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글씨를 모른다고 할 한국인은 삼척동자 빼면 아마 없을 것이다. 심지어 글씨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귀동냥으로나마 추사체가 명필임을 말한다. 나 또한 10대 때 교육을 통해 그런 사실을 주입(!) 받은 이후 추호의 의심 없이 반세기 가까이 살았다. 최근 불현듯 전혀 다른 깨달음이 찾아왔다.


고등학교 1학년, 봉은사로 봄 소풍 와서 판전 현액을 처음 보았다. 미술 선생님께서 곡절을 말씀해주셨다. 마냥 신기하게 생각하고 감동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새롭다. 지난 일요일 오전 판전 현액을 다시 보기까지 아마 수 십 차례 보았을 것이다. 그날따라 글씨에는 병중무심이라는 평평한 내러티브 이상의 진실이 숨어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천천히 걸으며 느슨히 생각을 펼쳐 놓기 시작했다.


내 상상의 풍경에는 기억 속에 있던 추사의 글씨들이 몇 단계를 거쳐 늘어서고 있었다. 붓을 처음 잡았을 때, 그러니까 배우기 전 어린 추사의 neoteny 가득한 글씨. 선배 명필들의 글씨를 본떠 열심히 배워 틀 갖춘 추사의 글씨. 학습 명필에 만족하지 못한 추사의 새로운 시도로서 어린 시절 neoteny를 녹여낸 글씨, 이른바 추사체. 추사체마저 던질 수밖에 없었던 아픈 추사의 <판전> 글씨. 전경을 본 뒤 나는 생각했다. 원효 일생 같구나.


추사는 타고난 악필이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명필을 섭렵한다. 아무리 꿰뚫어도 성에 차지 않는다. 2% 모자란다. 타고난 음치가 아무리 교정해도 끝내 완벽하게 되지 않는 것처럼 타고난 악필은 아무리 흉내 내도 학습 명필이 될 수 없다. 흉내 내도 안 된다는 사실이 반전의 근거가 된다. 추사는 흉내를 포기, 아니 거절하기로 한다. 자신만의 손길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그 손길은 바로 neoteny 가득한 어린 손길이었다. 단순히 복귀한 것이 아니다. 인고의 닦음이 neoteny에 배어들었다고 할까. neoteny가 인고의 닦음을 뚫고 배어나왔다고 할까. 부정의 극단에서 맺은 열매가 이른바 추사체다.


추사가 금석문에 정통했다는 사실은 반증으로 작용하지 못한다. 금석문은 neoteny 가득한 글씨다. 그것을 추사가 neoteny로 인식했다고 할 수는 없다. 거꾸로 그 무구함의 도저한 예술성을 간파한 자신의 neoteny에 이끌려 자신의 글씨에 녹여냈다고 해야 한다. 추사 이외의 사람은 끝내 자신의 neoteny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어른 글씨, 그러니까 흉내 명필로 생을 마감했다. 추사는 자신의 내부에 있는 neoteny를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여 글씨에 근원성radicality을 부여했다. 이것이 추사의 위대함이다.


물론 여기가 끝이 아니다. <판전>이 남아 있으니까. 천재는 남이 만든 유類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는 자다. 자기 유를 만드는 자다. 그러나 자기가 만든 유를 타고 앉는 자는 진정한 천재가 아니다. 자기 유도 스스로 놓아버리는 자가 진정한 천재다. <판전>은 바로 그 놓아버림이다. <판전>은 추사체가 아니다. <판전>은 추사체가 아닌 것도 아니다. 원효의 마지막 같구나.


사실 이런 추사 가설은 자주 드나드는 인사동 한 음식점에 걸린 어떤 글씨를 보면서 든 생각이 단초가 되었다. 내가 한눈에 그가 누군지 알아볼 정도로 그 글씨를 쓴 사람은 우리 시대의 뜨르르한 이른바 대가다. 본 글씨 옆에 서명한 작은 글씨가 있다. 본 글씨와는 전혀 다른 서체다. 심지어 재빨리 휘갈겨 쓴 글씨가 분명하다. 나는 서예를 배운 일이 없어서 본디 그렇게 하는 것이 관행인지 아닌지 잘 모른다. 어쨌든 그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본 글씨만 예술이고 서명은 아닌가? 그림 작품이라면 모르되 같은 글씨 아닌가? 그런데 정작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서명 글씨가 악필이라는 데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내 의문은 단되직입이 된다. 갈고 닦아, 그러니까 열심히 흉내를 낸 뒤 나름의 멋을 부가해 학습 명필의 반열에 올랐지만, 본디 저 사람은 악필이다. 악필을 감춘 채 일생을 명필로 추앙받으며 살았다. 저 사람이 참 명필이려면 자신만의 악필을 인정하고 머금은 자태가 글씨에 드러나야 하지 않나? 이 때 홀연히 추사가 떠오른 것이다.


