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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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과 존재의 깊은 관계가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지금 우리는 정체성의 심오한 변화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돈이 새로운 자아, 연결된 자아, 상대방의 이익이 곧 나의 이익이라는 상호연결성의 진리가 실현될 세계에 어울릴까?·······


그것은·······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떨어지는 화폐다.·······역이자율을 적용받는, 소멸하는 화폐다.·······‘소멸’이라는 말을 잠시 짚고 넘어가고 싶다. 부정적 어감을 주는 말이·······기 때문이다.

  왜 ·‘소멸’은 부정적으로 들리고 ‘보존’은 좋게 들릴까? 이런 사고방식은 자연을 초월하고, 엔트로피·혼돈·소멸을 극복하고, 질서정연한 과학적·합리적 세계를 만드는 것이 인류의 운명이었던 도약 이야기에서 생겨났다. 도약 이야기는 비물질적·영구적·신적 불멸 영혼이 물질적·비영구적·세속적 소멸 육체를 억압하는 분리 영성과 상보관계였다. 인류는 육체를 정복하고 세계를 정복하고 소멸 과정을 막고자 노력해왔다. 불행히도 그렇게 함으로써 소멸을 포함한 더 큰 과정을 가로막고 있다. 더 거대한 통합적 복잡성을 향해 재생·재활용·진화해가는 과정 말이다. 다행히 분리와 도약 이야기는 끝나간다. 이제 우리의 사고방식과 경제에 소멸의 아름다움과 필요성을 되살릴 때가 되었다.(232-234쪽)


보편적 순환의 법칙에서 돈만 예외라는 것은 자연에서 인간만이 예외라는 이데올로기의 일부다. 소멸화폐는 이목을 끌기 위한 전술이 아니라 진실의 인정이다.·······영원한 것은 없다는 우주 보편법칙에서 돈도 더 이상 예외가 되지 않을 것이다.(250쪽)


윤선애의 노래 <하산> 가사 일부다.


“영원히 산다면 세상은 이리 아름답지 않아.

스스로 간절한 줄 모르는 빛일 뿐이지.

세상을 포옹하는 늦은 하산.

발걸음은 어둔 산에 묻히고,

삶이 저 아래 사람들 사는 곳으로 이어진다.”


하산은 스스로 간절한 줄 모르는 빛을 떠나 저 아래 사람들 사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저 아래 사람들 사는 곳은 “소멸의 아름다움”에서 비롯한 “더 거대한 통합적 복잡성을 향해 재생·재활용·진화해가는 과정”이 이루어지는 “진실”의 세계다. 진실의 세계는 “상호연결성의 진리가 실현”되는 사건의 네트워킹이다. 이 네트워킹의 결절에서 어김없이 작동하는 것이 돈이다. “돈은 우리 문명을 결정하는 너무나도 근본적인 요소이기에, 돈의 근본적 전환 없이 진정한 문명 전환을 기대하는 것은 순진하다.”(241쪽)


더는 순진함으로 불멸 이야기에 현혹당할 수 없다. 불멸의 화폐에 편승한 불멸의 영혼은 얼마나 추한가. 아름다운 소멸을 ‘살’로 지닌 돈이 우리를 구원한다. 돈 구원은 소멸을 숭고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소멸 숭고가 장엄이다. 장엄은 소멸하는 존재의 재생·재활용·진화 과정이다. 그 과정의 찰나마다 낭자하게 번지는 살 냄새며 맛이며 소리며 모습이며 닿는 느낌이다. 모든 동등한 존재의 직접 닿음peer-to-peer에서 일어나는 느낌이야말로 전환된 문명의 경이 감각이다. 경이 감각은 소멸만이 빚어낼 수 있는 존엄이다.


존엄한 발걸음, 어둔 산에 묻히리니.

신성한 삶, 저 아래 사람들 사는 곳으로 이어지리니.


이제 우리 손잡고 하산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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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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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버리는 물건으로 가득 찬 삶은 풍요로운 삶이 아니다. 경제 활동의 대상, 즉 사람들이 창조하고 교환하는 것들을 존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신성한 경제를 이룰 수 있겠는가?(228쪽)


소시민의 소심한 감각임을 모르지 않으나 어쩌다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에 갈 때마다 나는 묵시록적 의문에 사로잡힌다. 


대체 누가 얼마나 필요로 하기에 이 많은 물건들을 만들고 팔아대는 걸까? 이게 인류가 파멸하는 징조 아닐까?


나 같은 가난뱅이 집에도 한두 번 쓰고 처박아둔, 사실상 버린 물건이 적지 않다. 연필에서 옷까지 실로 다양한 물건들이 이런 처지에 놓인다. “쓰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제대로 쓰지도 않고 버리는 것이다. 아니. 제대로 쓰지 않는다는 것은 버린다는 것이다. 온갖 곳에 쟁여진 그런 물건들만 재활용해도 인류가 생산을 전면 중단한 채 몇 십 년은 충분히 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 보면 이자 기반 화폐시스템 자체가 ‘제대로 쓰지도 않고 버리는’ 낭비 시스템이다. 전 세계 산업설비의 40%가 멈춰 서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증거가 된다. 무엇보다 돈, 특히 부자들의 금고 속에 모셔진 돈은 버려진 돈이다. 그 돈이 그들의 부라 하자. 그 부의 실재는 뭔가? 없다. 굶어서 죽어가는 아이의 우유 값으로조차 쓰이지 않는 저 빳빳한 현금은 버려진 물건일 뿐이다. 돈은, 대체 얼마나 쓰고, 아니 쓰지 않고 버리는 우스운 것이어서 무서운 악인가 말이다.



