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몸을 접수하면 의사들은 그 몸을 환자들의 삶에서 분리해 생각한다.·······의학은 통증이 삶에서 갖는 의미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통증은 질환의 증상일 뿐이다. 의학은 아픈 사람의 통증 경험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며 치료법이나 관리법에만 관심을 둔다. 의학은 분명 몸에서 통증을 줄여주지만, 그러면서 몸을 식민지로 삼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의학의 도움을 구하면서 맺는 거래 조건이다.(87쪽)


오랫동안 치료저항성수면장애에 시달리고 있는 중년 여성이 찾아왔다. 나라 밖 빼곤 그가 치료하러 가보지 않은 데는 없단다. 온갖 프로그램, 묘방을 찾아다니며 허탕을 치는 동안 점점 더 예민해졌다. 날로 강하게 집착하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잠이 잘 오는지 모르는 게 없어서 잠을 자지 못하는 기이한 풍경에 갇혀 피폐일로를 걷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말을 경청하면서 신중히 침 치료를 이어갔다. 수면장애를 무심히 놓아두고 몸과 마음 전체의 병리적 상태에 유념하여 탕약을 처방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두 가지 소식을 처방했다. 우선,


“잠을 제대로 대우해주십시오. 일하고 나서 하루의 끄트머리에 잠자는 게 아닙니다. 하루의 첫머리에 잠자고 일어나 일하는 겁니다. 소중하다면서 실은 홀대했던 잠에 미안한 마음을 지니셔야 합니다.” 다음,


“자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으십시오. 이 강박은 소유 관념에서 옵니다. 소유 관념은 사물화 작용입니다. 사물이 된 잠은 삶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입니다. 떨어져 나온 조각은 더 이상 삶의 현상이 아닙니다. 전체 삶을 믿고 맡기면 필요에 따라 잠은 오게 마련입니다.”


내 처방들에 그의 몸과 마음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애 최초로 불만 없이 치료를 받아들이고 적응해갔다. 어느 샌가 달콤한 잠이 그의 삶 한가운데로 스며들었다.


수면장애도 일종의 문명병이다. 백색문명에서는 잠도 장사商거래 대상이 되었다. 잠은 본디 우리 생명 현상 전체가 그러하듯 선사膳賜거래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선사의 잠은 장애의 덫에 흔하고 독하게 걸리지 않는다. 장애가 만연하고 엄혹한 것은 이 문명의 상거래가 극에 달했다는 증후다.


상거래는 돈이 되는 것을 우리 삶에서 분리해낸다. 통증은 진통기술의 과녁이 되니까 거래 대상으로 삼는다. 통증의 경험은 화폐화가 불가능하다. 어느 정도 가능하다 하더라도 경제성이 떨어진다. 백색의학이 손 댈 리 없다. 통증이 몸을 경이롭게 여기는 계기가 되고, 삶을 돌아보게 하는 동기가 되려면 선사거래에 맡길 수밖에 없다. 선사거래는 녹색의학의 몫이다. 녹색의학은 숙의를 포함할 수밖에 없다. 숙의는 의학의 끄트머리가 아니다. 첫머리다. 숙의는 소유 가능한 지식이나 기술이 아니다. 인생을 통틀어 나오는 경륜과 사랑이다.


우리 조상들은 고수레 전통을 지켜왔다. 산들에서 식사 하거나 굿 할 때, 자연 또는 신에게 감사를 표하고 돌려보내는 의미, 그러니까 선물로서 음식 일부를 먼저 덜어내 산들로 돌려보냈다. 고수레는 흔쾌한 나눔, 풍요로운 순환의 출발이다. 고수레 의학, 고수레 문명이 박두하고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12-13 0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13 1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초음파 검사 후 의사가 말했다. “이건 조사가 있어야겠네요.”·······‘나’는 의학의 ‘이것’이 됐다. 의사는 “환자 분 몸에 무슨 이상이 있는지 우리가 알아내 보겠습니다.” 정도로 말하지 않았다.·······

