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 나이듦에 관한 일곱 가지 프리즘
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정하린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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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그렇다. 이제 생각난다. 나는 어떤 사람의 태양계 한가운데 있는 태양이 아니라는 것. 스스로를 거기에 두려고 안달하면서, 나는 특별하고 내 인생도 어떤 특별한 의미를 지녀야 한다고 우긴다면, 아마 절망 또는 망상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만물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것,·······새와 나무보다 더 중요하지도 덜 중요하지도 않다는 것을 이해할 때, 평화가 찾아온다.(35-36쪽)


내가 태양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기만 하면, 햇빛을 가로막으면서 그림자를 드리우는 일을 멈출 수 있다·······, 한 발짝 물러나서 햇빛이 만인과 만물을 비추도록 할 수 있다·······, 그래서 생명의 빛으로 삼라만상을 무르익게 할 수 있다·······.(38쪽)


스스로 못났다고 낮추는 사람은 결코 겸손한 사람이 아니다. 자기조롱의 배후에는 ‘나는 너희들과 달라.’라는 거드름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잘났다고 뻐기는 사람은 결코 교만한 사람이 아니다. 자기자랑의 배후에는 ‘사실 나 쓰레기야.’라는 고자질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못났다, 잘났다는 평가가 근거 없음으로써 유지되는 극단이기에 이런 어긋남이 가능하다. 극단은 분리를 낳는다. 분리된 것들은 의미로 존부를 다툰다. 다투면서 극단들은 분열적으로 공생한다. 분열적 공생은 평가의 거절로 궤멸된다. 평가를 거절하면, 존재는 있는 그대로 평화다. 나는 새와 나무처럼 만물의 일부일 뿐이다. 특별하지 않으니 의미를 따질 일도 없다. 무의미하다는 말이 아니다. 의미·무의미를 넘어 모두 존재할만한 존재라는 말이다.


자신에 대한 극단적 평가 때문에 분열적 삶을 살아가는 청년이 찾아왔다. 브라만과 언터처블 사이를 오가며 그의 영혼과 육신 모두가 기괴하게 뒤틀려 있다. 극단에서 극단으로 도망치기를 끝없이 반복하는 동안 앙큼하고 밉살스런 트릭스터 자아만 기괴하게 커졌다. 기만적 자기애에서 놓여나지 않으려는 영악함으로 똘똘 뭉쳐 집요하게 할퀴고 투덜거리고 징징거린다. 질병을 넘어 ‘자기 악’ 상태에 이미 침륜된 듯하다.


이럴 때만큼 급격히 모순 상태에 빠지는 경우가 드물다. 새와 나무처럼 만물의 일부일 따름인 내가 특별한 능력을 바라게 되니 말이다. 한 발짝 물러나서 그에게 햇빛이 비추도록 하는 일이 가능한지 묻게 되니 말이다. 평가를 멈추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곡진하게 이른 뒤, 들이지른다. 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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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정하린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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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아는 바가 없지만 이른 아침 커피를 마실 수 있다면 천국에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믿는 데는 이유가 있는데, 지옥에서는 커피콩을 볶을 수만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영혼의 양식은 유머로 발효되지 않으면 복통을 일으킨다.(32쪽)


유머는 웃음을 이끌어내는 유용한 기술에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거쳐 치유의 방편으로 넘어가더니 요즘 몸값을 올리는 전략으로까지 평가 받고 있다. 유머에 대한 일련의 도구적 이해가 만들어낸 추이다. 더 나아가 유머의 존재론적 이해를 시도해본다.


유머(에 해당하는 요소)가 있는 말글은 비대칭의 대칭이라는 전체성을 확보한다. 시종일관 진지한 말글은 이를테면 일극집중구조인 셈이다. 사물의 존재 이치에 맞지 않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나도 이런 생각에까지 닿지 못해 유머를 대개 부차사항이라 여겼다. 유머는 다만 부차사항이 아니다. 존재론적 선택사항이다. 유머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겠다.


말글에서 비대칭의 대칭을 이루려 할 때, 내가 택한 길은 두 갈래다. 하나는 산문에 운문(성)을 도입하는 것. 운문(성)은 리듬으로 유희를 일으킴으로써 진지함 일극구조를 흔드는 매력이 있다. 유머에 비해 은근하기 때문에 듣고 읽는 이가 감지하기 쉽지 않는 것이 문제다.


다른 하나는 유머와 반대편에 선 것이다. 웃음 아닌 눈물(의 감동)을 이끌어내는 감성에 더 주의를 기울였다. 여느 사람들이 웃음치유를 전파할 때 임상의로서 울음치유를 설파했던 맥락과 정확히 일치한다. 웃음=긍정, 울음=부정이라는 통속한 이해를 거절하는 입장에는 지금도 변함없다. 엉엉 우는 것이야말로 대大긍정이다.


유머, 그러니까 웃게 하기에 대한 자세를 정색하고 다시 생각하는 일은 entearing-적당한 영어가 없어서 만든 신조어-, 그러니까 울게 하기에 대한 자세를 정색하고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게 결과다. “영혼의 양식은 entearing으로 발효되지 않으면 변비를 일으킨다.” 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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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실체에 가까이 다가서면 삶이란 선물에 눈이 뜨이고 경외감을 느낀다(32쪽)


나는 이 말을 이렇게 바꾼다.


“삶이란 선물에 눈이 뜨이고 경외감을 느끼면 실체도 모른 채 일으키는 죽음에 대한 발화를 멈추게 된다.”


