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폭발 - 타락
스티브 테일러 지음,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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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려운 새 환경이·······마음과 몸의·······분리를 촉진했다. 그리고 자성과 합리성의 더 큰 능력이 필요해졌으므로, 이것이 “분리되고 예리하며 공간적 영역을 지닌” 새로운 정신을 창조하였다.


사하라시아인들은 더 많이 생각하고, 자성 능력을 발전시키·······게 되었다.·······자성이란 내 머릿속의 “나”가 자기 자신에게 수다를 떠는 것이다.


가뭄과 사막 열과 먼지로 인해 사람들이 이제 겪기 시작했을 순수한 육체적 고통과 불편함도·······정신과 육체 간의 분리를 재촉했을 것이다. 이는 정신이 육체에서 떠나 동일시하지 않으려고, 다른 무엇으로 보는 경향을 초래했을 것이다.(167-168쪽) (인용자가 본문 순서를 바꿈)


최근 공황발작panic attack을 겪고 나서 치료 받아야겠다 싶어 서둘러 찾아온 어떤 분이 말했다. “원인을 모르겠습니다. 여태까지 안정되고 여유로운 정신으로 살아왔거든요.” 내가 말했다. “그 안정과 여유는 삶의 악조건에 적응하려고 구성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갑옷 입은 정신이라고나 할까요.”


갑옷을 입으면 갑옷 바깥 세계에서 분리되어 독립과 안전을 보장받고 바깥 세계에 무감해진다. 갑옷 입은 정신은 무엇보다 먼저 육체에서 분리되고 육체에 무감해진다. 육체에 무감한 정신은 육체가 보내는 신호를 감지하지 못한다. 감지해도 해석하지 못한다. 해석해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이 과정에서 병이(나 악이) 노정되는 것이다.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트라우마 에피소드를 기억하고 정신적 병리 문제를 살펴 건강하게 감응하는 사람은 드물다. 대부분 기억을 봉인하고 방어기제를 만들어 그 안에서 가짜 평화를 누리며 살아간다. 갑옷 입은 정신이 벌이는 일이다. 육체는 그 기억을 숨기지 못한다. 끊임없이 증거를 드러내고 신호를 발한다. 하다하다 안 되면 충격적인 방법을 쓴다. 공황발작도 그중 하나다.


공황발작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일단 그것이 정신적 병리의 증거일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자율신경증상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공황장애 진단이 나와도 화학합성약물로 증상 완화시키는 것을 치료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생명에 불안 스펙트럼이 깔려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여서 삶의 기조를 바꾸려고 행동하지 않는다. 이는 공황장애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갑옷 입은 정신 전반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갑옷 바깥으로 육체를 쫓아내면 전체 생명은 물론 정신 자체도 왜곡되고 위축된다. 정신은 육체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육체적 본질”에서 이탈한 정신은 그대로 포르노다. 정신 포르노로 고매한 명상을 한들 우주의 비밀을 밝힌들 아름다운 예술을 한들 그 파편성을 어찌 면하랴. 파편성의 요체는 망상이다. 망상에 떨어지지 않으려거든 육체에 예의를 다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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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폭발 - 타락
스티브 테일러 지음,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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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통 “우리 스스로가 다른 사람의 처지가 되어 생각하는 것”과 그들과 “공감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비록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이나 손해를 끼질 가능성이 있어도 우리 욕망을 다른 사람-또는 피조물이나 환경-안녕보다 우선시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때때로 끔찍할 정도로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행동을 할 능력이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당하는 사람의 아픔이나 괴로움을 인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155-156쪽) 
   
세월호사건, 그 진실을 덮은 채 우리사회는 벌써 6년차 해를 맞아 한 달 가까이 흘려보냈다. 오늘 아침 새삼 250명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확인한다. 조관우의 추모 노래 <화애>를 가만가만 따라 부른다.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모든 기억이 슬프고 아프다. 

어느 날 우연히 한 음식점에서 유가족 몇몇의 식사 광경을 지켜보던 기억이 선연하다. 울면 운다고 웃으면 웃는다고 타박하는 사람들 때문에 일상이 칼날 위에 서 있던 그분들이기에 나는 눈길조차 제대로 주지 못했다. 없는 듯 있는 듯 앉아서 술 한 병 비우고 일어섰다. 아뜩한 질문 하나 솟아올랐다. 