내게는 10년 훨씬 넘게 쓴 가방이 하나 있다. 버리라고 아무리 말해도 버리지 않자 아내는 새 가방을 하나 사왔다. 나는 주말 나들이 때 한 번 새 가방을 쓸 뿐 여전히 그 가방을 들고 출퇴근한다. 이리 오래 쓸 만큼 잘 만들었고, 낡았으나 본디 기품을 잃지 않은 가방을 버리는 것은 “경제 활동의 대상, 즉 사람들이 창조하고 교환하는 것들을 존중하지 않”는 신성 모독이라 생각한다. 내 작은 신념과 실천이 생산, 유통, 폐기의 포르노를 얼마나 저지할 수 있을까만 열이 되고 백이 되면 신성한 경제 이룰 그 날을 희망 속에 놓을 수 있지 않겠나. 그 희망을 품은 헌 가방이 진정한 풍요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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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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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같았으면 모든 인류를 위해 공동체 향유자원을 관리하는 것이 정부의 목적이라고 말했을지 모른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우리가 지구와 연인관계로 접어들고 있는 이 시점에서는 인류를 새로운 기관으로 포함하는 지구를 위해 공동체 향유자원을 관리하는 것이 정부의 목적이라고 말하고 싶다.(215쪽)


인류와 지구가 미성년의 모자관계에서 벗어나 성년기의 연인관계로 접어들고 있다는 비유는 인류에게 그만큼 성숙한 사랑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탁월하지만 공동체 향유자원 관리의 목적을 인류에게서 지구로 바꾼다고 해도 여전히 인류 중심적 사유 구조를 벗어나지 못한다. 지구가 인류를 하나의 기관, 그러니까 유기적 구성요소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실을 충분히 반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류가 지구의 구성요소인 한, 양자를 택일의 대립 항으로 동등하게 놓아서는 안 된다. 이는 (심)폐와 몸, 뇌와 마음의 관계와 흡사하다.


진정 성숙한 인류라면 연인이 되는 것은 상대방을 위한 전사가 되는 것이라거나, 자아를 확대하여 지구 전체를 ‘대’자아로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을 실체로 전제하는 사유 거점을 스스로 지움으로써 전체성에 깃든다.(7. 선물의 세계③ 참조.) 인류가 스스로를 지구한테서 분리한 것은 인식과 그 체계인 문명에서 그랬다는 뜻일 뿐, 실재에서는 아니다. 당최 불가능하다. 이 진실을 깨닫는 것이 재통합이다. 재통합 사유에서 지구를 위해 공동체 향유자원을 관리하는 것은 그대로 인류를 위한 것이 된다. 큰 개념은 작은 개념을 포함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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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념이란 개념은 잡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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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시스템의 기반으로·······귀중하고 신성하고 ‘값비싼’ 공동체 향유자원보다 더 나은 것이 있을까?·······그렇게 하는 방법 중 하나는·······우선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자연의 적절한 양에 대해 정치적으로 중재된 공동의 합의를 이끌어낸다.·······

  그것을 기반으로 화폐를·······정부가·······발행해, 오늘날 세금 수입을 지출하듯 사용하면 된다.·······그 돈을 기반 품목으로 상환하는 것은 자원과 오염에 붙는 세금과 같이 기능한다.(215-217쪽)


오염을 줄이거나·······공동체 향유자원을 덜 쓰는 방법을 찾아낸 사람은 비용을 줄여 더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이윤 추구의 욕구와 지구를 치유하려는 욕구가 대립 아닌 상생 관계로 된다.(218쪽)


공유자원commons이라는 번역을 구태여 공동체 향유자원으로 바꾼 것은 저자의 다음 인식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지금 진행 중인 경제적 변혁은 마르크스주의 혁명을 넘어서는 것이다. 새로 만들어질 ‘사람들이야기’는 새로운 소유의 이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소유의 허구적 관습적 본질을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재산은, 누가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는 사회적 합의일 뿐이다. 재산은 객관적 실재가 아니지만,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이론 모두가 그렇듯, 재산을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기본전제로 삼으면 우리 자신도 모르게 그것이 포함된 이야기의 노예가 된다. 나는 신성한 경제가 재산이라는 기본전제에서 출발할 수 없다고 본다. 재산 개념은 진실이 아닌, 혹은 더 이상 진실일 수 없는 자아와 세계이야기, 즉 객관적 우주 속의 분리된 자아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자처럼 자연과 문화유산을 공(동소)유로 해야 한다고 말하기보다, 모든 것에 재산 개념을 적용하기를 멈추고, 어떻게 하면 그 모든 것의 가치를 공정하고 창의적이고 멋지게 경제시스템으로 구현할지 생각해보자.(214쪽)


공유도 소유며, 소유는 재산 개념을 전제한다. 향유는 소유가 아니다. 배타성을 지니지 않아서 함께 누리는 것을 향유라 한다. 공동체 구성원이 함께 향유하는 자연, 아니 함께 공동체적 삶을 향유하는 자연에, 배타적 소유는 근원적으로 맞지 않는 개념이다. 근원을 통찰하지 못한 것은 마르크스 또한 분리문명 프레임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분리를 직격하지 않은 채 탐욕을 관리하려 드는 것은 결국 가짜다.


진짜는 “재산이라는 관습을 통해 부와 권력의 배분이 정당화되고 용이해”(213쪽)지는 것을 막는다. 진짜는 공동체 향유자원, 정확히 말하자면 공동체 구성원이 함께 향유하는 자연,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함께 공동체적 삶을 향유하는 자연을 착취하거나 오염시키지 않고 평등하게 평화롭게 평범하게 누림으로써 존재의 재통합을 이룬다. 진짜가 진짜 도래하는 이때, 내가 가짜면 이 무슨 횡액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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