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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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한 경제는 생태계의 연장이며 생태계의 모든 법칙, 그중에서도 순환의 법칙을 따른다. 구체적으로 말해, 산업 공정이나 그 밖의 인간 활동에서 배출되는 모든 물질이 다른 인간 활동에 사용되거나 결국에는 다른 존재가 처리 가능한 형태와 속도로 생태계에 되돌아온다는 뜻이다.·······

  그런 경제를 자연 경제나 생태적 경제라 부르지 않고 ‘신성한’ 경제라 부르는 이유는 바로 선물의 신성함 때문이다. 순환의 법칙을 따르는 것은 곧 선물의 정신을 따르는 것이다. 우리는 선물을 받고, 그 선물로 말미암아 다시 선물을 한다. 선물은 계속 전달되어야 한다.·······

  유신론적 관점에서·······진정으로 신을 믿는 사람이라면 신의 창조물을·······감사의 마음으로 잘 쓰고 다시 선물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쓰레기 제로’ 경제를 신성한 경제라고 부르는 유신론적 이유다.

  무신론적 관점에서 쓰레기 제로 경제는 모든 존재의 상호연결성에 대한 경제적 깨달음이다. 남에게 행하는 것이 곧 나 자신에게 행하는 것이라는 진리의 구현이다.(201-202쪽)



순환의 법칙을 따르는 경제가 신성한 이유는 선물의 신성함 때문이다. 선물이 신성한 이유는 감사와 환대의 끝없는 전달이기 때문이다. 감사와 환대의 끝없는 전달은 모든 존재를 평등하고 평화롭고 평범한 연대 사건으로 엮어낸다. 무한히 평등하고 평화롭고 평범한 연대 사건이 신성운동이다. 신성운동은 유신론과 무신론의 대립을 자발적으로 깨뜨리는 무한 소소심심小少沁心의 신 행위다. 무한 소소심심의 신 행위는 순환의 법칙 바깥에 있는 실체가 아니다. 순환의 법칙 바깥에 있는 실체가 아니어야만 참된 신성을 구현한다. 참된 신성은 선물을 주고받는 만휘군상의 소리며 냄새며 맛이며 살 느낌이며 눈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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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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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가치를 만들어낸다.·······힘을 발휘한다.·······모든 돈은 이야기다. 돈을 창조하려면 이야기의 틀 안에서 창조하는 수밖에 없다.(193-194쪽)


돈은 이원론의 영성과 관련된 속성들, 즉 편재성·추상성·비물질성에 더해 물질세계에 개입해 창조하거나 파괴하는 힘까지 지녔·······다.(195쪽)


이야기는 말의 구성체다. 말은 그 자체로 질량이거나 에너지가 아니고 물질성과 영성을 매개하는 신호거나 정보다. 말은 실재와 허구를 가로지르는 트릭스터다. 트릭스터로서 말, 말의 구성체로서 이야기가 성취한 인류 최고의 창조는 돈이다. 돈이 인류를 흥하게도 망하게도 한다. 돈 이야기를 바꾸면 인류 생멸 여하가 전복된다. 인류가 파국을 피하려 한다면 돈 이야기를 바꾸지 않고서는 어림없다. 묻는다.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세계이야기는 무엇이며, 그 이야기를 구현하고 강화할 화폐는 어떤 식의 화폐인가?”(198쪽)


치밀하고 단단하게 돈 이야기를 새로 만들고, 그렇게 바뀐 이야기로서 돈을 치밀하고 단단하게 써야 비로소 세상은 바뀐다. 세상을 바꾸려 애쓰던 사람들이 결국은 기존 세상이 짜놓은 돈 이야기의 덫에 걸려 스러지는 경우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오늘 아침 노회찬 의원의 비보를 접했다. 9년 전 노무현 대통령 때와 동일한 통증이 들이닥쳤다. 이것은 개인적 모멸감의 문제가 아니다. 현행 화폐시스템을 장악하고 있는 집단의 소시오패스 문제다. 지난 10년 동안 유린당해온 내게 오늘의 통증은 뼛골을 파고드는 예리한 물질성을 지닌다. 돈이 만들어내는 가치와 파괴하는 가치의 물질적 막강함은 개인의 사유와 윤리를 무참히 무화시킨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닌가. 이 무서움 앞에서 얼어붙지 않으려면 무엇을 어찌 해야 하나. 일단, 무서움 응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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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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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인으로 가는 과도기의 두 번째 특징은 시련이다. 옛날 부족문화에서는 성인이 되기 위한 다양한 통과의례와 시련이 존재했다. 고립, 통증, 단식, 환각식물 등의 수단을 통해, 일부러 작은 자아를 무너뜨린 뒤 개인을 초월한 더 큰 자아로 재통합시키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인류도 그와 같은 시련을 겪는 중이다. 오늘날의 복합적인 위기는 우리 정체성을 시험하는 과정이자, 우리가 이겨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시련이다. 이 시련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능력을 이끌어내고, 세계와 새로운 관계를 맺도록 몰아간다. 민감한 사람이 위기 앞에서 느끼는 절망도 그러한 시련의 한 부분이다.(177-178쪽)


시련은 형벌이 아니다. 아이가 어른이 되는데 어찌 형벌이 필요하겠나. 필요한 것은 아이의 프레임을 깨는 것이다. 프레임 깨기가 시련이다. 그것이 시련인 까닭은 깨는 과정에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류가 겪는 고통은 과연 시련인가? 시련이려면 범죄가 전제되지 않아야 한다. 범죄는 분명히 저질러졌다. 범죄의 대가는 형벌이 틀림없다. 인류는 지금 형벌을 받고 있다. 문제는 범죄자라기보다 피해자에 해당하는 사람이 형벌을 뒤집어쓴다는 데 있다. 뒤집어쓴 형벌은 형벌에서 시련으로 가로질러 간다. 이 진실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시련을 통과해 어른이 된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노모패스는 성실무비의 노예로 살다 비참하게 죽는다.


