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때로 결백을 위로이게 한다




눈은 때로 갈엽을 백화이게 한다




눈은 때로 나무 전체를 꽃송이이게 한다




눈은 때로 가을나무를 햇빛의 호위무사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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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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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부터 12월까지 나는 『몸의 증언』의 주해 리뷰 60편을 썼다. 같은 저자다. 그 책이 3년 나중 저술됐으나 번역이 먼저 됐다. 두 책의 느낌은 사뭇 판이하다. 내용이나 번역의 차이일 수도 있지만, 달라질 수밖에 없는 글쓰기 감수성 자체에서 다른 풍경이 빚어졌을 것이다.


이 책의 원제목는 『AT THE WILL OF THE BODY: Reflections on Illness』다. 『몸의 지향: 질병을 숙고함』 정도로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말글살이 분위기와 저자의 의중-disease와 illness 차이를 섬세히 또는 엄격히 구분하는-을 고려해서 『아픈 몸을 살다』로 번역한 듯하다.


자신의 질병 경험을 삶의 한가운데서 통찰한 글이라 다양한 촉감이 그대로 전해진다. 학문적으로 훈련된 기반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탁월한 감각을 따라 펼쳐지는 감성과 이성의 교직이 때로는 웅숭깊고 때로는 눈부시다. 사유의 깊이와 표현의 기술을 고루 갖춘 드문 지성이다.


이 책을 몇 사람에게 소개·추천했다. 심장마비와 암을 겪은 이야기지만 우울장애를 위시한 마음병을 겪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더 깊은 울림을 주는 부분이 있어서다. 어떤 이에게는 필사를 권유했을 정도다. 약간의 이의와 보충을 포함해서 아픈 삶의 길 동행기를 적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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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의학 이야기>를 꾸준히 읽는다는 한 사람이 내게 물었다. “파동 공동체가 무엇입니까?” 아, 나 또한 이간문명의 흔적을 지닌 채 글을 쓰고 있구나. 자그마하게 배어드는 마음 小少沁心으로 이야기를 해야 마무리가 되겠구나.


파동공동체는 ‘고립된 자급자족 계획공동체(찰스 아이젠스타인)’의 입자 정체성을 염두에 둔 대안 용어로 내가 고안해낸 말이다. 고립된 자급자족 계획공동체는 공동체를 양(가시적 조직)으로, 영역으로만 생각한다. 우리가 흔히 보는 종교(성을 띤) 공동체, 명망가 중심으로 특정한 삶의 목적·방식을 가지고 꾸린 공동체가 바로 그런 예다. 어떤 정체성 안에서만 연속될 뿐이어서 이간문명의 속성 또는 트라우마를 고스란히 간직한 상태다.


파동공동체는 질(상호교류)로, 네트워킹으로 생각하는 공동체 개념이다. 이런 예는 어떨까. 가령 통일 문제를 말할 때, 보통 반사적으로 남북의 영토적 통일을 떠올린다. 그러나 남북한을 포함해,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아가는 한인들을 네트워킹으로 연결한 유연한 공동체 형성을 통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중국, 중앙아시아, 미주, 일본 등에 결코 적지 않은 수의 한인이 집단을 이루어 사는데, 이들을 영토적으로 묶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남북한의 영토적 단일성 문제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최근 벌어진 북한 병사 귀순 사건에서도 보듯 휴전선은 그 어느 국경선보다 살벌하고 견고한 분리 상태를 드러내고 있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헌법에 무슨 의미가 있나.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사상과 삶을 공유한다면 카자흐스탄 고려인 마을에 사는 사람과 LA 한인 마을에 사는 사람을 공동체 구성원이라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나는 한 줌 무리 이끌고 어느 섬으로 들어가 울타리 두른 다음, 녹색의료·녹색출산·녹색장례·녹색농업 일구어 우리끼리만 행복하게 오래오래 사는 ‘율도국’ 공동체를 만드는 꿈을 꾸지 않는다. 율도국 프랜차이즈 시스템을 구축해 지구를 율도국 분점으로 덮는 꿈은 더욱 꾸지 않는다. 비밀리에 기적의 율도전사를 양성해 전 세계를 율도제국 통치 아래 두는 꿈은 더더욱 꾸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각각 그 인연에 따라 고유한 율도국을 만들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깨달아 고유한 율도국을 이루도록 소통하는 계기 공동체를 꿈꾼다. 계기 이상(의 권력)이 되면 스스로 거점을 지워 나아가는 공동체를 꿈꾼다. 이게 바로 파동공동체다.


