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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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앓고 난 후에는 예전에 있던 곳으로 전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변화의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기에는 너무도 비싼 값을 치렀기 때문이다. 너무도 많은 고통을 보았고, 특히·······건강한 사람은 갖기 어려울 수도 있는 어떤 관점에서 고통을 보았다. 삶이라는 게임을 이전과 같은 조건으로 계속할 수는 없었다. 예전의 나를 회복하기보다는 앞으로 될 수 있는 다른 나를 발견하고 싶었다.(9쪽)


통이지지痛而知之. 아픔으로 알아지는 바가 있다는 말이다. 이때 안다는 말은 어떤 지식을 지닌다는 말과는 다르다. 전인격적 깨달음을 뜻한다. 좀 더 핍진한 해석은 ‘아픔으로써만 깨달아지는 진실이 있다.’일 것이다. 이 진실은 차마 형언할 수 없는, 언어 저편의 비밀을 지니고 있다. 신비라고 표현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아픈 사람 자신에게조차 곡진한 주의를 기울일 때에만 틈을 내주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 극한의 아픔은 죽음의 공포마저 부숴버린다. 목숨을 삼키는 아픔도 있다는 사실에는 두 개의 경고가 붙는다. 아픔과 맞닥뜨릴 때 눈감지 마라. 아픔과 맞닥뜨릴 때 도끼눈 뜨지 마라. 자연히 똑 한 개의 격려가 남는다. 아픔과 맞닥뜨릴 때 망연한 눈으로 지그시 바라보라. 망연한 눈에는 전경이 들어온다. 지그시 바라보면 풍경이 흘러간다. 비로소 아픔답게 대할 길이 열린다.


전경을 품고 각각의 풍경을 지나 걸어감으로써 아픔을 대할 때에만 얻어지는 각성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고유할 뿐만 아니라 새롭다. 새로움에서 솟아오르는 경이가 앓고 난 사람의 인격에 기품을 부여한다. 그 기품을 일러 거룩함이라 한다. 거룩함은 단독자의 실체 아닌 상호 의존하는 존재의 관계를 눈부시게 드러낸다. 관계의 눈부심이 바로 신이다. 신의 길을 여는 것이 아픔이다.


아픔으로 여는 신의 길이 아픔 이전 삶으로 돌아가는 길인 경우는 전혀 없다. 신의 삶은 고착된 경지를 허하지 않는다. 돈오는 무한히 점오를 낳으며 늘 걷는다無常. 늘 걷는데 자아가 있으랴無我. 無常無我의 걸음에는 신도 부처도 이름을 내려놓는다. 이름 없는 소소小少한 파동으로 소소소 번져간다. 함께 배고 서로 밴다. 아픔은 거대와 고립을 녹여 자그마하게 주고받는 무한 네트워킹의 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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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노을이나

코타키나발루 노을이나

모두 처연히 아름답다

처음과 끝이 닿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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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여백, 여백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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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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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이 가져오는 위험 중 가장 명백한 위험은 경계를 넘어가 죽는 것이다. 이 위험이 제일 중요하며, 또 언젠가는 이 위험을 피할 수 없는 날이 오고야 만다. 하지만 피할 수 있는 다른 위험이 있는데, 바로 질병에 집착하게 되는 위험이다. 질병을, 자신과 마주하지 않고 또 다른 이들과 마주하지 않으면서 뒷걸음질 치는 핑계로 삼는 것이다. 하지만 질병은 계속 매달리고 있을 만한 무엇이 아니다. (할 수만 있다면) 그저 회복하면 된다. 그리고 회복의 가치는 새로 얻게 될 삶이 어떤 모습일지 얼마나 많이 알아 가느냐에 달려 있다.(8쪽)


강상중은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에서 악을 병으로 규정한다. 악에서 윤리성을 소거하려는 것이 아니다. 악의 뿌리가 윤리성 너머까지 뻗어 있다는 것이다. 악은 병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병이 악인 것은 아니다. 어떨 때, 병은 악이 되는가? “집착”할 때다.


