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 나이듦에 관한 일곱 가지 프리즘
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정하린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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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자아의 탐구와 하느님에의 탐구, 그것은 차이가 없는 구분으로서, 나의 영적 생활을 구원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으로 더욱 깊이 인도해주었다.(95쪽)


차이가 없는 구분”이 실제로 가능한가?


이 질문은 단단한 형식논리로 양육된 사람을 부득불 아포리아에 빠뜨린다. 파커 J. 파머도, 그를 이끈 토머스 머튼도 이 아포리아에서 온전히 자유롭지 못한 듯하다. 참 자아 탐구는 참 자아“” 탐구이고, 하느님 탐구는 하느님“에의” 탐구라 하니 말이다. “의”와 “에의”는 다만 글자 하나 차이가 아니다. 절대타자로서 하느님은 그들에게 결코 불식될 수 없는 개념이며 사유이리라. 혹은 아무리 참 자아라고 해도 결국은 자아의 확장에 지나지 않거나.


이런 한계가 “신에게 부여받은 자아”(95쪽)를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인연에 온전히 충실한 파커 J. 파머에게 더 오를 경지 운운하도록 독려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그의 삶에서 풍겨나는 거룩함이 내가 궁구하는 거룩함과 같은 점이 있는 한 감사함으로 교감할 수 있다. 내가 지닌 다른 점은 내 인연 속에서 거룩함으로 가꾸면 된다.


내게는 참 자아 탐구는 참 자아“” 탐구이고, 하느님 탐구는 하느님“에의” 탐구인 것이 아니다. 하느님 탐구도 하느님 탐구다. 내게는 참 자아가 자아의 확장이 아니다. 소거다. 내게는 하느님이 절대타자가 아니다. 네트워킹이다. 내가 드러내는 것은 신에게 부여받은 자아가 아니다. 신에게 배어들고 배어나는 자아다. 내게는 참 자아가 하느님이다.


구체적 실재에서 무슨 차이가 있는가?


나는 내 경계 안팎에 있는 모든 하느님을 “각각 그들의 참된 이름으로 부른다.”(리베카 솔닛의 『CALL THEM BY THEIR TRUE NAMES』에서 영감을 얻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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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깊은 수준의 소통은 소통이 아닌 교감입니다.·······그것은 말을 넘어서고 개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토머스 머튼


  나는 토머스 머튼을 그가 죽은 이듬해에 만났다. 그의 글과 “말을 넘어서” 펼쳐지는 교감을 통해 만났다. 친한 친구들이 오랫동안 헤어져 있다가 다시 만날 때처럼 매끄럽게 만났다. 머튼과의 우정 그리고 지난 45년 동안 그것이 내게 준 희망이 없었다면, 나는 내 직업에 대한 믿음을 그나마 그렇게 불완전한 채로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90-91쪽)


거의 5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의 글을 읽고 있는데, 여전히 거기서 우정, 사랑, 그리고 구원(희망의 메신저가 되는 데 필수 요소들)을 발견한다. 희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뭔가를 촉구하거나 독려하는 것과 무관하다. 그것은 영혼을 존중하고 마음을 북돋우며 정신에 영감을 주는 것, 발걸음을 서두르는 것, 그리고 그 길에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상처를 치유하는 것일 뿐이다.

  거의 반세기 동안, 머튼은 내 여정을 밝히면서 동행해주었다. 내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볼 수 있도록 생기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93-94쪽)


파커 J. 파머는 토머스 머튼이 열어준 길을 참 자아, 역설, 커뮤니티, 부서진 세계 속 ‘감춰진 전체성’의 넷으로 정리했다. 이 넷을 내 버전으로 바꾸면 바리, 화쟁, 아미타림(바리누리), 일심(비대칭의 대칭)이다. 내 토머스 머튼은 분황 원효다. 원효의 영성은 바리에 젖줄을 대고 있다. 아니, 그는 성육신한 바리다. 바리는 버림받은 “사회의 주변부”(토머스 머튼) 사람들이다. 바리로서 바리를 향해 가는 화쟁의 도상에서 바리누리가 꾸려지고 마침내 비대칭의 대칭인 일심세계가 드러난다.


나는 바리로 태어나 바리로 살다가 열아홉에 원효의 옷자락 하나를 처음 붙잡은 뒤 45년째 “거기서 우정, 사랑, 그리고 구원(희망의 메신저가 되는 데 필수 요소들)을 발견”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 발견은 “그의 글과 “말을 넘어서” 펼쳐지는 교감을 통해” 온다. 교감은 “친한 친구들이 오랫동안 헤어져 있다가 다시 만날 때처럼 매끄럽게” 이루어진다. 처음 원효의 글과 만났을 적 기억과 느낌은 아직도 나를 전율케 한다. 마치 내가 쓴 것을 읽는 듯 어휘와 문장을 하나하나 새기지 않았음에도 뜻이 통짜로 빨려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 경험은 내 독서 태도 근본을 뒤집어 놓았다. 내 생각은 이렇게 전복되었다.


