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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 푸른푸른 ㅣ 창비청소년시선 14
김선우 지음 / 창비교육 / 2018년 5월
평점 :
“일상이라는 말이 낯설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가슴이 막혀온다. 어린 별들이 떴다. 울고 또 운다. 비참하고 끔찍한 일을 참사라고 한다. 이 말은 행위의 주체를 숨긴다. 다시 쓴다. 세월호에서 학살이 일어났다. 용산의 망루에서 사람들이 살해당한 것처럼, 세월호에서 승객들이 집단으로 수장 당했다. 침몰 당시 승객들은 ‘목숨 가진 존재’인 생명이 아니라 화물 취급을 당했다. 구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음에도 생명에 대한 감각이 완전히 마비된 자들에 의해 사람들이 죽었다.
괴물의 탄생이 새로운 일은 아니다. 유신시대 이후 개발독재의 광풍을 거치며 ‘경제 부흥’이 기득권층의 만능열쇠가 된 이래 이제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은 거의 언제나 땅에 뿌리박고 사는 민중의 몫일 뿐이다. 이윤의 추구와 권력의 유지보다 중요한 게 없는 이 나라 기득권자들의 행보가 현실세계를 점차 지옥도로 만들고 있다.
언제나 말할 때는 지금이며, 행동할 때는 지금이다. 선거하고 세금 내는 머릿수에나 국민이 필요할 뿐 정작 국민의 안위에 관심 없는 ‘그들의 국가’ 따위가 필요한가. 필요 없다. 필요한 건 생명이 귀하게 존중받는 안전한 사회다. 사람이 행복해지는 ‘우리들의 나라’다. 무기력해지지 말자. 새로운 판을 짜야 한다. 사람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손을 잡자. 울고 있는 옆 사람과 손잡자. 붉은 밤하늘에 새로 생긴 어린 별자리. 옹기종기 손잡은 노랑리본자리에서 우리 아이들이 내려다보고 있다.”
2014년 5월 한 일간지에 김선우 시인이 쓴 글이다. 그 노랑리본자리 아이들이 한 시인의 삶과 문학관을 바꾸어 놓았다. 시인은 말한다.
“청소년으로 연령대를 특정한 시집은 내 몫이 아니라고 여겨왔다. ‘청소년 시’라는 이름으로 시집이 나와도 괜찮다면 그 주체는 청소년 당사자이가나, 청소년과 함께 일상의 희로애락을 나누는 교사들, 혹은 청소년기 아이를 둔 부모들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그랬던 내가 청소년시선‘ 시리즈 중 한 권으로 청소년시집을 내게 되다니. 이 변화를 만든 것은 약속 때문이다.
안산 단원고 교정에서 약속을 했었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텅 빈 운동장에 아주 많은 목소리들이 떠다녔다. 떠나고 없는 아이들과 친구들의 부재를 감당하며 학교에 다녀야 하는 아이들이 모두 아팠다. 잃어버린 아이들과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 아이들 모두를 위해 우리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무엇부터 해야 하나.
그해 봄 이후, 내 일상의 동선에 비교적 큰 변화가 생겼다.
이전에는 웬만하면 피하던 게 중고등학교 강연이었다.·······
더는 피하지 말자고 마음먹었다. 아이들을 만나러 와달라는 요청이 오면 다른 어떤 곳보다 먼저 일정을 잡았다. 노랑리본자리 아이들에게 한 약속 때문이었고, 스스로에게 부과한 숙제이기도 했다.
그렇게 삼년이 흐르는 동안, 내 생애에 가장 많은 십대들을 만나면서, ‘청소년과 함께 읽을 시집’을 써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였다.”(110-112쪽)
받아들인 결과가 『댄스, 푸른푸른』이다. 『댄스, 푸른푸른』은 다만 한 권의 시집이 아니다. 한 시인의 변화된 인생이다. 한 시인이 온 몸으로 살아낸 한 시대의 사건이다. 한 시대의 사건으로 빚어낸 역사의 길목 하나다.
이 『댄스, 푸른푸른』이 나온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오늘, 광화문 교보 신간 수평 진열대에서는 볼 수가 없다. 서가 식 수직 진열대 속 녹색 띠 하나로 숨죽이고 있다. 내 책들이 그렇게 됐을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천하시인 김선우가! 아니! 그보다 김선우가 만일 성인시집을 냈어도 이랬을까?
나는 이 대목에서 소름끼치는 한 장면을 떠올렸다. 『중용416』의 <제8장: 사소한 것이 위대하다>(2016.4.25.) 일부를 가져온다.
“그러면 대체 무엇은 작으며 무엇은 클까요? 우리의 구체적 현실에서 좀 더 결곡하게 따져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결정적 중요성을 지닌 주제입니다.
세월호사건, 이것으로 국가가 목숨을 앗은 사람은 304명입니다. 그 가운데 250명, 그러니까 대부분이 만 열일곱 살의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입니다. 이런 질문을·······던져보겠습니다.