  “이건 조사가 있어야겠네요.”라는 말은 의사들이 조사를 할 것이라고 가정하지만, 의사들도 문장 밖에 익명으로 남는다. “있어야겠네요.”라는 표현은 조사를 필요로 하는 주체가 조사인 것처럼 들린다. 의사는 왜 이런 식으로 말해야 했을까?·······조사 과정에서 실수를 저질렀을 때 의사 개인에게 책임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실수는 어떤 과정의 일부일 뿐이고 ‘있어야 하는’ 것 중 하나일 뿐이다. 어쩌면 불확실성 때문만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는지도 모른다. 불확실성과 두려움을 마주했을 때 그 의사는 자신과 다른 의사들을 익명으로 만드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리고 나도 똑같이 익명이 되어야 했다.(84-85쪽)


이 땅 적폐 정치인들의 비열한 꼼수 화법 가운데 압권으로 꼽혔던 말이 ‘주어가 없다.’였다. 지금도 심심치 않게 다시 도마에 오른다. 유체이탈 어법과 더불어 책임을 도려내는 대표 협잡이다. 백색문명에서 협잡은 필수니 저들은 여전히 전가의 보도로 지니고 있다.


백색의자는 백색문명의 총아에 속한다. 총아답게 진단과 치료의 전 과정에서 기계와 화학합성물질을 전면에 세우고 자신들은 뒤로 빠진다. 기계와 화학합성물질은 과학의 권위를 전유하므로 우연히(!) 개입하는 의자의 실수까지 빨아들여 책임에서 초월한다. 수많은 인간들이 그렇게 죽어갔으며 죽어가고 있고 죽어갈 것이다. 아니, 익명이므로 그것들은 폐기되었으며 폐기되고 있고 폐기될 것이다.


백색의자 개인의 문제가 아님은 물론이다. 시스템의 문제다. 시스템은 백색의자들에게서 영혼을 가져가는 대신 자리와 돈을 보장해준다. 시스템을 상대로 싸워 이길 개인은 없다. 나는 백색의료시스템 아래서 아버지와 장모를 잃었고, 딸아이에게 깊은 상처를 남겨주었다. 분명한 오류와 실패가 있었으나 모두 덮였다. 주위 사람들은 대부분 의학 아닌 아픈 사람에게 잠시 주목하며 지나갔다. “어쩌다가 그런 병에·······.”


나는 시스템의 보호를 받을 여지도 의도도 없는 마을 의자다. 그나마 주류 백색 양의자들이 의자로 치지도 않는 녹색지향 한의자다. 내가 아픈 사람 앞에서 빠질 경우도 없고 그들을 익명화할 이유도 없다. 기계 하나 없이 눈과 귀와 코와 손으로 진단하고, 천연 약재 하나하나를 엄선해 처방하고, 복용 과정에서 들어오는 이의를 모두 받아 시정해야 하는데 어떻게 서로 익명성을 주고받겠는가. 거의 매일 오다시피 하는 초로 여성이 김장을 몇 포기 했는지 아는데 어떻게 서로 사물이 되겠는가. 알코올중독으로 죽은 아들 이야기를 하며 우는 어르신과 마음 나누는 가운데 시침을 해야 하는데 어느 틈에 ‘이것’이 튀어나오겠는가.


변방에서 백안시되며 살아가는 존재 그 자체가 시스템 안 사람에게는 익명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런 익명이라면 달게 받겠다. 내 이름으로 저들에게 건넬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나는 변방의 내 이름을 선물로 건네는 삶에서 경이를 빚어간다. 언젠가 어디선가 반드시 짝지 경이가 반짝였을 것이므로. 또는 언젠가 어디선가 반드시 짝지 경이가 반짝거릴 것이므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의학이 어떻게 몸을 치료하느냐는 질병 이야기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지만, 절대 이야기의 반 이상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나머지 반은 몸 자체다.········이 두 이야기, 즉 몸을 자신의 영토로 취하는 의학 이야기와 몸 자체에 경이로워하는 법을 배우는 이야기는 같이 나올 수밖에 없다. 질병은 두 이야기 모두이기 때문이다.(83-84쪽)