“글을 읽음으로써 그 너머의 교감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교감은 이미 이루어져 있다. 글은 그것을 일깨우는 확실한 기회이자 부족한 방편일 따름이다.”


교감은 근원적·존재론적 상호작용이다. 소비자본주의가 부추기는 무드의 교류가 아니다. “내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볼 수 있도록 생기 있는 길을 열어”주는 공현사건이다. 공현사건은 우리가 ‘따로 또 함께’ 존재한다는 진실의 증거다. 이 증거는 말의 도움이 필요 없다는 단 한마디 말만 허한다. 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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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은 환상을 꿰뚫어 실재에 가닿는 하나의 방법이다.

  ·······실패는 나 자신과 내가 세상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냉정한 진실 앞에 나를 마주시킨다. 성공과 그것이 빚어내는 환상의 햇볕을 기분 좋게 쬐고 있을 때는 피하게 되는 진실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실패는 명상적 삶이 취할 수 있는 여러 형태 가운데 하나다.(86-87쪽)


인간의 영혼이 이 세상에서 더 이상 힘쓰지 못한다고 확신할 때, 그때가 우리 영혼을 누군가에게, 어딘가에서 드러낼 시간이다. 또한 그것은 재앙에 의한 명상가가 되어 얻을 수 있는 결실 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89쪽)


“법적·경제적·직업적 인간으로 살해에 준하는 일을 당했”을 때, 정말 힘들었던 것은 실패를 받아들이고, 불안과 절망을 견디는 일이 아니었다. 내 아픔엔 빗장 지르고 남의 아픔을 맞아 들여 치유와 희망을 이야기하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내 “영혼이 이 세상에서 더 이상 힘쓰지 못한다고 확신”하는 상태였으므로 상담 예약 잡는 간호사 목소리가 마치 형벌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그만둘 상황도 아니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 채로 그냥 맡기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으로 마주앉았다. 아,


그렇구나. 바로 “그때가 우리 영혼을 누군가에게, 어딘가에서 드러낼 시간”이구나. 이따금 비수처럼 파고드는 공포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어느 때보다 곡진함으로 숙의를 끝냈다. “나 자신과 내가 세상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냉정한 진실 앞에 나를 마주시킨” 실패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환상을 꿰뚫어 실재에 가닿는 하나의 방법”을 깨치면서 그때는 몰랐지만 나는 “재앙에 의한 명상가”가 되었던 게다.


실패가 끝내 실패로 남는 것은 성공으로 보상받으려 할 때다. 실패의 보상은 성공이 아니라 실재다. 실재는 인간이 이르러야 할 기본적이면서도 궁극적인, 사소하면서도 위대한 세계다. 이 비대칭의 대칭은 환상을 꿰뚫어야 감지된다. 환상이 권력인 이 세상에서 실패는 저항이다. 모든 저항은 성패의 경계를 넘어간다. 경계 넘는 일의 개 짜릿함,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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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은사에 가면 추사의 향을 달리 맡을 수 있는 편액을 둘 만난다. 



<판전>



<영산전>



위 것은 추사가 죽기 사흘 전에 남긴 유작이다. 추사체를 머금되 훌쩍 넘어 스스럼없이 네오테니에서 노니는 절정고수의 무애 자재함으로 신비감마저 군더더기 감정 같이 느껴지게 한다. 사찰에 걸릴 편액임을 알면서 병중에 썼다는 말을 굳이 남긴 까닭은 알 길 없으되 아마 이조차도 경계 너머 마음 아닐까 싶다. 


아래 것은 추사의 제자 추금秋琴 강위姜瑋의 문인이었던 백련白蓮 지운영池雲英의 글씨다. 추사체에 대한 초보적 기억만으로도 이 글씨에서 추사를 떠올릴 수 있다. 그 눈으로 보면 판전 글씨보다 잘 쓴 글씨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나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가 그러면 판전 글씨처럼 써야 하느냐에 대한 답은 아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보편일 수 없다. 자신의 지향과 삶의 조건이 만나는 시공에서 지극함으로 각기 인연을 지을 따름이다. 추사는 추사의, 백련은 백련의 마음 다함에서 노닌다. 나는 내 마음 다함에서 노닌다. 이번은 영산전 앞에 오래 머문다. 이 머묾이 그저 스쳐갈 작은 우연이라면 그게 고마운 만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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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밀히 들여다보지 않은 삶이 살만한 가치가 없다면, 마찬가지로 생기 없는 삶은 면밀히 들여다볼 가치가 없습니다.(78쪽)


Simon McEwen이 2017년 10월 2일에 쓴 “The unexamined life if surely worth living, but is the unlived life worth examining?”이란 글 전문을 인용한다.


