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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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은·······프로젝트에서 출발한다.(141쪽)


이자 기반 시스템에서 계급전쟁은·······불가피하다.·······화폐시스템이 근본적인 변화를 거치기 전까지, 계급전쟁은 점점 심화될 것이다.(138쪽)


개인의 채무 이행 거부는 법 제도와 국가의 적법성이 무너지기 시작할 때·······가능한 일이다. 그런 붕괴는 돈과 재산이 사회적 관습일 뿐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상징의 관습적 해석에 근거한 모든 것을 빼고 나면, 세계 최고 부자·······도 나와 다를 바 없다. 그의 집이 내 집보다 클지 몰라도, 문서상으로 그 집이 그의 것이라 해도, 그 또한 관습의 문제일 뿐이다.(140쪽)


프로젝트는 기획이며 사업이다. 이자 기반 화폐시스템에서 빚은 돈 없는 사람의 필요를 따라 생기지 않는다. 돈 있는 사람이 토건으로 일으킨다. 말이 좋아 프로젝트다. 음모가 적실한 표현이다. 계급전쟁의 불가피성을 머금으니.


법 제도와 국가의 적법성은 사실상 허울뿐인지 오래다. 법과 국가가 정의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빚을 일으키는 음모 과두와 그 주구들뿐이다. 이미 붕괴된 적법성이 그나마 지탱되고 있는 것은 마취 효과 때문이다.


마취에서 깨어난 사람 있어, “돈과 재산이 사회적 관습일 뿐이라는” 진실을 받아들인다. “상징의 관습적 해석”을 넘어간다. 채무의 사슬에서 자유로워진다. 계급전쟁의 서막이거나 기존 화폐시스템에 종언을 고하는 조종이거나.


어디 연착륙이 쉽겠나. 찰스 아이젠스타인이 인류사적 현 단계를 한 인간의 일생에 빗대어 “성장의 한계, 미성년기의 끝에 다다른 것처럼 보인다.”(112쪽)고 한 말이 단순한 비유가 아닐진대 진통은 당연히도 엄청나게 크지 않겠나.


그 누구라도 무서워하는 파국. 현실에서 보면 딱 맞다. ‘개’망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 죄악을 씻으랴. 안타까움에서 덜어보려 한다면 길은 하나다. 시기를 앞당기는 거다. 앞당기려면 버티지 말아야 한다. 버티지 말고 놓아야 한다. 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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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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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게 말해 이자의 논리는 이렇다. “나는 돈을 가졌고 너는 돈이 필요해. 그러니까 내가 돈을 쓰게 해주는 대신 이자를 청구하겠어. 왜냐하면 나는 돈이 있고 너는 돈이 없으니까.” 부의 양극화를 피하려면 이자율이 경제성장률보다 낮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단지 돈이 있다는 이유로 생산자본의 평균 한계효율보다 빠르게 부를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생산보다 소유를 통해 더 빨리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거의 항상 그렇다. 경제성장 속도가 빨라지면 관계당국이 이자율을 더 올리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 방지책이라고 하지만, 부를 계속 늘리고 돈 있는 사람들의 힘을 더 키우는 장치다. 재분배 정책 없이는, 불황은 물론 호황에도 부의 집중이 심화될 수밖에 없다.(134-135쪽)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펼친 주장과 같다.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높아 자본가는 항상 더 높은 소득을 올리므로 부의 불평등이 가속화된다.”


2015년 이후 상위 1%의 부가 나머지 99%의 부를 넘어섰다고 한다. 상위 8명의 부가 하위 50%인 36억 명의 부와 맞먹는다는 통계자료도 있다. 이 세계 현상은 각각의 국민국가 화폐시스템에서 일어나는 일의 단순한 집합일까? 물론 아니다. IMF·IBRD·WTO 삼위일체 유일신이 창조한 금융체제가 주도하는 초국적 단일 현상이다. 그 유일신은 금융제국주의를 인류 최초로 건설한 USA의 아바타다. USA를 섭리하는 지성소는 월스트리트다. 월스트리트는 ‘부르주아지의 일상사를 처리하는 위원회’다.


이 위원회가 과연 “재분배” 개념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재산·소득·권리 일부를 많이 가진 계층에서 적게 가진 계층으로 이전하는 것을 그들은 공산주의라 반발하거나, 미쳤다고 조롱할 테니 말이다. 조롱 받으며 미친 짓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개벽 시대에 인식론적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복된 인식은 다름 아닌 선물. 선물의 삶으로 재분배를 시작한다. 묻는다.


“내가 바로 이 순간 선택할 선물의 삶은 무엇인가?”