대화할 때 서로 사용하는 어휘들의 사전적 의미를 정확히 안다고 해서 소통이 제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제대로 소통하려면 말의 행간이나 그늘shade을 포착해야 한다. 말의 행간이나 그늘은 언어공동체가 삶의 경험을 함께 나누면서 품고 길러온 미묘한 느낌의 파동 같은 무엇이다. 미묘한 느낌의 파동 같은 무엇이므로 의식적으로 가르치고 배워서 감지할 수 없다. 이 감각의 장場에서 소외되면 사회생활은 무척 고단해진다.


바로 이런 고단함이 마음병과 교직된 한 사람과 숙의를 진행하고 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말에서 행간이나 그늘을 감지하는데 매우 취약하다. 중요한 대목에서 외부로 드러난 말뜻의 일부만 취함으로써 충분히 소통하지 못한다. 환유의 언어 감각으로 자신이 다른 사람을 분리해내면서도 대화가 끝나고 나서는 오히려 당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후적 피해의식은 그가 거의 언제나 을의 위치에서 지니는 것이므로 다른 사람에게 그다지 폐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의도적으로든 무심코든 갑이 환유를 일삼을 경우다.


의자가 작성하는 진료부가 질병 이야기의 전부로 행세하는 백색의학 현실은 환유가 어떻게 권력, 아니 폭력인지 증언하고 있다. 진료부는 질병 이야기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백색의자는 이 일부에 아픈 사람의 삶 전체를 우겨넣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 일부로써 아픈 사람의 존재를 전유한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일부를 아픈 사람의 존재에서 떼어내 거기다 존재 전부를 환원한다. 그 외에는 알 바 아니고 알 수 없다. 그런 그들이 아래와 같이 훤화한다.



이 무슨 개소린가. 순서를 뒤집어 ‘환자가 아프면 의사도 아프다.’ 했다면 물색없는 위선이라도 ‘에구, 애깨나 쓴다.’ 해주지. 자신들이 갑이란 사실을 대놓고 드러냄으로써 장구한 세월 동안 환유의 폭력에 절어 살아온 내력을 여실히 증명해준다. 자신들에게서 아픈 사람을, 질병을 가차 없이 분리해온 자들이 이해관계가 가로놓이자 뜬금없이 연속성을 내세운다. 그나마 아재개그만도 못한 사이비 경구를 들고 나선다. 이들은 안와전두엽이 손상된 위너임에 틀림없다. 위너의 자기애성 분리의 오만증후군은 진부하지만 깨알 같다. 스스로는 의사醫師, 그러니까 치료하는 스승이고 아픈 사람은 환자 患者, 그러니까 앓는 놈이라니 말이다. 


그들이 나라와 환자 걱정 앞세우며, 급여비율을 높이려는 정책에 반대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돈이다. 돈으로 환원된 세상에서 갑으로 군림하면서도 끊임없이 결핍감에 껄떡거리는 자신들의 모습을 전혀 볼 수 없는 수준이다.


