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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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받고 팔기에는 너무 훌륭해서 그냥 줄 수밖에 없는 것이 있다.(434쪽)


이따금 불교조계종 총본산인 조계사 앞을 지나간다. 볼 때마다 거기 풍경은 내 심사를 편치 않게 한다. 탄핵 직전 총무원장직 사퇴를 발표하면서도 뻔뻔한 표정을 전혀 감추지 않던 설정이란 중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종교가 지녀야 할 참 위엄이 억지로 꾸며져 있지만 잡스럽기 그지없다.


며칠 전 일이다. 대웅전에서 무슨 법회가 열리고 기총소사 같은 읊조림 소리가 낭자하게 울려 퍼지기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들어보았다. 생년, 주소, 이름 등을 말하고 축원하는 간단한 말을 숨 쉬기도 아깝다는 듯 재빠르게 이어간다. 무심코 들으면 지나칠 수 있도록 코맹맹이 소리를 섞어가며 주기적으로 내뱉는 단어가 하나 있다. “대애~바악~” 실로 실소를 금하기 어렵다. 돈 내고 두 손 비비며 절하고 있는 대중이나, 돈 받고 대박을 축원하는 중이나, 돈거래 들러리인 압도적 크기의 황금불상이나, 하나같이 헐값 거래에 내맡겨진 비참한 존재다. “돈을 받고 팔기에는 너무 훌륭해서 그냥 줄 수밖에 없는 것”이 이제 불교에는 남아 있지 않은가보다.


어디 불교뿐이랴. 모든 종교가, 모든 예술이, 모든 치유가, 모든 철학이 대박 장사판 한가운데 있다. 가뭄에 콩 나듯 훌륭한 것을 그냥 주는 사람이 나타나면 무참히 익명화시킨다. 그냥 준다니 그냥 받고 그대로 입을 닦아버린다. 조계사를 떠나며 나는 문득 내 입술에 손을 대본다. 내게도 그 동안 그냥 받고 입을 닦아버린 일이 얼마나 많았으랴. 대박 장사판을 힐끗거린 눈길이 얼마나 많았으랴. 신성한 칼을 들어 다시 뼈에 새긴다.


돈을 받고 팔기에는 너무 훌륭해서 그냥 줄 수밖에 없는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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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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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투자가 더 멋진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선물로써 돈을 사용한다면, 그렇게 사용되는 선물을 받는 것이 바로 의로운 생계다.(426쪽)


  즉 의로운 생계의 핵심은 선물로 먹고 사는 것이다.(427쪽)


의로운 생계의 목적은 에너지를 사랑하는 무언가에 쓰기 위함이다. 그 일을 하면서 도덕적 책임감, 좋은 사람이 되려는 의무감이 아니라 해방감을 느껴야 한다.(430쪽)


오늘 점심은 한의원 바로 앞 음식점에서 소면국수를 먹는다. 뜨거운 국물 찰랑히 붓고 거기에 매운 다짐까지 듬뿍 넣어 땀 흘리며 먹는다. 생일이다. 자축한다. 육십 년도 훨씬 지나 비로소 내 출생을 온새미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감사한다.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도, 열 명 넘는 '어머니'를 내 앞에 줄 세웠던 아버지도 자축의 상에 영혼 극진히 모신다.


자축의 마음으로 볼 때 출생부터 낱낱이, 온이 선물이다. “의로운 생계의 핵심은 선물로 먹고 사는 것”이라 하니 낱낱이, 온이 선물이면 가히 ‘의로운 생애’라 아니 할 수 없다. 내가 정색하고 의롭게 살아서라기보다 누군가 극진하게 선물한 것들로 삶이 교직되어 있으므로 의롭다.


의로운 생애 한가운데 선 자는 책임과 의무라는 “원칙”(428쪽)에 결박당하지 않는다. 해방의 “느낌”(429쪽)을 타고 노닌다. “의로운 생계의 목적은 에너지를 사랑하는 무언가에 쓰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해방함으로 해방되는, 해방됨으로 해방하는 느낌에서 현현한다. 해방의 느낌은 질탕경건하며 소요고요하다. 역설의 전율 속에서 자발적·능동적으로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것이 바로 의로운 생계다.


