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원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건물 뒤 후미진 곳에 가끔 길고양이들이 와서 머문다. 오늘은 그중 낯익은 녀석이 하나 누워 낮잠을 즐기고 있다. 어쩌면 저렇게 가감 없이 평안을 몸에 담을 줄 아는지. 혹 사람만 모르는 것은 아닐까 싶어 부럽고 부끄럽고 그렇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18-09-11 2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13 18: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40대 후반과 50대 전반 10년 동안 나를 사로잡은 텍스트는 『상한론傷寒論』이란 동아시아 의학 고전이다. 『상한론』의 독자적 해석서 한 권을 품고 탐구하면서 나는 비로소 자신을 담은 책 한 권을 지니게 되었다. 한창 이 책을 가지고 강의할 때는 반드시 수강자들에게 이 책 냄새를 맡아보게 했다. 대부분은 그 냄새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내 체취라고 말해주면 감탄하거나 의아해했다. 전자는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로 받아들인 것이고, 후자는 ‘뭐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로 받아들인 것이다. 각자의 길이 있으니 각자 선택한다. 다만, 자신의 삶이 어떠하든 자신이 선택한 길을 비추는 책 한 권에 자신을 담는 예의 정도는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역이자 화폐, 경제적 지대의 제거와 공유자원 고갈에 대한 배상, 사회·환경 비용의 내부화, 경제·통화의 지역화, 사회배당금, 경제 역성장, 선물문화와 P2P 경제로 요약(358-378쪽)되는 찰스 아이젠스타인 표 신성한 경제학을 분권화, 자기조직화, P2P, 생태적 통합(215쪽)으로 트랜스버전하면 찰스 아이젠스타인 표 신성한 정치학이 된다.


이 신성한 정치학을 나는 <59. 신성 유물론①>에서 저마다 중심, 자발적 내부창조, 평등한 개체끼리의 직접 닿음, 소요고요의 생명 연대로 트랜스버전해서 신성한 신학에 갈음했다. 신성한 신학은 그대로 신성한 자연학이다. 신성한 자연학은 그대로 신성한 인간학이다. 신성한 인간학은 그대로 신성한 미학이다. 신성한 미학이 아름다움을 복원한다.


아름다움을 복원해 발휘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지향해야 할 지상의 가치며 열반이며 구원이다. 아름다움은 나의 품에 그득히 남을 안고 살아감으로써 펼쳐내는 갸륵함의 느낌이며, 알아차림이며, 좇음이다. 한 아름 더 되면 허영이다. 한 아름 덜 되면 퇴영이다. 아름다움은 최대한과 최소한이 일치하는 한 아름의 경계에서 피는 꽃이다.


한 아름은 절묘한 균형이자 규모다. 이 균형과 규모로 인간, 자연, 신의 신성성을 담보하는 공동체가 구성된다. 한 아름 공동체의 네트워킹에서 정치경제학의 신성성이 완성된다. 신성한 정치경제학은 평범한 존재들이 평등한 연대로 평화를 향수하는 역동적 과정이다. 이 역동적 과정은 영원을 약속하지 않는다. 찰나마다 영원의 보랏빛 섬광을 선물할 뿐.


<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허황된 꿈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 마음은 지나치게 좋은 것을 꿈꾸기 두려워한다. 이런 얘기가 분노와 좌절과 슬픔을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은 누구나 지닌 상처, 즉 분리의 상처를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꿈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우리 내면의 앎은 억누를 수 없다. 이제 우리 내면의 앎을 믿고 서로 의지하고 그런 삶을 꾸려나가자. 낡은 세계가 무너져가는 지금, 우리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을까? 신성한 세계보다 못한 세계에 안주할 것인가?(482쪽)


박완서의 소설 『창밖은 봄』(1977)을 <MBC베스트극장>에서 드라마로 만들어 방영한 적이 있다(1984). 줄거리 많은 부분을 잊어버렸지만 오랫동안 기억하는 한 장면이 있다. 식모 일을 하던 길례(서갑숙 분)와 막노동을 하는 정씨(이대근 분)가 어렵사리 부부의 연을 맺어 살아가는 어느 겨울. 일이 잘 안 되다 그날은 운이 좋았던지 조금 큰(?) 돈을 손에 쥔 남편이 생선 한 손 사들고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향한다. 생선을 받아들고 반색하던 아내의 얼굴에 갑자기 어둠이 깔린다. 남편에게 말한다. (바로 그 문장은 아니지만 이런 내용임에 틀림없다.)


“여보, 우리 이렇게 잘 살아도 되는지 겁이 나요.”


무슨 말인가. 행복한 시간이 덧없이 사라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랄 수 있겠다. 전혀 달리, 섬광처럼 찾아온 행복을 한껏 기림으로써, 불행을 생의 기조로 여기며 살아온 사람이 자신의 불행한 운명에 곡진히 헌사를 바치는 것이랄 수도 있다.