인간의 삶과 죽음 문제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포지션은 빛의 입자와 파동 문제에서 취할 수 있는 것과 다르다. 죽음 자체를 실험·관찰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의학적으로 죽음이 확정된 이후 나타나는 결과적 현상을 죽음 자체라고 할 수 없다. 육체의 생명 활동이 멈추고 부패가 진행되는 과정 전체는 물론, 분리라 하든 소멸이라 하든 정신 현상이 사라진 것을 죽음 자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 무슨 실체를 논할 근거가 있는가.


종교나 정신수련 집단이 거의 예외 없이 주장하는 이른바 사후세계 이야기도 본질적으로 마찬가지다. 삶과 죽음에 적용하는 이원론과 정신과 육체에 적용하는 이원론이 서로 충돌하는 줄도 모르면서 가장자리에서 일어나는 현상, 이를테면 유사체험에 죽음의 이름을 붙여 다양하고 번쇄한 훤화를 남겨 놓은 것들이 경전이란 이름으로, 지혜서란 이름으로, ‘천국이 있습니다.’ 따위의 감언이설로 준동하고 있다. 모두 가짜다.


진짜는 선물인 삶에 눈 뜨고 경외감 느낀 이야기를 곡진하고 결곡하게 하는 것뿐이다. 제대로 살고, 그 삶을 실감하는 일이 멈추는 찰나 시간 위에 죽음의 실체는 카이로스적으로 존재한다. 나머지 우수마발은 살아 있는 타자의 췌언에 지나지 않는다. 삶의 실체를 말할 때 건너편 가장자리에서 일으켜지는 침묵으로써만 죽음의 실체에 접근이 가능하다. 요컨대 죽음을 아는 길은 삶을 아는 데 있고, 그 삶을 아는 길은 삶과 죽음의 가장자리에 있다.


파커 J. 파머의 말은 삶의 끝자락에 가까이 다가서면 삶이란 선물에 눈이 뜨이고 경외감을 느낀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상식 수준의 교훈에서 멈춘다. 퀘이커 교도임을 감안해 영성적으로 이해하면 그의 사회적 삶과 결합해 한결 기품 있는 고백으로 자리매김할만하다. 이것은 그의 인연이며, 그 인연에 그는 최적화된 감응을 하고 있다.


나는 나로서 내 인연에 감응한다. 내 인연은 바리다. 바리인연에서 삶으로 죽음을 말할 때, 나는 오직 눈물로 시작한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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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보건대 모든 것(올바르게 이해한 것과 잘못 이해한 것)을 끌어안으면 전체성의 은총이 임하는 과정에 대해 경외감을 느낀다.(30쪽)


  온전함이란 완전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부서짐을 삶의 총체적인 부분으로서 끌어안는다는 뜻이다.(31쪽)


자연스러운 의미 연계를 위해 인용문 순서를 뒤집는다. 문장들의 번역 일부를 의미의 선명성을 고려해 바꾼다.


  온전함이란 완벽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부서짐을 전체 삶의 일부로 끌어안는다는 뜻이다.


  돌아보건대 모든 것(바르게 포착한 것과 그르게 포착한 것)을 끌어안으면 전체성의 은총이 임하는 과정에 경외감을 느낀다.


자신이 종사하는 업계에서 그 이름 석 자 뜨르르하게 떨쳐온 중년의 여자 사람이 공황과 강박을 호소하며 찾아왔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완벽주의자였다. 완벽주의가 그를 그 지경으로 몰아넣었다.


완벽주의란 무엇인가? 모자라거나 잘못한 것이 없는 상태가 있다는 전제 아래 전천후의 평가를 거치며 그 목표에 이르려 하는 삶의 태도다. 이 당위Sollen는 고도한 집중을 요구한다. 집중 대상은 모든 것이다. 모든 것에는 쓸데없는 것도 포함되기 마련이다. 쓸데없는 것에까지 고도로 집중하다 완벽주의자는 소진된다. 소진된 완벽주의자는 결국 헛똑똑이다. 이 헛똑똑이를 양산하기 위한 거대 음모가 분리문명이다.


분리문명은 부서진 것, 그르게 포착한 것을 거세함으로써 일부를 가지고 전체를 구성하려는 환유다. 환유는 완벽의 전형으로 국가와 돈, 그리고 유일신의 삼위일체 내러티브를 창작했다. 삼위일체 내러티브는 전체 진실, 그러니까 비대칭의 대칭을 은폐하고 이원론에 터한 일극집중구조를 영속화한다. 이원론에 터한 일극집중구조를 거절하고 전체성의 은총 앞에 무릎 꿇는 것을 온전함이라 한다.


온전함은 모자라거나 잘못한 것이 없는 상태가 있다는 전제를 세우지 않는다. 현재 상태를 평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인다. 반드시 이르러야 할 목표는 없다. 부서진 것, 그르게 포착한 것을 끌어안고 그때그때 세상과 마주할 따름이다. 이 자연Sein은 관대한 비非집중을 연다. 비非집중은 집중과 함께 작동한다. 소진될 일이 없다. 온전한 사람이야말로 참똑똑이다. 참똑똑이가 세상을 바꾼다.


완벽주의 그 여자 사람에게 말해주었다.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 섰다고. 삶의 자세를 전복해야 한다고. 말을 잘 못 알아듣는다. 집중에 집착해온 사람에겐 어려울 문제일 터. 사지선다형으로 하면 어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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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동 지나도록 선연해서 처연한 가을 잎새들



히스파니아 제9군단




라스트 모히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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