의로운 생계는 아름다움을 창조하므로 삿된 호화를 거절하는 만큼 지지리 궁상도 사양한다. 탐욕을 멀리하는 것과 희생을 자처하는 것은 다르다. 누군가 소개로 침 치료를 받으러 온 분이 내 모시옷을 곱다 한다. 사실 이 옷은 20년 된 기성복이다. 정하게 입었기 때문에 여전히 기품 있는 자태를 유지한다. 오늘 이 모시옷을 내 의로운 생계의 상징이자 생일 자축잔치 빔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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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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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로운 투자는 돈에 신성한 제의sacred vestments를 입히는 일이다.(410쪽)


신성한 견제의 투자는 부를 나누려는 행위다.(411쪽)


  많은 세월이 흘러, 돈이 돈으로 인식되지 못할 만큼 지금과 달라진다 해도, 기본적인 투자 개념은 사라지지 않고 남을 것이다. 우주의 근원적 풍요와 인간의 무한한 창의성 덕분에, 당장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풍족한 선물의 흐름을 이용할 기회가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 공동의 노력과 지구와 맺은 동반자관계를 통해 경이로운 일을 창조하기 위해, 돈과 같은 수단은 계속 존재할 것이다. 한마디로 신성한 투자란 이렇게 넘치는 풍요를 창조적인 목적에 사용하는 것이며, 필요에 부응하는 투자에서 점차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투자로 나아갈 것이다.(411-412쪽)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물론 좋아하지 않아서다. 나쁜 기억과 관련이 있다. 생애 첫 커피의 기억은 고등학생 때 어느 날 아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밤을 꼬박 새고 시험공부를 한 뒤 굶은 채 등교를 막 하려던 참이었다. 어머니가 부엌에 가면 먹을 것이 있다고 말했다. 끼니를 거르는 게 일상이었던지라 따스한 죽이라도 있을까 하고 부엌으로 들어섰다. 전혀 다른 종류의 냄새가 확 끼쳐왔다. 동그란 뚜껑이 덮인 연탄불 위에 누런 양재기가 놓였는데 거기 갈색 액체가 들어 있었다. 말로만 듣던 커피였다. 탁하지 않고 속이 들여다보였다. 요즘 말로 하면 아메리카노 쯤 될 것이다. 나는 어머니가 그것을 내게 왜 주셨는지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끼니를 거르는 집에 어떻게 커피가 있는지도 이해지 못했다. 얼핏 드는 생각을 떨쳐버리고 집을 나서는데 등 뒤에서 들려온 이 말 한 마디를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일등 하라고 투자한 거야.”


어른이 되어 그때 어머니 나이가 되어서는 받아들일 수 있었던 말이지만 십대 아이로서는 투자라는 말에 걸려 우당탕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시험 전 커피 말고 공부 전 죽 한 그릇이기만 했어도 충격이 덜했을 텐데·······. 커피와 연동되어 투자라는 말은 내게는 오랫동안 ‘과정이야 어쨌든 결과적으로 이익만 남기면 되는 비정한 도모 행위’ 쯤으로 인식되었다. 지금 화폐시스템에서 보자면 여지없이 정확하지만 내 인식은 성찰 자체가 결락된 화인火印 같은 것이었다. 내 삶을 의도된 빈곤으로 몰아간 상처의 트리거로 작동했음에 틀림없다.


트리거는 “가난이 곧 선이 아니며, 비 축적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다.”(409쪽)는 깨달음의 반대편을 조준하도록 기회마다 상처를 격발시켰다. 내 진욕進辱의 사상은 “신성한 투자란 이렇게 넘치는 풍요를 창조적인 목적에 사용하는 것이며, 필요에 부응하는 투자에서 점차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투자로 나아갈 것”이라는 능동적 진실 전체를 간취하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내 영성의 지분은 여전히 청록색 바다에 더 많이 잠겨 있었다.