누구도 타고난 악필이 아닌 사람은 없다. 저마다 다 다른 악필이다. 아니 악필이랄 것도 없다. 흉내 내지 않은, 훈련되지 않은 자연 글씨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배워서 고쳐진 글씨는 남의 글씨다. 진정한 내 글씨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내 운명과 인연 속의 neoteny를 받아들여 무애자재로 나아가는 것이 도道다. 어디 글씨뿐이랴. 삶이 모두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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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제약회사 - 거대 제약회사들의 살인적인 조직범죄
피터 괴체 지음, 윤소하 옮김 / 공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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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약을 찾아내고 개발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들어서 약값이 비싸다.

② 비싼 약을 외면하면 기적의 신약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③ 값비싼 약으로 절감되는 비용이 더 크다.

④ 신약은 제약회사가 후원하는 연구에서 나온다.


제약회사는 진짜 신약 개발에는 비교적 적게 투자하고서, 공적 후원 연구를 넘겨받으면 턱없이 높은 가격으로 약을 판매한다. 독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약회사는 연구와 관련된 거짓말을 입버릇처럼 하며 신약에 대한 공로를 가로채서 그 약을 자기네가 개발했다고 주장한다.·······제약회사는 수익의 1%만 신약 물질을 개발하기 위한 기초 연구에 투자한다. 세금으로 보조되는 만큼이다. 그리고 새로운 약과 백신의 개발을 위한 기초 연구비의 4/5이상은 공적 자금이다.


⑤ 제약회사들은 자유 시장에서 경쟁한다.

⑥ 의료계와 제약회사의 긴밀한 협력관계는 환자에게 이롭다.

⑦ 제약회사의 임상시험은 환자 치료를 개선하기 위한 것이다.

⑧ 환자들의 반응이 다양하기 때문에 같은 종류라도 여러 가지 약이 필요하다.

⑨ 복제 약은 효력이 불안정하니 쓰지 마라.

⑩ 국고 지원이 없어서 제약회사가 의학연수 비용을 대준다.(423-437쪽)



실로 이것은 십계명이다. 야훼 하느님이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내리신 저 십계명보다 엄중하고 치명적이다. 의심 없이 웃으며 한꺼번에 수억 명의 사람이 이 계명 앞에 부복한다. 분노 없이 웃으며 한꺼번에 수십만 명씩 사람을 이 계명으로 죽인다.


유일하게 제4계명에만 주석을 달았다. 유독 이 계명이 기적의 놀라운 기작을 계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소 비용으로 최대 이익을 낳는다는 신조는 근본적으로 돈 놓고 돈 먹기라는 자본의 형이상학에 터한 것이다. 제4계명은 이에 충실하면서도 이를 뒤엎는 신공을 시전한다.


수익의 1%만 신약 물질을 개발하기 위한 기초 연구에 투자한다. 세금으로 보조되는 만큼이다.


최소한의 돈을 놓는다. 원칙에 충실하다. 그 돈은 세금으로 보조된 것이다. 원칙을 뒤엎는다. 사실상 땡전 한 푼 안 놓고 “신약에 대한 공로를 가로채서” “턱없이 높은 가격으로 약을 판매한다. 독점이기 때문이다.” 실은 이것이야말로 전지전능이다. 약훼 하느님의 도래다.


약훼 하느님이 내리신 십계명을 안고 우리가 가야 할, 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어딘가. 풍요로운 부작용과 놀라운 이탈증상과 거룩한 의원병醫原病, 그리고 마침내 영원한 죽음으로 뒤덮인 간난의 땅 아닌가. 머리를 땅에 찧으며 고뇌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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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토콘드리아 걷기가 각종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원리의 핵심에는 체온 상승이 있다. 체온이 상승했다는 것은 생체진동수가 높아졌다는 것이므로 효과가 광범위하다. 그 효과가 정신적 질환에도 미치는 것은 당연하다.


연구에 따르면 (미토콘드리아) 걷기가 세로토닌 전구물질인 트립토판 분비를 촉진한다고 한다. 논란의 여지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세로토닌은 몸·마음, 의식·무의식, 좌·우뇌의 역동균형과 관련되는 신경전달물질이므로, 정확히 비대칭의 대칭 운동인 걷기가 이런 효과를 낸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세로토닌이 선형적으로 우울장애와 인과관계를 이루느냐 여부와 상관없이 걷기가 일으키는 역동균형 작용이 우울장애를 치유할 수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우울장애도 결국은 불균형 문제고, 불균형 문제는 생체진동수 저하 문제기 때문이다. 다른 정신장애에도 이런 이치는 두루 통한다.


