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할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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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여 넘어진 나무가 마지막 꽃송이를 맺었다. 세월호 엄마의 눈물 같다. 하마 4년이 흘러갔다. 그저 사고가 아니었다. 다만 구조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기획된 것이었다. 진실이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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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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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강을 읽은 적이 없다. 맨부커상 수상 열풍이 매체와 서점가를 휩쓸고 있을 때도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까닭은 모른다. 미국으로 나가기 하루 전인 4월 1일, 시집 한 권 들고 갈 요량으로 교보에 들렀다. 수없이 그냥 지나쳤던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가 덥석 손목을 잡는다. 이상하게도 망설임 없이 나는 동행을 결정했다. 까닭은 역시 모른다.


비행기에서 단숨에 읽고 나는 바로 ‘서랍에 시집을 넣어두었다.’ 단 두 편의 시만 남기고.


<저녁의 소묘2>                                <저녁의 소묘5>


목과 어깨 사이에                               죽은 나무라고 의심했던

얼음이 낀다.                                     검은 나무가 무성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게 부서지는 걸 지켜보고 있다.            지켜보는 동안 저녁이 오고


이제는                                            연둣빛 눈들에서 피가 흐르고

더 어둡다                                        어둠에 혀가 잠기고


손끝으로 더듬어 문을 찾는 사람을          지워지던 빛이

손끝으로 느끼면서 알지 못한다              투명한 칼집을 그었다

  

그가                                               (살아 있으므로)

나가려는 것인지                                그 밑동에 손을 뻗었다

(어디로) 들어가려는 것인지


한 강은 이 두 편의 神詩만으로 내게 벼락같이 왔다. 나는 네바다 사막 먼지가 아스라이 내려다보이는 라스베이거스 한 호텔 26층 창가에 앉아 내내 이 두 편의 시만 되풀이해서 읽다 돌아왔다.


이 두 시의 studium에 입 댈 처지는 아니다. 나는 다만 이 두 시의 punctum을 말할 따름이다. <저녁의 소묘2>는 오늘 여기 내 깊은 저녁 상황의 증인으로 서 있다. <저녁의 소묘5>는 오늘 여기 내 깊은 저녁 상황의 예언자로 서 있다. 예언자는 예언적 과거를 나지막이 읊조린다.


밑동에 손을 뻗었다.


종자신뢰를 정색하고 톺아둠으로써 바꾸지 않기에 바뀌는 경이로운 삶의 “투명한 칼집을 그었다”고 선포한다. 췌언의 여지가 없다.


돌아와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를 다시 연다. 들어갈 때 알아보지 못했으나 진즉부터 초입에 앉아 있던 신시 한 편을 나올 때 기어이 알아보았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나는 밥을 먹었다. 늘 같아서 찰나마다 다른 밥을 먹었다. 늘 같아서 찰나마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힘을 얻었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를 이제 덮는다. 덮는다고 어디 덮일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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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죽음과 살갗을 맞대는,

그런 것이다 




명, 것은 죽음의 행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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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우리 생명공동체에게 카이로스 통증을 일으켰던, 아직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크로노스 통증이 되어버린, 그 기억의 지표에서부터 나는 죽기 살기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4년 동안, 3백 쪽짜리 책 50권 분량을 썼다. 책으로 출간될 상품성 갖춘 것이 아니었으므로 철저하고도 처절한 익명의 글쓰기였다. 어깨가 ‘나갔다’.


처음에는 미세한 국소적 근육의 존재감으로 시작했다. 일시적인 현상이라 여겨 그대로 놔두었다. 시나브로 영역이 확대되면서 삼각근 전체로 통증이 일어나 번져갔다. 통증의 결과 겹도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마침내 견갑대 전체에서 승모근으로, 팔과 손으로 스무 가지가량 통증이 찰나마다 갈마들며 날뛰기 시작했다. 문제 삼아야만 할 시점에 도달했다.


무엇보다 먼저 통증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는 일에 주의를 기울였다. 통증이 어떻게 일어나 변하고 잠잠해지는지 관찰했다. 몸이 어떻게 대응하는지 조용히 지켜보았다. 일어날만해서 일어난 통증이므로 함부로 서둘러 진통치료를 하지 않고 기다렸다. 물론 통증은 사라지지 않고 점점 더 심해졌다. 잠자다가 깨는 일이 차츰 잦아졌다.