정색하고 파도를 넘는다. 다홍색 지붕 집이 펼쳐진 바닷가에 닿는다. 정좌한다. 지나온 바다의 세월을 돌아본다. 어린 시절 ‘환갑 진갑 다 지난 노인’이란 말을 들었을 때 느꼈던 아득한 낯섦에서 화들짝 놀라 깨어난다. 아, 내 시간은 벌써 환갑 진갑이 다 지난 뒤다. 그 세월 동안 축적된 것은 부가 아닌 부채다. 신성하다 여겼던 내 투자는 순환 저 너머로 사라진다.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흐름은 적막에 휩싸인다. 정지된 이 시간 속에서 나는 천천히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신다. 40여 년 전, 내게 그것을 건넨 어머니가 네 번째 어머니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네 번째 어머니는 내 인생을 결정적으로 일으켜 세우고 결정적으로 쓰러뜨렸다. 나를 낳은 어머니에 버금가는 영향을 미쳤다. 여태까지 내 해석은 결정적 쓰러뜨림 중심이었다. 정지된 시간 다홍색 해변에서 나는 해석을 바꾼다. 결정적 일으켜 세움도 동등한 또 하나의 중심에 놓는다. 두 중심이 그려내는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태극 원의 진실 속에서 신성한 투자를 ‘끼적거린다, 되작거린다, 집적거린다, 자꾸 덤벼본다’(스리니 필레이의 개념을 차용함). 넘치는 풍요와 아름다움을 두 팔 벌려 안아본다. 사위는 이제 자색으로 물들기 시작하리라. 후천개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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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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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로 결핍이 유도하는 화폐시스템과 축적문화 속에 살면서 비 축적을 실천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남들도 다 같이 실천한다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는 한 스스로를 보호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지극히 타당한 생각이며 합리적으로 반  박할 수도 없다. 다만·······당신의 마음이 이성 너머 무언가에 이끌리는 것을 알아차리기만 바랄 이다. 이성, 현실성, 안전함의 추구가 이끄는 대로 살아온 지금의 결과를 보라. 이제는 다른 무언가에 귀 기울일 때인지도 모른다.(401-402쪽)


부가 안전을 보장한다는 믿음은 기만일 뿐이다. 삶의 고통은 부의 성벽 너머로 침투해 들어와, 누구나 겪는 사회적 병폐를 왜곡된 형태로 겪고 있는 부자들도 결국 그 고통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응급 상황에서는 부가 목숨을 구해줄 수 있다고 말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게 무슨 차이일까? 얼마나 더 오래 살든 어차피 우리는 죽게 돼 있다. 지나온 삶이 섬광처럼 짧게 느껴지면서, 삶의 목적이 최대한 편안하고 안전하게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베푸는 것임을 깨닫는 시간이 올 것이다.(403-404쪽)


이미 우리의 영적 직관은 다가오는 시대의 진실을 알아차리고 있다. 소유는 짐이라는 진실, 참된 부는 나눔에서 온다는 진실, 남에게 행하는 것이 곧 나 자신에게 행하는 것이라는 진실 말이다.(407쪽)


『댄스, 푸른푸른』에 이어 김선우 두 번째 청소년 시집『아무것도 안 하는 날』이 나왔다. <시인의 말> 일부를 가져온다.


“드디어 숙제를 끝냅니다. 누가 하라고 한 것이 아니건만, 한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의 작가로서 스스로에게 부과한 숙제였습니다.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기에 힘들어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집을 만나 힘을 얻는 벗들이 있다면 그때마다 노랑리본 자리가 조금씩 더 환해질 것입니다. 지상의 별들과 하늘의 별들이 서로를 응원하며 날마다 조금씩 더 생동하기를 기도합니다.”




김선우야말로 “삶의 목적이 최대한 편안하고 안전하게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베푸는 것임”을 알고 실천하는 참 사람이다. 그의 인생 요목은 “이성, 현실성, 안전함”이 아니다. 감성, 창조성, 경이로움이다. 이들로 말미암아 축적이 불가능·불필요한 신성인생이 가능하다. 내가 김선우를 ‘천하시인’이라 부르는 소이다.


천하시인 김선우는 나를 ‘이심전심 쌤’이라 부른다. 이심전심은 유래origin가 같아서 가능하다. 그 유래는 “통속한 시간적 유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마음에서 유래했다는 특별한 의미로 쓴 것”(350쪽)이다. 신의 마음은 “소유는 짐이라는 진실, 참된 부는 나눔에서 온다는 진실, 남에게 행하는 것이 곧 나 자신에게 행하는 것이라는 진실”을 알아차리는 “영적 직관”으로 현현한다. 김선우의 영적 직관은 시로, 내 영적 직관은 숙의로 펼쳐지거니와 양육과 치유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같다. 다른 점은 김선우가 탱맑은 선명으로 살아가는 데 반해 나는 는적거리는 익명 속에 침륜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내가 손위나 삶은 김선우가 윗길이다. 오늘도 나는 끝내지 못한 숙제를 끌어안고 김선우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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