이때 정녕 필요한 목소리는 아픈 사람들에게서 나와야 한다. 현재 백색의학의 식민지로 사는 사람은 물론 언제 어디서든 저들의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몸 이야기를 들고 나서야 한다. 갑들이 3만이나 모였다니 을들은 30만, 300만 모여서 의료민중의 경이로운 몸 이야기를 하며 걸어야 한다. 걸으면서 길을 찾아야 한다. 백색의학의 환유독재를 혁명하려는 녹색의학 은유민주 촛불을 들 때가 바로 지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대로 된 돌봄은 아픈 사람의 경험에서 다른 점이나 특별한 점을 인식하며, 그래서 돌봄을 받는 사람은 자기 삶이 귀중히 여겨진다고 느낀다. 우리에게 사람을 분류할 권리는 없지만 특권이 하나 있다. 바로 각자가 얼마나 고유한지 이해하는 특권이다. 돌보는 사람이 이 고유함에 마음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아픈 사람에게 어떻게든 전할 때 아픈 사람의 삶은 의미 있어진다. 나아가 아픈 사람의 인생 이야기가 돌보는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이루는 한 부분이 되면서 돌보는 사람의 인생도 의미 있어진다. 돌봄은 상대방을 이해하는 일에서 분리할 수 없으며, 이해가 쌍방향으로 일어나야 하듯 돌봄도 대칭을 이뤄야 한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나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다른 사람을 돌보며 우리는 자신 또한 돌본다. 그렇지 않다면 소진되거나 좌절하고 말 것이다.(80-81쪽)


내가 하는 일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이 보이는 가장 흔한 반응은 이 두 가지다. 마음 아픈 사람들과 허구한 날 함께 있으면 너도 아파지지 않느냐? 네가 아프면 누가 고치냐? 내 대답은 이 두 가지다. 나도 아프다. 아픈 사람들이 고친다. 내 대답을 들은 뒤에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백색의학은 부정하겠지만 우울병의 근원적 치유에 숙의는 불가결하다. 숙의의 터전은 공감이다. 공감의 본령은 전염이다. 전염의 경로는 이야기다. 이야기를 연결고리로 환자와 의자의 삶은 함께 짜인다. 함께 짜이는 과정에서 환자와 의자의 삶은 ‘다로 또 같이’ 달라진다. 달라짐, 이것이 다름 아닌 치유다.


치유는 치료와 돌봄을 포괄하는 너른 개념이다. 돌보는 사람을 겸하므로 숙의로 치유하는 의자는 의학 너머 삶을 산다. 의학 너머 삶을 사는 의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끊임없는 깨침의 계기다. 어느 한 깨침에 머무를 수 없다. 머무를 수 없는 까닭은 그가 마주하는 모든 사람이 고유한 아픔이기 때문이다.


각기 고유한 아픔을 치유하는 일의 성패를 칼 같이 판단할 수는 없지만 어떤 경우라도 깨침은 일어난다. 아픔의 사람, 사람의 아픔을 마주하는 일은 그 자체로 아픔이므로 즐거울 리 없지만, 웃을 일 구태여 찾지 않아도 삶이 싱그러운 것은 바로 전천후 깨침 때문이다. 전천후 깨침에 뭘 보탠들 사족 아니랴.


60년 남짓한 생의 여정을 돌아보면 참으로 훼절이 많았다. 극단의 고통, 극단의 결핍, 극단의 이별, 극단의 모멸, 극단의 실패로 점철된 세월이었다. 그 훼절을 뚫고 나아가기 위한 저항 또한 극단이었다. 극단들의 어름에서 숙의치유, 그러니까 돌봄의 숙명이 드러나 오늘에 이르렀다. 고유 우주들에 감사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질병은 상실을 불러온다. 상실은 통증처럼 몸 안에서 시작되고, 그 다음엔 밖으로 이동해 나가서 몸과 다른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영향을 준다.(62쪽)

  미래와 과거의 상실,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느낌의 상실, 평범한 기대의 상실은·······모두 애도되어야 했다. 아픈 사람이 무엇을 상실하느냐는 각자의 삶과 질병에 따라 다르다. 아픈 사람이 애도하기로 택한 것에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이 상실했다고 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이상해 보일 수도 있지만, 상실은 실재하며 존중받아 마땅하다.(66-67쪽)

  사람들이 애도와 관련해 겪는 문제는·······상실한 사람이 그만 슬퍼하길 주변에서 바라기 때문에 생긴다.·······사회는 아픈 사람과 돌보는 사람이 상실을 그리 대단치 않은 일로 정리하고 잊은 다음, 건강한 보통 사람들 사이로 돌아가라고 압력을 가한다.

