 전체를 주의 깊게 살핀다. 해석·평가, 의미 챙기기는 하지 않는다.


뜻 가름. 이것은 걷기를 내 삶에 정색하고 다시 들이기로 하는 다짐이다. 어떻게 얼마나 걸을까, 나름과 깜냥의 결 세움이다. 걷기가 이미 자연의 문제에서 역사의 문제로 바뀌었다는 각성을 구체적 실천으로 드러내는 행위다.


그리하여 마침내 걸어본다. 수단이든 목적이든 삶 그 자체든 살아 있는 날까지 걸어 가보는 것이다. 십인십색의 걷기에서 참다운 도가 일어나 인간이 우주에 여한 없이 배어들 수만 있다면야. 걷기는 그야말로 태고의 미래로서 인류 존망의 열쇠를 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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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은 가을로 불타고

꽃은 봄으로 불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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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도둑놈이다

다람쥐 밤 한 톨과

도토리 세 알을 훔쳤다

나는 용서 빌지 않으련다

내 죄 땅 깊이 묻을 거다

언젠가 봄 되어, 내 죄가

무럭무럭 자라나


오늘 굶주린 다람쥐, 그 아가들에게

밤 열 톨로

도토리 서른 알로

떨어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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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직립 보행할 수 있도록 진화하면서 뇌가 커져 미숙한 상태로 태어난다. 미성숙기가 오래토록 지속된다. 윤리 뇌가 다 자라는 것을 마지막이라고 보면 여성은 25년가량, 남성은 30년가량 자라야 한다. 전인격적 성숙까지 고려할 때, 사실 인간의 대부분은 평생토록 다 자라지 못하고 살다 죽는다. 직립보행이 인간에게 가져다준 축복의 이면이다. 비대칭의 대칭이란 진리는 여기서도 예외를 허하지 않는다.


인간이 태어나 자라가는 과정은 단계적인 몸짓 변화로 이루어진다. 몸짓이야말로 존재론이며 근원의학이다. 소미한 이야기는 다른 기회로 넘기고 큰 몸짓 이야기만 한다. 아기가 가장 먼저 하는 몸짓은 뒤집기다. 뒤집기는 눕혀진 상태에서 엎드린 상태로 바꾸는 몸짓이다. 이 몸짓은 살아 있는 생명체를 스스로 만드는 최초 행동이다. 배가 위로 향해 있으며 움직이지 못하는, 그러니까 죽어가는 물고기와 움직이지는 않지만 배를 아래로 향하고 잠든 물고기를 비교하면 그 이치를 금방 알 수 있다.


뒤집은 다음 아기가 하는 몸짓은 몸을 좌우로 흔들어 전진하는 배밀이다. 이것은 명백히 물고기, 그러니까 어류의 생명 운동이다. 그 다음에는 손발을 쓰면서 진행되는 엎드려 기기다. 배가 여전히 땅에 닿아 있는 양서류 단계부터 시작해 파충류 단계를 거쳐서 이윽고 배가 땅에서 완전히 떨어져 생활하는 포유류에 이르기까지 자라간다. 그러다가 주위 사물을 의지하면서 서고 발걸음을 떼면서 영장류로 변화해간다. 최후로 걷기가 시작되어 능숙해지고, 게다가 달리기로 나아가면 비로소 인간의 몸짓이 완성된다. 이 일련의 과정은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라는 말로 요약된다.


어류는 어류대로, 양서류는 양서류대로, 파충류는 파충류대로, 포유류는 포유류대로, 영장류는 영장류대로,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 우주 이치에 맞는 생명을 살다 간다. 그들의 삶에는 심신 분열도 없고, 자아와 우주의 분리도 없다. 문제는 인간이다. 인간의 걷기는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조건이다. 걷기의 진리를 미처 자각하기 전에 인간은 자아폭발(스티브 테일러)이란 분리를 겪으면서 걷기에서 스스로 소외되었다. 걷기에서 소외된 장구한 역사를 우리는 문명이라 부른다. 문명이 이제 인간을 인간이지 못하게 하는 조건이 되었다. 어찌할 것인가?


걷기의 진리를 복원해야 한다. 걷기를 되살려야 한다. 걸을 수 있음에도 걷지 않는 사람은 무조건 당장 걸어야 한다. 걷지 못하는 사람은 기어야 한다. 기지 못하는 사람은 배밀이해야 한다. 배밀이도 못하는 사람은 뒤집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시작해서 걷기를 복원하면, 구구한 설명 필요 없이 인간이 왜 인간인지 알 수 있다.


그러면 걷기란 무엇인가? 이미 <녹색의학은 여성이 남성과 다름을 인정하는 의학이다-『이브의 몸』(14)>에서 대강을 밝혔다. 걷기는 우주 진리를 몸 사건으로 일으키는 인간의 존재 양태다. 두 발과 다리는 비대칭의 대칭을 이루며 움직인다.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미는 동작을 교차 반복한다. 찰나적으로만 땅에서 서로 연속되고, 나머지 모든 시간 동안은 서로 단절된다. 이것이 연속과 단절의 본령이다. 연속될 때는 단정하게, 단절될 때는 기우뚱하게 균형을 이룬다. 이것이 연속과 단절의 하모니다. 걷기는 정확하고 절묘하게 우주 운동을 담는 인간 행위다. 몸짓으로서 인간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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