알므로 신뢰한다. 거대한 모래 산을 무너뜨리는 힘은 작디작은 모래 알갱이 하나가 자리를 바꾸는 데서 생긴다는 진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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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돈의 모순에 걸려 있다. 본래 돈은 감사와 신뢰의 징표고, 선물과 필요를 연결해주는 매개체며, 돈이 아니면 아무 교류도 없을 사람들 간의 교류를 돕는 촉진제로서 우리 모두를 풍족하게 만들어주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현실의 돈은 불안과 빈곤을 가져왔고, 자연과 문화적 공유자원을 고갈시켜왔다. 왤까?


그 원인을 찾으려면 화폐시스템의 핵심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원인은 돈이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방식에 내재해 있으며, 그 시스템의 중심에 이자놀이가 있다. 이자놀이는 선물과 정반대의 것이다. 필요 이상으로 소유한 사람이 그것을 남과 나누는 대신, 소유의 힘을 이용해 더 많이 얻으려 하기 때문이다.(118쪽)


문제는 이자에서 비롯한다. 이자를 낳는 빚은 언제나 새로운 돈을 수반하기에, 빚의 총액은 언제나 돈의 총액을 넘어선다. 돈의 부족은 우리를 서로 경쟁하게 만들고, 끊임없는 구조적 결핍에 시달리게 만든다.(127쪽)


이자 기반의 빚 시스템에서 신용 거래는·······현재의 상품과 ‘더 많은’ 미래의 상품을 교환하므로, 우리가 ‘충분한’ 상태로 되는 날은 결코 오지 않는다. 빚을 갚거나 단지 살기 위해, 우리는 남이 가진 기존의 부를 빼앗거나·······공유자원에서 ‘새로운’ 부를 창출한다.(128쪽)


불교의 <중아함경>을 제외하면 고대 종교나 철학 사상 대부분은 이자를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화폐시스템의 경제적 본질을 통찰하고 내린 결론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도 그럴 것이 자본주의 등장 이후 몇몇 이슬람국가 말고는 이자 자체를 문제 삼는 종교는 없으니 말이다. 불교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모든 종교도 이제야말로 돈과 이자 문제를 놓고 근원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멸절의 조짐 앞에서 이토록 무력한 종교라면 마지막 승부수를 띄우지 않는 한 구원과 깨달음을 더 이상 전파할 수 없으리라.


이슬람국가, 예컨대 말레이시아가 이자 자체를 금지하는 것에 대해 개신교 사람들은 극단적이라고 말한다. 극단이란 중용을 잃고 치우친 상태다. 이자는 “필요 이상으로 소유한 사람이 그것을 남과 나누는 대신, 소유의 힘을 이용해 더 많이 얻으려” 하는 수탈 수단이다. 수탈의 정도를 낮춘다고 중용이 되나. 수탈 자체를 멈추어야 중용이다. 수탈을 멈추면 “정반대의 것”이 경제를 이끈다.


선물


선물을 주고받는 경제는 “우리를 서로 경쟁하게 만들고, 끊임없는 구조적 결핍에 시달리게” 하지 않는다. “남이 가진 기존의 부를 빼앗거나·······공유자원에서 ‘새로운’ 부를 창출”하게 하지 않는다. “감사와 신뢰”의 세계를 다시 펼친다. “아무 교류도 없을 사람들 간의 교류”를 촉진해 “우리 모두를 풍족하게” 하는 길에 새삼 세운다.


모순을 푼다.


* 번역 문제-본디 이자놀이는 고리대금으로, 모순은 역설로 번역되었는데 인용자가 바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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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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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말해서 음모론은 인간이 그 복잡한 시스템을 성공적으로 조종한다고 볼 만큼 인간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있다.······

  게다가 대개 반증 불가능한 음모론은 실증적 호소라기보다 심리적 호소에 훨씬 더 가깝다. 음모론은 우리의 원초적 분노를 이용하고, 그 분노를 쏟아낼 대상을 찾아 비난하고 증오하게 만드는 사악한 매력을 지녔다. 하지만 수많은 혁명가들이 과두제를 전복하면서 깨달았듯이, 우리는 증오 대상을 잘못 잡고 있다.(115-116쪽)


우리는 세계 파괴에 연루되는 일을 최소화할 수는 있어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이 사회에 사는 것만으로 세상의 악에 기여한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완전히 고립된 자급자족의 계획공동체를 갈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무슨 도움이 될까?·······사회악에서 결백함을 증명하려는 개인적 욕망은 백 평도 넘는 주택에 설치한 태양열전지판과도 같은 일종의 물신fetish이다.(114쪽)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우리의 이데올로기, 신념체계, 무의식의 그림자들이 만들어낸, 마치 음모처럼 보이는 동시발생의 그물망·······이다. 말하자면 음모를 꾸미는 사람 없는 음모며, 모두가 하수인이지만 하수인을 부리는 사람은 없·······다.(115쪽) 진짜 범인·······, 막후에서 엘리트층을 조종하는 진짜 지배자는 바로 화폐시스템 자체다.(116쪽)