몸의 자기치유력을 존중하는 것만으로는 통증 사건 전체를 경험할 수 없다고 판단한 때부터 나는 조금씩 몸을 돕기 시작했다. 손으로 두드리고 문지르고 주물렀다. 자다가 아파서 깨면 일어나 스스로 침을 놓았다. 그러면서 통증의 곡절과 전언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왜 왼쪽에서 시작되었나? 어깨는 몸에서, 삶에서 무엇인가? 몸은 마음과 어떤 관계인가?


숱한 상념들이 일어나고 스러졌다. 단계마다 새로운 깨달음으로 질적 차이를 지닌 시간이 흘러갔다. 마음 문제에 치우쳐 있는 내 삶의 경사, 개인의 삶에서 짊어져온 십자가의 과중을 거쳐, 이윽고 공적 참여를 위한 익명적 희생에 이르자 통증 사건이 전모를 드러냈다. 이 깨달음은 통증을 제거하는 묘약이 아니라 삶의 변화를 가리키는 이정표였다.


40년 전 신체 일부를 생으로 잘라내는 카이로스 통증과 급격히 조우하면서 내 인생은 격변의 길로 들어섰다. 그 통증은 제거할 수 없는, 해서는 안 될 생명의 징조였다. 그 징조에 감응함으로써 나는 40년 동안의 인생 제2기 la Critique 부정否定과 파괴의 시대를 견뎌냈다. 이제 나는 100일 동안 크로노스 통증을 겪으면서 전혀 다른 징조를 읽어낸다.


제거할 수 있는, 해야 할 통증과 직면하면서 마침내 인생 제3기 la Naïveté seconde 부정不定, 그러니까 무애자재의 시대로 넘어가는 변화를 예감하고 있다. 생명과 그 감각을 갉아먹으며 부단히 엔트로피를 끌어올리는 통증을 분별하여 선선한 손길로 털어버리는 노년의 운수雲水야말로 대大자유의 삶일 것이다. 어찌 하면 선선한 손길을 지닐 수 있을까?


이 100일의 끄트머리 닷새 동안 나는 낯선 나라에 머물렀다. 도착한 날 한밤중에 나는 홀연히 잠에서 깨어났다. 아내의 숙면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욕실을 거쳐 화장실로 들어갔다. 빛이 완벽하게 차단되는 공간이었다. 완벽한 어둠 속에서 나는 어둠을 응시했다, 어둠은 좀처럼 물러나지 않았다. 아, 그렇구나. 응시한다고 해서 물러날 어둠이 아니다!


어둠은 어떻게 물러나는가. 내 몸에서 나오는 빛을 받고서야 물러난다. 인간의 몸에는 세포마다 광자photon가 있다. 완벽한 어둠 속에서 이치를 따라 기다리면 몸이 내는 빛으로 말미암아 주위 어둠이 이치만큼 물러난다. 기계적인 즉각 반응이 아님은 물론이다. 응시의 힘은 더더욱 아니다. 나는 그 동안 응시에 마법적 힘을 부여해왔다. 잘못이다.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인다고 해서 통증이 물러나는 것은 아니다. 기작과 의미를 깨닫는다고 해서 통증이 물러나는 것은 아니다. 몸 전체에 깃들어 있는 생명력을 일깨우고 북돋워 반생명적 통증에 맞서야 물러난다. 물러날 때까지 손을 써야 한다. 이것이 선선한 손길이다. 선선한 손길이 삶에서 엉긴 열을 내려 가벼이 흐르게 한다.


백일통오百日痛悟는 결국 손으로 귀결되었다. 손은 마음이 몸의 마음이라는 진실을 확인해주는 상징이다. 인간인 한 이 손을 떠날 수 없다. 손에 깃드는 진실을 터득하기까지 통증에 예의를 갖추려고 지난 100일의 어느 시점부터 나는 글 읽기와 쓰기를 멈추었다. 기존 삶을 멈추고 새로이 감지한 내 삶의 어떤 경이로움에 가만 손대어 본다. 덤덤하게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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