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치유의 본질에 대하여 - 노벨상 수상자 버나드 라운이 전하는 공감과 존엄의 의료
버나드 라운 지음, 이희원 옮김 / 책과함께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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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슴에 불편한 느낌을 호소하는 환자의 병력을 세심히 물어보면, 사회적으로 혹은 가정 내에 어려운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주 증상을 환자가 말하는 것과 다르게 설정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환자는 흔히 “선생님,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젠데요·······”라고 말한다. 종종, 나는 환자의 가정이나 직장 문제, 심리적 문제에 개입하며 어떤 경우에는 세계적인 문제에까지 관여하게 되는데, 보통 환자가 겪는 가장 큰 문제는 가정 내에서 일어난다. 일단 문제가 밝혀지면 약물보다는 대화가 가장 중요한 치료법이 된다. 주 증상을 환화하기 위한 약물처방은 대부분 잘못된 것으로서, 사실 수많은 약물들이 효과가 없으며, 그로 말미암아 의료비가 상승하기 마련이다.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환자는 다른 의사나 병원을 찾아다니게 된다. 그리고 주 증상을 완화하기 위해 처방하는 약물은 부작용이 잦아서, 환자는 결국 비싼 수술이나 주사 등의 방법에 의존하게 된다.(42-43쪽)


미국의 의사가 그려낸 진료실 풍경과 환자의 동선 추이가 우리나라 상황과 너무 닮았다. 아니, 우리가 저들을 답습하고 있으니까 우리가 닮은 것이다. “선생님,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젠데요·······”를 “선생님, 다들 그러고 살던데요·······”로만 바꾸면 완벽히 우리나라 의사가 쓴 글이다. 문제는 현실을 알든지 모르든지 간에 우리나라 의사 가운데는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전혀 없다는 데 있다.


세계적인 문제에까지 관여”하다니. “대화가 가장 중요한 치료법”이라니. “약물처방은 대부분 잘못된 것”이라니. 수많은 약물들이 “효과”가 없고, 심지어 “부작용”이 잦다니.


하기는 저자 정도 되는 고수니까 대놓고 이렇게 말할 수 있지,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미국에서도 동료 의사들한테 뭇매를 맞았을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단도직입으로 말하면 물론 돈 때문이다. 돈을 위해 약물을 먹인다. 약물을 먹이려 육체의 질병이라는 물질적인 근거를 마련한다. 물질적인 근거가 보장하는 약물의 권위는 급기야 보편성까지 획득한다. 보편 치료를 가능하게 한 마지막 물질이 다름 아닌 뇌다. 뇌에 약물을 투입해 정신의 질병까지 치료한다고 선포함으로써 약물의료는 마침내 유구한 서구 이원론을 타파하고 일원적 유물론을 완성한다. 일원적 유물론 의학은 돈 신을 멸절의 전능으로 부추기는 악마의 유물론이다.


악마의 유물론에 누가 맞서는가? 돈교의 사제인 의사에게 기대하지 마라. 아픈 사람이 “사회적으로 혹은 가정 내에 어려운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해야 개벽이 일어난다.


“선생님, 그거야말로 각별히 중요한 문제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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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치유의 본질에 대하여 - 노벨상 수상자 버나드 라운이 전하는 공감과 존엄의 의료
버나드 라운 지음, 이희원 옮김 / 책과함께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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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자의 병력을 듣는 목적 중에는 중요한 정보를 얻기 위한 것도 있지만, 환자에게 귀를 기울임으로써 환자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것도 있다. 그리고 이 부분이야말로 매우 중요하다. 쉬운 것처럼 보이지만, 듣기는 의사가 해야 할 일 가운데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기술에 속한다. 의사는 환자가 말하지 않는 문제까지 들을 수 있도록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36쪽)


말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다는 이치는 너무 익숙해서 소홀히 여겨진다. 다시 정색하고 살피건대, 근본적으로 듣기는 말하기 다음에 온다. 말하기 온 과정을 기다리면서 말해진 그대로 듣는다. 그대로 들으므로 듣기는 듣는 사람이 마음을 열고 말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온전히 들어오게 한다. 온전한 듣기는 듣는 사람이 말하는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기가 아니다.


이런 내 생각은 저자와 다르다. 같은 사태를 다른 측면에서 파악하는 것이라고 눙칠 수 없다. 숙의로 치유하는 동안, 내가 아픈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려고 들은 적은 없다. 그들이 내 마음속으로 들어오도록 넋 놓고 하염없이 듣기 위해 나는 내 거점을 지우는 곡진함에 들었을 따름이다. 아픈 사람이 스스로 주도적으로 자신의 내러티브를 구성할 수 있도록 하려고, 치유하는 사람의 판을 치워 놓는 무無(위爲)의 감수성에서 나온 자세다.


무(위)의 감수성은 말하지 않는 문제까지 들으려 할 때,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 믿고 맡기는 고요함이 아픈 사람의 말과 말 사이 침묵에 공명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힘을 빼고 느슨하게 그물을 풀어놓으면 오히려 빠짐없이 걸린다[天網恢恢 疏而不漏천망회회 소이불루].