지식인이라면 모름지기 음모론에 휩쓸리는 따위 짓은 하지 않는다. 그렇다. 그러면 음모론을 일축하고 나서는 무엇을 해야 하나? 음모론과 의문 사이에서 많은 지식인이 국가범죄·사회악의 방조범으로 전락한다. 음모론의 곡절을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이다.


허다한 음모론의 전범典範은 거대유일신교다. 창조신 관념이야말로 음모론의 핵심이다. 국가, 남성가부장, 성인, 백인, 이성애자, 비장애인들이 모두 창조신에 빙의되어 크고 작은 음모의 정상에 군림한다. 대한민국이라면 영남, 삼성, 조·중·동, 개신교, 판검사, 사학재단, 서울대, 육사를 아우르는 매판·독재·분단세력이 음모의 정상에 자리 한다. 음모가 아니고서는 이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음모는 실재다.


음모는 분리문명 시대에서 필연이다. 분리문명 시대의 분리는 상하 분리다. 상하 분리의 목적은 수탈적 지배다. 수탈적 지배는 음모 없이 불가능하다. 음모론은 실제 음모 여부를 가지고 나이브하게 논해서는 안 되는 주제다. 찰스 아이젠스타인이 음모론을 물리치는 실질적 이유를 톺아볼 필요가 있다.


찰스 아이젠스타인은 현대문명을 변혁하려 할 때 취해서는 안 되는 두 극단을 경계한다. 하나는 음모론에 이용당하는 세속 혁명이다. 다른 하나는 “완전히 고립된 자급자족의 계획공동체”다. 양자는 모두 분리를 전제로 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후자는 음모론과 전혀 무관해 보이지만 음모가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을 뿐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분리라는 프레임 안에서는 아무리 완벽주의를 시도해도 헛일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어찌 하면 음모를 돌파할 수 있나? 분리문명의 세상에는 부단히 음모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음모란 없다고 못 박는 것은 분리문명의 화폐시스템이 펼치는 전략 가운데 하나다. “동시발생의 그물망·······이다. 말하자면 음모를 꾸미는 사람 없는 음모며, 모두가 하수인이지만 하수인을 부리는 사람은 없·······다. 진짜 범인·······, 막후에서 엘리트층을 조종하는 진짜 지배자는 바로 화폐시스템 자체다.”라는 찰스 아이젠스타인의 말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동시발생의 그물망과 화폐시스템은 전혀 다른 말이다. 전자는 구성 개체(n)의 상호작용(n!)으로 실재하는 사건이며 n 하나하나와 분리되지 않는 전체적 실재다. 후자는 개체 구성 밖에 존재하는 초월적 실체다. 만일 진짜 지배자로서 화폐시스템 자체를 범주 개념으로 삼는다면 이 논의는 분리 문명을 넘어서지 못한다. 플라톤의 이데아, 기독교의 거대유일신 그림자 안에 도로 갇히고 만다. 도로 음모론에 갇힐 때는 이중으로 갇힌다. 음모가 없다는 음모론.


음모가 없다는 음모론을 꿰뚫으려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동시발생의 그물망, 정확히는 비인과적 상호작용의 네트워킹으로 파악해야 한다. 이 네트워킹에서는 진짜 지배자와 하수인을 분리할 근거가 없다. 화폐시스템 자체는 그럼 누가 변모시키나, 라고 물을 필요도 없다. 음모론이 말하는 음모가 들어설 자리도 없다. 완벽한 음모가 없다고 해서, 전지전능한 조종자가 없다고 해서 음모를 부정하는 자들처럼 거대유일신을 부정한답시고 무신론에 빠져버리는 유의 오류에 가담할 이유도 없다.


비인과적 상호작용의 네트워킹은 신성과 타락 어느 한쪽으로 프로그램화 되어 있지 않다. 생성·변화·소멸해가는 과정에서 상호작용하는 인간들의 정치경제학적 역관계를 따라 다른 결과 겹이 형성되는 것이 사실이다. 시스템이 막후에서 엘리트층을 조종한다고 말하면 안 되는 것은 신께서 섭리하신다고 말하면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음모론을 “실증적 호소라기보다 심리적 호소”(115쪽)라고 비판하기 전에 ‘실증적 호소라기보다 정치적 계산’으로 음모를 부정하는 현실에 저항해야 한다.