범죄자면서 형벌을 피해자에게 전가한 사람은 물론 시련도 당하지 않는다. 승승장구 호의호식 지상천국을 구가한다. 그 구가의 대가는 영성 몰수다. 영성이 몰수된 소시오패스는 자신이 지닌 돈 말고는 모든 존재를 부정하다가 결국 돈 이야기의 허구 속에서 허무로 사라진다.


자아 이야기와 세계 이야기의 허구를 알아차린 “민감한 사람이 위기 앞에서 느끼는 절망”, 곧 우울은 나와 우리를 함부로 허무에 내어주지 않는다. 허무에 던져지는 사람은 우울에 사로잡혀 무심코 살아서 그렇다. 무심코 살지 않는 사람은 우울에 감응한다. 감응하면 벗어난다. 우울증에서 벗어나 우울의 실재를 증득한 사람은 자기 삶을 신뢰한다. 신뢰하면 맡긴다. 맡기면 자유롭다. 자유로우면 풍요해진다. 풍요를 함께 누리는 삶이 선물의 삶이다. 선물을 주고받는 사람이 어른이다.


요절할 수도 있음은 물론이다. “이겨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시련이 날카로운 위기로 우리 옆구리에 깊숙이 찔러 넣어져 있다. 생멸 여하는 깨달은 사람의 신성 네트워킹이 빚어내는 비인과적 동시적 대변혁 여부에 달렸다. 대변혁의 생화학은 형벌과 시련 사이 모순에서 일어난다. 형벌과 시련의 이율배반에는 목적론적 낙관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찰나마다 곤두서는 거룩한 놀이 감각으로 반걸음 앞을 내다보고 한 걸음 내디디는 몸-사건이 있을 따름이다.


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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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가량 입은 한복 바지다.

서툰 솜씨로나마 기워서 입고 다닌다.

삼가 대하고 함부로 없애지 않음으로써 사물을 경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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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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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공동체를 살리기 위한 인류의 천명이라 할 때, 사랑은 그 보편성 안에 개체성을 매몰시킬 수 있다. 다시 사랑 문제를 말하는 소이다.


사랑의 개체성은 사랑의 겹과 결을 칼같이 톺는다. 사랑의 보편성이 그 주체를 추상화하여 사랑을 studium에 널어놓을 때, 개체성은 그 punctum에 비수를 찔러 넣는다. 누가 누구를 왜 어떻게 사랑하는가.


사회역사적 당위로 각성하기 훨씬 전에 사랑은 자본의 전략에 따라 편만하게 소비되었다. 이미 그 통속함은 극에 달해 있다. 아니 할 말로 개나 소나 사랑을 입에 담는 세상이다. 이 매끈함 속에서 역사적 맥락의 구불구불함과 사회적 지평의 울퉁불퉁함을 찾아내야 한다.


위기에 처한 나라 팔아먹고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리는 매판집단이 해야 할 천명의 사랑과 항일의병에서 독립군에 이르기까지 나라 지키기 위해 희생해온 민초들이 해야 할 천명의 사랑이 어찌 같을 수 있나. 개인 토지 97.6%를 소유한 상위 10%가 해야 할 천명의 사랑과 고작 2.4%를 소유한 나머지 90%가 해야 할 천명의 사랑이 어찌 같을 수 있나.


250명이나 되는 생때같은 아이들을 물에 빠뜨려 죽인 2014년 4월 16일 이전의 사랑과 그 범죄 이후 4년도 훨씬 지나 국가의 책임 대부분을 인정하지 않은 판결 내린 사법이 준동하는 오늘의 사랑이 같을 수는 없다. 4대강사업 벌여 국토를 유린한 이명박의 사랑과 그에 반대하여 소신공양 단행한 문수 비구의 사랑이 같을 수는 없다.


사죄하는 것이 한 사랑이면 사죄를 요구하는 것도 또 다른 한 사랑이다. 불의하게 모은 재산을 포기하는 것이 한 사랑이면 불의하게 모은 재산을 환수하는 것도 또 다른 한 사랑이다. 살인까지 저지르며 국정을 농단한 통치자를 몰아내는 것이 한 사랑이면 산업농을 거부하고 묵묵히 자연농에 귀의하는 것도 또 다른 한 사랑이다.


보편적 사랑의 저 로맨틱함만으로 시대를 전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대를 전환할 사랑은 독한 것이기도 해야 한다. 독한 사랑은 수탈당하는 사람, 슬픈 사람, 소수인 사람에게 아프디아픈 천명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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