집착은 병을 자신의 삶에서 떼어내 대상 사물로 만들면서부터 시작된다. 대상 사물은 숭배와 착취를 넘나든다. 숭배든 착취든 권력의 도구이긴 마찬가지다. 권력을 획득한 병은 보수화된다. 보수성 속에 안주함으로써 병을 앓는 사람은 병의 화신이 된다. 병의 화신은 병이 지니는 고통의 속성을 무기로 삼는다. 그 무기를 휘두르는 순간부터 병은 악이다.


병의 화신을 ‘고통체’라 부르기도 한다. 병을 쾌락으로 여긴다는 측면에서 보면, 고통체라는 이름은 악을 병이라 한 통찰과 맞물려 섬뜩하게 본질을 꿰뚫는다. 이렇게 악으로 고착된 병은 병인의 삶을 파편으로 만든다. 파편이 된 삶은 회복을 포함한 그 어떤 변화도 거절한 채, 동어반복 속으로 침잠한다. 동어반복은 주술이 된다. 주술은 제의를 낳는다. 제의는 정교하게 다듬어져 신성 내러티브를 짓는다. 내러티브 추상화로 경계 안에서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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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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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질병은 우리를 삶의 경계로 데려간다. 그곳에서 우리는 삶이 어디에서 끝나버릴 수도 있는지 본다. 경계에서 삶을 조망하면서 우리는 삶의 가치를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해볼 수밖에 없다.(7쪽)


신약성서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 나심을 천사가 최초로 알려준 대상은 양치는 목동이었다. 이때 목동이 남의 양을 치는 고용목동임은 물론이다. 이 고용목동은 세리, 창녀, 이발사들과 함께 거의 최하층 신분에 속한다. 하느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 것을 이들에게 가장 먼저 알렸다는 것만큼 하느님나라의 본질을 웅변으로 증명해주는 사건은 다시없다. 하느님나라 소식, 그러니까 복음은 변방부터 전해진다. 변방인, 그러니까 “경계”에 서 있는 사람에게 하느님나라 인식의 특권이 부여된 것이다.


하느님나라는 무엇인가. “삶의 가치를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해볼 수밖에 없”게 하는 일대변화다. 그 변화는 “삶을 조망”해야 가능하다. 삶의 조망은 “경계에서”만 가능하다. 경계에서만이 “삶이 어디에서 끝나버릴 수도 있는지” 볼 수 있다. 삶의 끄트머리에 서게 하는 위태로운 삶에서 인간 인식은 깨어난다. 그 위태함이 질병인가, 사회정치적 수탈인가, 하는 차이 문제는 본질이 아니다. 생물학적 약자와 사회정치적 약자의 교집합은 원인과 결과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같은 내러티브 속으로 흘러든다.


심각한 질병”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이른 사람은 질병을 계기로 단순히 자신의 개인적 삶만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다. 거의 불가피하게 보건의료시스템의 거대한 벽과 맞닥뜨린다. 거기서 생물학적 질병이, 그 질병을 앓는 사람이 어떻게 사회정치적 수탈 대상으로 되어 가는지 통렬히 경험할 것이다. 이 통렬함이 생물학적 질병의 고통과 어떻게 다르고, 그러나 또 어떻게 같은지 깨닫고야 말 것이다.


심각한 수탈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 내몰린 사람은 수탈을 계기로 단순히 자신의 사회정치적 삶만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다. 거의 불가피하게 생물사회적 소외의 정교한 그물과 맞닥뜨린다. 거기서 사회정치적 수탈이, 그 수탈을 겪는 사람이 어떻게 생물학적 병자로 만들어져 가는지 통렬히 경험할 것이다. 이 통렬함이 사회정치적 수탈의 고통과 어떻게 다르고, 그러나 또 어떻게 같은지 깨닫고야 말 것이다.


사회 변화를 포기한 개인의 각성은 영적 폭식이다. 개인의 각성을 거세한 사회 변화는 공적 폭력이다.


분리 이데올로기 지배집단의 이간질은 본디 이 둘커녕 개인의 각성도 사회 변화도 모두 불가능하게 죄다 갈가리 찢어 놓았다. 아서 프랭크는 여기에 가장 근본적인 꿰매기를 시작했다. 심각하게 아파서 경계에 설 수 밖에 없었으므로. 이는 대단히 축하받을 일이다. 그 이전 허다한 사람들이 그 경계에 섰으나 인식의 특권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가 바느질한 땅에 어떤 꽃이 피는지 설렘으로 둘러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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