파동은 에너지를 공급하거나 구조를 세우지 않는다. 파동은 자그마하게 소식news을 주고받는다. 자그마하게 주고받은 소식은 각자의 복음the Good News이 되어 인연에 맞는 에너지와 구조를 스스로 일구도록 조절 한다. n개의 녹색공동체는 n가지 스펙트럼의 녹색 빛을 낸다. 이간문명의 극복은 이토록 다양하고 풍요롭게 번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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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醫는 앓는 소리를 뜻하는 예殹에다 술 단지를 뜻하는 유酉를 더하여 만들어진 글자다. 고대에는 술로 병이나 상처를 치료했기 때문에 이런 글자가 형성되었다. 오늘날의 서양 과학적 지식으로 추정한다면, 에탄올의 작용을 핵심으로 이용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술은 증류주든 발효주든 순수 에탄올 이상의 약 성분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그렇게만 말할 수는 없다. 동아시아 고대의학에서 주로 사용한 탕약은 대부분 물로 달이지만 술을 넣어 달이도록 한 처방도 있다. 이것은 에탄올 추출이 더 나은 경우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술과 함께 복용하도록 한 처방도 있다.


자연스럽게 醫는, 우리가 아는 의사나 치료라는 기본 뜻 말고, 술이라는 뜻도 함께 지닌다. 하지만 술의 최초 위상은 신성한 것이었다. 종교지도자가 신을 만나는 방편이었으니 말이다. 술의 치료 기능은 아마도 그 신성의 확장, 세속화 과정에서 나타났을 것이다. 이렇게 종교지도자는 의사이기도 했으므로 醫에 무당의 뜻이 담기는 것 또한 자연스럽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정치지도자가 종교지도자이자 의사였다. 醫에 보살피는 사람이라는 뜻까지 담긴 것은 이 사실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듯하다.


醫의 이런 다중 의미를 오늘날 다시 음미할 필요가 있다. 이간문명이 가르고 또 갈라놓아 모든 것이 파편화된 현대사회에서 의사는 요법포르노 기술자로 타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본디 의사는 영성의 사람이었다. 세상을 보살피고 돌보는 공공의 사람이었다. 녹색의술을 시행하는 치유의 사람이었다. 본디 위상을 복원해야 한다. 승려가 되고 국회의원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영성과 공공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요법 포르노를 떠나서 전인치유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과 사람사이, 사람과 자연 사이, 자연과 자연 사이를 흐르는 파동 공동체의 매개변수가 돼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무당이자 술인 사람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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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의학이 근원과 연대하는 일은 연대 자체로 하나의 극복운동이다. 연대는 연속을 복원하는 일이다. 연속은 불연속, 그러니까 단절의 악을 관통한다. 단절의 악을 체계로 만든 것이 백색문명이다. 백색문명을 스티브 테일러는 타락the Fall-자아폭발ego explosion이라 묘사한다. 백색문명을 찰스 아이젠스타인은 분리의 이데올로기/흐름이라 표현한다. 백색문명을 거대 음모로 각색하고, 그 가짜 음모의 하수인 노릇하며 거들먹거리는 세력의 야심을 염두에 두어, 나는 이를 이간離間문명이라 이름 짓는다.


이간질은 악의적으로 둘 사이를 갈라놓는 짓이다. 이간문명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자연과 자연 사이를 갈라놓음으로써 상호연계의 네트워킹을 거세한다. 역동적 네트워킹 대신 가짜 초월, 사이비 보편을 옹립한다. 그렇게 옹립되어 마침내 완성된 초 일극집중구조의 유일신이 바로 돈이다. 돈의 지배체제인 백색문명, 그 하부단위인 백색의학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다름 아닌 녹색의학이다. 녹색의학은 돈의 노예로 살기를 거절하는 결단이다. 녹색의학은 삶을 선물(찰스 아이젠스타인)이게 하는 운동이다.


선물을 쌓아 올려 만들어내는 것이 공동체다(찰스 아이젠스타인의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102쪽). 녹색의학은 녹색출산, 녹색장례, 녹색농업과 연대하여 이런 열린 공동체를 향해 간다. 폐쇄적이고 자기충족적인 아라한집단을 꿈꾸지 않는다. 아라한집단은 자기들만 깨달았고 자기들만 깨끗하다고 기만하는 병든 게토이기 십상이다. 병든 게토는 공동체를 입자로만 생각한다. 파동으로서 공동체도 있다. 입자와 파동을 가로지르며 중재하는 존재가 의醫다. 의는 무당이자 술이다. 나는 무당이자 술로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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