“내가 대체 얼마만큼 저 분들의 심정에 가 닿을 수 있을까?


사실 2014년 4월 16일 이후 두 해 가량 나는 매일 울다시피 했다. 주말마다 광화문으로 향할 때는 인근에 다다르기만 해도 눈물이 흐르곤 했다. 내 육친을 여의었을 때보다 슬픔과 아픔을 더 실감했다. 그럼에도 나는 성호 엄마, 유민 아빠 슬픔과 아픔에 공감했다고 감히 말할 자신이 없다. 스티브 테일러를 읽고 난 시선으로 돌아본다. 

“내가 타락한 인류의 DNA를 물려받아서 타인의 아픔과 슬픔에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진 것인가?”

사냥감인 동물에게조차 “존경과 매혹” “공감과 숭배”(157쪽)의 감정을 가지는 타락 이전 인류의 마음은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으니 타락이 분명한데, 단식하는 유족 앞에서 치킨 뜯어먹고 자빠진 족속의 마음 또한 바이 상상할 길 없으니 이는 무엇이라 불러야 하나. 

여기서 공감이 본성이냐 능력이냐 하는 논쟁을 할 필요는 없다. 삶에서 우리가 직접 부딪치는 문제는 “끔찍할 정도로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행동”의 실재고, 그 행동을 인간만 저지른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만 비인간적 인간이 존재한다는 이 진실을 떠나서는 뭘 떠들어도 공허하다. 타락이든 모순이든 잔혹성과 비인간성을 게워대는 공감 부재의 생생한 현장에서 나와 너는 오늘 공감의 틈을 내고 내일 공감의 길을 열어야 한다. 

공감의 틈을 내고 길을 여는 역사는 공감의 틈을 막고 길을 닫은 바로 그 역사의 지평에서 행진한다. 2014년 4월 16일은 여전히 그날의 음성으로 나와 너의 행진을 부르고 있다. 아뜩한 질문을 그대로 부둥켜안고 가뭇없는 공감의 땅을 찾아 나서라 당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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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테일러 지음,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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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소설가 D. H. 로렌스도 실제로는 인류학자였다.·······1920년대에 그는 3년간 가장 좋은 기간 동안을 뉴멕시코의 목장에서 보내며, 남서부의 아메리카 원주민들, 특히 푸에블로 인디언들과 긴밀한 접촉을 가졌다.·······로렌스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인디언의 정신상태가 유럽인들과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는 “인디언들의 의식(consciousness) 방식은 우리가 의식하는 방식과 다르며 우리에게 치명적이다.·······두 가지 방식들, 이 두 흐름은 결코 통합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화해하지도 않는다.”고 썼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차이점이 발생하는 주요 원인 중에 하나는, 인디언들은 우리처럼 우주와의 분리 상태를 체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분리된” 반면 인디언들은 “모든 생명체와의 합일·······개인들이 거의 분리되지 않은 고대 종족의 일치”된 정신 상태를 유지하며 산다.(151쪽)


  일부 식민주의자들은·······“이기주의self-ness”에 대한 인식을 발전시켜야 비로소 원주민들을 충분히 “문명화”시킬 수 있음을 깨달았다. 헨리 도스 상원의원은 1887년 체로키족에 대해서 설명하면서·······“그들은·······더 이상 발전하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땅을 공동으로 소유하기 때문이다. 문명의 밑동인 이기심selfishness이 없다.”고 설명했다.(154쪽)(원문 단어 인용자 붙임)


『남자친구』 마지막 회를 우연히 보았다. 주인공 차수현에게 아버지가 이런 내용의 말을 한다. (정확하진 않지만 내가 이해한 대로 옮긴다.) “주위부터 돌보는 네 마음 안다. 그러나 근원적인 질문을 받으면 너 자신부터 돌보는 거야.” 그런가?


그렇다. 그러나 조건을 초군초군 챙기지 않으면 치명적 실수가 된다. 하나, 주위부터 돌보는 것이 삶의 기조여야 한다. 둘, 근원적인 질문 앞이어야 한다.