버나드 라운에게는 요령부득의 이야기다. 그는 그의 감수성으로 질병 너머 인간을 포착한다. 나는 나의 감수성으로 그리 한다. 이 비대칭의 대칭은 세계 구성·운동의 이치이기 때문에 둘 중 하나만 진실일 수는 없다. 가능하다면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문제는 현실에서 치료자가 환자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의사는 기계가 제시한 진단 결과와 제약회사의 처방 매뉴얼에 따를 뿐이다. 무위고 유위고 간에 아픈 사람의 말을 들어야 무슨 교류든 할 것 아닌가. 아픈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시공에서 예술 치유가 일어나는 법은 없다. 인간이 듣는 인간homo auditus이라는 진실은 의료화사회에서 더욱 뼈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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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직이 합의된 후 김득중 지부장이 축하 인사를 받고 있다.


생때같은 목숨 서른을 잃고서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119명이 드디어 공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 한 사람이 복직될 때까지,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자행한 폭력과 협잡을 단죄할 때까지 끝난 일이 아니지만 일단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축하할 만하다.



* 2014년 대한문 분향소 옆 길바닥에서 노동자 한 분에게 시침하고 있다.


2011년 봄 제주 강정마을로 날아가 투쟁하던 주민과 활동가들에게 침 치료를 하고 돌아온 직후, 정혜신 선생이 쌍차 해고노동자와 가족을 위해 평택시청 공간 하나 얻어 집단으로 심리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접했다. 트위터 쪽지로 정혜신 선생에게 연락했더니 침 챙겨들고 일단 내려와 보라는 답이 왔다. 그 날부터 심리치료 공간 아래 한 귀퉁이에 ‘자리 펴고’ 침 치료를 시작했다. 집단 심리치료에 적응이 어려웠거나 참여하지 않았던 몇 사람은 개인적으로 상담을 하기도 했다. 가족 운동회가 열리는 운동장 시설 한 귀퉁이에서, 대한문 분향소에 가서는 길바닥에서, 김진숙 지도위원 크레인을 향해 노동자들이 천리 행군할 때는 식사하거나 쉬는 자리에서, <와락>이 열렸을 때는 치과 치료 공간 한 귀퉁이에서 침 치료를 했다. 쌍차 노조 이창근 기획실장 부탁으로 수배 중이던 송경동 시인을 찾아가 침 치료를 하기도 했다. <와락>이 제법 안정을 찾아갈 무렵 문턱 없는 한의사회 후배에게 치료를 맡기고 이따금씩 가족들을 돌보는 정도로만 인연을 이어갔다. 시간이 흘러도 복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노동자들의 투쟁은 고공농성, 단식, 행진, 인도 원정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나는 그 과정에 서명, 행진 참여, 지지 방문, 한방차·한약 지원으로 함께했다. 대한문에 김주중 조합원의 분향소가 마련되면서는 다시 대한문이 순례지가 되었다. 당분간은 분향소가 유지되겠지만 살아생전에 대한문 분향소로 다시 향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빈다.



<버스라 쓰고 부스라 읽는다> 방송하고 있다. 바로 앞 프로를 김선우 시인이 진행했다. 


쌍차 해고노동자와 그 가족 옆에 멀찌막이 나지막이 머물렀던 7년의 세월 동안 나는 많이 부끄러워하고 괴로워하고 고마워했다.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 옆을 지키던 수많은 사람들과 아름답게 만나 소중한 인연 되었다. 이창근 실장이 기획한 인터넷 방송 <버스라 쓰고 부스라 읽는다> 덕분에 만난 김선우 시인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생의 남은 날들 동안 이들 가운데 대개는 서로 아는 듯 모르는 듯 살아가겠지만,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김정우, 김득중, 김정욱, 이창근, 고동민, 복기성·······그리고 이자영, 권지영, 조은영, 이정아······그리고 주강이, 가온이·······그리고 평택시청과 <와락>에서 아이들과 놀아주던 사람들, 대한문으로 밥 해다 날랐던 사람들·······



* <와락>에서 만났던 가족들. 이자영(이창근 실장 부인)씨와 주강이 모습이 보인다. 