불행한 운명에 바치는 곡진한 헌사는 분리문명 깊숙이 던져진 평범한 사람이 추구할 수 있는 실재the Real의 미학이다. 현행 화폐시스템 속에서 행복의 예찬과 축원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언어 착취며 조롱인지 경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지 않나.


20대 후반, 참된 삶의 지향과 각성·구원 문제로 깊이 고뇌하고 있던 내 가슴에 이 장면은 육중하게 각인되었다. 내가 각성·구원 문제를 인간 지평에서 떠나지 않는 것으로 닻 내리게 만든 예리한 한 순간이었다. 여적 내 사유의 정수리에는 쪼그만 질문 구멍이 뚫려 있다.


“그대, 황홀한 행복이 삶의 지향이며 의미인가?”


우리가 꿈꾸는 신성한 세계는 결코 궁창에 둥실 떠 있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우리가 구태여 “믿고 서로 의지하고” 꾸려가야 할 신성한 세계는 분리시대의 아프고 슬픈 기억을 제거해 몰아넣는 망연한 환희 도가니가 아니다. 그런 것이라면 우리가 지향해서도 안 되고, 그럴 필요도 없다. 신성한 세계에는 분명히 선물이 필요한 사람과 선물을 주려는 사람이 각각 존재한다. 그냥 주어야 하는 사람과 감사를 표하며 받아야 할 사람이 따로 존재한다. 서로 견딤을 주고받으며 기다린다. 그 과정마다 희로애락을 두루 실감한다. 우리의 신성한 세계에 천사는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새 시대를 탄생시키고 인류가 성년이 되기 위한 시련의 시기는 다소 혼란스러울 것이다. 경제적 붕괴와 파시즘, 소요사태, 전쟁까지 수반되는 혼란일지 모르지만, 그런 암흑기는 우리 예상보다 훨씬 짧고 훨씬 가볍게 지나가리라 예상한다.

  그 이유는 내가 만나는 수많은 깨어 있는 사람들 때문이다. 인류는 지난 반세기 동안 많은 것을 학습하면서 의식 발전의 임계점에 이르렀다.·······가속화되고 있는 이 전환 국면은·······점점 가속화되고 있는 시대 계승의 마무리 단계인지도 모른다. 특이점이 가까워지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심오한 전환이 이루어질 것이다.(475-476쪽)


강릉 거점 을미의병(1895)의 지도부 일원이었던 강무영은 원산에서 전사했다. 그의 가문은 당연히 쑥대밭이 되었다. 세 아들은 국권상실기 내내 왜경에 쫓겨 다녔다. 해방 이후에도 제대로 사회경제적 안정을 되찾지 못했다. 전쟁과 독재를 거치며 요동치던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그의 후손은 소외와 빈곤의 심연으로 점점 더 깊이 가라앉았다. 침하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의 둘째 아들의 둘째 아들의 둘째 아들이 바로 나다. 증조부가 순국한 지로부터 60여년 뒤에 태어나 60여년을 살아온 내게, 이 “암흑기”는 과연 얼마나 짧고 가벼운 것일까.


대표적인 매판지식인으로 뜨르르했던 자 가운데 홍진기가 있다. 국권상실기에 법관으로 일제에 부역했다. 해방 후 이승만의 주구로 경향신문 폐간, 조봉암 처형하는 데 앞장섰다. 4·19혁명 당시 내무장관으로 발포를 명령해 민주시민 200명을 살해했다. 5·16쿠데타 세력에게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이병철의 도움으로 살아났다. 그 뒤 삼성과 인연을 맺어 화려하게 사후까지 복락을 누렸다. 중앙일보가 그의 가문에게 황금알을 낳아주는 거위다. 그의 둘째 아들이 바로 CU의 주인 홍석조다. 금수저 물고 태어나 살아온 홍석조의 60여년은 과연 얼마나 길고 무거운 것일까.


찰스 아이젠 스타인이 간과하는 진실을 말하려 한다. 아메리카 프리미엄으로 누리는 저 짧고 가벼운 시련과 혼란과 암흑은 아시아·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얼마나 길고 무거운 것인지 그가 알 수 있을까. 그보다 먼저 아픔을 실감하고 그보다 나중까지 아픔에 잠겨 있어야 하는 수십억 사람의 살갗에 그의 손이 가 닿을 수 있을까. 그의 통찰과 낙관이 고마우면서도 내가 끝내 아뜩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차이 때문이다.


“CU의 주인이 홍석조인 줄 몰랐을 때, 나는 거기서 막걸리를 여러 통 샀다. 안 뒤, 나는 발길을 끊었다. 이것이 내 실천이다. 그러면 나의 그 시간 동안, 홍석조는 무엇에 깨어 있었으며, 무엇을 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