주위부터 돌보는 것이 삶의 기조인 사람에게 이런 충고가 가당한 까닭은 오늘 우리가 북아메리카 원주민이 아니기 때문이다. 북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주위를 돌보는 일은 곧 나를 돌보는 일이다. 문제될 일 없다. 오늘 우리에게 자기 자신과 “분리”된 주위를 돌보는 일은 십분 문제 된다. 그 문제의 이름이 저 뜨르르한 우울증 아니던가. 우울증은 분리문명 수탈구조의 희생양에게 나타나는 정서 상태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돌보라고 말하는 것은 누락 불가한 처방이다. 자기 파괴적 희생을 멈춰야 그 다음을 기약할 수 있으니 말이다.


다음 기약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필경 근원적 질문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아버지의 처방은 딸을 또 다른 일극으로 이끌기 위함이 아니다. 양극 대칭의 진실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그 말을 둘러싼 문맥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익명으로 일방이 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각기 고유한 자기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서로 주고받는 대칭행위다.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의 다음 기약은 결국 다시 주위를 돌보는 일이다. 진정으로 주위를 돌보려면 자신을 돌보는 일부터 해야 한다. 내게서 비롯하여 네게로 번져가는 삶이 진리다.


이 진리의 각성은 분리를 뼈아프게 경험한 인간에게 불가피하고 불가결하다. 불가피하다는 판단은 군말을 더 필요로 하지 않는다. 불가결하다는 판단은 각별한 주의를 불러낸다.


이기심selfishness” 또는 “이기주의self-ness”를 문명의 필수요소로 여기는 것이 어디 일부 식민주의자들뿐이겠나. selfishness, self-ness를 이기심, 이기주의로 번역하는 것이 정확할까 고민할 필요도 없이 분리문명 속에서 우리 모두가 이미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이기주의자로 살고 있다. 이렇게 타락한 우리에게 내게서 비롯하여 네게로 번져가는 삶이 진리라는 각성은 결코 결락시켜서는 안 될 당위다.


타락의 심리학에서 보면 이런 당위는 “치명적”이다. 이때 치명적이란 말은 생명을 위협한다는 뜻이지만, 본디 죽을 위험에서 살려낼 만큼 결정적이라는 뜻도 포함한다. 분리의 사람에게 “통합”도 “화해”도 불가해 보이는 이 “의식(consciousness)”으로 살아갈 때 도리어 참 삶의 길이 열린다. 이 경이로운 전복의 칼날 위에 설 자 누군가?


“당신은 이별을 하세요. 나는 사랑을 할 겁니다.” 『남자친구』의 또 다른 주인공 김진혁이라면 기대해 볼 만하지 않겠나. 물론 여성과 남성의 역할이 정반대로 뒤집힌 드라마였다면 내겐 더 좋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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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십 년 지기의 아내가 세상을 떴다. 그 아내 또한 결혼 생활 내내 내 벗이었다. 부모상을 당하던 시기도 저물어가고, 딸 아들 결혼시키던 시절도 저물어가니, 드디어 배우자상을 당하는 시기가 오고 있다. 황혼 빛이 짙어진다.

노년이냐 여부와 무관하게 내가 살아온 세월이 결코 짧지 않다는 생각이 사무치게 든다. 빈소에 동행했던 아내를 다시 한 번 생각한다. 벗이 보고 싶다 말한 내 딸을 다시 한 번 생각한다. 남은 날이 훨씬 짧으니 그들 존재가 육중하다.

늦은 밤 돌아와 소주 한 잔을 놓고 앉았다. 동행한 아내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벗도 나 이상으로 내 아내의 조문이 고마웠으리라. 누군들 다른 누구에게 은총이 아니랴. 아내 잃은 벗을 생각하며 어느 때보다 깊숙이 소주를 흘려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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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폭발 - 타락
스티브 테일러 지음,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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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에서 “타락이 이브가 지식knowledge의 나무 열매를 먹은 결과로 일어났다”고 하는 부분은 중요하다. 이는 타락이 어떤 새로운 지적intellectual 능력이나 인식awareness을 얻는 것과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아담과 이브에게 이제는 “이해력understanding이 주어졌고”, 이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벌거벗었음을 깨닫고realized 무화과 나뭇잎들을 모아 꿰매서 스스로를 가렸다”는 점이다. 이는 타락이 인간들에게 스스로를 관찰하고observe 판단할judge 수 있는 어떤 새로운 능력을 주는 것, 어떤 새로운 자기인식이 인간 내면에서 발전되는 것과 연계되어 있음을 시사한다.(149-150쪽) ( 원문 단어 인용자 붙임.)