Recently, I feel I’ve achieved a state of personal authenticity. I’ve obtained a sense of clarity of my own values, goals, and opinions and have achieved a healthy distance from the effects of negative external opinions and have steered off the path towards becoming a product of our culture. In a recent article, I discussed my admiration for authenticity and in it, highlighted the importance of self-knowledge and dove deeper into the echoes of Socrates words “An unexamined life is not worth living.”


I’m keen to challenge myself on this statement. I recently finished a great book by Daniel Klein titled ‘Every Time I Find the Meaning of Life, They Change it’. A Harvard philosophy graduate and as a life-long philosopher he has explored the full range of ideologies adopted by thinkers across time. What I really enjoyed about this book was its simple structure. It was based on pithies which Daniel collected throughout periods in his life. He laid out each pithy, discussed the time he recorded it, and then went on to explore that thought in the present moment. One of the many pithies Daniel recorded is a polar-opposite counter question to Socrates’ quote mentioned above. Adam Phillips, British psychoanalyst and philosopher said, “The unexamined life if surely worth living, but is the unlived life worth examining?”


I don’t think it’s a stretch to say that the modern man has an innate fondness for avoiding living in the present. We are so preoccupied with the lives we have not lived that we forget about appreciating the one we actually have. We have many reliable cognitive abilities to drift away from the present by fantasying “What next?” or the clincher, “What might have been?” Phillips argues that “We think we know more about the experience we don’t have than the experiences we do have.” This “unlived life” of our imagination becomes our tormentor as it heightens in clarity and significance over our present life. Phillips continues, “And what was not possible becomes the story of our lives… Our lives become a protracted mourning for, an endless trauma about, the lives we are unable to live.”


We trap ourselves in the vicious cognitive distortion of playing the “What if” game, a deeply ungratifying way to live and certainly not a way in which one can nurture a positive attitude toward the life we now have and have lived. It is on the other end of the spectrum of a life of gratitude for simply being alive. Phillips makes us question our fundamental philosophies and notion of ‘self-actualisation’:“I don’t want to say self-knowledge is useless. But we need to know when self-knowledge is genuinely useful and when it isn’t. There are some situations where the struggle to ‘know’ about an experience is a distraction from the experience itself.”


I still believe a purposeful acquisition of self-knowledge is an essential act required for individuals to obtain a sense of clarity and comfort necessary to navigate and handle the impermanence of life. However, I do agree that there is a line which can be easily crossed, if not carefully considered, which distracts us from the present moment and brings us no benefit; ultimately resulting in loss of time, a likely increase in personal torment, all for the acquisition of superfluous information.


Simon McEwen에 따르면 “The unexamined life is not worth living.”은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고, “The unexamined life if surely worth living, but is the unlived life worth examining?”은 여기에 Adam Phillips가 거꾸로 제기한 의문이다. 파커 J. 파머가 그 사실을 알고 평서문으로 바꿔 인용한 것인지, 스스로 이렇게 정리한 것인지 알 수 없으되, 이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이 문제를 이렇게까지 거론하는 까닭은 “면밀히 들여다보지 않은”이란 번역문구와 “생기 없는”이란 번역문구의 뜻을 도무지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Simon McEwen의 논지에 기본적인 동의를 한다고 전제할 때, unexamined는 “self-knowledge”와 unlived는 “self-actualisation”과 평행이다. “면밀히 들여다보지 않은”, 특히 “생기 없는”은 오역에 가깝다. “생기 없는”이라고 번역한 unlived는 말 그대로 “have not lived”(Simon McEwen)다. 위 본문의 뜻은 아마 이 정도지 싶다.


“스스로를 성찰하지 않는 삶이 살만한 가치가 없다면,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살아내지 않은 삶은 성찰할 가치가 없다.”


스스로를 살아낸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의 경험에서 삶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경험을 우선순위에 놓는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상상하고 가정하고 평가해서 만든 내러티브에 정신을 파느라 삶의 몸/물질적 본질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아니 근원적인 문제다. 삶은 내 몸에서 시작해 네 몸으로 건너가는 사건이다. 마음은 이 사건을 온전하게 하려고 인간에게 부가된 무엇이다. 인간이 인간이란 종적 집착을 놓아버린다면 마음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그야말로 무심히 신의 길을 간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스스로를 성찰하는 삶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면, 스스로를 온전히 살아내는 삶은 차마 성찰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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