걷기가 인간에게 개체 단위로 미치는 지상의(!) 효과는 일렁고요다. 일렁고요는 역동균형을 이른바 도道의 차원에서 묘사한 것이다. 말하자면 구원(의 확신)이요, 견성이다. 걸어서 우주에 깃든다. 걸어서 우주와 합일한다. 홀로 가능한가? 가능하다. 단! 찰나적으로만. 이것을 홀로 영속화하려 할 때 깨달은 마귀가 된다. 깨달은 마귀가 되지 않으려면 진정으로 깨쳐야 한다. 진정으로 깨치는 길은 구원의 확신으로 홀로 구원 받는 길은 없다는 진리를 실천하는 길이다. 견성으로 홀로 부처 되는 길은 없다는 진리를 실천하는 길이다. 이 진부한 진리가 진부해지지 않으려면 찰나마다 새로운 발걸음을 떼어야 한다.


새로운 발걸음은 더불어 걸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누구와 더불어 걷는가? 이웃이다. 이웃은 누군가? 작은, 적은, 아픈, 슬픈, 수탈당하는, 죽임당하는 사람이다. 작은, 적은, 아픈, 슬픈, 수탈당하는, 죽임당하는 자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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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잎으로만 오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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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제약회사 - 거대 제약회사들의 살인적인 조직범죄
피터 괴체 지음, 윤소하 옮김 / 공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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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부고발자가 다시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한 정도의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나라는 미국뿐이다. 그러나 내부고발자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포상금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양심이다. ‘나는 누군가를 죽게 만드는 일에 동참하고 싶지 않다.’라는 양심.·······

  내부고발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며, 소송에는 평균 5년이 걸린다. 피터 로스트는 회사의 사기행위를 고발한 내부고발자 233명이 어떻게 됐는지 조사했다. 90%가 해고되거나 좌천됐고, 27%는 고소당했고, 26%는 정신과 치료나 신병 치료를 받아야 했고, 25%는 알코올 중독에 빠졌고, 17%는 집을 잃었고, 15%는 이혼했고, 10%는 자살을 시도했고, 8%는 파산을 겪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내부고발을 하지 않겠다고 답한 사람은 그들 중 16%에 지나지 않았다.(402-403쪽)


우리나라의 경우 부패 범죄의 조사가 개시되는 사건 절반 이상이 내부고발에서 비롯한다고 한다. 부패 통제에서 그만큼 내부고발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동시에 우리사회처럼 내부고발 조건이 열악한 상태에서 이 정도라면 내부고발자 보호의 질이 좋아지면 그 비율은 더 높아질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2011년 공익신고자보호법을 제정했다. 이 법이 공공기관에 한해 적용하던 범위를 넓혀 민간에서 발생하는 공익 침해 사례까지도 넓혀 놓기는 했지만,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우선, 내부고발 대상이 정부·공공부문 중심이어서, 민간 부문은 건강·안전·환경·소비자·권익침해 등으로 국한돼 있는 것이 문제다. 분식회계, 배임, 횡령, 뇌물 등 중요 문제가 대상에서 제외된다. 대상 범위를 현실화해야 한다.


그리고 내부고발자 보호 질이 낮은 것도 문제다. 최대 30억까지 보상해준다 하지만, 실제 공공부문 내부고발자들이 받는 보상액은 5천만 원 미만 수준이라고 한다. 그 돈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인데, 누군들 감히 용기를 낼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 현실적인 문제는 신고자가 조직에서 생존하는 방향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살아남는다 해도 좌천되고, 대개는 해고되는 상황과 맞지 않다. 조직을 떠나, 다른 삶을 시도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제약회사 내부고발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2016년 어느 언론에 보도된 유나이티드제약회사 전 수석연구원의 내부고발 사건을 보면 제약회사 행태는 여느 다국적 제약회사의 그것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보도는 보도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사회에서 제약회사 내부고발은 희귀한 일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한다.


사회 전체가 견지하고 있는 공적 윤리의식으로 미루어보면 뭐 그리 놀라울 것도 없다. 대통령이 부패로 파면당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대다수 졸개들은 내부고발커녕 부역을 정당화하기에 급급한 사회 아닌가. 다른 것은 몰라도 세월호사건 하나만이라도 내부고발이 있어야 적어도 상식은 통하는 사회다. “‘나는 누군가를 죽게 만드는 일에 동참하고 싶지 않다.’라는 양심”이 실로 300명 넘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보고도 발동하지 않는 사회에서 제약회사 내부고발은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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