이제 기억은 기억대로, 그리움은 그리움대로, 아쉬움은 아쉬움대로 둔다. 앞으로 그들이 의로운 만큼 행복하고, 행복한 만큼 의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소식을 들으며 나도 행복하고 의로워지리라 믿는다. 삼가 한 시대를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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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치유의 본질에 대하여 - 노벨상 수상자 버나드 라운이 전하는 공감과 존엄의 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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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서 강조하는 문제가 특히 한국의 상황에서는 더욱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의 의료제도는 미국을 모델로 하여 출발했을 뿐 아니라 어떻게 보면 잘못된 방향으로 급속히 진행되고 있기도 합니다. 한국은 전문의가 차지하는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으며 일반의는 전체의 3분의 1을 밑돕니다. 전문의 중에서도 4분의 1이 두 가지 이상의 전문 과목을 표방합니다. 전문의는 자신의 전문 영역에만 집중적인 관심을 가진 의사입니다. 그런 집중적인 관심으로 말미암아 의료장비에 의존하게 되고 이는 의사와 환자 사이의 이해와 신뢰 구축에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의사들이 점점 더 최신 약을 처방하는 배후에는 제약회사가 있고 의사들은 이들 회사와 결탁하여 이익을 취하고 있습니다. 내가 알기로 한국은 세계에서 약제비가 가장 높은 나라입니다. 한국의 건강보험 총지출에서 약제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30%를 넘는데, 약제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다는 비판이 크게 제기되고 있는 미국조차 그 비중이 10%에 불과한 것과 비교됩니다.·······

  한국이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따라 국민의 건강뿐만 아니라 사회적 안녕도 크게 영향을 받게 될 것입니다. 미국 의료제도를 답습한 전문 과목 중심 치료, 지나친 의료장비 위주의 병원 진료는 엄청난 재정적 부담을 안게 되므로 사회의 다른 부문에 투자할 자원을 잠식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인 미국에서도 이런 형태의 의료제도가 야기하는 재정적 부담을 감당할 수 없어 의료개혁을 추진하고 있습니다.(9-11쪽)


이 책은 2003년 『치유의 예술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바 있다. 위 인용문은 그 때 저자가 보낸 <한국의 독자들에게> 중 일부다.


2003년에 미국인 의사가 알고 있었던 한국 의료계의 전문의·약제비 관련 부조리를 나는 15년이나 지난 그의 글, 그것도 2003년 번역서가 절판된 뒤 다시 번역해 펴낸 책에 되 실린 글을 읽고 알게 되었다. 한심하다는 생각, 분노가 치민다는 생각이 갈마들며 심사를 뒤집는다. 『녹색의학 이야기』를 쓰는 동안 웬만큼 단련되었다고 믿었으나 어둠을 대하는 감각은 찰나마다 거듭나는 모양이다.


그 동안 상황은 어떻게 변했을까? 물론 더 악화되었다. 전문의 비율은 7%, 약제비 비율은 3%(내가 찾은 통계자료에 따르면 총 진료비 중 약제비 비율이 23.5%에서 26.5%로) 더 높아졌다. 국민의료비 대비 공공재원 비중을 보면 한국의 상황을 좀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2014년 통계로 일본 84.6%, 미국 제외한 서구 70%대 후반, OECD 평균 73.1%, 한국은 56.5%다. 지난 10년 동안(2005-2015) 경상의료비 평균 증가율은 한국이 OECD 국가 중 1위다. 이런 좋지 않은 지표 추이는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것이다.


한국의 의료개혁은 가능할까? 물론 난망하다. 박근혜 파면 뒤 정치가 돌아가는 꼴을 보면서 우리는 매판수구세력의 힘이 얼마나 강고한지 훨씬 더 뼈저리게 체득해가고 있다. 저들이 어찌 황금알 낳는 거위를 ‘근본 없는 것’들에게 넘겨주겠나. 개혁 갔으니 개벽 오라. 개벽은 작고적은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깨우는 새벽이다.


옆에 계신 작고적은 그대, 우리 이미 구면이잖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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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치유의 본질에 대하여 - 노벨상 수상자 버나드 라운이 전하는 공감과 존엄의 의료
버나드 라운 지음, 이희원 옮김 / 책과함께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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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제는 『THE LOST ART OF HEALING』이다. ART를 왜 본질이라고 번역했는지 그다지 궁금하지 않다. 저자가 치료 대신 치유라는 말을 쓴 의도를 헤아린다면 예술이라는 본디 표현을 살리는 편이 나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의 사전적 의미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창조하는 일에 목적을 두고 작품을 제작하는 모든 인간 활동과 그 산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어떤 재주나 능력이 탁월하여 아름답고 숭고해 보이는 경지에 이른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도 쓴다.


치유를 예술이라 할 때는 어떤 의미에서일까? 치유는 질병 너머 사람과 삶까지 한 아름에 품으므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창조하는 활동임에 틀림없다. 현실에서 대부분 의사의 재주나 능력으로는 치유를 행하지 못한다. 능력이 탁월하여 아름답고 숭고해 보이는 경지에 이른 소수만이 치유에 가 닿는다. 행위 내용에서도 수준에서도 치유는 예술이다.


치유는 질병에 대한 정확한 지식으로 치료하고 나아가 사람과 삶에 대한 결곡한 지혜로 더 큰 변화를 이끌어낸다. 변화가 자아내는 감흥이 치유를 예술이게 한다. 예술로서 치유는 사람과 삶을 신성으로 인도한다. 신성의 완전함은 질병으로 배어들어 치유로 배어난다. 이 진리를 깨닫는 데 백색의학과 산업 의료는 백해무익하다. 치유예술혁명의 때가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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