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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평점 :
질병은 상실을 불러온다. 상실은 통증처럼 몸 안에서 시작되고, 그 다음엔 밖으로 이동해 나가서 몸과 다른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영향을 준다.(62쪽)
미래와 과거의 상실,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느낌의 상실, 평범한 기대의 상실은·······모두 애도되어야 했다. 아픈 사람이 무엇을 상실하느냐는 각자의 삶과 질병에 따라 다르다. 아픈 사람이 애도하기로 택한 것에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이 상실했다고 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이상해 보일 수도 있지만, 상실은 실재하며 존중받아 마땅하다.(66-67쪽)
사람들이 애도와 관련해 겪는 문제는·······상실한 사람이 그만 슬퍼하길 주변에서 바라기 때문에 생긴다.·······사회는 아픈 사람과 돌보는 사람이 상실을 그리 대단치 않은 일로 정리하고 잊은 다음, 건강한 보통 사람들 사이로 돌아가라고 압력을 가한다.
전문가들은 적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나는 애도가 ‘긍정하는 일’일 수 있다고 강조하고 싶다. 질병이나 죽음 때문에 애도하는 일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긍정한다. 상실이 그저 뒤돌아 나오면 되는 사건인 양 단순하게 다룰 때만 ‘신속한 적응’을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상실한 무언가를, 상실한 누군가를 존중하지 않는다. 아픈 사람이 그때껏 함께 살아온 자기 몸과 헤어질 때, 돌봄을 주던 사람이 돌봄을 받던 사람의 죽음으로 고통스러울 때 시간을 두고 충분히 애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충분히 애도한 뒤에야 한 사람은 상실을 통과하여 다른 편에 있는 삶을 발견할 수 있다.(68-69쪽)
지난 5월 18일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의 리뷰로 쓴 <슬픔의 ‘슬픔’에서 혁명이 시작된다>는 애도를 왜곡·억압하는 권력의 파렴치보다 애도를 오해하며 허투루 대하는 지식인의 피상성 문제를 지적했다. 애도는 어느새 유행어처럼 되었지만 여전히 그 의미가 제대로 새겨지지 않은 채 흘러 다닌다. 이 어두운 실재는 오늘 아서 프랭크의 본문에도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충분한 애도를 힘주어 말하는 저자의 의도에 누가 무슨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문제는, 상실을 슬퍼하는 것이 애도의 내용이라는 사실로부터 그 애도가 상실한 사람의 삶 전체에서 무엇인가 하는 질문의 답이 도출되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저자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긍정”하는 일이라고 한다. 저자가 더 이상의 언급을 하지 않으므로 내가 쟁에 부친다.
원문 단어를 모른 채 하는 일이라 조심스럽긴 하지만 일단 “긍정”이란 번역이 옳다고 전제하자. 긍정은 부정의 반대말이다. ‘틀리다(그르다)’에 맞서는 ‘맞다(옳다)’의 뜻을 담고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긍정한다는 말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맞다’고 평가한다는 말이다. 과연 애도가 ‘맞다’는 평가일까?
아니다. 특정 부분 불균형을 제외하고 저자는 일관되게 질병과 통증과 상실의 발생이 성격 또는 윤리적 판단 대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만일 애도가 ‘맞다’는 평가라면 ‘맞게 살아온 삶에 왜 이런 상실이 발생했을까?’ 하는 질문이 불가피하게 일어난다. 그 질문에 답하는 일은 실증적인 차원을 물리고 심리적 차원을 불러들인다. 이는 저자의 뜻과 배치된다.
생각건대 저자의 전체 논지로 보아 애도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긍부 평가 없이 그대로 “인정認定”하는 일이라 함이 타당하다.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좋다 싫다 구별하지 않은 채 현실 자체를 내 삶의 일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일이 바로 애도다. 질병과 통증과 상실을 내 삶에서 분리해내고서는 애도가 성립할 수 없다. 애도 없이는 “다른 편에 있는 삶”에 가 닿을 수 없다. 애도는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의 삶을 잇는 연속의 고리다. 애도는 질병과 삶, 나와 너, 개인과 사회를 잇는 연속의 고리다. 그 연속의 고리는 “인정”이 피워내는 꽃이다. “인정”이 피워내는 꽃은 슬프기 때문에 아름답다.
저자가 미처 여기까지 생각하지 못한 것인지, 번역자가 그런 것인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서구 사유가 이런 부분에 취약하며, 그 서구의 자장 안에 있는 우리사회 주류 역시 그렇다는 사실이다. 오늘도 세월호사건 유가족은 애도를 금지 또는 유보당한 채 잠 못 이루는데 지겹다 애도 따위 그만하고 적응하라 종용하는 무리가 훤화하고 있다. 촛불이 세월호사건 수괴를 권좌에서 끌어내려 감옥에 넣었지만 진실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있다. 아이들을 가슴에 묻은 채 1332일째 진실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애도 길이 하루빨리 열리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