그 저항이 네트워킹에서 신성을 창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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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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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옛것을 뿌리 뽑고 처음부터 완전히 새것을 창조하는 혁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 혁명은 이미 시도해 왔지만 구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고방식 때문에 매번 같은 결과를 낳았다. 신성한 경제는 전적으로 다른 혁명이며,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변모시키는 것이다. 이런 혁명에서 패자는 자지가 패자임을 깨닫지도 못할 것이다.(106쪽)


“승리한 사상이 비판적 요소를 포기하고 수단이 되어 기존 질서에 봉사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자기의지와는 반대로 예전에 선택했던 긍정적인 것을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것으로 변질시키게 된다.”


아도르노의 이 말은 “이미 시도해 왔지만 구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고방식 때문에 매번 같은 결과를 낳았다”는 찰스 아이젠스타인의 귀납 언어를 명징한 연역 언어로 바꾸어 보여준다. 왜 이런 일이 거듭해서 일어났을까? 왜 이런 일은 거듭해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을까?


상대를 부정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구축하는 사람은 반드시 상대방을 닮게 되어 있다. 얼핏 들으면 수사rhetoric 정도에 지나지 않아 보이지만 일상의 경험에서도 이 말은 타당성을 인정받는다. 마음 치유에서도 이 말은 주의 깊게 적용된다. 엄밀하게는, 닮는 것이 아니라 본디부터 자기한테도 있는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첨예하게 대립할 때는 A와 non A로 나뉘어 전선이 형성 되지만, 전선이 붕괴되면 상대의 것으로만 분류되던 속성이 자기 것으로 표면화되기 마련이다. 정치적 혁명 국면에서는 혁명으로 일어선 자가 혁명으로 넘어진 자와 같은 짓을 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러고 보면 “옛것을 뿌리 뽑고 처음부터 완전히 새것을 창조하는 혁명” 자체가 당최 성립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짓을 인간이 되풀이해온 이치를 따져보자.


A를 뿌리 뽑고 non A를 창조하는 일은 두 가지 전제가 있어야 가능하다. 1. A와 non A는 완전히 분리된다. 2. A 없이 non A만으로도 세계가 구성된다.


형식논리에서 이 두 전제는 이의의 여지없이 성립한다. non A가 진리일 때 A는 비 진리다. 비 진리는 비존재다. 아니. 비존재로 만들어야 한다. 형식논리를 만들어 구사해온 역사는 그렇게 만들기 위해 진리를 구사해온 역사다. 진리 구사를 선교라 하든 혁명이라 하든 교육이라 하든, 비 진리를 박멸해 진리만이 충만한 세계로 만들고자 한 분투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분투 결과, 비 진리의 자리에 대신 진리가 가득 채워졌던가. 그럴 리가. S극을 제거한 N극만의 자석이 있나. 파동을 제거한 입자만의 빛이 있나. 관념이 실재를 구축驅逐한 곳에 무성히 자란 진리는 폭력일 뿐이다. 실재로서 진리는 논리 폭력 너머 비대칭의 대칭구조가 자발적으로 부서지는 운동이다. 변화를 추동하는 쪽이 상대를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변모시키는 것”이다. 상대는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변화의 흐름에 감응하는 것이다. 감응이 감응을 낳는다. 참된 혁명은 감응이 공명해가는 과정이다.


이 정도면 찰스 아이젠스타인의 의중을 깊이 들여다본 셈인데, 뭔가 개운치 않다. 왜 그럴까? 숱한 혁명 이론, 특히 마르크스 사상과 같은 고급담론에 대한 이해·태도 여하와 무관하게 우리가 현실에서 공유하고 있는 ‘혁명 감정’과 간극을 느끼기 때문이다. 당장 이런 의문부터 든다. “변화를 거부하면 제거해야 하지 않나?” 우리 눈앞에서 그런 꼴을 너무도 많이 보아온 터라 이 의문은 내려놓기 쉽지 않다. 찰스 아이젠스타인의 말은 이를테면 범주적이다. 특정 개인·정당·언론·종교·기업·권력기관을 가리켜 하는 말이 아니다. 양승태·자유한국당·조중동·개신교·삼성·떡검 따위를 몰아내는 일은 변모의 반대말이 아니다. 이들을 몰아내는 일은 구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도리어 이들을 철저히 처절히 몰아내는 일이야말로 그들이 속한 사회분야를 변모시키는 지름길이다. 이들을 깨알같이 챙겨 몰아내야 우리사회 전체가 변모된다. 변모는 성찰하는 주체에게서만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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