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허황된 꿈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 마음은 지나치게 좋은 것을 꿈꾸기 두려워한다. 이런 얘기가 분노와 좌절과 슬픔을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은 누구나 지닌 상처, 즉 분리의 상처를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꿈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우리 내면의 앎은 억누를 수 없다. 이제 우리 내면의 앎을 믿고 서로 의지하고 그런 삶을 꾸려나가자. 낡은 세계가 무너져가는 지금, 우리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을까? 신성한 세계보다 못한 세계에 안주할 것인가?(482쪽)
박완서의 소설 『창밖은 봄』(1977)을 <MBC베스트극장>에서 드라마로 만들어 방영한 적이 있다(1984). 줄거리 많은 부분을 잊어버렸지만 오랫동안 기억하는 한 장면이 있다. 식모 일을 하던 길례(서갑숙 분)와 막노동을 하는 정씨(이대근 분)가 어렵사리 부부의 연을 맺어 살아가는 어느 겨울. 일이 잘 안 되다 그날은 운이 좋았던지 조금 큰(?) 돈을 손에 쥔 남편이 생선 한 손 사들고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향한다. 생선을 받아들고 반색하던 아내의 얼굴에 갑자기 어둠이 깔린다. 남편에게 말한다. (바로 그 문장은 아니지만 이런 내용임에 틀림없다.)
“여보, 우리 이렇게 잘 살아도 되는지 겁이 나요.”
무슨 말인가. 행복한 시간이 덧없이 사라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랄 수 있겠다. 전혀 달리, 섬광처럼 찾아온 행복을 한껏 기림으로써, 불행을 생의 기조로 여기며 살아온 사람이 자신의 불행한 운명에 곡진히 헌사를 바치는 것이랄 수도 있다.
불행한 운명에 바치는 곡진한 헌사는 분리문명 깊숙이 던져진 평범한 사람이 추구할 수 있는 실재the Real의 미학이다. 현행 화폐시스템 속에서 행복의 예찬과 축원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언어 착취며 조롱인지 경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지 않나.
20대 후반, 참된 삶의 지향과 각성·구원 문제로 깊이 고뇌하고 있던 내 가슴에 이 장면은 육중하게 각인되었다. 내가 각성·구원 문제를 인간 지평에서 떠나지 않는 것으로 닻 내리게 만든 예리한 한 순간이었다. 여적 내 사유의 정수리에는 쪼그만 질문 구멍이 뚫려 있다.
“그대, 황홀한 행복이 삶의 지향이며 의미인가?”
우리가 꿈꾸는 신성한 세계는 결코 궁창에 둥실 떠 있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우리가 구태여 “믿고 서로 의지하고” 꾸려가야 할 신성한 세계는 분리시대의 아프고 슬픈 기억을 제거해 몰아넣는 망연한 환희 도가니가 아니다. 그런 것이라면 우리가 지향해서도 안 되고, 그럴 필요도 없다. 신성한 세계에는 분명히 선물이 필요한 사람과 선물을 주려는 사람이 각각 존재한다. 그냥 주어야 하는 사람과 감사를 표하며 받아야 할 사람이 따로 존재한다. 서로 견딤을 주고받으며 기다린다. 그 과정마다 희로애락을 두루 실감한다. 우리의 신성한 세계에 천사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