“만일 그 250명이 어른들이었다면 그렇게 죽였을까?”·······
아이들·······이니 그들의 생명 가치를 ‘작은’ 것으로 여겼음이 분명합니다. 이 ‘작은’ 것을 희생시켜 ‘큰’ 것을, 그러니까 정권을 보위해야 한다는 계산이 섰으므로 실행하였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서울의 뜨르르한 어느 교회 목사는 대놓고 그런 취지로 설교하여 공분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살 떨리게 떠올릴 수밖에 없는 또 다른 한 사건이 있습니다.
“호송열차를 타고 방금 도착한 사람들이 가스실에 빽빽이 들어찬 뒤 죽임을 당했다. 특수부대는 매일같이 하는 끔찍한 일을 하고 있다. 얽히고설킨 시체들의 몸을 풀어 호스의 물로 씻기고는 화장터로 시체들을 운반한다. 그러나 맨 밑바닥에서 그들은 아직 살아 있는 소녀를 발견한다.·······
의사가 불려오고 주사를 놓아 소녀를 소생시킨다.·······그 순간, 죽음의 시설을 담당하는 SS대원들 중 한 명인 무스펠트가 다가온다. 의사가 그를 한쪽으로 불러 사건을 설명한다. 무스펠트는 망설이다 결정한다. ‘안 된다. 소녀는 죽어야 한다. 나이가 좀 들었다면 일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녀는 좀 더 분별력이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침묵하도록 그녀를 설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겨우 열여섯 살이다.’ 결국 그녀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제 손으로 죽이지 않고 자신의 부하를 불러 소녀의 목덜미를 쳐서 죽인다.”
프리모 레비는 이탈리아 국적의 유대인으로 나치의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사람입니다. 위 내용은 그가 경험한 사실을 토대로 쓴 책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63-65쪽 일부를 인용한 것입니다. 두 번 죽임당하는 이 소녀 이야기는 참으로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에 휩싸이게 합니다. 이 감정은 같은 또래 소녀와 소년 250명의 죽음을 지켜보던 2014년 4월 16일, 그 때의 것과 그대로 포개집니다.
우리는 정색하며 다시 묻습니다.
“이 국가는 저 어린 국민 250명을 왜 죽였는가?”
물론 국가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아니, 사건 자체를 부정합니다. 단순 교통사고라고 우깁니다. 그러나 그 배는 ‘국가 보호 장비’로 등록된 배였습니다. 국정원의 지시 감독을 받았습니다. 명백한 국가의 판단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한 나치의 대답으로 우리 국가의 대답 일부를 대신합니다.
“안 된다. 소녀와 소년들은 죽어야 한다. 나이가 좀 들었다면 일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들은 좀 더 분별력이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그들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침묵하도록 그들을 설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겨우 열일곱 살이다.”
이것이 죽인 이유라면 실로 엄청난 반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작은, 하찮은, 사소한 생명이어서 대놓고 죽였다는 표면적 판단의 심층에 오히려 더 큰, 위험한, 무거운 증거능력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국가가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는 데 어른 보다 이 아이들이 훨씬 더 감당하기 힘든 상대라는 판단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국가는 분명한 기억을 지니고 있습니다. ‘분별력이 없어’ 침묵하지 않았던 저 2008년 촛불소녀들 말입니다. 그 때 국가는 그 소녀들이 분별력이 없어 낭설에 휘둘리는 것이며 북한의 지령과 자금을 받아 움직였다고 마녀사냥을 자행했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아침 세월호사건, 그 생사의 갈림길에 선 아이들도 ‘철없어서’ 나오지 못했다고 국가는 다시 뒤집어씌웠습니다(세월호청문회에서 해양경찰이 한 말). 그 때 죽이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마침 잘됐다는 식의 대응입니다. 물론 철없는 아이들이므로 침묵하지 않고 자기들이 한 짓을 증언·고발할 것이기 때문에 죽였다는 사실을 그렇게 은폐하는 것입니다.
사소한 것이 위대합니다. 이 아이들의 죽음이 위대한 것으로 길이 남으려면 반드시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 진실마저 바다에 빠뜨리고서야 어찌 우리 어른이 ‘큰’ 사람일 것입니까.”
김선우로도 세월호 아이들로도 청소년 시, 아니 청소년 무시, 아니 청소년 무시 살해의 벽을 넘어설 수 없는 거냐고 물으면 억지인가, 무리인가.
김선우 시인은 『댄스, 푸른푸른』을 보내주면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한의원에 치료 받으러 오는 청소년들 있으면 한편씩 적절한 시 읽어주시길·······. 아픈 아이들 너무 많아 아픈 어른이 쓴 청소년시집이니·······.”
아픈 아이들이 너무 많아 아픈 어른이 쓴 시에 아픈 아이들이 접근조차 하지 못하는 현실은 얼마나 참담한가. 바로 이 순간순간 아이들은 다시, 거듭 살해당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리뷰가 아니다. 이런 글을 쓰게 되리라 꿈에도 그려본 적이 없다. 『댄스, 푸른푸른』이라는 시집 자체를 위해 아픈 마음을 펼쳐본다. 부디 이 땅의 아이들이 너무 아프지 않기를! 부디 이 땅의 부모들이 아이들을 더는 무시하지 않기를! 부디 이 땅의 어른들이 아이들을 더는 살해하지 않기를!
『댄스, 푸른푸른』이 들불처럼 번져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