  전문가들은 적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나는 애도가 ‘긍정하는 일’일 수 있다고 강조하고 싶다. 질병이나 죽음 때문에 애도하는 일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긍정한다. 상실이 그저 뒤돌아 나오면 되는 사건인 양 단순하게 다룰 때만 ‘신속한 적응’을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상실한 무언가를, 상실한 누군가를 존중하지 않는다. 아픈 사람이 그때껏 함께 살아온 자기 몸과 헤어질 때, 돌봄을 주던 사람이 돌봄을 받던 사람의 죽음으로 고통스러울 때 시간을 두고 충분히 애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충분히 애도한 뒤에야 한 사람은 상실을 통과하여 다른 편에 있는 삶을 발견할 수 있다.(68-69쪽)


지난 5월 18일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의 리뷰로 쓴 <슬픔의 ‘슬픔’에서 혁명이 시작된다>는 애도를 왜곡·억압하는 권력의 파렴치보다 애도를 오해하며 허투루 대하는 지식인의 피상성 문제를 지적했다. 애도는 어느새 유행어처럼 되었지만 여전히 그 의미가 제대로 새겨지지 않은 채 흘러 다닌다. 이 어두운 실재는 오늘 아서 프랭크의 본문에도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충분한 애도를 힘주어 말하는 저자의 의도에 누가 무슨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문제는, 상실을 슬퍼하는 것이 애도의 내용이라는 사실로부터 그 애도가 상실한 사람의 삶 전체에서 무엇인가 하는 질문의 답이 도출되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저자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긍정”하는 일이라고 한다. 저자가 더 이상의 언급을 하지 않으므로 내가 쟁에 부친다.


원문 단어를 모른 채 하는 일이라 조심스럽긴 하지만 일단 “긍정”이란 번역이 옳다고 전제하자. 긍정은 부정의 반대말이다. ‘틀리다(그르다)’에 맞서는 ‘맞다(옳다)’의 뜻을 담고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긍정한다는 말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맞다’고 평가한다는 말이다. 과연 애도가 ‘맞다’는 평가일까?


아니다. 특정 부분 불균형을 제외하고 저자는 일관되게 질병과 통증과 상실의 발생이 성격 또는 윤리적 판단 대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만일 애도가 ‘맞다’는 평가라면 ‘맞게 살아온 삶에 왜 이런 상실이 발생했을까?’ 하는 질문이 불가피하게 일어난다. 그 질문에 답하는 일은 실증적인 차원을 물리고 심리적 차원을 불러들인다. 이는 저자의 뜻과 배치된다.


생각건대 저자의 전체 논지로 보아 애도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긍부 평가 없이 그대로 “인정認定”하는 일이라 함이 타당하다.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좋다 싫다 구별하지 않은 채 현실 자체를 내 삶의 일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일이 바로 애도다. 질병과 통증과 상실을 내 삶에서 분리해내고서는 애도가 성립할 수 없다. 애도 없이는 “다른 편에 있는 삶”에 가 닿을 수 없다. 애도는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의 삶을 잇는 연속의 고리다. 애도는 질병과 삶, 나와 너, 개인과 사회를 잇는 연속의 고리다. 그 연속의 고리는 “인정”이 피워내는 꽃이다. “인정”이 피워내는 꽃은 슬프기 때문에 아름답다.


저자가 미처 여기까지 생각하지 못한 것인지, 번역자가 그런 것인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서구 사유가 이런 부분에 취약하며, 그 서구의 자장 안에 있는 우리사회 주류 역시 그렇다는 사실이다. 오늘도 세월호사건 유가족은 애도를 금지 또는 유보당한 채 잠 못 이루는데 지겹다 애도 따위 그만하고 적응하라 종용하는 무리가 훤화하고 있다. 촛불이 세월호사건 수괴를 권좌에서 끌어내려 감옥에 넣었지만 진실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있다. 아이들을 가슴에 묻은 채 1332일째 진실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애도 길이 하루빨리 열리기를 기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