이 주해리뷰는 “아는 게 악이다”라는 제목으로 시작됐다. ‘아는 게 병이다’라는 속담에서 나왔음은 물론이다. 제대로 된 것이 아닌 어설픈 앎은 되레 화를 부른다, 뭐 이런 깨달음 정도로 통용되는 말이다. 틀리지 않지만 여기서 멈추면 이 깨달음 또한 화를 부른다. 그도 그럴 것이 인류 역사가 제대로 된 앎을 추구해온 과정임에도 화는 더욱 커지고 있으니 말이다. 앎 문제에 근원적 접근을 해야 할 최후 시점이 이제지 싶다.


딱 네 문장인 인용문에 쓰인 앎과 관련된 단어만도 일곱 개다. 앎의 결과 겹은 실로 무궁무진해서 그 자체가 앎의 차원을 넘어선다. 불가피하게 유한한 앎 속에서 유한한 앎으로 살아내야 한다. 모든 것을 알아야 제대로 살 수 있다면 제대로 사는 일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 불완전한 채 온전히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진실의 전체성을 향해 스스로를 열어놓는 앎, 곧 타자의 진입을 흔쾌히 수용하는 앎, 오직 이뿐이다.


전체성을 위해 타자의 진입을 수용하지 않는 앎은 자체완결성을 구성한다. 자체완결성은 전체 진실에서 나와 나 이외의 모든 것 사이를 갈라놓는 성城이다. 전쟁, 가부장제, 아동학대, 소유 집착, 육체 소외, 자연 착취, 시간 지배, 거대종교, 이 모든 것이 자체완결성을 지닌 앎의 소산이다. 이 자체완결성의 단단한 토대가 다름 아닌 형식논리다. 형식논리에 터한 앎의 명쾌함은 그대로 칼날이 되어 그 밖의 모든 타자를 베어버린다.


타자를 살해함으로써 돈을 버는 도구가 인도유럽인과 셈족의 앎이다. 앎이 깊어질수록 악도 교묘해진다. 예를 든다. 최근 수십 년 동안 큰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화학합성약물이다. 폭탄을 터뜨려 벌어들이는 돈보다 약을 팔아서 버는 돈이 더 많고, 폭탄을 터뜨려 죽이는 사람보다 약을 먹여서 살린다는 칭찬 들으며 죽이는 사람이 더 많은데 구태여 전쟁 벌이는 멍청한 짓을 할 까닭이 뭔가. 포성 없는 “세계대전”이다.


이 고요한 세계대전을 지휘하는 인도유럽인과 셈족의 제유提喩제국에서 앎은 필연적으로 절대 권력이다. 그 아래 전방위·전천후로 노예를 거느린 앎은 우아한 포르노로 등극한다. 앎의 포르노는 모든 실재를 망상으로 부패시킨다. 망상은 종당 앎 자체를 집어삼킬 것이다. 망상의 아가리 속에 처박히기 직전 “귀” 있는 자는 소리 없는 소식 하나를 듣는다. “네 앎의 거점을 지워버려라. 모르는 상태에서 두 팔을 활짝 벌려라.” 악마의 속삭임인가.


악마의 속삭임 치고는 너무 무모하다. 사실 앎에 집착하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은 욕심 때문이다. 욕심에 빠져드는 것은 결핍감 때문이다. 결핍감에 휘말리는 것은 남이 내 것을 가져간다고 생각하는 망상 때문이다. 이 망상에서 놓여나는 단도직입의 방법이 바로 내 앎의 거점을 지우는 것이다. 내 앎의 거점을 지우고 나면 할 수 있는 일이 딱 하나밖에 없다. 두 팔을 활짝 벌리는 것이다. 전체성에 항복하는 것이다.


전체성에 항복하면 타자의 진입을 막을 수 없다. 만일 타자 또한 전체성에 항복했다면 그도 내 진입을 막을 수 없다. 여기부터가 모름 공화국이다. 모름 공화국은 당연히 모름에게 주권이 있다. 모름이란 주권자는 모르기 때문에 평범하고 평등하며 평화로운 소통과 교감의 네트워킹을 한다. 네트워킹은 모름이 창조하는 앎이다. 이 앎이 참 앎이다. 참 앎이 참 삶이다. 참 삶이 번져가는 모름 공화국 헌법 제1조: “아는 게 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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